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黃(덕산황씨)
본관(本貫): 덕산(德山)
시조(始祖): 황언필(黃彦弼)
유래(由來):
덕산 황씨(德山黃氏)의 시조 황언필(黃彦弼)은 고려 때 도첨의정승을 지내고 덕풍군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을 덕산으로하여 세계를 이어왔으나 상계가 실전되어 장흥고사를 지낸 황 재(黃 載)를 일세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가문의 중요 인물
황길상(黃吉祥)
재(載)의 아들 길상(吉祥)이 고려 때 문과에 올라 부정을 지냈다.
황덕경(黃德卿)
재의 손자 덕경(德卿)은 신호위보승 낭장을 역임하였다.
황욱(黃郁)
호조참의에 추증됨.
황필
연산군 때 경주부윤을 지낸 필은 부위 귀수(龜壽)의 셋째 아들로 일찍이 김종직(金宗直) 문하에서 글을 배워 성종 때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교리·사인·승지를 거쳐 경주부윤을 역임하였다.
특히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상을 당하자 6년 동안이나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생활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황기로(黃耆老)
필의 손자 기로(耆老)는 중종 때 진사시에 합격하고 벌좌를 지냈으며 특히 초서를 잘 써서 초성으로 일컬어졌다.
자는 태수(鮐叟), 호는 고산(孤山)·매학정(梅鶴亭). 1534년(중종 29) 진사시에 합격한 뒤 고향에 은거하여 여러 번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초서를 잘 써서 ‘초성(草聖)’으로 불렸다. 『근묵(槿墨)』 등에 진적이 전하며, 『동국명필(東國名筆)』·『대동서법(大東書法)』 등에 필적이 모각되어 있다.
이밖에 1549년 이백(이백)의 「초서가행」을 쓴 초서필적이 석각(석각)되어 전하는데, 당나라 회소(懷素)의 『자서첩(自敍帖)』중 광초(狂草)를 방불한다. 금석으로 충주의 이번신도비(李蕃神道碑, 1555)가 있다.
조선시대 서예사에서 초서로는 김구(金絿)·양사언(楊士彦)과 함께 제1인자라는 평을 받아왔으며, 후대에 크게 영향을 미쳐 비슷한 풍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아우인 영로(榮老)도 초서를 잘 썼다고 한다.
출전(다움 백과사전)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덕산 황씨는 남한에 총 4,078가구, 18,43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전 <한미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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