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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황씨(黃)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장수황씨)

 

 

본관(本貫): 장수(長水)

시조(始祖): 황경(黃瓊)

유래(由來):

 

장수 황씨(長水 黃氏)의 시조 황경(黃瓊)은 통일신라 경순왕의 부마로 시중을 지냈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우리나라 황씨의 도시조 황 락(黃 洛)의 후손이며 장수군에 봉해진 을고의 아들로 전한다.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후손들은 참의를 지낸 황석부(黃石富)를 일세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가문의 중요 인물

 

황희(黃喜)

1363(공민왕 12) 1452(문종 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 旽 村). 석부(石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균비(均庇)이고, 아버지는 자헌대부 판강릉대도호부사(資憲大夫判江陵大都護府使) 군서(君瑞)이며, 어머니는 김우(金祐)의 딸이다. 개성 가조리(可助里)에서 출생하였다.

1376(우왕 2) 음보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다. 1383년 사마시, 1385년 진사시에 각각 합격하였다. 그리고 1389년에는 문과에 급제한 뒤, 1390(공양왕 2) 성균관학록에 제수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 ( 杜門洞 )에 은거하였다. 그러다가 1394(태조 3) 조정의 요청과 두문동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학관으로 제수되면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하였다. 이후 직예문춘추관 · 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1398년 문하부우습유(門下府右拾遺) 재직 중 언관으로서 사사로이 국사를 논의했다고 문책되어 경원교수(慶源敎授)로 편출되었다가, 1398(정종 즉위년) 우습유로 소환되었다. 이듬 해 언사로 파직되었다가 그 해 2월경 문하부우보궐에 복직되었다.

그러나 또다시 언사로 파직되었으며, 곧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를 거쳐 형조 · 예조 · 이조 · 병조의 정랑을 역임하였다. 1401(태종 1)경 지신사 ( 知申事 ) 박석명(朴錫命)이 태종에게 천거해 도평의사사경력(都評議使司經歷)에 발탁되었다.

그 뒤 병조의랑에 체직되었다가 1402년 아버지의 상으로 사직하였다. 그러나 그 해 겨울 군기(軍機)를 관장하는 승추부의 인물난으로 기복되어 대호군 겸 승추부경력에 제수되었다. 1404년 우사간대부를 거쳐 승정원좌부대인에 오르고, 이듬 해 박석명의 후임으로 승정원지신사에 발탁되었다.

1409년 참지의정부사가 되고, 형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 대사헌 등을 지냈다. 1411년 병조판서, 1413년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이듬 해 질병으로 사직했다가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다.

1415년 이조판서 재직중 송사(訟事) 처리와 관련해 육조에 문책이 내려지면서 파직되었다. 그러나 그 해 행랑도감제조(行廊都監提調)에 복위된 데 이어, 참찬 · 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16년에는 세자인 양녕대군 ( 讓寧大君 )의 실행(失行)을 옹호하다가 다시금 파직되었다.

그 뒤 조정으로 복귀해 공조판서가 되었다. 그리고 평안도도순문사 겸 평양윤, 판한성부사를 역임하였다. 1418년 세자 폐출의 불가함을 극간하다가 태종의 진노를 사서 교하 ( 交河 )로 유배되고, 곧 남원부에 이치(移置)되었다.

세종의 치세가 시작되고 아울러 상왕(上王 : 태종)의 노여움이 풀리면서, 1422(세종 4) 남원으로 소환, 직첩과 과전을 환급받고 참찬으로 복직되었다. 1423년 예조판서에 이어 기근이 만연된 강원도에 관찰사로 파견되어 구휼하였다.

그리고 판우군도총제(判右軍都摠制)에 제수되면서 강원도관찰사를 계속 겸대하였다. 1424년 찬성, 이듬해에는 대사헌을 겸대하였다. 또한 1426년에는 이조판서와 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발탁되면서 판병조사를 겸대하였다.

1427년 좌의정 겸 판이조사가 되었고, 그 해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하였다. 그 뒤 기복되어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 이어 평안도도체찰사로 파견되어 약산성기(藥山城基)를 답사하였다. 이 때 약산이 요충지라 해서 영변대도호부를 설치한 뒤 평안도도절제사의 본영으로 삼게 하였다.

1430년 좌의정으로서, 감목(監牧)을 잘못해 국마(國馬) 1,000여 필을 죽인 일로 해서 사헌부에 구금된 태석균(太石鈞)의 일에 개입해 선처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일국의 대신이 치죄에 개입함은 부당할 뿐더러, 사헌부에 개입하는 관례를 남기게 되므로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래서 한때 파주 반구정(伴鷗亭)에 은거하였다. 1431년 다시 복직되어 영의정부사에 오른 뒤 1449년 치사(致仕 :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하기까지 18년 동안 국정을 통리(統理)하였다. 그리고 치사한 뒤에도 중대사의 경우 세종의 자문에 응하는 등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침착하였다. 그리고 사리가 깊고 청렴하며, 충효가 지극하였다. 학문에 힘써 높은 학덕을 쌓았으므로 태종으로부터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공신으로서 대우했고, 하루라도 접견하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접견했으며, 하루라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 할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는 농사개량에 유의해 곡식 종자를 배급하고, 각 도에 명령해 뽕나무를 많이 심어 의생활을 풍족하게 하였다. 또한 경제육전 經濟六典 을 펴내면서, 종래 원집(元集)과 속집(續集)으로 나뉘어 내용이 중복되고 누락되거나 내용과 현실이 괴리되는 것을 수정, 보완하였다.

한편, 국방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 북방 야인과 남방 왜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하였다. 그리고 예법을 널리 바르게 잡는 데에 노력해, 원나라의 영향이 지대한 고려의 예법을 명나라의 예법과 조선의 현실을 참작해 개정, 보완하였다.

또한, 인권에 유의해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 ( 賤役 )을 면제하는 등 태종대의 국가기반을 확립하는 데 공헌하였다. 세종대에는 의정부의 최고관직인 영의정부사로서 영집현전경연예문관춘추관서운관사 세자사 상정소도제조(領集賢殿經筵藝文館春秋館書雲觀事世子師詳定所都提調) 등을 겸대하였다.

그리고 중앙과 지방의 백성들의 마음을 진정(鎭定)시키면서, 46진의 개척,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였다. 특히, 세종 말기에 세종의 숭불과 연관해 궁중 안에 설치된 내불당 ( 內佛堂 )을 두고 일어난 세종과 유학자 중신 간의 마찰을 중화시키는 데 힘썼다.

이처럼 그는 왕을 보좌해 세종성세를 이룩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로써 조선왕조를 통해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되었다. 1452(문종 2) 세종묘에 배향되었다. 그리고 1455(세조 1) 아들 수신(守身)이 좌익공신 ( 佐翼功臣 )에 책록되면서 순충보조공신 남원부원군(純忠補祚功臣南原府院君)으로 추증되었다.

상주의 옥동서원 ( 玉洞書院 )과 장수의 창계서원 ( 滄溪書院 )에 제향되고, 파주의 반구정에 영정이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방촌집 이 있으며,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황치신

1397(태조 6) 1484(성종 1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맹충(孟忠). 초명은 동()으로, 태종이 동중서(董仲舒)가 다시 났다고 해 지어준 이름이다. 석부(石富)의 고손으로, 증조는 균비(均庇)이고, 할아버지는 강릉대도호부사 군서(君瑞)이며, 아버지는 영의정 희()이다.

태종에게 불려나가 이름을 하사받은 뒤 음보(蔭補)로 공안부부승(恭安府副丞)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그 이름이 형제들과 맞지 않다 해서 다시 치신이라 고쳐 하사받고, 곧 사재직장에 임명되었다.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사섬시주부가 되었다. 1415(태종 15) 통례문봉례랑을 거쳐 감찰이 된 데 이어, 호조좌랑과 사온서영(司 倍 署令) 등을 역임하였다.

1426(세종 8) 형조정랑이 되어서는 세도가에서 민간을 잡아다 노비로 만들어 50여 년간을 소송하던 적체된 사건을 해결하였다.

이듬 해 호조정랑으로 익찬 ( 翊贊 )을 겸임했으며, 이어서 판통례문사 겸 상서소윤(判通禮門事兼尙瑞少尹)이 되었다. 1433년에 동부승지, 1435년 예조참의를 거쳐 호조참의가 되었다. 그리고 1437년에 중추원부사가 되었다가 곧이어 한성부윤으로 옮겼다.

그의 탁월한 정치 능력을 인정받아 경기도도관찰사와 경창부윤을 거쳐, 형조와 호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1444년 호조판서에 승진해 곧 판한성부사로 옮겼다. 1448년 모친상을 당해 사임하고, 1452(문종 2)에는 부친상을 당해 거상하였다.

1454(단종 2) 다시 중추원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하성절사(賀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도진무사(都鎭撫使)를 겸하였다. 1457(세조 3) 충청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며, 곧이어 인순부윤(仁順府尹)이 되었다가 인수부윤(仁壽府尹)으로 옮겼다.

1461년에는 판중추원사가 되었다가 남의 노비를 빼앗은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1466년 동지중추부사 겸 도총관으로 복관되어 1479(성종 10)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뒤에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호안(胡安)이다.

 

황수신(黃守身)

1407(태종 7) 1467(세조 1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수효(秀孝 : 세종실록에는 季孝로 되어 있음.), 호는 나부(懦夫). 균비(均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릉대도호부사 군서(君瑞)이고, 아버지는 세종조의 명상 영의정부사 희()이며, 어머니는 양진(楊震)의 딸이다. 판서 치신(致身)의 아우이다.

1423(세종 5) 사마시에 응시했다가, 학문이 부진하다고 시관 ( 試官 )에게 욕을 당하고는 발분해 학문에 진력하였다. 문음으로 종묘부승(宗廟副丞) · 종부시직장 · 사헌부감찰 · 도관서영( 歸 官署令) 등을 역임하였다.

14297월 지평 · 호조정랑 등을 거쳐 사재감부정을 지냈다. 그리고 1432년 경기도관찰사 권제(權蹄)의 요청에 의해 경력 ( 經歷 )을 역임하였다. 장령 재직시에는 도성 내에서 인간의 화복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면서 인심을 현혹시키는 요무(妖巫)를 성 밖으로 방출하였다.

1440년 사섬시윤을 거쳐, 그 해 전라도경차관이 되어 함길도 5(五鎭)을 충실히 하기 위해 충청도 · 전라도 · 경상도의 민호를 사민(徙民)하는 일에 관여하였다. 그 뒤 조정으로 돌아와 지사간원사를 지냈다.

지형조사로 자리를 옮겨서는 수년간에 걸쳐 결단하기 어려운 옥송을 처결하였다. 1441년 첨지중추원사, 1442년 겸지병조사, 1443년 우부승지에 올랐다. 또한 좌부승지 · 좌승지를 거쳐, 1446년에는 국초 이래로 문과출신이 아니면 제수되지 못한 도승지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이듬 해 친분이 있는 임원준 ( 任元濬 )을 의서찬집관(醫書撰集官)으로 부정 발탁한 것이 적발되면서 고신 ( 告身 )을 박탈당하였다. 그 뒤 1448년 직첩을 환급받고, 1450(문종 즉위년) 5월 첨지중추원사로 복직되었다.

그 해 문종의 특명으로 병조의 습진(習陣) 및 군사검찰(軍士檢察)의 논의에 참여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병조참판이 되어 수양대군 ( 首陽大君 )을 도와 진법의 상정(詳定)에 공헌하였다.

그 뒤 아버지상을 당해 사직했다가 1452(단종 즉위년) 기복되어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그리고 한성부윤을 거쳐 경상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가 1455(세조 1) 우참찬으로 소환되었다.

그 때 관찰사 재직시에 작성한 경상도 웅천현(熊川縣)의 지도를 올리면서 비방책(備防策)을 건의하였다. 그리고 세조 등극에 끼친 공로로 좌익공신 ( 佐翼功臣 )에 책록되어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졌다.

1456년 좌참찬이 되었으며, 1457년에는 사은사 ( 謝恩使 )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리고 우찬성에 오른 뒤, 판예조사를 겸임하면서 예조를 지휘하였다. 1458년 좌찬성, 14591월과 12월 양차에 걸쳐 충청도도순문진휼사(忠淸道都巡問賑恤使)와 경상도모민체찰사(慶尙道募民體察使)로 파견되었다.

그 뒤 귀환해 보국숭록대부 ( 輔國崇祿大夫 )에 승자되면서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으로 봉해졌다. 1462년 아산의 전지를 무단 점거했다고 여러 차례 탄핵되었으나, 용서를 받고 유임되었다.

같은 해 좌찬성으로서 경국대전 의 제2차 초안(草案) 작성에 참여했으며, 우의정이 되어 명나라 헌종의 등극을 축하하는 진하사 ( 進賀使 )로 다녀왔다. 1466년 영의정 한명회 ( 韓明澮 ), 좌의정 심회 ( 沈澮 )와 함께 문과출신이 아니면서도 예문춘추관직을 겸대하였다. 그리고 1467년 영의정에 올랐다.

세조의 명을 받아 법화경 法華經 · 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 의 언해 ( 諺解 )를 주관하였다. 그리고 1465년에는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 을 찬진하였다.

풍모가 뛰어나고 인품이 중후하면서도 기국이 있어 세조대의 민심 수습과 치적에 큰 공헌이 있었다. 장수의 창계서원 ( 滄溪書院 )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열성(烈成)이다.

 

황정욱

1532(중종 27)1607(선조 4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경문(景文), 호는 지천(芝川). 영의정 희()의 후손이며, 방답진첨절제사 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지서별제 기준(起峻)이고, 아버지는 행호분위부호군(行虎賁衛副護軍) ()이며, 어머니는 양천허씨(陽川許氏)로 용()의 딸이다.

1552(명종 7)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사관 ( 史官 )이 된 뒤 승문권지(承文權知예문관검열·봉교 등을 거쳐 시강원설서에 제수되었다. 1561년 호조·예조의 좌랑을 역임하였다.

이듬 해에 해미현감으로 나아갔으며, 성균관직강이 되었다. 1565년 헌납 겸 지제교·부수찬 등을 거쳐 지평을 지냈다. 당시 세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명종이 병이 나자, 훌륭한 선비를 뽑아 종실을 가르칠 것을 청하였다.

1580(선조 13) 진주목사를 거쳐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그 뒤 승지에 올랐으며, 1584년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명나라에 가서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왔다. 그 공으로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이어 호조판서로 승진하였다.

1589년 정여립 ( 鄭汝立 )의 모반에 연좌되어 파직되었다가 곧 복직되었다. 이듬해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 ( 光國功臣 ) 1등이 되어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에 책봉되면서 대제학이 되었다. 이어 예조판서·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소사(號召使)가 되어 왕자 순화군 ( 順和君 )을 배종(陪從)해 관동으로 피신하였다. 여기서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돌렸다. 그러나 왜군의 진격으로 회령에 들어갔다가 국경인 ( 鞠景仁 )의 모반으로 왕자와 함께 포로가 되어 안변의 토굴에 감금되었다.

이 때 왜장 가토(加藤淸正)로부터 선조에게 보내는 항복 권유문을 쓰도록 강요받았다.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그의 손자와 왕자를 죽이겠다는 위협을 받자 아들 혁()이 대신 썼다. 한편, 항복 권유문이 거짓임을 밝히는 또 하나의 글을 썼으나 선조에게 전달되지 못하였다.

이듬 해 왜군이 부산으로 철수할 때 석방되었다. 그러나 항복 권유문을 기초한 문제가 동인·서인 간의 정치쟁점이 되면서, 이후 정권을 장악한 동인의 집요한 공격을 받아 길주에 유배되었다. 1597년 왕의 특명으로 석방되었으나, 복관되지 못한 채 죽었다.

문장··서예에 능하였다. 저서로는 지천집이 있다. 1623(인조 1)에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황경원(黃景源)

1709(숙종 35) 1787(정조 11). 조선 후기의 문신 · 예학자(禮學者).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대경(大卿), 호는 강한유로(江漢遺老).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정랑 처신(處信)이고,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이며, 어머니는 권취(權 愼 )의 딸이다. 승원(昇源)의 형이다. 이재 ( 李縡 )의 문인이다.

1727(영조 3) 19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그 뒤 의금부도사를 지내다가 174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고, 이어 예문관검열 · 병조좌랑을 거쳐, 홍문관응교로 있을 때에는 명나라 의종 ( 毅宗 )의 추사(追祀)를 건의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대사성 · 대사간 · 대사헌 겸 양관제학(兩館提學) 등의 청화직(淸華職)을 거쳐, 1761년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나, 고서(姑壻) 이정(李 昧 )의 상언사건 (上言事件)에 연좌되어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합천으로 이배되었다가 고향으로 방환(放還)되고, 이듬해에는 풍천부사로 복관되어 영조가 죽기까지 12년 동안 호조참판 · 홍문관제학 · 이조참판 겸 대제학과 형조 · 예조 · 공조의 판서 등으로 활약하였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모두 사양하고 중추부판사로 죽었다.

서예에도 뛰어났으며, 예학(禮學)에 정통하고 고문 ( 古文 )에도 밝아, 오원 ( 吳瑗 ) · 이천보 ( 李天輔 ) · 남유용 ( 南有容 ) 등이 그를 따르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항상 춘추대의(春秋大義)로 자임하여 1418(영락 16, 태종 18)부터 1645(홍광 1, 인조 23)까지의 남명서 南明書 를 편찬하였고, 또 명나라 의종 이래로 명나라에 대한 절의를 지킨 조선 사람들의 전기 ( 傳記 )명조배신전 明朝陪臣傳 을 저술하였다. 문집으로 강한집 3215책이 있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장수 황씨(長水 黃氏)는 남한에 총 29,970가구, 126,74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黃喜(황희)  선생의 일화.

1

  황희 정승과 딸과 박 광대

황희 정승이 정승으로 지내도 살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빈곤하였다.황희 정승에게는 딸이 여럿 있었는데 치마가 없어서 하나를 가지고 서로 빌려 입고 변소에 갈 정도였다.
그런데 이제 황희 정승이 돌아가시게 되었으니 딸들이 모여 울면서 여쭈었다.

「아버님 돌아가시면 저희는 어찌 삽니까?」「공작새는 날 거미줄을 먹고 사나, 너희들은 이제 남산 밑의 박광대가 알아서 하리라.」이런 말씀을 남기시고 세상을 뜨셨다.

얼마 후 대국에서 공작이라는 새가 왔는데 어떤 걸 주어도 안 먹고 굶는다. 그 소식을 들은 누가 딸들에게「대감님이 아시는 게 하 많았는데 혹시 돌아가실 적에 무슨 말씀이 없었나?」 하고 물었다.
「아무 말씀 안 하시고 저희들이 어찌 사나, 하고 여쭈었더니 그래 공작새는 날거미줄 먹고 사나, 너희는 남산 밑의 박광대가 알아 하리라 하셨습니다. 」
그 말을 들은 이가 「그러면 날 거미줄을 걷어 오라.「 일러, 걷어 온 날 거미줄을 주니 공작새가 먹었다. 그래 살을 찌워 공작새를 보내고 한 걱정을 덜었다.

그 후 나라 임금님이 등극하는데 광대들이 나와 재주를 피우는데 박 광대가 나오더니, 치마를 위로 던지고 다른 광대들은 쫓아가 잡아당기는 장면을 연출한다.
구경하던 대감이 보니 괴이하기 그지없어 박 광대에게 「무슨 짓이냐?」하고 물었다.

「황희 정승님은 아는 것은 많았어도 사는 게 하도 어려워서 변소 갈 때 따님들이 치마 하나를 서로 당겨 입고, 벗고 하였습니다.」 하고 아뢴다.대감이 듣고 보니 딱하기 그지없다.「그렇다면 오늘 하루 서울 남문에 황곡은 모두 황희 정승 댁으로 보내어라.「 이르고 그 날 종일 기다려도 들어오는 대동곡이 없었다.

저녁 때 겨우 계란 바리 하나 들어오는 것이 전부였다. 그것이라도 보내야 하겠는데, 그나마도 삶아 먹으려하니 모두 뼈가 있는 썩은 알이었다.

복 없는 사람은 계란에도 뼈가 들었다는 말은 바로 여기서부터 유한 말인 것이다.

 

 

황희 정승의 아들 길들이기

조선 초기의 명재상이었던 황희 정승은 18년간이나 영의정을 지냈지만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결백하여 청백리로 불렸다.
황희 정승의 아들 중에는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황희 정승에게 그 아들은 근심거리였다.
여러 번 훈계도 하고 때로는 매도 들었지만 아들의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황희 정승은 무언가 방법을 달리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느 날 황희 정승은 술을 마시러 나간 아들을 밤늦게까지 마당에 서서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황희 정승의 어깨에 밤이슬이 내려 옷이 축축해질 무렵, 술에 취한 아들이 비틀거리며 대문으로 들어섰다.
이것을 본 황희 정승은 아들 앞으로 다가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어서 오십시오.”
술에 취해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보던 아들이 인사를 건네는 사람을 자세히 들여다보다
순간 술이 확 깼다.
“아버님, 왜 이러십니까?”
황희는 여전히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아들에게 말했다.
“무릇 자식이 아비의 말을 듣지 않으면 내 집안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식이 아니라 내 집에 들어온 손님이나 마찬가지가 되지요.
내 집에 찾아온 손님을 정중하게 맞이하는 것은 예의인즉, 지금 저는 손님을 맞고 있을 뿐입니다.”
그 뒤로 황희 정승의 아들은 옳지 못한 버릇을 고치고 아버지 못지않은 청백리 선비의 자세로 학문에 정진했다고 한다.

 

 

검은 소와 누런소

황희는 어려서부터 글공부에 열심이었고 키가 크고 풍채가 잘 생긴데다가 눈이 무섭게 생겼다.
 그래서 황희를 보는 사람들은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짐작하였다.  황희는 스무 살 때  벌써 진사의 벼슬에 있었다.
 어느 날 친구 집으로 가는 길에 들판을 지나다 잠시 쉬게 되었다.  
들판에서는 농부들이 소를 몰며  논을 갈고 있었는데 그것을 보던 황희가  농부에게 말을 걸었다.

  「노인장, 그 두 마리의 소중에서 어느 소가 일을 더 잘하오 ?」 그러자 농부는 황희 가까이 다가와 옷소매를 잡아당기고 소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더니 귀엣말을  하였다.
  「누런 소가 검은 소보다는 훨씬 일을 잘합니다. 」  「그런데 노인, 어느 소가 일을 잘하던 그것이 무슨 큰 비밀이라고 여기까지 와서 귀엣말을 하십니까? 」
 황희의 말을  들은  농부는
  「젊은 선비, 모르는 말씀하지 마시오.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자기를 욕하고 흉을 보면 기분을 상하게 되는 것이라오. 」

 농부의 말을 들은 황희는 얼굴이 화끈했다.  
비록 그 소들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해도 지금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잘한다, 못한다 하고 흉보는 일은 나쁘다는 교훈이었다.
  “저 노인은 비록 농사를 짓고 있으나  학덕이 높은 선비인 것 같구나. 오늘 나는 저 노인에게 아주 값진 교훈을 받았으니 평생 잊지 말아야지.”

 황희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이렇게 굳은 결심을 하고, 훗날 백성의 아버지로서, 뛰어난 재상으로서, 조선의 새 역사를 창조하는데 기둥이 되었다.

 

 

 

 

黃喜(황희) 정승의 일화

 

조선의 명재상 하면 黃喜(황희)를 떠 올린다.

조선 역사상 황희처럼 청렴결백하고 마음이 너그러운 재상은 없었다. 황희는 목민관의 범이자 재상의 대명사가 되었다.

황회의 자는 구부, 처음 이름은 수로였고, 호는 방촌이다. 고려 말에 과거 급제하여 나이 여든여섯 살에 은퇴했다.

 

4후에 145290세로 세상을 떠나, 종묘에 배향되고 익성공이라는 시호 가내려졌다.

황희는 자신의 희로애락을 함부로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그는 집안의 노비들을 노예로 여기지 않고 사람으로 대우했으며 결코 노비들에게 매를 대는 일이 없었다.

여종들은 황희 앞에서 함부로 농담을 지껄이기도 하고 싸움질을 해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황희는 웃어주었다.

노예도 역시 하늘 백성인데 어찌 함부로 부리겠는가. 노비를 비라보는 황희의 생각이었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黃喜(황희) 정승의 일화

 

어느 날이었다 황희 혼자서 동산을 거닐었다. 그때 이웃에 실고 있는 젊은이가 돌을 던져 익은 배가 우수수 땅에 떨어졌다.

 

황회가 큰 소리로 뒤따라오는 시종을 불렀다.

얘야, 떨어진 배를 그릇에 담아 돌팔매질한 젊은이에게 갖다 .”

숨어 있던 젊은이는 이 광경을 보고 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黃喜(황희) 정승의 일화

 

황희가 정승이 되었을 때였다.

김종서가 공조 판서로 있었다. 날 나랏일로 판서들이 모였다. 김종서가 황희를 배려하여 약간의 술과 과일을 마련했다. 이를 보고 황희가 벌컥 성을 냈다.

나리에서 예빈시(빈객 · 연회를 맡아 보던 관청)를 조정의 곁에 설치한 것은 삼공을 접대하기 위함이오. 신청한다면 으레 예빈시에서 장만 해 것이지, 어찌 공이 사사로이 가져온단 말이오!”

김종서는 황희가 매우 야속했으나 그의 말이 모두 맞기 때문에 한마디도 대꾸 할 수 없었다.

그 뒤에도 황희는 다른 사림들은 모두 관대하게 대했는데 오직 김종서에게 박절 할 정도로 꾸지람을 내랬다. 때로는 김종서 대신 구시{관원이 출입 할 모시고 다니는 하인)를 매질하기도 하고 옥에 가두기도 했다.

이때 김종서는 병조 · 호조 판서를 역임했다

어느 맹사성이 황희에게 물었다.

대감, 김종서는 당대의 훌륭한 인물이오. 대감께서 매번 허물을 잡는 까닭은 무엇이오?’

황희가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고불(맹사성의 ), 내가 김종서를 미워하는 것 같으오?’

그럼 대감께서는 어찌 그리 그 사람에게만 야박하단 말씀이오?’

종서는 큰 그릇이나 성격이 매우 급하고 기운이 강해서 일을 감하게 처리하오. 이것은 매우 좋은 일이기는 하나, 그가 뒷날 내 자리나 고불 자리에 앉았다고 봅시다. 그때도 지금처럼 성격대로 일을 처리 한다면 신중하겠소? 반드시 그르칠 염려가 있소. 그래서 내가 미리 그의 기운을 꺾고 경계하여, 그로 하여금 뒷날 모든 일을 가볍게 처리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오. 이래도 내가 김종서를 미워 하는 것이오?’

대김의 뭇이 그곳에 있는줄 몰랐소이다. 제가잠시 오해 한것을 용서하시오.”

큰 그릇은 다듬어야 빛이 나는 법이오.” 그 뒤에 황희는 김종서를 정승에 추천했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黃喜(황희) 정승의 일화

 

황희가 한번은 교하의 둔전을 이양 받으려고 교하 수령에게 압력을 넣었다는 모함을 받게 되었다.

이때 양사에서 들고 일어나 황희를 파직시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황희를 신임했다.

그 무렵 어느 길에서 성균관 유학생이 황희에게 삿대질하며 마구욕했다.

네가 정승이 되어 임금의 눈을 속이고 못 된 짓을 한단 말이냐!” 황희는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태연스럽게 그에게 웃었다.

그는 유학생의 기백을 높이 샀던 것이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黃喜(황희) 정승의 일화

 

황희는 나이가 많아질수록 더욱 겸손해졌다.

그는 벼슬에 물러나서는 고요한 방에 앉아 하루 종일 말이 없었고 오직 글만 읽었다.

창기에 늦복숭아가 무르익어 이웃의 아이들이 먹었다. 황회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 따먹지 마라. 나도 맛좀 보이야지 않겠느냐?’

조금 뒤에 나가 보니 복숭아가 알도 남아 있지 않았다. 황희는 그저 웃었다.

끼니때마다 집의 종의 아이들이 모여들어 황희가 덜어 주변 지껄이며 먹었다.

때로는 서로 싸우는데도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는 도량이 매우 넓은 재상이었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黃喜(황희) 정승의 일화

 

황희는 이조 판서 시절 양녕대군의 폐위를 반대했다.

이 때문에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7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그때 황희는 남원에서 7동안 찾아오는 손님마저 물리치고 오로지 운서 한 질을 갖고 거기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그 덕으로 뒤에 비록 나이가 많아도 글자의 획이나 음이나 뜻이 백에 하니라도 그릇되지 않았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앉아 황희를 배지에서 불렀다. 태종은 황희의 인물됨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세종에게 그를 불리 것을 권유했다. 세종은 자기가 세자에 오르는 것을 반대한 황희였지만, 아버지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어서 황희는 입사하게 되었다.

 

황희는 통이 벌어진 갓을 쓰고 거칠고 푸른색의 두루막 차림에 조알을 띠고 승정원(비서실)에 들어섰다. 그는 시골티가 역력했으나, 보는 사람들이 모두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때 상왕전에 세종도 있었다.

두분 마마, 신 황희 인사 올리옵니다.” 태종은 황회를 매우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시구려. 지난날 나의 홀대를 섭섭다 여기지 마시오.”

전하 어인 말씀이 시옵나이까? 그동안 공부를 많이 수 있어 좋았사옵니다.”

그랬다니 다행이구려.” 태종이 세종에게 말했다.

주상, 황희의 지난일은 어쩌다가 그릇된 것이었소. 그러나 이 사람을 버릴 수 없소. 나리를 다스리려면 이 사람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오.”

알겠사옵니다, 아바 마마.”

세종은 태조의 뜻을 받들어 황희에게 에조판서를 제수했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黃喜(황희) 정승의 일화

 

한번은 황희가 종이를 펼쳐 놓고 글씨를 쓰려고 했다. 그런데 종의 아이가 종이에 오줌을 갈겨 버렸다. 황희는 오줌을 손으로 훔치며 말했다.

허허, 그놈 고추가 실하지 않구나.”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黃喜(황희) 정승의 일화

 

한번은 정언(사간원 소속) 이석헝이 황희를 만나러 갔다. 황희는 이석형에게 책표지에 제목을 쓰게 했다. 그런데 몹시 추하게 생긴 계집종이 개다리 소반에 술상을 챙겨 들고 와서 이석형을 노려보며

 

대감, 술상을 놓으리까?’

조금 기다리어라.”

황희가 이석형이 책표지를 쓸 때 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여종이 한참을 기다렸다. 황희가 술상을 내려놓으라고 하지 않, 여종이 버럭 고힘을 질렀다.

어찌 이라 꾸물거리누.”

황희가 웃으면서 받았다.

그럼 내려놓으려무나.”

여종이 술상을 방에 내려놓았다.

뒤이어 남루한 옷을 입은 한 의 아이들이 맨발로 우르르 들어와 황희의 수염을 잡아당기기도 하고 옷을 밟기도 하고 두들기기도 하면서 안주를 집어 먹었다.

이들은 황희가 부리는 종들의 아이들이었다.

황회는 종의 아이들이 하는 짓을 지켜보면서 얘들이 두들기면 '아야 아야 하고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이석형은 너무나 어이가 없어 할말을 잃고말았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黃喜(황희) 정승의 일화.

 

정승의 도량

 

황 희 는 고려 1363(공민왕 12)에 태어났다. 장수(長水) 황 씨로서 처 음 이름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이다.

14 세에 생원, 진사에 뽑히고 소년 시절에 문과(요즈음 고등 고시 비슷함)에 급제하였다.

소년 시절이었다. 농부가 검은 소와 누런 소로 밭을 기는 것을 보고

어느 소가 밭을 더 잘 갑니까?”

하고 물었다. 농부는 대답 없이 한참 산을 돌아 나와서야 귓속 말로

누런 소가 더 잘 갑니다.”

하는 것이었다. 황 희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왜 그 자리에서 대답하지 않고 여기까지 와서 말합니까?”

하고 다시 물어 보았다. 농부가 대답하기를

비록 하찮은 짐승이라 하더라도 오장은 사람과 같으니 사람의 말을 짐작 할 것이라 생각되어 차마 소 앞에서 잘하고 못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읍니다.”

고 하였다. 그는 이 말을 듣고 크게 감동하여 평생 동안 남의 옳고 그름과 더 잘하고 더 못한다는 것을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

 

27 세 때 습유우보궐(拾遺右補闕) 벼슬을 지내고 조선 태종 때 이조판서 (更曹判書)가 되었다. 그는 성품이 곧아서 바른 말을 용감하게 하였다. 양녕 대군(讓寧大君)을 물러나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임금님께 간해서 말씀 드리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남원(南原)으로 귀양을 갔다. 옳은 말을 하다가 쫓겨 났지만 임금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살과 뼈는 부모께서 주신 것이요, 옷과 음식을 비롯하여 모든 것은 임금 님의 은혜로 얻는 것이니 신이 어찌 덕을 저버리겠읍니까?”

하면서 불평 한 마디 없이 귀양길을 떠났다 한다.

 

남원에서의 귀양살이 7 년간 그는 열심히 학문을 닦았다. 찾아오는 손님도 맞이하지 않고 문을 닫고 단정히 앉아서 운서(韻書)를 읽는 데만 골돌하였다. 이 때 열심히 공부한 때문에 뒷날 나이가 든 뒤에도 글자의 획 하나 틀리지 않았다 한다.

1422(세종 4)에 상왕 태종의 부름을 받았다. 이 자리에서 상왕이 세종에게 이르기를

황 희의 전 날 일은 어쩌다가 그릇된 것이니 이사람을 끝내 버릴 수는 없소. 정사를 잘 하려면 이 사람이 없어서는 아니 됩니다.”

하고 중용(重用)하기를 권했다. 세종은 그에게 예조 판서를 맡겼다. 마침 흉년이 들어 강원도 관찰사로 전임 되었다. 세종 5년 흉년에도 정성을 다하여 백성을 구제했으므로 백성의 괴로움이 없었다. 도량이 넓고 모가 나지 않았으며,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예의를 지키고 나라일을 의논할 때는 새로 고치고 바꾸는 것을 매우 조심하였다. 그래서, 왕의 칭찬을 크게 받고 2년 뒤에 다시 내직(內織)인 찬성사(贊成司)와 대사헌(大司憲) 두 직책을 겸하여 맡겼다.

 

그는 계속하여 임금님의 신임을 받아 영의정이라는 중요한 자리에 올랐다.

간신들은 황 희가 높은 자리에 올랐는데도 분에 넘친다는 생각은 없고, 오히려 쓸데없는 고집을 세우는 등 무례하다고 모함을 하여 황 희를 내치라고 간청했다. 세종 임금께서는

그는 모든 일을 숨김없이 바르게 말하여 정치를 옳게 하도록 하였으니 국정을 맡은 대신을 가벼이 끊을 수 없다.”

하며, 간청을 물리쳤다. 그 뒤 어느 날 황 희가 길을 가다가 태학 유생을 만났다. 유생이 길에서 면박하기를

네가 소위 정승으로서 일찍이 임금의 그릇됨을 바로잡지 못한단 말이냐?”

하였으나, 그는 노여워하지 않고 도리어 기뻐하였다. 세종 임금은 황 희가 학식과 도량이 넓고 깊어, 큰 일을 잘 판단한다고 그를 점 잘 치는 사람 또는 무게를 다는 저울에 비유하였다. 평시에는 너그러웠으나 큰 일은 그 자리에서 옳고 그름을 따져 뜻을 굽히지 않았다. 백성들이 어진 정승으로는 황 희를 반드시 으뜸으로 꼽았다.

 

부모상(父母喪)을 당했을 때 벼슬자리에서 물러나기를 여러 차례 원했으나 임금님께서 허락해 주지 않았다. 나이 80이 되어서야 벼슬에서 물러날 수 있었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도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임금님이 반드시황 희와 상의한 뒤에 결정하였다. 그는 어린 아이들을 무척 아끼고 사랑했다. 어떤 아이들은 황희의 수염을 뽑기도 하고 뺨을 치는 아이도 있었지만 화를 내지 않았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바야흐로 붓을 들어 글을 쓰려고 하는 참에 종(奴僕)아들 하나가 종이 위에 오줌을 쌌다. 그래도, 그는 손으로 훔치면서 조금도 노여워하지 않았다. 또 그가 어느 날 홀로 동산을 거닐다가 이웃에 사는 버릇없는 아이가 돌을 던져 배나무의 배가 많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자 그는 곧 시동(侍童)을 불러 땅에 떨어진 배를 한 광주리 가득 담아 돌을 던진 그 아이 집에 갖다 주라고 하였다.

 

배 한 광주리를 받은 그 집에서는 이제 곧 크게 꾸중이 내릴 것이라 생각하고 벌벌 떨었으나 그 뒤 끝내 아무 말이 없었다 한다. 집안에서 부리는 종도 함부로 부리지 않았다. 한번은 그가 사랑하는 계집종이 작은 종과 심한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을 보고도 나무라지 않고 어리광으로 받아 들였다.

노예도 역시 하늘이 낸 백성이니 어찌 함부로 부리리요?”

라는 글을 써서 자손들에게 지키게 하였다. 당시에 천대 받고 있던 아이들과 종들을 다같이 하늘이 낸 백성이라 하여 인격을 존중하는 것은 참으로 뛰어난 교훈이 아닐 수 없다. 그는 1452(문종 2) 2월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 90세였다. 그의 위패는 세종묘(世宗墓)에 배향되어 있으며 상주 옥동 서원에 영정과 위가 모셔져 있다. 그의 장례 때는 상하 귀천없이 많은 사람들이 상복을 입고 애도했다.

 

출전상주군 함창중앙초등학교 최 교감

참고 문헌> 嶺南人物考

 

 

 

 

 

 

출전 <한미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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