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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황씨(黃)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창원황씨)

 

 

본관(本貫): 창원(昌原)

시조(始祖): 황석기(黃石奇):황충준(黃忠俊):황양충(黃亮沖)

유래(由來):

 

창원 황씨(昌原黃氏)는 황씨의 도시조인 황 낙(黃 洛)의 후손으로, 창원백에 봉해진 병고의 지손에서 계대를 알지 못하는 다음 3파로 크게 분류한다.

첫째, 고려 충정왕 때 도첨의 참리를 지냈고 회산군에 봉해져서 문하평장사에 오른 황석기(黃石奇)를 파조로 하는 회산군계이다.

 

둘째, 시중을 역임한 황충준(黃忠俊)을 파조로 하는 시중공계가 있다.

 

세째는 호장공계 황양충(黃亮沖)의 계통이다.

한편 조선씨족통보에는 위의 3파를 포함하여 8파가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연원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

 

가문의 중요 인물

 

황상(黃裳)

회산군계 파조인 석기의 아들 상이 고려 충혜왕 때 호군이 되어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추충익 찬공신 을 포함하여 여러 번 공신에 녹훈되었으며, 특히 홍건적의 난과 왜구의 침입을 토평하는데 공을 세워 문하찬성사를 지내고 회산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서강 도원수 등을 지냈고 무예에 능하여 궁술로 이름을 떨쳤다.

 

충혜왕 때 호군(護軍)이 되었으며, 공민왕 초에 밀직부사에 제수되고 추충익찬공신(推忠翊贊功臣)에 봉해졌다.

1354(공민왕 3) 유탁(柳濯)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장사성(張士誠)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우고 돌아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가 되었다. 1356년 적신 기철(奇轍) 일파를 숙청하는 데 가담해 그 공으로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가 되었다. 1358년에는 추밀원사가 되었으며, 뒤이어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가 되어 1등공신에 부록되었다.

병란(兵亂)이 사방에서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개와 매를 기른다는 왕의 꾸지람을 받았다. 또 채하중(蔡河中)의 옥사에 연루되어 귀양간 판밀직(判密直) 신귀(辛貴)의 처와 간통해 어사대의 탄핵을 받았으나 그 동안의 공적으로 면직됨에 그쳤다.

홍건적의 침공으로 왕이 복주(福州 : 安東)로 파천하게 되자 왕을 호종한 뒤 교주 강릉도도만호(交州江陵道都萬戶)가 되어 종군하였다.

개경에 둔치고 있는 홍건적을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의 휘하에서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 등과 더불어 20만 대병으로 포위 공격해 적을 대파하고 개경(開京)을 수복하였다. 그리고 평장사 이공수(李公遂)와 함께 개경의 수성(守城) 책임을 맡았다.

이러한 공으로 신축호종공신(辛丑扈從功臣수복경성공신(收復京城功臣) 1등에 각각 포록(褒錄)되고, 참지문하정사(參知門下政事)에 승진해 추충분의익찬공신(推忠奮義翊贊功臣)에 책봉되었다. 이어 찬성사에 올랐으며 사직한 뒤 회성부원군(檜城府院君)에 봉해졌다.

홍건적을 토벌한 공으로 원나라로부터 봉훈대부(奉訓大夫)의 산계와 경정감승(經正監丞)의 관직을 받았다. 다시 찬성사가 되어 추충분의보리익찬공신(推忠奮義輔理翊贊功臣)에 봉해졌다.

1364년 심왕당(瀋王黨)최유(崔濡)가 덕흥군 혜(德興君譓)를 왕으로 추대하고 원병(元兵) 1만명으로 서북면에 침공하였다. 또한 이 혼란에 편승해 동북면에서는 삼선(三善삼개(三介)가 공략해와서 화주(和州) 이북을 함락하였다. 이에 동북면도순토사(東北面都巡討使)가 되어 이성계와 더불어 최유의 침입을 격퇴하였다.

1371년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으며, 우왕 때는 왜구토벌에 여러 번 종군해 공을 세웠다. 1381(우왕 7) 3월 왜구가 개경을 위협하자, 서강도원수(西江都元帥)로 동강도원수 나세(羅世)와 함께 연안 15개처에 군대를 주둔시켜 방비를 하였다.

아버지의 기일(忌日)에 원씨(元氏)에게 장가를 들고, 원씨 역시 세가(世家)의 딸로서 남편의 상기(喪期)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시집을 왔으므로 헌사(憲司)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우왕의 특별 배려로 무사했고, 처 원씨만 유배되었다.

무예에 능하고 용맹이 있어서 역대 왕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궁술이 뛰어나 원나라 순제(順帝)의 부름을 받아 시범을 보이기도 하였다.

 

 

황형(黃衡)

1459~ 1520)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언평(彦平)이다. 삼포왜란 때 전라좌도 방어사로 제포에서 전공을 세우고 경상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그 후 도총관·훈련원지사를 거쳐 함경도 변경에서 야인이 반란하자 이를 진압했다.

아버지는 선공감정(繕工監正) 황예헌(黃禮軒)이며, 어머니는 사헌부감찰 남인보(南仁甫)의 딸이다.

1480(성종 11) 무과에 급제하고 상서원판관이 되어 내승(內乘)을 겸직하였다. 1486년 무과중시에 장원으로 급제, 평안도우후(平安道虞候), 유원(柔遠)과 혜산진의 첨절제사로 나갔다. 그 뒤 훈련원도정, 의주목사, 회령부사, 함경도병마절도사·평안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이어서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1510(중종 5)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방어사가 되어 제포(薺浦)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르고 그 곳 경상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 뒤 도총관, 지훈련원사(知訓鍊院事)를 거쳐, 1512년 평안도 변방에서 야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순변사로 나가 이를 진압하였다. 이어서 평안도, 함경북도의 병마절도사를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장무(莊武)이다.

 

 

황기

형의 아들 기는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直提學)과 대사간(大司諫)을 지냈고 경기도 관찰사(觀察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황신(黃愼)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사숙(思叔), 호는 추포(秋浦). 공조판서 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별제 원()이고, 아버지는 정랑 대수(大受)이며, 어머니는 내섬시정 곽회영(郭懷英)의 딸이다.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1582(선조 15) 진사가 되고, 1588년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그 뒤 감찰·음죽현감 등을 거쳐, 호조·병조의 좌랑을 역임하였다. 1589년 정언이 되어 정여립(鄭汝立)을 김제군수로 임명한 이산해(李山海)를 추론(追論)하였다. 그리고 정여립의 옥사에 대해 직언하지 않는 대신을 논박하다가 이듬 해 고산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591년 건저(建儲)문제가 일어나자 정철(鄭澈)의 일파로 몰려 파직당하였다. 1592년 다시 기용되어 사서·병조좌랑·정언 등을 지냈다. 다음 해 지평으로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을 접반하였다.

그 때 송응창이 오로지 양명학만을 주장하자 대학강어 大學講語를 지어 정주학(程朱學)을 논의하였다. 그 뒤 세자(世子 : 뒤의 광해군)를 따라 남하해 체찰사의 종사관이 되었다. 이어 병조정랑이 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596년 변방 백성들을 따뜻하게 위로하는 방법을 진달(進達 : 공물을 상급 관청으로 올리는 것)해서 절충장군이 되었다. 통신사로 명나라의 사신 양방형(楊邦亨심유경(沈惟敬)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그러나 화의가 결렬되자 명나라의 내원을 청해 가선대부에 승진하였다. 이어 위유사(慰諭使찬획사(贊劃使) 등을 거쳐 전라감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전쟁으로 피폐해진 남원의 복구에 공을 세워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뒤이어 공조·호조의 참판, 한성부우윤·대사간 등이 되어, 인재등용과 기강확립 등을 골자로 하는 12조의 시무차자(時務箚子)를 올렸다. 그리고 소학의 권장을 청하였다. 1601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정인홍(鄭仁弘)의 사주를 받은 문경호(文景虎)가 스승인 성혼을 비난하자 이를 변호하다가 파직되었다.

이듬 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가는 도중 어양(漁陽)에 이르렀을 즈음, 정인홍의 탄핵으로 삭탈관작되었음을 듣고 강화로 돌아갔다. 그러나 1605년 임진왜란 때의 공이 인정되어 호성선무원종공신(扈聖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1607년 복관(復官)되었으나, 유영경(柳永慶)이 이를 시행하지 않아 부여에 가서 살았다. 1609(광해군 1) 호조참판으로 진주부사(陳奏副使)가 되어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와서 공조판서·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진휼사(賑恤使)가 되어 재정의 절용과 민력(民力)을 아낄 것을 주청하였다.

1612년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시종한 공로로 위성공신(衛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회원부원군(檜原府院君)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다음 해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은 죄수 정협(鄭浹)의 무고로 쫓겨나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다. 그 뒤 옹진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졸하였다.

우의정에 추증되고, 공주의 창강서원(滄江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일본왕환일기 日本往還日記. 막부삼사수창록 幕府三 酬唱錄. 추포집. 대학강어등이 있다. 시호는 문민(文敏)이다.

 

황일호(黃一皓)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익취(翼就), 호는 지소(芝所).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수(大受)이고, 아버지는 척()이며, 어머니는 강백룡(姜伯龍)의 딸이다. 큰아버지 신()에게 입양되었다. 조수륜(趙守倫)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음보로 운봉현감·전주판관·임천군수 등을 역임하고, 1635(인조 1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세자시강원문학을 거쳐 1636년 장령이 되었다.

이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가서 독전어사(督戰御史)로 전공을 세웠고, 척화를 적극 주장하였다. 난이 끝난 뒤 호종의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진주목사에 제수되었다.

1638년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 명나라를 도와 청나라를 치고자 최효일(崔孝一) 등과 모의하다가 그 사실이 발각되어 1641년 청나라 병사에게 피살되었다.

강화충렬사(忠烈祠), 부여의열사(義烈祠), 운봉용암서원(龍巖書院), 의주백마산성사(白馬山城祠)에 배향되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출전(다움 백과사전)

 

황운조(黃運祚)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사용(士用), 호는 오수(寤修), 도천(道川)이다. 이괄(李适)의 난과 병자호란 때 공을 세운 지소(芝所) 황일호(黃一皓)의 현손이다.황운조(黃運祚)[1730~1800]1797(정조 21) 7월 합천 군수로 있다가 인천 부사로 부임하여 치적을 많이 쌓았으며, 청백리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같은 해 12월 통정대부로 승진하였고, 다음해인 1798(정조 22) 12월 돈령부(敦寧府) 도정(都正)에 제수되었다. 황운조의 후임으로 인천 부사에 재임 중이던 서직수(徐直修)17991월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황운조는 인천 부사에 재임되었다가, 다음해 2인천도호부 관아에서 사망하였다.황운조는 어려서부터 학문과 서도(書道)에 힘써 이 분야에 일가를 이루었다. 윤순(尹淳)·김상숙(金相肅)과 함께 강도 삼절(江都三絶)로 불리었다. 황일호의 신도비에 글씨를 썼고, 경기도 연천군에 있는 김재구(金載久) 묘의 묘비문을 썼으며, 쌍봉사(雙峯寺) 사적비(寺蹟碑)를 썼다.1797(정조 21) 왕명에 따라 통감강목(通監綱目)춘추좌전(春秋左傳)()’을 써서 바쳐 가자(加資)되었다.인천 부사로 재직 중에 부사 황공 운조 청덕 선정비(府使黃公運祚淸德善政碑)’를 비롯한 선행비(善行碑) 2기가 세워졌으며, 효행(孝行)으로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효행으로도 향리에 명성이 널리 알려져 1814(순조 14) 정문(旌門)이 내려졌고, 아직도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의 처음 그 자리에 세워져 있다.

출전(디지탈 인천남구문화대전)

 

 

 

황귀하(黃龜河)

생몰 1672(현종 13)1728(영조 4)

33세 때 1705(숙종 31) 알성시(謁聖試) 병과3(丙科3).

암행어사 연보 - 1712년 지평사서를 거쳐 이듬해 정언부수찬수찬교리를 지냈다.

42, 1714(숙종 40) 충청좌도어사로 나가 천안군수 어유봉(魚有鳳)을 폄삭(貶削)하고 충주목사 김진옥(金鎭玉)을 포상하도록 주청하였다.

441716년 별견어사(別遣御史)가 되어 제주도에 다녀와서 굶어 죽은 제주도민을 치제(致祭), 조위(吊慰)하도록 하였으며, 진상품인 전복의 양을 3분의 2로 감해주도록 주청하여 실현시켰다.

관련 기록 숙종 055 40/11/27(을축) / 충청좌도 어사 황귀하의 복명으로 천안 군수 어유봉을 폄직하고 청주 목사 김진옥을 포장하다 충청좌도 어사(忠淸左道御史) 황귀하(黃龜河)가 복명(復命)하여 천안 군수 어유봉(魚有鳳)을 폄직(貶職)하고, 청주 목사(淸州牧使) 김진옥(金鎭玉)을 포장(褒獎)하였다.

출전(문화콘텐츠닥컴)

 

 

황근중(黃謹中 )

자는 일지(一之), 호는 월담(月潭). 풍저창수 준원(浚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종친부전부 탕경(湯卿)이고, 아버지는 영춘현감 수()이며, 어머니는 정랑 이준(李浚)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나서 많은 칭찬을 받았고 1589(선조 22) 생원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에 가서 임금을 만나 전함사별좌(典艦司別坐)가 되어 경양도찰방(景陽道察訪내섬시직장·호조좌랑을 거쳐 송화현감, 공조와 호조의 정랑이 되었다.

1606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경상도도사를 거쳐 다음 해 예조정랑·지평이 되고, 1609(광해군 1) 부사직으로 있다가, 뒤에 금산·양근의 군수로 있으면서 치적을 올려 안변부사로 승진되었다.

1615년 강원감사가 되어 지극한 효행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 해 동부승지·좌부승지를 거쳐 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인조반정 이후 은거하며 벼슬하지 않았다.

출전(다움 백과사전)

 

 

황자(黃梓)

자는 자직(子直). 신구(藎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흠()이고, 아버지는 서하(瑞河)이며, 어머니는 박태연(朴泰延)의 딸이다.

1718(숙종 44)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21년 설서가 되었다가 소론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 1725년 지사 민진원(閔鎭遠) 등의 주청으로 다시 서용되어 수찬·지평·부교리 등을 거쳐, 1726년 교리·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1727년 겸사서·겸문학·이조좌랑을 역임하면서 언론의 개방과 주강(晝講)에 대신들을 참여시킬 것을 상소하기도 하였다. 그 뒤 응교·사간을 거쳐, 1734년 진주사행(陳奏使行)의 서장관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와 이듬해 의주부윤이 되었다.

그 뒤 광주부윤(廣州府尹겸필선·집의·보덕·강원도관찰사·부제학을 거쳐, 1748년 이조참의·대사헌·지의금부사·개성유수를 역임하였다.

1750년 동지부사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 호조참판이 되었다. 저서로는 두 차례에 걸쳐 청나라에 다녀온 견문을 기록한 기행문집 갑인연행록(甲寅燕行錄)이 있다.

출전(다움 백과사전)

 

 

황형조

자의 맏아들로 형조 판서를 역임.

 

황시우(黃士祐)

호장공계의 사우는 중종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지평·응교 등을 지냈고, 대사헌을 거쳐 호조·예조·이조 판서 때 알성문과에 올라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임진왜란 때 동지돈령부사에 이르렀다.

자는 국보(國寶), 호는 용헌(慵軒). 사우(士佑)라고도 한다. 영일현감 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봉예랑 귀경(貴卿)이고, 아버지는 희성(希聖)이며, 어머니는 진유경(秦有經)의 딸이다.

[내용]

1507(중종 2) 진사가 되고, 1514년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 1520년 지평이 되고, 그 뒤 문학·헌납·보덕·응교 등을 거쳐, 1529년 대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좌승지를 거쳐 부제학을 지내고, 1532년 한성부우윤·대사헌이 되었다.

처가와 이성(異姓) 사촌 되는 김안로(金安老)에 부화뇌동하여, 1534년에는 형조참판을 거쳐 호조판서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예조와 이조의 판서를 지내고 우찬성에 올랐다. 김안로에게 아부하여 벼슬이 정경(正卿)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뇌물을 받고 벼슬을 팔아 치부하였다.

출전(다움 백과사전)

 

 

황기천(黃基天)

본관은 창원. 자는 희도, 호는 능산·후완. 아버지는 병마절도사 인환이다. 1792(정조 16)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정조의 총애로 청환직을 거치지 않고 이조좌랑이 되었다. 1801(순조 1) 문사랑을 거쳐 강동현감·정언·지평·종부시정 등을 지냈다.

1806년 장령으로 있을 때 우의정 김달순(金達淳)을 탄핵하는 합계에 참석하지 않아 용천에 유배되었다. 그뒤 고금도로 이배되었으나 1809년 익종이 태어나자 사면되었다. 문장이 뛰어났으며, 전서·예서·해서·초서의 서법에 모두 능통했다고 한다. 또한 경사에도 통달했으나 천성이 겸손하여 성예를 구하지 않았다 한다.

출전(다움 백과사전)

 

황재영

고종 때 학자로 유명했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창원 황씨(昌原黃氏)는 남한에 총 53,591가구, 220,81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黃眞伊(황진이) 의 문학

 

황진이는 조선시대의 명기다. 본명은 진이고, 일명은 진랑이다. 그 리고 기명은 明月(명월)이다. 그녀가 언제 누구의 딸로 태어났는지, 언제 죽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중종 때 사람이며 비교적 단명했을 것이라고 추측될 뿐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송도기이등 야사에 많이 등장한다.

황진이의 작품은 한시작품으로는 박연, 영반월, 등만월대회고, 여소야J등이 전해지고 있고. 시조작품으로는 청산리 벽계수 야, 동짓달 기나긴 밤을, 내 언제 이 없어, 산은 옛 산이로되, 어져 내일이여등이 전해지고 있다.

현재 전해지는 작품은 5, 6 수에 지나지 않으나 기발한 이미지와 알맞은 형식, 세련된 언어 구사로 표현하고 있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黃眞伊(황진이)의 일화.

 

송도삼절

황진이는 기생이긴 하지만 성품이 고결하여 사치한 것을 싫어했다.

비록 관청에서 베푸는 술자리라고 해도 다만 빗질과 세수만 하고 , 옷도 바꾸어 입지 않았다. 방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많은 돈을 준다 해도 저잣거리의 천한 사내들과는 상대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항상 선비들과 놀기를 좋아했다. 뿐만 아니라 글도 많이 읽었는데, 唐詩(당시) 읽기를 좋아했다.

황진이는 일찍이 화담 서경덕을 사모했다.

그는 뭇사람의 존경을 는 성리학자 였다. 황진이는 늘 그 문하에 나가 봐었다. 서경덕도 그녀를 거절하지 않고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황진이는 재주가 있고 시를 이는 여자라서 서경덕은 그녀를 퍽 귀여워했다. 하루라도 글을 배우러 오지 않으면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서경덕은 시를 한수 읊기 시작했다.

마음이 어린 후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겹겹 산중에 어느 님이 오리마는

 

지는 부는 바람에 행그인가 하노라.

<解說>

마음이 어리석은 뒤라, 하는 일이 다 어리석다며 황진이를 그리워하는 심정토로하고 있다. 바람 소리인가 했더니 냥랑한 목소러가 문운풍지를 건들었다. 황진이였다.

그래 요즘도 唐詩(당시)를 많이 읽는 모양이지?” 서경덕이 물었다.

요즘은 杜甫(두보)의 시를, ‘분류두공부시언해를 옆에 같이 놓고 공부하는데 재미있어요.”

황진이가 말했다.

분류두공부시언해는 성종 12(1481) 유윤겸 · 조위 - 의침 등이 당나라 전성기 때의 두보의 시 1451편을 한글로 번역하여 2519책으로 펴낸 역시집이었다. 서경덕은 황진이의 문학 실력을 칭찬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이번에는 황진이가 노래를 부르춤을 추었다. 빙글빙글 돌아갈 때마다 풍만한 가슴이 언뜻 언뜻 러났다. 서경덕은 황진이의 춤추고 노래히는 모습을 귀엽다는 듯이 라보았다.

산은 옛산이로되 물은 옛물이 아니로다

주야의 흐르니 옛 물이 있을소냐

인갤도 물과 갇아 가고 아니 오노매라.

 

황진이의 청아한 목소리가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산은 전의 그 산 이로되 물은 그 전의 그 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밤낮에 흐르고 있으니 물이 있을 것이냐? 인물 중에 뛰어난 사람들도 물과 같아서 한 번 가면 다시는 아니 온다는 것이다.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임을 먼저 속였간대

월침삼경(月沈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찌하리오

 

간간히 골짜기를 가르며 지나가는 소리가 황진이의 숨소리를 삼켰디. “내가 언제 신의가 없어서 언제 님을 속였기에 달지는 깊은 밤중에 생각이 아주 없구나.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 소리야 난들 어찌하랴?으음. "

 

서경덕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어느덧 골짜기에 어둠이 내렸다.

그 날 밤 황진이는 서경덕과 밤을 보냈다. 서경덕은 코를 골며 잠을 잘뿐이었다. 다음 날도 서경덕과 밤을 같이 보냈다. 서경덕은 코를 골며 잠을 잘뿐이었다. 그 다음 날도 서경덕과 밤을 같이 보냈다. 그러나 서경덕은 코를골며 잘뿐이었다.

아하하하 아하하하 아하하하.”

황진이는 섬돌로 내려서자마자 크게 웃어재꼈다.

이 세상에 자신의 몸을 탐내지 않는 사내가 있다니. 도가 높다던 지족선사를 파계시킨 황진이가 아니던가.

그러나 황진이는 슬프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뻣다. 육체적 사랑이 아닌 정신적으로 사랑 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 에 있다는 것이 너무 기뻣다.

 

박연폭포 · 서경덕 · 황진이가 송도삼절이야. ”

황진이는 혼잣소리로 웅얼거렸다. 눈물이 핑 돌았다.

“30년간이나 도를 닦아 명승으로 이름이 높은 지족선사도 나의 美色(미색)에 폭 빠져 30년 수도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그런데 화담 선생만은 왕래를 해온지 이미 여러 해가 되는데도 그저 친숙한 모습만 보여 주셨을 뿐이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유혹해 보았지만 위 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내가졌다.

화담 선생이야말로 참으로 성인이라 할 수 있다.”

황진이가 주위 사람들에게 토로했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黃眞伊(황진이)의 일화.

 

절세의미인

중국 사신이 개성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원근에 사는 녀들이 그 일행을 구경하려고 길옆에 마치 숲처럼 빽빽이 서 있었다. 이 때 사신이 말리서 황진이를 바라보다가 말에 채찍을 가해 급히 달려와서 한참 동안 그녀를 보고는 갔다. 사신이 관청에 이르자 말에서 내렸다.

당신의 나라에 절세의 미인이 있습니다.” 시신이 조선의 통역관에게 말했다.

황진이는 그 당시 대국이라고 자처한 중국에도 없는 절세의 미인이었던 것이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黃眞伊(황진이)의 일화.

 

신선의노래

악공 엄수는 나이가 70세였다.

그는 은나라에서 가야금 타는 솜씨만은 명수로 꼽혔다. 또한 음률도 터득했다. 그런 그가 황진이를 음 만났다. ‘과연 선녀로구나!’ 엄수가 탄복했다.

어디 노래를 한번 불러보오.” 엄수가 말했다.

솜씨는 없지만 한번 불러 보겠습니다.” 황진이가 노래를 불렀다.

이것은 신선이 사는 곳에서 울려 나오는 노래 소리다. 인간 세상에서 어찌 이런 가락이 흘러나올 수 있겠는가?”

 

자신도 모르게 놀라 일어선 엄수가 외쳤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黃眞伊(황진이)의 일화.

 

과연 천재로다.

번은 송공이 그의 어머니의 장수를 비는 축하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이웃 고을의 수령과 고관들이 모두 참석했다. 송공은 서울에 있는 예쁜 기생과 노래 잘하는 여자들도 불러 모았다. 얼굴에 붉게 분칠한 여인들이 가득하고 비단옷을 입은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이때 황진이는 얼굴에 화장도 하지 않고 담담한 차림으로 자리에 나왔다. 절세미인으로서의 천연스러운 그녀의 태도가 더욱 사림들의 마음을 직였다.

잔치는 밤이 응속하도록 계속되었다 모든 손님들은 황진이를 칭찬 했다. 그러나 송공은 단 한 번도 눈길을 황진이에게 주지 않았다.

자기 첩이 전날처럼 엿보고 있다가 무슨 변을 일으킬까 염려해서였다. 술이 취하자 송공은 시녀를 시켜 술잔에 술을 기득 부어서 황진이에게 마시기를 권하고, 자기 가까이 앉아서 혼자 노래를 부르게 했다.

 

황진이가 자세를 가다듬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맑고 고운 노래 소리가 간들간들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노랫소리는 하늘에 사무쳤다. 고음, 저음 할 것 없이 다 맑고 고와서 보통 곡조와는 현저히 달랐다.

과연 천재로다!”

송공이 무릎을 치며 칭찬했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黃眞伊(황진이)의 일화.

 

내 앞길이 낭패로다.

자기를 짝 사라하다 죽은 총각 사건으로 마음에 상처를 받은 황진이는 기생이 되었다. 그녀의 용모와 재주는 송도의 화류계에 소문이 났다. 그녀는 노래도 또한 잘 불렀다. 사람들은 그녀를 선녀라고 불렀다.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송공이 개성유수로 부임해 왔다. 그때가 마침 명절이었다. 낭관(각 관아의 벼슬이치)들이 관사에서 조출한 술자리를 베풀었다. 그때 황진이도 참석했다. 그녀의 몸매는 가냘프고, 행동은 단아했다. 송공은 원래 풍류를 즐기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는 황진이를 보자 첫눈에 범상치 않은 여자임을 알아차렸다.

이름은 헛되이 얻어지는 게 아니로군!”

송공이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송공은 황진이를 친절하게 대했다.

문틈으로 송공이 노닥거리는 모습을 훔쳐보고 있던 송공의 첩 역시 관서지방에서 이름이 나 있는 여자였다.

과연 절세의 미인이로군! 앞으로 내 앞길이 낭패로다. ”

송공의 첩이 머리를 풀고 발을 벗은 문을 박차고 나가면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절세의 미인이야! 절세의 미인이야! 아이고 내 팔자야.”

 

송공의 첩은 질투심을 이기지 못해 연신 숨을 거칠게 내쉬며 계속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곁에 있던 종들이 그녀를 붙잡고 말렸으나 도저히 만류할 수 없었다, 송공은 히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님들도 모두 물러갔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黃眞伊(황진이)의 일화.

 

상여가 움직이지 않는다.

황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아버지 황진사는 가끔 집에 들러 엽전이 자루를 던져주고 가버리곤 했다. 현금과 진이는 그리움 속에서 았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다. 현금은 황진사의 첩이었고, 진이는 서녀였던 것이다.

현금은 황진사에게 쏟지 못히는 정을 진이에게 쏟았다. 천자문을 구해서 가르쳤다. 진이는 총명해서 학습 속도가 빨랐다. 열녀전을 구해다 읽혔는데 역시 학습속도가 빨랐다. 이어서 소학을 공부하고, 사서삼경을 공부했다.

(음률을 말함)(; 글귀 문운을 달고 대를 맞추어 짓는 한문체의 하나) 짓기를 익혔다. 사군자 치는 법도 익혔다 거문고 타는 법도 익혔다.

 

어느덧 황진이의 나이 열여섯이 되었다. 이웃에 사는 사내들이 군침을 흘리며 황진이의 아름다운 용모를 훔쳐보았다. 그런데 이웃집 총각 하나가 그만 황진이의 아름다움에 빠져 넋이 나가버렸다. 틈만 으면 황진이의 집 앞을 왔다 갔다 하면서 그 집안을 엿보고서 애를 우고 가슴을 앓았다.

그리나 황진이에게 마디의 말조차 건네 보지 못했다. 총각은 그만 자리에 드러누워 꽁꽁 앓기 시작했다. 그 병의 인을 알게 된 총각어머니가 황진이의 집을 찾아갔다.

죽어 가는 자식 살려주는 셈치고 우리 아들을 한번 만나게 해 주세요.”

총각의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애걸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있으신 거예요.”

현금이 매몰차게 거절했다. 총각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돌이갔다. 보름 짝사랑의 홍역을 앓던 그 총각은 죽고 말았다.

 

어어야 어야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북망산천으로 냐는 간다

북망산이 어디던고,

강 건너면 그곳인데...

 

선소리꾼들이 요령을 흔들며 구슬픈 소리를 토해냈다.

 

이들을 마지막 보내는 어머니의 정회가 애달았다.

천길이 멀고도 먼데

억울해서 못가겠네.

너어화넘차 너어화

너어화넘차 너어화

 

상여소리에 황진이는 밖을 내다보았다. 상여가 자신의 집 앞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저 총각이 죽은건 진이를 짝사랑하다가 그만 병이 나 죽었대.”

저런 한번 말이나 걸어 보지 그랬네.”

총각 어머니가 찾아가서 애결을 했는데 진이 엄마가 거절했대.”

황진이는 이웃집 아줌마들의 소곤거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마당으로 내려섰다.

처녀의 옷을 던져줘야 상여가 떠날 있대. ”

상여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야단이었다. 황진이는 방으로 뛰어 들어 가 옷장을 열고 평소에 입던 치마와 저고리를 꺼내 하인에게 주었다. 황진이의 치마와 저고리로 상여를 감싸자, 상여가 움직이기 시작 했다.

너어화넘차 너어화

너어화넘차 너어화

 

구슬픈 상여 소리가 동구 앞을 벗어났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黃眞伊(황진이)의 일화.

 

황진이의 어머니 현금.

황진이의 어머니 현금은 젊어서부터 얼굴이 아름다웠다. 그녀의 나이 18때였다. 하루는 병부교 밑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때 생김새가 단아하고 옷차림이 화려한 사람 하나가 다리 위에서 현금에게 줄곧 눈길을 쏟았다. 그는 현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도 했고 미소를 보내기도 했다.

현금 또한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다가 그가 어디 론가 사라져버렸다. 저녁놀이 시냇물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빨래하던 여자들은 하나 둘 흩어졌다.

그가 다시 다리 위에 나타나 난간에 의지해 노랫가락을 옳었다.

 

노래가 끝나자, 그가 다리 아래로 내려와 물을 달라고 청했다. 현금은 표주박에 물을 가득히 떠서 그에게 주었다. 그가 반쯤 물을 마셨다.

너도 시험 삼아 마셔봐라.”

그가 웃으며 표주박을 현금에게 건네주었다. 현금은 물을 마셨다.

그런데 물이 아니라 소주였다. 현금은 속으로 기이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일을 인연으로 해서 두사람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마침내 그들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다. 그리고 이름을 黃眞伊(황진이)라고 했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黃眞伊(황진이)의 일화.

 

조선 초기의 여류문학

가부장제적 권위가 지배하고 남존여비사상의 절대적인 영향으로 조선왕조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에게 복종하고 가사를 충실히 돌보며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강조되었다. 따라서 여성교육의 본질은 가사 노동과 길쌈, 바느질 등의 습득에 있었으며, 교육은 남성들의 전유물 이었고, 여성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다. 다만 왕실양반층에 한하여 극히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육을 받을 뿐이었고 대부분의 하층계급 여성들은 글자를 깨우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문 또는 한문으로 그들의 감정을 표현한 이른바 여류문학이 싹텄으며 그를 대표할 만한 몇몇 여류문인들이 있었다.

사임당 신씨, 허난설헌, 황진이, 유희춘의 부인으로 시에 능한 송덕봉, 조원의 少室(소실)로 시에 능한 이옥봉, 부안의 기생으로 시문에 능한 이매창등이 바로 그들이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黃眞伊(황진이)의 일화.

 

蘇世讓(소세양)이 황진이의 소문을 듣고 "나는 30일만 같이 살면 능히 헤어질 수 있으며 추호도 미련을 갖지 않겠다"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황진이와 만나 30일을 살고 이별하는 날 황진이가 작별의 한시 送別蘇陽曲(송별소양곡)을 지어주자 감동하여 애초의 장담을 꺾고 다시 머물렀다고 한다.

 

명창 이사종과는 그의 집에서 3, 자기 집에서 3, 모두 6년을 같이 살고 헤어졌다. 풍류묵객들과 명산대첩을 두루 찾아다니기도 해 재상의 아들인 이생과 금강산을 유람할 때는 절에서 걸식하거나 몸을 팔아 식량을 얻기도 했다고 한다.

죽을 때 곡을 하지 말고 鼓樂(고락)으로 전송해 달라, 산에 묻지 말고 큰 길에 묻어 달라, 관도 쓰지 말고 동문 밖에 시체를 버려 뭇 버러지의 밥이 되게 하여 천하 여자들의 경계를 삼게 하라는 등의 유언을 했다는 야담도 전한다.

 

林悌(임제)가 평안도사가 되어 부임하는 도중 황진이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면서 지었다는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설어 하노라

라는 시조가 전한다.

그녀는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거든 굽이굽이 펴리라.

 

 

라는 시조를 포함해 모두 8수 가량의 시조를 남겼고 한시도 많이 남겻는데 식소록 識小錄·어우야담·송도기이 松都紀異·금계필담 錦溪筆談·동국시화휘성 東國詩話彙成·중경지 中京誌·조야휘언 朝野彙言등의 문헌에 황진이에 관한 일화가 실려 전한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黃眞伊(황진이)의 일화.

 

宗室(종실) 벽계수가 황진이를 만나보기를 원했으나 황진이는 명사가 아니면 만나주지 않아 친구 李達(이달)에게 의논했다.

李達(이달)"진이의 집을 지나 ()에 올라 술을 마시고 한 곡을 타면 진이가 곁에 와 앉을 것이다. 그때 본체만체하고 일어나 말을 타고 가면 진이가 따라올 것이나 다리를 지나도록 돌아보지 말라"하고 일렀다.

벽계수는 그의 말대로 한 곡을 타고 다리로 향했다. 황진이가 이때

 

"靑山裏(청산리) 碧溪水(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一到滄海(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웨라

明月(명월)滿空山(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라는 시조를 읊었다. 이것을 들은 벽계수는 다리목에 이르러 뒤를 돌아보다 말에서 떨어졌다. 황진이는 웃으며 "명사가 아니라 風流郞(풍류랑)이다"라고 하며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黃眞伊(황진이)의 일화.

 

黃眞伊(황진이)는 화장을 안 하고 머리만 빗을 따름이었으나 광채가 나 다른 기생들을 압도했다. 宋公大夫人(송공대부인) 회갑연에 참석해 노래를 불러 모든 이의 칭송을 들었고 다른 기생들과 송공 소실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았으며, 외국 사신들로부터 천하절색이라는 감탄을 받았다.

성격이 활달해 남자와 같았으며, 협객의 풍을 지녀 남성에게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남성들을 굴복시켰다.

 

30년간 벽만 바라보고 수도에 정진하는 知足禪師(지족선사)를 찾아가 미색으로 시험해 결국 굴복시키고 말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시정의 돈만 아는 사람들이 천금을 가지고 유혹해도 돌아보지 않았으나, 徐敬德(서경덕)處士(처사)로 학문이 높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시험 하다가 그의 높은 인격에 탄복하여 평생 서경덕을 사모했다.

거문고와 술· 안주를 가지고 자주 화담정사를 방문해 담론하며 스승으로 섬겼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黃眞伊(황진이)의 일화.

 

朴淵瀑布(박연폭포徐敬德(서경덕)과 함께 松都三絶(도삼절)이라 일컫는 인물이다. 재색을 겸비한 조선조 최고의 명기이다.

어디를 가든 선비들과 어깨를 겨누고 대화하며 뛰어난 한시나 시조를 지었다. 가곡에도 뛰어나 그 음색이 청아했으며, 당대 가야금의 妙手(묘수)라 불리는 이들까지도 그녀를 仙女(선녀)라고 칭찬했다.

 

황진사의 庶女(서녀)라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라고도 하는데, 일찍이 개성의 관기가 되었다.

 

15세 때 이웃의 한 서생이 황진이를 사모하다 병으로 죽게 되었는데, 영구가 황진이의 집 앞에 당도했을 때 말이 슬피 울며 나가지 않았다. 황진이가 속적삼으로 관을 덮어주자 말이 움직여 나갔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후 기생이 되었다는 야담이 전한다.

기생이 된 후 뛰어난 미모, 활달한 성격, 청아한 소리, 예술적 재능으로 인해 명기로 이름을 날렸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출전 <한미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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