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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해황씨(黃)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평해황씨)

 

 

본관(本貫): 평해(平海)

시조(始祖): 황낙(黃洛)

유래(由來):

 

평해 황씨의 시조는 중국 후한의 유신(儒臣)으로 서기 28(신라 유리왕 5, 한나라 광무제 4) 구대림(丘大林)과 함께 사신으로 교지국에 가던 길에 풍랑을 만나 안아진에 표착하여 그 곳에 정착 세거한 황낙(黃洛)이다. ()의 후손에서 갑고(甲古을고(乙古병고(丙古)3형제가 있어 그 중 갑고가 기성군에 봉해졌고, 그의 아들로 전하는 온인(溫仁)이 고려조에서 금오위 대장군·태자검교를 지냇고 평해에 세거하였으므로 후손들은 온인을 일세조로 계대하면서 본관을 평해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가문의 중요 인물

 

황희석(黃希碩)

?1394(태조 3).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 본관은 평해 ( 平海 ). 고려 때 시중 유중(裕中)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판서 천록(天祿)이다. 본래 출가했다가 우왕 때에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를 역임하였다.

1381(우왕 7) 왜구가 명량향(鳴梁鄕)에 침입하는 등 전라도가 소란해지자 체찰사 ( 體察使 )로 파견되어 민심을 수습하였다. 뒤에 단주상만호(端州上萬戶)에 임명되어, 13837월 요심(遼瀋)의 적이 단주에 침입하자 단주상만호 육려(陸麗), 청주천호(靑州千戶) 이두란 ( 李豆蘭 ) 등과 연합해 해양 ( 海陽 ) 등지까지 추격해 격퇴하였다.

1388년 요동원정군이 발진하게 되자, 청주상만호로서 예하군사를 이끌고 우군도통사 이성계 ( 李成桂 )의 휘하에 들어갔다. 이성계가 회군을 단행해 반정에 성공하자 동지밀직사사 (同知密直司事)에 승진되었다. 1389(공양왕 1) 회군공신에 책봉되었다.

13923월에는 이성계가 낙마해 위기에 몰렸을 때 병사들을 이끌고 이성계를 보호하였다. 또한, 그해 정몽주 ( 鄭夢周 )가 격살당하자, 사태수습책으로 정몽주 일파를 탄핵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어 구성로 ( 具成老 ) 등과 더불어 제군사부(諸軍事府) 군관 200여 명의 연서를 받아, 정몽주 일파에게 죄줄 것을 청하였다. 따라서, 공양왕의 폐위와 조선 건국의 중요한 명분을 세운 공로를 이루었다.

1392(태조 1) 8월 조선개국공신 44인이 확정되고, 원종공신 ( 原從功臣 ) 28인이 책봉될 때 원종공신이 되었다. 그러나 한 달 뒤에 태조의 특지(特旨)에 의해 개국공신 2등에 책록되어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로서 의흥친군위도진무(義興親軍衛都鎭撫)를 겸하였다.

1394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서 죽었다. 질병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듣고 태조는 국의(國醫)를 보내어 치료해 주었다. 그리고 죽은 뒤에는 특별히 이화 ( 李和 )를 보내어 예장과 부의를 후하게 하였다. 문하시랑찬성사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양무(襄武)이다.

 

황현(黃鉉)

1372(공민왕 2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평해 ( 平海 ). 고려시대 시중 유중(裕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직제학 근()이고, 아버지는 공조판서 유정 ( 有定 )이다.

1393(태조 2) 춘장문과(春場文科)에 동진사 ( 同進士 )로 급제하고, 1407(태종 7)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으로서 중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경승부소윤(敬承府少尹)에 초배(超拜)되었다.

태종과 세종대에 대사성을 지냈으며, 1428(세종 10) 인수부윤(仁壽府尹)을 거쳐 1429년 행성균대사성(行成均大司成)을 겸직하였다. 1430년 변계량 ( 卞季良 )과 함께 행성균대사성으로서 문과초시 때 강경 ( 講經 ) 중 두가지 시제(試題)만을 뽑아 제술(製述)할 것을 건의, 실시하게 하였다.

그러나 유학자들이 여전히 초록집(抄錄集)에만 의존하고 경학(經學)을 경시한다는 건의에 따라 그 뒤 다시 과거에서 경서강독(經書講讀)이 시행되었다.

 

황여일(黃汝一)

1556(명종 1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해 ( 平海 ). 자는 회원(會元), 호는 해월헌(海月軒매월헌(梅月軒). 평해 출신. 세충(世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연()이며, 아버지는 유학 ( 幼學 ) 응징(應澄)이다.

1576(선조 9)에 진사가 되고 1585년 개종계별시문과(改宗系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88년 검열이 되었는데, 하번사관(下番史官)임에도 불구하고 출입하였다 하여 파직되었다.

1594년 형조정랑이 되고 곧 도원수 권율 ( 權慄 )의 종사관으로 내려갔는데, 얼마 뒤 도원수의 허락을 받고 일시 귀가하여 도원수와 함께 추고(推考)당하였다. 1598년 사서에 이어 장령이 되고, 이듬해 장악원정을 역임하였다.

1601년 예천군수가 되고 1606년 전적을 역임, 1611(광해군 3) 길주목사, 1617년 동래진병마첨절제사가 되었다. 평해의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조천록 朝天錄·해월집147책이 있다

 

황윤석(黃胤錫)

1729(영조 5) 1791(정조 15). 조선 후기의 운학자(韻學者). 본관은 평해 ( 平海 ). 자는 영수(永 馬 ), 호는 이재( 蓬 齋) · 서명산인(西溟散人) · 운포주인(雲浦主人) · 월송외사(越松外史). 김원행 ( 金元行 )의 문인이다.

1759(영조 35) 진사시에 합격, 1766년에 은일(隱逸)로서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되고, 뒤이어 사포서 ( 司圃署 )의 직장 · 별제를 거쳐 익위사의 익찬이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1779(정조 3)에 목천현감이 되었다가 다음해 사퇴하였고, 1786년 전생서 ( 典牲署 )의 주부를 거쳐 전의현감(全義縣監)이 되었다가 그 다음해에 사퇴하였다.

그의 학문은 실학시대의 학풍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것인데, 처음에는 이학 ( 理學 )의 공부에 힘쓰고 주역 을 비롯한 경서의 연구도 하였으나, 북경을 거쳐서 전래된 서구의 지식을 받아 이를 소개한 공이 크고, 또 종래의 이학과 서구의 새 지식과의 조화를 시도한 점이 특색이다.

저서로는 이재유고 蓬 齋遺稿 · 이재속고 蓬齋續稿 · 이수신편 理藪新編 · 자지록 恣知錄 이 있다. 이 중 이재유고 자모변 字母辨 · 화음방언자의해 華音方言字義解 등이 있어 국어학사의 연구대상이 되며, 운학에 대한 연구는 이수신편 에 실려 있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평해 황씨는 남한에 총 30,200가구, 124,07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黃慶杰(황경걸)  선생의 일화.

하늘이 알아주는 효자

선생은 가난한 살림살이에서 글을 배우지 못하였으나 어릴 적부터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부지런히 일하여 생계(生計)를 이어갔다.
불행히 아버지가 우연히 눈이 멀어졌으며, 기침병으로 16년간이나 고통을 겪든 중 무오(戊午)년에 각지에서 괴질이 유행하여 경향(京鄕)에 병사자  )가 많았을 때에 설상가상으로 이 괴질에 걸려서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
이에 놀란 아들이 이른 새벽에 약을 지으려 심산유곡의 험한 “덕재”를 넘어가는데 안개가 자욱하고 수림(樹林)이 울창하여 지척(咫尺)을 분별할 수 없었다.

사방은 적적하고 으쓱하여 호랑이라도 금방 나을 듯하였다.
그러나 효자는 조금도 겁내지 않고 약을 지어 가지고 다시 “덕재”에 돌아오니 아직도 안개는 덜 개이고 어둑어둑한데 별안간에 뭇까마귀들이 머리위에서 지저귀며 날아들었다 날아갔다 하면서 흡사 사람을 산(山)구렁으로 불러들이는 것 같아서 그 까마귀들을 따라 숲속으로 내려간즉 오소리가 죽어 있기에 자세히 살펴보니, 방금 호랑이가 창자를 빼어먹고 김이 무럭무럭 나는  살 고기만 남아 있어 그것을 등에 걸머메고 무서운 것도 잊고 발걸음을 재촉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그 오소리고기를 아버지께 드리니 병세가 회복되어 그후 10여년을 더 살았다.

임종 시에도 그는 단지(斷指)로 아버지 입에 수혈(輸血)하여 2. 3시간 소생 하였으나 그만 천명(天命)인지 70세로 운명하였다.
효성이 지극한 그의 사실을 듣는 이 마다 감동하고, 산짐승들 가지도 효성에 감동하여 도운 것이라며 멀리 가까이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黃喆欽(황철흠)의 지극한 효행.

 

밤길을 인도하는 호랑이

 

1846(헌종 12) 군위군 고로면 학암동에 서 태어난 황 철흠(黃喆欽)은 황 효자라고 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용모가 수려하고 성품이 바르며 온화하였다. 원래 부모님이 영천군 신녕에서 살다가 화전민으로 살길을 찾아 산을 개간하여 농사를 지어 어렵게 살며 주경야독한 선비로서 그의 자는 덕오(德五)이며 평해 황씨이다.

 

어려운 가정에서 알뜰히 살아왔으나 부친이 병환으로 고생하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극진히 병간호를 하며 틈틈이 짚신을 만들어 그것을 멀리 사오 십 리 떨어진 영천 신녕 장에 가서 팔았다. 깊고 험한 산을 넘어 장에까지 가는 일은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고, 또한 부친의 병간호로 전날 밤을 꼬박 지새운 탓으로 자꾸만 감겨지는 눈꺼풀에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서둘러 길을 향했다.

 

그것으로 쌀과 반찬을 사고 사방으로 수소문하여 병든 아버지 의 약을 구해 바쁜 걸음으로 달려와서 정성껏 봉양하기를 계속하였다. 험준한 산길을 내왕하기란 여간 여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모두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지성에 의한 것이라 조금도 힘든 줄을 몰랐다.

 

하루는 여느 때와 같이 신녕 고현 장에 갔다가 그만 날이 저물어 산길을 헤매며 집으로 오는데 사방은 캄캄하고 산 짐승 소리가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얼마간을 한참 헤매고 있을 때 어흥!”하고 산이 울리도록 큰 소리와 함께 눈에 시퍼런 불을 켠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순간 아차, 이제 죽는구나 ! ”하고 생각하나 눈앞이 캄캄해 졌다.

 

그러나 도망칠 수 도 없고, 이 깊은 산중에 고함을 지르며 사람 살려달라고 외쳐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 영락없이 호랑이의 밥이 될 신세라 이제는 죽는구나, 병든 아버지를 누가, 어떻게 모시나? 이 일을 어찌 하오리까? 나의 효심이 부족하여 일찍 이 약을 드려 보지도 못하고 죽는구나, 아버님 ! 아버님 ! ’하며 속으로 외쳐대며 가슴을 죄면서 꼼짝도 못해 그 자리에 오금이 박혀 서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호랑이가 황 효자 앞에 오더니 반가운 양 꼬리를 살랑 살랑 흔들며 해칠 듯한 기색은 전혀 없고 앞으로 슬슬 걸어가는 것이었다.

웬 일일까? 너무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고 의아한 광경이 순식간에 벌어 졌다. 호랑이는 계속 꼬리를 흔들며 산길을 따라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황 효자는 겁에 잔뜩 질려 호랑이의 뒤를 계속 따라 갔다. 이윽고 동네 어귀가 눈에 비치자, 호랑이는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호랑이도 효심이 지극한 황 효자를 알아보는 듯, 그리고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옛 말과 같이 천지 신명의 도움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실로 믿기 어려운 괴이한 일이었다. 그 후로부터는 밤 늦게 돌아올 때면 으례 그 호랑이가 나타나서 그의 앞길을 인도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이 일을 전해 듣고 하늘과 땅이 감동하여 도와 준 일이라며 칭찬이 자자했으며 이 소문은 온 고을로 점점 퍼졌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 눈이 몹시 많이 내려 사방의 길이 막혔다. 장날인데도 약과 먹을 것이 없어 애태우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난데없이 마당 안으로 꿩 한 마리가 날아와서 부엌으로 날아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불쑥 잡아서 이것을 솥에 고아 병석에 누워 계신 부친께 드렸다. 이 또한 실로 하늘이 감동하여 도운 일이라 하여 마을 사람들이 입을 모아 감탄하였다.

이와 같이 뛰어난 효행이 마을에서 점차로 온 고을로 전파되어 드디어 고 을의 여러 어른들께서 이 고을 다스리는 성주에게 아뢰자는 의논이 일기 시 작하여 황 효자를 치하하는 글을 올리니 효행 표창이 내려졌다.

 

18785(고종 15) 이 고을 유지인 박 기순, 신대협, 이 석영 등 35 명의 연 서로 성주께 글을 올려 표창을 청원했던바 알아보고 처리한다는 전갈을 받 았고 187912월 다시 신 낙기, 이 창재, 김 수치 등 45 명의 유지들이 성주에게 글을 올렸더니 황 효자를 높이 치하하고 후한 상금을 내리며 고을 모든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 지니 세상에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성주의 표창을 받은 황 효자는 이를 한낱 채찍으로 받아들여 더욱더 지성 으로 부친을 섬기게 되었으며 부전자전으로 후손들이 이 정신을 이어받고 마을사람들도 만고에 사표가 되는 효행 행적이라 자랑스럽게 여기며 본을 받아 실천하기에 힘썼다.

 

1960년 이 곳 학암동에 길이 후손에게 자랑으로 알리고 온 마을의 자랑으로 또한 본보기로 삼아야겠다는 뜻으로 드디어 마을 앞에 효자 창행비외 비각을 세우자고 결의하여 건립한 것이 학은 황 효자각(鶴隱黃孝子閣)이다. 지금 군위군 고로면 학암동 입구에 있는 것으로 창효각이며 오늘도 말 없이 비바람에도 의연히 서 있어 오가는 사람들에게 효행의 거울이 되고 있다.

 

이 비각을 건업할 때 황 효자의 증손자인 황 석이 (黃石伊)와 그의 고손자인 황 종주가 송아지 한 마리를 판 돈을 비롯하여 온 마을 사람들의 정성 어린 성금이 모여서 이룩되었으며 1961 년에 세워졌다.

 

학암동을 달리 방학동이라 하니 그 옛날 이 마을에서는 어린 학을 많이 길러 놓아 주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효행이 지극한 황 효자의 영향으로 이 고장의 젊은이들이 어버이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함에 마음과 몸을 다하니 벽진 이씨 효열비가 이를 대신 말해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산자수명한 이골에는 지금도 이웃 노인을 섬기는 젊은이들의 모임이 있어 해마다 봄가을, 칠순이 넘는 노인을 한 자리에 초대하여 잔치를 펴는 한편 웃어른을 섬기고 공경하는 따뜻한 경로사상을 구현하고 있다.

 

참고 문현 孝烈行誌(효렬행지), 軍威鄕脈(군위향맥).

 

 

 

黃就根(황취근)의 효행

 

백수(白壽)를 누리시게

 

효자 황 취근(黃就根)1761(영 조 37) 산 좋고 물 맑아 제2의 금강 산이라 불리는 주왕산(周王山)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경북 청송군 청운동 (靑雲洞)에서 태어났다.

그의 자()는 백원(百源)이며 호는 성암(省庵)이라 했으며 본관은 평해 (平海) 황씨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타고 난 재주로 학문에 뜻을 두고 장차 나라를 위하여 큰 일을 하고자 열심히 공부를 하였으나 가정이 빈한하여 품었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부모님 봉양에 전력을 기울이는 한편 스스로 인격 연마를 위해 틈나는 대로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의 천성은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여 한 번도 부모의 말씀을 어긴 일이 없었으며, 뿐만 아니라 동네 웃어른 섬기기를 부모와 같이 정성껏 하니, 칭송이 끊일 날이 없었다.

 

이처럼 천성이 어질고 효심이 지극함은 물론, 동기 형제 사이에도 남다른 우애가 있었으니 부모 봉양에서나 가정을 이끌어 감에 있어 효도와 우애로 그 근본을 삼으니 보는 이마다 본받을 만 하다 하였다.

그의 처는 진주 강씨이니 인품이 어질고 순박하며 사랑과 관용으로 가정과 가문을 화목하게 하였으며, 남편의 효심에 조금도 손색없이 시부모 섬기기를 극진히 하니 두 부부의 부모 섬기는 효성이 온 마을의 귀감이 되었다.

 

한번은 산나물을 캐러 산에 들어갔다가 도라지를 한 바구니 캐어 왔는데 지나가던 이웃 노인이 무심코 도라지를 들여다보다가 거기에 산삼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산삼이라는 것은 원래 신비한 것이라 사람의 눈에 잘 띄는 것이 아닌데 강씨 부인이 캔 것을 보고 그 노인은

부인의 시부모 섬기는 효심이 남달리 특출하더니 하늘의 도우심이 있어 산삼을 캐게 되었나 보구려. 이 후로도 그 정성이 변하지 않는다면 자자손손 큰 복을 받게 될 것이요.”라는 말을 남기고 지나가 버렸다.

 

자기가 캔 도라지에 산삼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안 강씨 부인은 정성스레 꿇어 앉아 하늘에 감사를 드리고는 몸을 깨끗이 씻고 인삼을 달여서 시부께 드렸다고 한다.

 

또 한번은 눈이 몹시 오는 겨울에 찬바람까지 불어 한 발 앞도 구별할 수 없게 되었는데, 시부님은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셨다. 그러나, 집안이 워낙 가난하여 고기는 커녕 끼니 이을 쌀도 귀한 처지라 강씨 부인은 난감하기 짝이 없었으나 연로하신 시부님의 원이시라 곰곰 생각한 끝에 진보에 있는 먼 친척집을 생각해 내고 그 눈보라치는 40 리 길 진보로 향하였다. 용전천에 이르자 물 가운데 오리 한 마리가 날지 못하고 앉아 있기에 강씨 부인은 앞 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물로 뛰어 들어가 오리를 잡아다가 시부님께 고깃국을 끓여 드리었다.

 

이 밖에도 강씨 부인은 시부모의 건강을 위하여 구할 수 있는 약초는 모두 구하여 드림은 물론 비록 나물일망정 정성을 다하여 원기를 돋우는데 좋은 음식을 드리기에 힘썼다. 그리고 이웃집 빨래, 길쌈, 논밭일 등을 하여 받은 쌀로 시부모님께 맛있는 쌀밥을 지어 드렸다고 한다.

 

황 취근의 나이 예순 세 살 때 여름, 부친이 이질에 걸려 온갖 약을 써도 효험이 없었다. 이에 주야로 기도를 올리며 부친의 병환이 낫기를 기원하였 다. 두 부부는 매일 새벽 정화수를 떠서 빌고 있던 중 어느 날, “이질에는 노루 고기가 특효이니라.”라는 음성이 들려 왔다. 그래서 두 부부는

하느님이시여 ! 아버지의 병환을 고쳐 주소서. 아버지의 병환에 특효하다는 노루를 잡게 해 주소서. 제발 병환을 고쳐 주소서, 노루를 잡게 해 주소서....”

하고, 그 날부터는 동네 옆 고족골 깊은 산 속에서 새벽마다 저녁마다 두 손

모아 정성껏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이렇게 자식 내외가 정성을 드리고 온 갖 고생을 하는 것을 알고 부친은, “얘들아, 이 늙은 몸 죽으면 어떠냐? 성한 너희들이나 잘 살 것이지 날 위해서는 걱정하지 말아라.”

하고, 간곡히 말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 취근 부부는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더욱 더 깊은 산골에서 간절히 부친의 병환이 낫기를, 그리고 노 루가 잡히기를 소원하면서 이산 저산을 헤매었다.

 

오늘도 노루가 잡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우거진 숲속을 헤매다 지쳐 기진 맥진 산기슭에 쓰러져 잠이 들었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어디선가 저기 노루 봐라.”하는 고함소리가 들려 오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깨어난 황 취근은 주위를 살펴보니 뜻밖에도 그렇게 바라고 소원하던 노루 한 마리가 멍 하니 서 있지 않는가. 그는 온 힘을 다하여 사로잡아 약재와 더불어 달여 드 렸더니 신기하게도 부친의 병환은 씻은 듯이 완쾌되었다.

 

그후 그의 부친은 아들 황 취근과 며느리 강씨 부인의 지극한 봉양으로 효행을 다하여 백수(白壽 : 99 )까지 오래 사시었다고 한다. 이를 본 마을 사람들은 두 부부의 지극한 효성이 하늘에 닿아 하늘이 그들의 소원을 들어 주어 노루를 보내 주신 것이라 하며 모두가 자기 일인 듯 기뻐하였다.

그 때 노루가 나타난 곳을 지금 주민들은 노루막또는 놀기막이라 부르고 있다.

 

황 취근 부부의 지극한 효성으로 하늘이 감동하여 특효의 노루 고기를 구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산삼과 오리고기를 구하여 봉양하게 되어 백수를 누리게 되니, 이러한 사실을 청송 유림(儒林)에서 알고 조정에 건의하여 평소 부모 섬기기를 지성으로 하고, 병환 또한 지극한 효행으로 낫게 하였으므로 이에 황 취근 부부를 함께 표창하게 되었다.

 

그 후 청송 향교 유림에서 황 치근 부부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904(광무 8) 쌍효각(雙孝閣)을 세워, 그들 부부의 효행을 만대(萬代)에 전하 게 하였으니, 오늘도 동네를 굽어 흐르는 맑은 시냇가 언덕에 우뚝 솟아 그 날의 효행을 말해 주고 있다.

 

출전청송군 청송중고등학교 이 교감

참고 문헌 靑松香氣, 孝烈行誌, 平海黃民族譜

 

 

 

黃希碩(황희석)의 노복 박자형

박자청은 원래 황희석(黃希碩)의 노복으로 있다가 궁문(宮門) 입직(入直)군사로 근무했다. 어느날 태조의 이복동생인 의안 대군이 궁궐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박자청은 국왕의 명령이 없어 그를 들여보내지 않았고, 화가난 의안대군이 발길로 걷어 차 얼굴에 상처가 생길 정도로 맞았지만 의안대군은 궁궐에 들여보내지 않았다.

그 후 태조는 의안대군을 나무라고 박자청을 국왕 경호를 담당하는 호군(護軍)으로 발탁했는데 그 후 건축에 인정을 받아서 승승장구했고, 태종은 박자청이 건축에 탁월한 재주가 있는 것을 알고 재위 8 ( 1 4 0 8)에는 공조판서로 승진시켰다. 정도전이 서울을 설계했다면 건축은 박자청이 했다고 해야 할 정도로 대부분의 도성건물은 그의 손을 거쳤다.

 

 

 

 

 

출전 <한미족대성보>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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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6 진주 형.jpg 진주형씨(邢) 청남 14-08-30 3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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