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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신창표씨(表)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表(신창표씨)

 

 

본관(本貫): 신창(新昌)

시조(始祖): 표인려(表仁呂)

유래(由來):

 

표씨(表氏)는 중국에서 귀화(歸化)해 온 성씨(姓氏)로서, 현존(現存)하는 관향은 신창(新昌) 단본(單本)이며,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에 37본(本)까지 기록되어 있다.

신창 표씨(新昌表氏)는 중국 고대(古代) 오계시대(五季時代:오대의 문란해진 시대를 일컬음)에 후주(後周)의 이부 상서(吏部尙書) 표대박(表大 )이 서기 960년(고려 광종11) 장(張), 방(方), 위(韋), 변(邊), 윤(尹), 진(秦), 감(甘), 황보(皇甫) 등 8성(8姓)과 함께 고려에 들어와 귀화(歸化)함으로서 연원(淵源)을 이루게 되었다. 그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고 소목(昭穆)을 밝힐 수 없어, 후손들은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합문지후(閤門祗侯), 평장사(平章事) 등을 지내고 좌리공신(左理功臣)에 올라 온창 백(溫昌伯)에 봉해진 표인려(表仁呂)를 중시조(中始祖:일세조)로 하고, 신창(新昌)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표연말(表沿沫)

1449(세종 31) ∼ 1498(연산군 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신창 ( 新昌 ). 자는 소유(少游), 호는 남계(藍溪) · 평석 ( 平石 ). 함양 출신. 할아버지는 을충(乙忠)이고, 아버지는 감찰 계(繼)이며, 어머니는 정랑 안홍기(安鴻起)의 딸이다. 김종직 ( 金宗直 )의 문인이다.

약관에 문행(文行)이 세상에 알려지고 당대의 김굉필 ( 金宏弼 ) · 정여창 ( 鄭汝昌 ) 등과 함께 문장에 뛰어났다. 같은 문하의 조위 ( 曺偉 ) · 김일손 ( 金馹孫 ) 등과 깊은 교유관계를 가졌다. 1469년(예종 1) 사마양시에 합격했고, 1472년(성종 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에 들어가고, 1485년 사의 ( 司議 )로서 ≪ 동국통감 ≫ 찬수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문과중시에 다시 병과로 급제한 뒤, 장령 · 사간 등을 거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490년에는 이조참의 · 대사성이 되고, 1492년에는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벼슬 첫길인 예문관 시절에 한림의 여러 선생들이 관례로 신관(新官)들을 침포(侵暴)하여 금육(禁肉)과 여악 ( 女樂 )으로 주연(酒宴)을 베푼 사실이 성종에게 알려져 징계가 내렸는데, 그도 이 자리에 들었다가 파직되어 향리로 돌아가 지내게 되었다.

이후로 향회 ( 鄕會 )에서 금육을 차린 것을 보면 결코 성법(聖法)을 다시 어길 수 없다 하고 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고 한다. 부모의 상을 주자의 ≪ 가례 ≫ 에 따라 치른 일로써, 스승인 선산부사 김종직의 추천을 받아 자급(資級)이 하나 높여졌다. 그 뒤 ≪ 성종실록 ≫ 편찬에 참여하였고, 무오사화 때 경원으로 유배가던 중 객사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였다. 과거시험에서 서거정 ( 徐居正 )의 문생이 된 인연으로 ≪ 필원잡기 筆苑雜記 ≫ 의 서문을 쓰기도 하였다. 〈 논학 論學 〉 이라는 글에서 김종직의 문인을 중심으로 하는 초기 사림파의 학문관과 정치관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1507년(중종 2)에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어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 함창의 임호서원 ( 臨湖書院 )에 제향되었다. 1517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854년(철종 5)에 후손 석준(奭峻)이 간행한 ≪ 남계문집 ≫ 4권 2책이 전한다.

 

표헌(表憲)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역관 ( 譯官 ). 본관은 신창 ( 新昌 ). 선조대의 어전통사(御前通事)로서 명나라 사신을 접견하고 설연(設宴)하는 데 있어 임기응변적 통역과 조처로서 왕의 곤경을 모면하게 하는 등 기지를 발휘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때 명나라와 조선 사이에 일어나는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데 노력하였고, 명나라 경략사 ( 經略使 ) 송응창(宋應昌)의 전략수립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1596년(선조 29)에는 진위사 ( 陳慰使 )로, 1597년 고급사(告急使)의 통역관으로도 크게 활약하였다. 1593년에는 염초(焰硝)의 법을 배워와 전쟁수행에 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표정로(表廷老)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역관 ( 譯官 ). 본관은 신창 ( 新昌 ). 아버지는 역관 헌(憲)이다. 그는 신분이 중인 역관이었으나 당대의 문장가로서 이름이 높았다.

선조 때 그가 원접사 ( 遠接使 )의 역관이 되어 의주에 가 배 위에서 명나라 사신을 맞을 때에, 명나라 사신이 그의 문장을 떠보기 위하여 은행 ( 銀杏 )을 운(韻)으로 시를 지으니, 그는 즉석에서 석류 ( 石榴 )를 운으로 하는 시로써 대답하였다. 명나라 사신이 크게 놀라면서 우리 나라를 문헌(文獻)의 나라라고 극찬하였다.

1616년(광해군 8) 지중추부사까지 지냈다. 그는 의표(儀表)가 수걸(秀傑)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표명서(表明瑞), 표인(表仁), 표근석(表根碩)

참봉(參奉)을 역임하였다.

 

표광수(表光守)

의병(義兵)을 일으켜 전공(戰功)을 세우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의 녹권(錄卷)을 받은 광수(光守)가 신창 표씨(新昌表氏) 가문을 더욱 더 빛냈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신창 표씨(新昌表氏)는 남한에 총 5,629가구, 23,60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전 <한미족대성보>..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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