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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하씨: 진양하씨(河)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河(진주:진양하씨)

 

 

본관(本貫): 진주(晉州): 진양(晉陽)

시조(始祖): 하공진(河拱辰):하진(河珍):하성(河成)

유래(由來):

 

 

晋州河氏(진주하씨) <출전 위키백과>

 

 

진주 하씨는 백제(百濟)시대부터 사대부(士大夫)의 문벌이었던 토성(土姓)이라고 하나 입증할 문헌이 없어 세 계통이 시조를 달리 하고 있다. 같은 조상을 뿌리로 뒀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 (侍郞公波) - 시조 하공진(河拱辰)고려 성종 때 압강도구당사(鴨江渡勾當使)가 되었고, 목종 때 중랑장(中郎將), 현종 때 좌사시랑(左司侍郞)을 역임했으며, 사후에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郎)으로 추증되었다.[1]
  1. 세손 하을지(河乙沚)1344년 과거에 급제하고, 홍건적의 침입 때 개경을 수복한 공로로 1363(공민왕 12) 1등공신이 되었다. 1376(우왕 2) 전라도원수 겸 도안무사(全羅道元帥兼都安撫使)가 되었다.
  2. 세손 하륜(河崙)이 조선 개국공신으로 태종(太宗)조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 (司直公波)(문효공파) - 시조 하진(河珍)고려 정종(靖宗)과 문종(文宗)조에 사직(司直)을 지냈다.
  • 세손 하즙(河楫)1324(충숙왕 11) 문과에 급제하여 찬성사(贊成事)로 치사하고 진주군(晉州君)에 봉해졌다.[2]
  1. 세손 하윤원(河允源)이 공민왕 때 전리총랑(典理摠郞)으로서 개경수복공신이 되었다.
  2. 세손 하연(河演)이 조선 세종(世宗)조에 영의정에 올랐다.
  • (丹溪公波) - 시조 하성(河成)은 고려 때 주부(主簿)를 역임하였다.
  • 세손 하위지(河緯地)는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진주 하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36명을 배출하였다.[3] 하륜(河崙)하연(河演)이 종묘에 배향되었다.

기원[편집]

1451(문종 1) 진주 하씨(晋州河氏) 최초의 족보 경태보(景泰譜)서문에 하연(河演)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오하(吾河)는 진주의 토성으로 백제시대(百濟時代)에 타주(陀州)로 불릴 때부터 사대부(士大夫)의 문벌이었으나 세계가 무전(無傳)하고 고려사에 나타난 시랑(侍郞) 하공진과 동원(同源)이라 하나 분파 계대(系代)가 확실하지 않고, 또 강인문(姜引文 : 給事)이 정승에게 시를 보냈을 때 하복야(河僕射)라 했을 뿐 휘()를 알 수 없으므로 이를 한탄하여 고려 정종·문종 양조에 자식을 지낸 하진(河珍)을 시조로 하였다.

족보를 편찬할 당시 하연하륜은 서로 교분이 두터웠던 같은 시대의 정승(政丞)이었으나 서로 계보(系譜)를 상고할 수 없어 시조를 달리 하였다.

본관[편집]

진주(晋州)는 경상남도 서부에 위치한 지명이다. 삼한시대에 고순시국(古淳是國)이 있었던 곳이다. 본래 백제의 거렬성(居烈城)이다. 663(문무왕 3) 신라에 편입되어 거타주(居陀州)가 설치되었으며, 685(신문왕 5)에 청주(菁州)를 설치하였다가, 757(경덕왕 16)에 강주도독부(康州都督府)로 개칭되었다가 혜공왕 때 청주(菁州)로 개칭되었다. 고려 건국 후 940(태조 23)에 다시 강주로 환원되었고, 983(성종 2)12목의 하나인 진주목으로 개편하였다. 995(성종 14)에는 정해군(定海軍)이라 하고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산남도(山南道)에 속하게 하였다. 1012년에 안무사(按撫使)로 고쳤다가, 1018(현종 9)에 진주목으로 복구되었다. 1392(태조 1) 조선 건국 후 현비(顯妃) 강씨(康氏)의 내향(內鄕)이므로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로 승격하였다. 그러나 1402(태종 2)에 진주목으로 환원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경상도 진주목의 토성(土姓)으로 (((() 4성이 기록되어 있다.[4]

1896경상남도 진주군으로 개편되었다. 1939년 진주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나머지 지역이 진양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995년 진양군이 진주시에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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晋州河氏(진주하씨)

정의

경상남도 진주에 세거하는 성씨의 하나.

연원

진주하씨의 시조는 고려 현종 때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郞)을 지내고 평장사(平章事)에 추증된 하공진(河拱辰)이다. 그런데 하연(河演)[문효공(文孝公)]1451(문종 1) 처음으로 족보를 내면서 그 서문에 세계가 전함이 없고 고려사(高麗史)에 홀로 하시랑 공진이 있어 듣기에 기쁘나 동원(同源)이면서 분파가 확실치 않다.’고 한 것과 같이 진주하씨의 세계(世系)는 계통이 뚜렷하지 않은 3파로 갈라져 있다. 하공진을 시조로 하는 시랑공파(侍郞公派), 고려 정종 때 사직(司直)을 지낸 하진(河珍)을 시조로 하는 사직공파(司直公派), 고려 때 주부(主簿)를 지낸 하성(河成)을 시조로 하는 단계공파(丹溪公派)가 그것이다.본관을 진주로 한 연유는 시조인 하공진이 진주 태생이며, 11세손인 하륜이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추봉되었고, 하진(사직공파)9세손 하즙이 진천부원군(晉川府院君), 10세손 하윤원이 진산부원군에 봉해졌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세거지현황

하공진의 후손은 대곡면 단목리, 수곡면 사곡리, 금곡면 검암리 운문과 수곡면 효자리에 세거하며, 하진의 후손은 명석면 관지리, 옥종면 안계리에서 대대로 살고 있다.

 

집성촌현황

단목, 사곡, 운문, 관지, 안계는 500여년의 역사를 가진 하씨들의 집성촌이다.

 

묘역

송정 하수일의 7대조부터 후손들의 묘는 수곡산에 있고, 하위보의 후손들은 단목에 세장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천서의 후손들은 운문에 세장되어 있다.

 

인물

시조 하공진은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막고자 외교를 펴다가 돌아오지 못하였고, 하륜[1347~1416]은 영의정으로 태종을 도와 조선의 문물을 정비하였으며, 경재 하연[1376~1453]3대의 임금을 섬기며 영의정으로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각재 하항[1538~1590]과 영무성 하응도[1540~1610]는 남명 조식의 제자로 학문의 성취가 있었고 송정 하수일[1553~1612]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을 역임하였으며 겸재 하홍도는 정묘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주하씨 [晋州河氏]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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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씨(河氏)의 선계(先系)는 삼한시대(三澣時代)부터 시작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없다.

고려시대(高麗時代)에서부터 진양(晋陽)의 토성(土姓)으로서 영남(嶺南)과 호남(湖南)에 정착(定着)한 하씨(河氏)는 진주(晋州)를 비롯하여 81본(本)까지 기록하는 문헌이 있으나, 모두가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며, 그 중에서 시조(始祖)가 분명(分明)한 것은 진주(晉州)·안음(安陰)·강화(江華) 3본(本)이다.

그러나 모든 하씨(河氏)는 진주(晋州)에서 분파(分派)된 것이 확실하므로 오늘날에는 진주 하씨(晋州河氏) 단본(單本)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진주 하씨(晋州河氏)는 연원(淵源)을 알지 못하는 다음 3계통(系統)으로 갈리어 세계(世系)를 잇고 있는데,

 

첫째는 고려(高麗) 현종(顯宗) 때 좌사 시랑(左司侍郞)을 지냈고 평장사(平章事)에 추증된 하공진(河拱辰)을 시조(始祖)로 하는 시랑공파(侍郞公波)이다.

하공진(河拱辰)은 994(성종 13) 압강도구당사(鴨江渡勾當使)가 되었고, 1009년(목종 12) 중랑장(中郞將)을 거쳐 얼마 뒤 상서좌사낭중(尙書左司郞中)이 되었다. 10년(현종 1) 동서계(東西界)에 있을 때 임의로로 군대를 동원하녀 동여진(東女眞)의 촌락을 치다가 패한 일이 드러나 유배당하였다. 같은 해 거란[契丹]의 성종(聖宗)이, 고려에서 목종을 폐립한 <강조의 정변>을 문책한다는 핑계로 침범해 오자 유배에서 풀려났다.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고영기(高英起)와 함께 국왕 사절로 거란에 가서 자신의 볼모를 조건으로 거란군을 철수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고영기와 같이 볼모로 있을 때 거란왕의 신임을 받았으나, 여러 차례 탈출을 꾀하다가 발각, 거란왕으로부터 온갖 악형과 회유를 받았으나 신하가 될 것을 거절하여 살해되었다.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郞)에 추증되었다

 

둘째는 고려 정종(靖宗)과 문종대(文宗代)에 걸쳐 사직(司直)을 지낸 하진(河珍)을 시조(始祖)로 하는 사직공파(司直公波)이다.

 

셋째 계통(系統)은 고려 때 주부(主簿)를 역임한 하성(河成)을 시조(始祖)로 하는 단계공파(丹溪公波)이다.

<출전 성씨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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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중요 인물

 

하윤(河崙)

1347(충목왕 3)∼1416(태종 16).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대림(大臨), 호는 호정(浩亭). 공진(珙辰)의 후예로, 식(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식목녹사(拭目錄事) 시원(恃源)이고, 아버지는 순흥부사 윤린(允潾)이다. 어머니는 증찬성사 강승유(姜承裕)의 딸이다.

1360년(공민왕 9)에 국자감시 ( 國子監試 ), 1365년에는 문과에 각각 합격하였다. 이인복 ( 李仁復 )· 이색 ( 李穡 )의 제자로, 1367년에 춘추관검열· 공봉 ( 供奉 )을 거쳐,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으나 신돈 ( 辛旽 )의 문객인 양전부사(量田副使)의 비행을 탄핵하다가 파직되었다.

그 뒤 고공좌랑(考功佐郎)·판도좌랑(版圖佐郎)·교주찰방(交州察訪)·제릉서영(諸陵署令)·지평·전리정랑(典理正郎)·전교부령지제교(典校副令知製敎)·전의부령(典儀副令)·전법총랑(典法摠郎)·보문각직제학·판도총랑(版圖摠郎)·교주도안렴사(交州道按廉使)·전리총랑(典理摠郎)·전교영(典校令)·대사성 등의 관직을 거치고, 1380년(우왕 6)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3년 상을 마친 뒤 우부대언·우대언·전리판서·밀직제학을 거쳐, 1385년에 명나라사신 주탁(周卓) 등을 서북면에서 영접하는 일을 맡았다. 1388년 최영 ( 崔瑩 )이 요동(遼東)을 공격할 때 이를 반대하다가 양주로 유배되었으나, 위화도회군 이후로 복관되었다.

그리고 그 해 가을 영흥군 왕환(永興君王環)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왔을 때 그가 가짜임을 밝혔다가 오히려 광주(光州)·울주 등지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윤이 ( 尹彛 )·이초(李初)의 변이 일어나자 의혹이 풀려 1391년(공양왕 3)에 전라도도순찰사가 되었다가 조선이 건국되자 경기좌도관찰출척사가 되어 부역제도를 개편, 전국적으로 실시하게 하였다.

또한, 신도(新都)를 계룡산으로 정하는 것을 반대, 중지시켰다. 1394년(태조 3)에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가 되었으나 이듬해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그러나 곧 기복 ( 起復 )되어 예문춘추관학사가 되었는데, 때마침 명나라와의 표전문(表箋文) 시비가 일어나자 명나라의 요구대로 정도전 ( 鄭道傳 )을 보낼 것을 주장하고 스스로 명나라에 들어가 일의 전말을 상세히 보고, 납득을 시키고 돌아왔다.

그러나 정도전의 미움을 받아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좌천되었는데, 그 때 항왜(降倭)를 도망치게 했다 하여 수원부에 안치되었다가 얼마 뒤 충청도도순찰사가 되었다.

그는 이방원 ( 李芳遠 )을 적극 지지하여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종이 즉위하자 정사공신 ( 定社功臣 ) 1등이 되고 정당문학 ( 政堂文學 )으로서 진산군(晉山君)에 피봉되었다.

그리고 그 해 5월 명나라 태조가 죽자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로 명나라에 가서 정종의 왕위계승을 승인받아 귀국, 참찬문하부사·찬성사·판의흥삼군부사 겸 판상서사사·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을 거쳐 진산백(晉山伯)으로 봉해졌다.

이 해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 ( 佐命功臣 ) 1등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했다가 영삼사사(領三司事)로서 지공거 ( 知貢擧 )가 되고 관제를 개혁하였다. 그리고 영사평부사 겸 판호조사(領司評府事兼判戶曹事)로서 저화 ( 楮貨 )를 유통시키게 하였다.

1402년(태종 2)에 의정부좌정승 판이조사 (議政府左政丞判吏曹事)로서 등극사 ( 登極使 )가 되어 명나라 성제(成帝)의 즉위를 축하하고 조선의 고명인장(誥命印章)을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그리하여 1405년에는 좌정승 세자사(世子師)가 되고, 다음 해에는 중시독권관(重試讀券官)이 되어 변계량 ( 卞季良 ) 등 10인을 뽑았다. 그 뒤 영의정부사·좌정승·좌의정을 역임하고 1416년에 70세로 치사(致仕),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이 되었다.

그는 태종의 우익으로 인사 청탁을 많이 받고 통진 고양포(高陽浦)의 간척지 200여 섬 지기를 농장으로 착복,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공신이라 하여 묵인되었다. 치사한 뒤에도 노구를 이끌고 함경도의 능침(陵寢)을 돌아보던 중, 정평군아(定平郡衙)에서 죽었다. 인품이 중후, 침착, 대범하였다.

저서로 문집 ≪호정집 浩亭集≫ 약간권이 있다. 태종의 묘정(廟庭)에 봉안되었다. 후대에 그를 한나라의 장자방(張子房:張良), 송나라의 치규(稚圭)라 일컫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하연(河演)

1376(우왕 2) ∼ 1453(단종 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 · 신희(新稀). 즙(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헌 윤원(允源)이고, 아버지는 부윤 자종(自宗)이며, 어머니는 정우(鄭寓)의 딸이다. 정몽주 ( 鄭夢周 )의 문인이다.

1396년(태조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봉상시녹사를 거쳐, 직예문춘추관수찬관(直藝文春秋館修撰官)이 되고, 이어 집의 · 동부대언 등을 역임하였다. 이 때 태종은 그가 간관 ( 諫官 )으로서 의연한 자세로 일을 말하는 것을 보고 손을 잡고 치하했다 한다.

세종이 즉위하자 지신사 ( 知申事 )가 되어 조심스럽게 처사하여 신임을 받아 예조참판 ·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423년(세종 5)에는 대사헌으로서 조계종 ( 曹溪宗 ) 등 불교 7종파를 선(禪) · 교(敎) 양종(兩宗), 36본산으로 통합하고, 혁파된 사원의 토지와 노비는 국가로 환수하고자 하여 채택받았다.

1425년에 경상도관찰사가 되었고 예조참판을 거쳐,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가 한때 천안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곧 유배에서 풀려 형조 · 병조의 참판을 거쳐 1431년에 대제학이 되고, 그 뒤 대사헌 · 형조판서 · 좌참찬 등 고위관직을 역임하였다.

1437년 의정부에 들어가서는 판이조사로서 이조의 일을 맡아 공세법(貢稅法 : 연분9등, 전분6등)을 마련했으며, 1442년에는 각품의 행수법(行守法)을 제정하였다. 1445년에 좌찬성이 되어 70세로서 궤장( 廓 杖)을 받았다. 이어 우의정 · 좌의정을 거쳐, 1449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영의정으로 있던 1451년(문종 1)에 문종이 대자암 ( 大慈庵 )을 중수하려고 하자, 이에 반대하고 치사(致仕)하였다. 의정부에 들어간 지 20여 년 간 문안에 사알(私謁)을 들이지 않았고 법을 잘 지켜 승평수문(昇平守文)의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1454년에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고, 숙종 때 진주의 종천서원 ( 宗川書院 ), 합천의 신천서원(新川書院)에 제향되었다. 편서로 ≪ 경상도지리지 慶尙道地理志 ≫ · ≪ 진양연고 晉陽聯藁 ≫ 가 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하위지(河違地)

1412(태종 12) ∼ 1456(세조 2). 조선 전기의 문신. 단종을 위해 사절(死節)한 사육신 중 한 명이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천장(天章) · 중장(仲章), 호는 단계 ( 丹溪 ) · 적촌(赤村). 선산 출신. 윤(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문하평리 ( 門下評理 ) 지백(之伯)이고, 아버지는 군수 담(澹)이며, 어머니는 유면(兪勉)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남들이 얼굴을 모를 정도로 형 강지(綱地)와 함께 학문에 정진하였다.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집현전부수찬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자 세종이 약을 내려 고향에 가서 치료하게 하고, 또 경상감사에게도 그를 구료하도록 전지(傳旨)를 내렸다. 1444년 집현전부교리가 되어 ≪ 오례의주 五禮儀註 ≫ 의 상정(詳定)에 참여하였다.

1446년 동복현감으로 있던 형 강지가 무함을 당해 전라감옥에 갇혀 병이 깊자 관직을 사임하고 전라도로 내려가서 형을 간호하였다. 1448년 집현전교리로 복직된 뒤 이듬 해 춘추관의 사관 ( 史官 )으로 ≪ 고려사 ≫ 의 개찬에 참여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세종 때부터 왕을 보좌해 훌륭한 치적을 쌓은 관계로 장령에 임명되었다. 그는 품성이 강직해 대사간의 직분으로 권세에 굴하지 않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한때, 대신들의 실정을 적극적으로 공격하다가 왕과 대신들로부터 반격을 받았으나 승지 정이한 ( 鄭而漢 )과 정창손 ( 鄭昌孫 ) 등의 비호로 무사하기도 하였다.

문종이 승하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다. 그 뒤 1453년(단종 1) 장령에서 집의로 승진하였다. 그 해 ≪ 역대병요 歷代兵要 ≫ 와 병서(兵書)의 편찬에 참여했던 집현전학사의 품계를 수양대군 (首陽大君)이 앞장서서 올리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서적의 편찬 사업은 집현전 본래의 업무이므로 품계를 올려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음을 들어 자신의 품계를 올리는 것에 반대하였다. 또한, 이 일을 수양대군이 나서서 처리하는 데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즉, 관직을 내리고 상을 주는 것은 국가의 공기(公器)이므로 경솔히 시행할 수가 없고, 그리고 종신(宗臣)의 신분으로 사은(私恩)을 베풀려는 수양대군의 처사는 매우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직책이 의리상 불가하다고 청해 집현전직제학에 전보되었다. 그러자 사직을 한 뒤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경상도 영산 ( 靈山 )의 온정(溫井)으로 내려갔다. 1454년 집현전부제학으로 복직되자 대궐 옆에 있는 불당(佛堂)이 왕실에 이롭지 못함을 들어 이를 훼철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해 ≪ 세종실록 ≫ 을 편찬하는 데 편수관으로 참여했고, 경연에서 시강관 ( 侍講官 )으로 왕에게 경사를 강론하였다. 이듬 해 집현전부제학에서 예조참의로 전임되었고,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 영의정이 되자 조복을 던져버리고 선산에 퇴거하였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올라 그를 간곡히 불러 예조참판에 승진되었으며, 곧 이어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겸하게 되었다. 세조의 즉위 후 그에게 교서를 내리는 등 잇단 부름을 받아 예조참판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본뜻은 진실로 단종을 위하는 일에 있었다. 세조의 녹(祿)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세조가 즉위한 해부터의 봉록은 따로 한 방에 쌓아두고 먹지 않았다. 그리고 세조의 강권정치에 맞서다가 추국의 명을 받기도 하였다.

세조는 즉위 후 왕권강화책의 하나로 종전부터 시행하던 의정부 본래의 권한인 서사제(署事制)를 폐지시키고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시행해 의정부의 권한을 축소시켰다. 이러한 세조의 조처에 대해 고대 주나라 제도를 들어 의정부서사제의 부활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456년(세조 2) 사예 ( 司藝 ) 김질(金 銷 )의 고변으로 단종복위운동이 탄로나 국문 ( 鞫問 )을 받게 되었다. 국문을 받으면서도 “ 이미 나에게 반역의 죄명을 씌웠으니 그 죄는 마땅히 주살(誅殺)하면 될 텐데, 다시 무엇을 묻겠단 말이오. ” 라며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국문 과정에서 성삼문 ( 成三問 ) 등이 당한 작형(灼刑 : 불에 달군 쇠로 죄인의 맨살을 지지는 형벌)은 당하지 않았으나, 사육신 등 여러 절신과 함께 거열형 ( 車裂刑 )을 당하였다. 그가 처형되자 선산에 있던 두 아들 호(琥)와 박(珀)도 연좌(連坐)되어 사형을 받았다.

아직 어린 나이인 작은아들 박도 죽음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금부도사에게 어머니와 결별하기를 청해 이를 허락하자 어머니에게 “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아버님이 이미 살해되셨으니 제가 홀로 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시집 갈 누이동생은 비록 천비(賤婢)가 되더라도 어머님은 부인의 의를 지켜 한 남편만을 섬겨야 될 줄로 압니다. ” 고 하직한 뒤 죽음을 받자 세상 사람들은 “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 ” 고 하면서 감탄하였다.

뒤에 남효온 ( 南孝溫 )은 ≪ 추강집 秋江集 ≫ 의 〈 육신전 六臣傳 〉 에서 하위지의 인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 그는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했으며, 말이 적어 하는 말은 버릴 것이 없었다. 그리고 공손하고 예절이 밝아 대궐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비가 와서 길바닥에 비록 물이 고였더라도 그 질펀한 길을 피하기 위해 금지된 길로 다니지 않았다. 또한, 세종이 양성한 인재가 문종 때에 이르러 한창 성했는데, 그 당시의 인물을 논할 때는 그를 높여 우두머리로 삼게 된다. ” 고 평하였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묘는 선산부 서쪽 고방산(古方山)에 있다.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영월의 창절사 (彰節祠), 선산의 월암서원(月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하윤(河潤)

1452(단종 즉위년)∼1500(연산군 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수부(睡夫), 호는 운수당(雲水堂). 아버지는 현령 계문(繼文)이며, 김지경 ( 金之慶 )의 문인이자 사위이다.

1477년(성종 8) 생원·진사의 양시에 합격하고 148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에 보직되었다. 1487년 예문관봉교로서 파출되었던 임사홍 ( 任士洪 )의 서용을 극력 반대하였다.

1489년 예조좌랑으로서 민정을 살피는 임무를 띠고 영안도 ( 永安道 )에 나갔으나 이듬해 모친상으로 사직하였다. 1494년(연산군 즉위년) 호조좌랑, 이듬해 형조좌랑이 되었으나 연산군의 난정(亂政)으로 사퇴, 고향으로 돌아가 행우산(行于山) 기슭에서 은거하였다.

1498년 지평으로 폐비윤씨(廢妃尹氏)의 입묘추숭(立廟追崇)의 그릇됨을 극간, 곧 순천군수로 나가 무오사화의 화를 면하였으나 임지에서 죽었다. 정광필 ( 鄭光弼 )과 친교가 있었으며, 진주 정강서원(鼎岡書院)에 제향되었다.

 

하응림(河應臨)

1536(중종 31)∼1567(명종 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대이(大而), 호는 청천(菁川). 맹윤(孟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계선(繼先)이고, 아버지는 참봉 영수(永水)이며, 어머니는 방응청(房應淸)의 딸이다. 뒤에 작은아버지 목사 억수(億水)에게 입양되었다.

1555년(명종 10)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59년에 정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그 뒤 봉교를 지내고, 1563년 부수찬이 되었다. 1566년 정언을 거쳐 공조정랑이 되고, 이어 예조정랑이 되었다.

문장이 뛰어나서 조선 중기의 학자들 중에 선망의 대상이 되었으며, 송익필 ( 宋翼弼 ) 등과 함께 8문장으로 일컬어졌다. 그는 항상 면학에 힘쓰는 한편 송나라 소식(蘇軾)의 문장을 사숙하였으며, 시(詩)와 서(書)는 물론 그림솜씨도 뛰어났다.

 

하만리(河萬里)

시인(詩人) 만리(萬里)는 극윤(克潤)의 아들로 일찍이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심하였으며, 부모의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받아 대접한 효자로 이름을 날렸다.

 

河崙(하륜)  선생님의 일화

 

태조의 위기를 구한 기지

함흥으로 갔다가 무학대사의 회유로 겨우 노여움을 푼 이성계가 서울로 환도 하게 되었다.
태종이 교외에 까지 나아가 태조를 맞이하려는데 河崙(하륜)이 태종에게 『태상왕의 노여움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을 것이오니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차일과 장막을 받치는 기둥을 굵게 세우도록 하소서』 라고 조언했다.
태종은 그렇게 하라 일렀다.

河崙(하륜)은 열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를 베어다가 기둥으로 삼았다. 아니나 다를까 곤룡포를 입고 기다리는 아들 태종의 모습을 본 태조는 갑자기 분노가 터져 나와 활(동궁)을 힘껏 당겨 화살(백우 전)을 쏘았다.
태종은 급히 기둥 뒤로 숨었는데 화살은 탁 소리를 내며 기둥에 꽂혔다. 간발의 차이였다.

그러나 이것을 본 태조는 껄껄 웃으면서
『이는 하늘의 뜻이로다. 네가 바라던 것이 이거지』 하면서 옥새를 내놓았다. 태종은 눈물을 흘리면서 세 번 사양하는 척 하다가 옥새를 물려받았다고 한다. 이어 성대한 축하연회가 베풀어졌는데 태종이 아버지 태조에게 헌수(獻壽)하게 되었다.

그때 하륜이 다시 태종에게 아뢰기를
『술통 있는 곳에 가서 잔을 잡고 술을 부으시고 아버님에게 잔을 올리실 때 전하께서 친히 올리지 마시고 내시를 시켜 잔을 드리게 하소서』 했다. 태종은 하륜의 말대로 내시를 시켜 술잔을 올렸다. 태조가 술잔을 받아 마시 고 나서는 웃으면서 옷소매에 감추어 두었던 쇠방망이를 내어 놓으면서
『모두가 하늘이 시킨 것이다』 하였다는 것이다. 태조는 쇠방망이로 아들을 치려했던 것이다.

 

河緯地(하위지) 선생의 일화.

하위지 공은 사람됨이 침정 과묵하고 공손하며 예의가 있어 대궐 앞을 지날 때면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비록 비가 와서 땅이 질더라고 길을 피하지 않았다.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 영의정이 되자 공은 벼슬을 버리고 선산(善山)에 물러가 있었는데 수양대군이 단종에 청하여 좌사간으로 불렀으나 사퇴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455년(단종 3, 세조 1) 세조가 왕위를 빼앗아 즉위하고 공을 예조 참판으로 부르니 마지못해 취임은 하였으나 치욕스러운 임금의 녹을 먹는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나라에서 받은 녹은 하나도 먹지 아니하고 모두 별실에 쌓아 두었다고 한다.

 

 

 

河崙(하륜) 대감의 일화

 

태종의 심복이었던 河崙(하륜)觀相(관상)風水(풍수)의 대가였다.

일찍이 하륜은 太宗(태종)의 관상을 보고 그를 섬기기로 결심했다. 태종의 관상 이 영특힌 기상이 하늘을 덮을 했던 것이다.

 

河崙(하륜)은 태종의 관상을 여러 사림들에게 알려 太宗(태종)에게 사람이 모여들도록 했다.

 

 

 

河緯地(하위지) 선생의 일화.

 

수양이 김종서를 죽이고 영의정이 되자 하위지는 조복을 없애 버리고 경상도 선산으로 은거해 버렸다.

수양이 그를 좌사간으로 불렀으나 그는 사양하고 출사하지 않았다.

세조가 예조참판을 제수하자 잠시 벼슬길에 올랐으나, 니라의 녹 먹기를 부끄러워 하여 녹을 곳간에 따로 쌓아 두고 먹지 않았다.

세조가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겨 옥에 사람을 보내어 회유했다.

네가 음모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발뺌하면 살 수 있다.”

이때 하위지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의 기족은 일선에 있었다. 금부도사가 그의 두 아들 호와 박을 집으러 일선으로 갔다. 이때 박의 나이는 20여세 쯤 되었다. 금부 도시를 보고도 조금도 두려운 기색 없이 양해를 구했다.

조금만 기다리시오. 어머님께 고할 말이 있소이다금부도사가 허락했다. 박이 어머니 앞에 꿇어앉았다.

어머님 아버님께서 이미 돌아가시어 소자가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자식이 어찌 홀로 살겠습니까? 비록 조정의 법령이 없더라도 자결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누이동생이 출가할 나이가 되었으니 비록 천한종이 되더라도 부인의 도리로 마땅히 한 남자를 따라야 것입니다. 부디 개나 돼지 같은 행실은 하지 말라고 이르십시오.”

 

어머니에게 절하고 나와 박은 끌려가 조용히 죽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河演(하여)과 홰나무 [시흥시]

- 홰나무를 벤다고 하연의 혼이 노해 -

 

 

하연(河演, 1376-1453)은 조선 전기의 상신으로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 신희옹( 新稀翁),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올랐고 문장이 전아(典雅)하며 고 학(古學)을 좋아한 분이다. 또한 인물이 누구보다도 출중하였으며, 나이 들어 늙어지니 벼슬을 내놓고 낙향을 하여 시흥시 신천동 계란마을에서 여생을 안락하게 보냈다.

 

그러다가 그는 천수를 다하고 별세하였는데, 일찍이 그는 자기의 묏자리를 미리 잡아 놓은 곳에 쓰게 했으며, 또한 그 주위에는 홰나무를 많이 심어 놓았었다.

 

그 후 하연이 돌아간 지 수백 년이 흘렀으며, 하연의 산소 주변에는 그가 심은 홰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큰 숲을 이루었고, 이 숲은 보는 사람마다 탐을 내게 되었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그 후손들은 홰나무를 팔아 없애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무렵 인천관아에서는 이상한 일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었는데, 부사(府使)로 내려오는 사람은 도임(到任)하는 그날로 원인도 모르게 횡사(橫死)하는 것이었다.

 

벌써 여러 번 이나 같은 일이 되풀이되자 조정에서는 괴이하게 여겨 힘세고 담력이 있는 사람을 가려서 부사로 내려보내게 되었다. 새로 부임한 부사는 임지에 도착하자마자 곧 육방관속(六房官屬) 을 모두 불러서 명령하기를, ‘내가 밤을 새워 볼 터이니, 동헌(東軒)곳곳에 불을 훤하게 밝혀 놓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런 뒤에 한밤중이 되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높은 사람이 행차 할 때 부르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는 듯하더니, 재상(宰相)의 조복(朝服)을 입은 사람이 부사 앞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부사는 뜻하지 않은 일에 순간 놀랐으나,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뜰로 내려가서 그 재상을 맞으면서 동헌 위로 오르도록 안내한 다음 허리를 굽혔다.

신임 부사 문안드리옵니다.’‘고맙소. 나는 아무 때의 재상, 하연이오, 내게 한 가지 소원이 있어서 부사에게 이렇게 오면 모두가 놀라서 죽고 말았는데, 이제 그대에게 내원을 말할 수 있게 되어 참으로 기쁜 일 이오.’

어서 말씀해 보십시오. 제가 힘자라는 데까지 거행하겠사옵니다.’‘소래산에 있는 내 무덤 주위에는 내가 살았을 때 심어 놓은 홰나무가 많이 있어서 나는 가끔 밤에 그곳에서 놀았는데, 못난 자손들이 그 홰나무를 팔아버려서 거의 다 베어지게 되었소. 그러니 부사는 그 나무들을 베지 못하도록 하여 주오.’

명심해서 이르겠습니다.’

 

부사는 옛날의 재상이었던 하연이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그 이튿날 손수 자손을 찾아가서 홰나무를 베지 말도록 하고, 벤 자리에도 더 심도록 단단히 일렀는데, 그런 일이 있는 후부터는 하연의 혼이 때때로 나타나 그 부사와 놀다가 가곤 하는 것이었다.

 

이런 일이 자주 있게 되니 부사도 점차 귀찮아졌고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부사가 생각하기를 하연은 재상이었기 때문에 상대하기도 거북할 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의 귀신과 자주 접촉을 한다는 것은 언젠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래서 어느 날 하연이 찾아왔을 때 부사는 물었다. ‘이 세상에서 죽은 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물건이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귀신이나 영혼은 복숭아를 싫어해서 복숭아나무 근처에는 가지를 않는다.’고 했다(귀신을 찾아내는 목살경을 읽을 때는 복숭아 나뭇가지로 도토마리를 치면서 읽음).

 

이 말을 들은 부사는 어느 날 하연이 찾아왔을 때 복숭아를 깎아서 내놓았다. 그러자 묵묵히 앉아 있던 하연이 부사에게 말하기를, ‘내가 온 것을 싫어하는 모양이로군. 나는 그대가 사람이 큰 줄 알고 정이 들어 자주 와서 세상 경륜을 함께 나누었는데, 오는 것을 싫어하니 다시는 안 오겠다.’고 하더니, 그 후 부터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본시 하연에게는 생전에 아들이 셋 있었는데, 가운데 아들의 그림솜씨가 좋아 아버지의 영정을 석 장 그려서 한 사람씩 나누어 가졌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였다. 막내아들의 후손이 영정을 산소 앞에 있는 사당에 놓고 피난을 가게 되었다. 얼마 후에 왜군이 그곳으로 쳐들어와서 하연의 사당에 모시어 있는 영정을 보고는 탐이 나서 그것을 가져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가져가려고 막상 그 영정을 드니, 한갓 종이에 불과한 그 족자가 무거워서 가져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저히 가져갈 수가 없으니까, 분통이 난 일본군사들은 그 영정을 바위틈에다 쑤셔 놓고 가버리고 말았다.

 

난리가 끝난 후 자손들이 돌아와서 사당에 모셨던 영정이 없어진 것을 알고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꿈에 하연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왜놈들이 내 영정을 가져가려고 해서 못 가져가게 하려고 무겁게 했더니 바위틈에다 쑤셔 놓고 갔다.’ 하므로 그 자손들은 바위 틈에서 영정을 다시 찾아서 모셨다는 것이다.

 

 

 

河緯地(하위지) 선생의 일화.

 

하위지가 세조 앞에 큰 칼을 쓰고 앉았다.

네죄를 알렷다!”

죄는 무슨 죄? 나리가 반역죄로 몰았으면 마땅히 목을 것이거늘, 무엇을 묻겠다는 게요!”

세조는 말을 잃고 말았다. 어서 빨리 죽이라는 데야 무슨 말이 있겠는가?

 

河緯地(하위지)의 자는 중장 · 천장이며 호는 단계이다. 성격이 매우 침착하고 조용하며 말이 적었다. 말을 하변 한마디도 버릴 것이 없었고, 공손하며 예의에 매우 발랐다. 대궐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비가 와서 땅 질퍽거리더라도 결코 통행이 금지된 로는가지않았다.

 

그는 문종이 승하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갔다.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조정의 안팎을 매우 위태롭게 여기고 시국을 의심했다. 朴彭年(박팽년)이 일찍이 河緯地(하위지)에게 도롱이를 일이 있었다.

하위지는 시로 답했다.

 

남아의 득실이 예나 지금이나 같도다.

머리 위에는 분명 백일이 임하였네

오호에 안개 끼고. 내리면 좋게 서셔로 찾으리.

 

이 시는 시대를 매우 슬퍼하는 내용이었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河相天(하상천)의 효행.

 

저승 사자와 까마귀

 

조선조 현종 혜의 일이다. 경상도 땅 영일군 동해안의 작은 어촌인 보천 이라는 마을에 진양 하씨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1838년 무술년에 진양 하씨의 29매 손으로 하 상천이라는 사람이 태어났는데, 가청 형편이 그렇게 넉넉한 편은 아니었으나 부부가 서로아껴주고, 형제간에 우애가 두터운 단란한 가정이었다.

 

상천은 어렬 해부터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였고 아버지를 도와 여러 가지 집안일을 거들면서 동생을 끔찍이 아껴주었다.

 

그런데, 상천이 13 세 되던 헤인 1851년에 그의 부친인 하채용 씨가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지리에 눕게 되었다. 건넛마을에 있는 의원을 찾아가 좋다는 약을 지어 드렀으나 별 차도가 없었다.

 

아버지가 병으로 인하여 자리에 눔게 되자 생활이 몹시 어렵게 되어, 상천의 어머니는 멀리 다른 동네 까지 행상을 하여 생계를 꾸려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린 상천도 뒷산에 가서 나무를 해 오고 아랫마을에 품일도 해 주어 생활에 큰 몫을 하였고 아버지의 병구완도 도맡아 하게 되었다.

 

그르나, 아버지의 병은 나날이 심해 저셔 이제는 사람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상천의 안타까운 마음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밥을 먹어도 마치 돌을 씹는 듯 했고, 잠을 자면서도 아버지 걱정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상천이 나무를 하려 가기 위해 막 집을 나서다가 시주 나 온 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비록 가세는 기울이서 살림이 넉넉하지는 않으나 평소에 불심이 깊었던 상천은 즉시 부엌으로 가서 보리쌀 한 됫박을 펴내어 스님께 시주를 하였다.

 

고맙게 시주를 받은 스님은 상천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더니,

 

얘야, 너의 얼굴에 근성이 가득하니 집안에 무슨 일이 있느냐?”

하고 물었다. 상천은 눈물을 글썽이며 아버지의 병환에 대해서 자세허 이야기 했다. 스님은 무언가를 한참 생각하는 듯하더니,

 

아주 어려운 방법이 있기는 한데, 어린 네가 과연 해 낼 수 있을지.......”

하였다.

 

상천은 뜻밖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스님께 매달리다시피 간곡 하게 물었다.

 

스님 ! 그 방법을 제게 가르쳐 주십시오. 아버님의 병만 나 살 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스님은 빙그레1 웃으며,

 

네 효심이 지극하구냐. 이 마을 뒷산 다섯 번째의 고개 위에 용머리 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밑에 피어 있는 약초를 구해 드리면 효험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일려 주고는 스님은 그대로 가 버렸다. 어린 상천은 휠 듯이 기뻐 했다.

아버지의 병은 이제 다 고친 거나 다름없다고 믿었다.

 

, 이제 아버지가 얼어나실 수 있게 되었구나. 얼른 가서 약초를 구해 와야지.’

 

상천은 급히 방으로 들어가서 동생에게 말했다.

 

아우야, 방금 시주 오신 스님의 말이 아버지의 병을 고칠 약초가 있다는 구나. 내가 약초를 구해 올 동안 아버지 곁을 떠나지 말고 보살펴 드려라·”

형아, 그러면 나도 함께 갈 테야.”

 

안 돼, 네가 따라 나서면 병든 아버지께서 흔자 남으시게 되지 않느냐?” 함께 짜라 나서려는 동생을 억지로 아버지 곁에 남겨 두고 상천은 스님이 일려 주신 대로 부지런히 달려갔다.

 

떼는 이미 점심때가 갈까왔으나, 상천은 배가 고픈 줄도 몰랐다. 마을 뒷산을 지나 첫 번째 고개를 넘었다. 다리가 아팠으나 병든 아버지를 생각하며 쉬지 않고 걸었다.

 

그런데, 두번째 고개를 넘을 때였다. 갑자기 날씨가 흐려지고 하늘이 어두워 오는데 주위가 소란해졌다.

 

아니, 이게 웬일일까?”

 

상천이 놀라서 머리를 들고 보니 난데없이 수많은 까마귀 떼들이 날아와서 오솔길이며 나무 위를 가득 메워 버렸다. 완전히 상찬이 가려는 길을 막아 버린 것이었다.

 

, 이 일을 어쩌나, 어떻게 하든 이 길을 지나가야 약초를 구할 수 있을텐데.....·.’

 

상천은 돌을 주워 까마귀 떼를 향해 던져 보기도 하고, 나무 막대기를 꺾어서 휘저어 쫓아 보기도 하였으나 까마귀 때들은 꿈적도 하지 않고 더욱 많

이 모여 들었다.

 

, 오늘은 안 되겠구나. 저렇게 까마귀들이 나의 갈길을 방해하고 있으니........네일 다사 와야겠다.’

 

장천은 하는 수 없이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상천이 집에 도착 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바지막 숨을 깊이 쉬고 있었다.

놀란 상천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해서라도 아머지의 목숨을 구해야 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망설이지 않고 그의 임지 손가락을 깨물어 그 피를 죽어가는 아버니의 입에 흘려 넣었다. 그랬더니 한참 후에 아버지의 얼굴에 붉그레 다시 핏기가 돌 고, 고른 숨을 쉬는 것이 아가!

 

아버지는 죽음에서 다시 소생하시게 된 것이다.

 

사람들의 말로는, 상천을 까마귀골로 끌어낸 것은 상천 아버지의 목숨을 뺏기 위해서 온 저승 사자였고, 까마귀들은 그의 졸개였다는 것이다. 결국 상천의 효심은 저승사자까지도 물러선 것이다.

 

아버지는 그 후 3년을 더 사시다 돌아가시니, 상천은 목에서 피가 나도록 울며 3 년을 한결 같이 시묘살이를 했다.

 

이러한 상천의 지극한 효행과 효심은 그의 후손들과 이 고장 사람들에게 훌흉륭한 본보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 사실이 조정이 까지 알려져 마침네 1881년에 하상천의 효행을 기리는 정효문이 보천마을에 세워졌고 지금도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옷깃을 여메게 한다. 참으로 효는 인간의 모든 행실의 으뜸이라 할 수 있다.

 

출전효행열지>

 

 

 

丹溪(단계) 河緯地(하위지) 선생의 죽음.

 

1456(세조 1) 여름, 잔뜩 찌푸리고 무더운 어느 날, 비봉산이 바라보이는 선산부 이문동 연봉리에 있는 한문 서당에서 흘러나오는 글 읽는 소리가 갑지기 뚝 끊기었다.

 

바람을 다고 한양에서 붙어온 소식들이 맞았구나. ' 하는 생각이 이웃 사람들에게도 느껴졌다. 포졸들이 서당을 둘러쌌던 것이다.

 

역적의 자식은 나오라.”

 

오뉴월인데도 동지섣달 서릿발 같은 금부도사의 외침이었다.

 

丹溪(단계) 河緯地(하위지)는 일찍이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집현전에서 세종 임금을 도와 많은 공적을 남기고, 그 뒤 병으로 고향인 선산에 돌아가 학문에 열중하였다.

 

수양 대군이 어린 단종을 내쫓고 왕이 되어 단계를 예조 참판으로 대우하려고 불렀으나, 세조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역적으로 몰려 지독한 처형을 당하여 한양에서 죽으니 역사는 그를 사육신의 한 분으로 받들고 있다.

 

그 때는 역적으로 몰리면 삼족자기, 외가, 처가을 멸망시키는 때이라 단계의 형과 동생도 죽음을 당하고 아들인 호와 박도 죽음을 당하게 되었으니 글을 읽던 서당으로 가, 그들을 잡으려고 금부도사가 나졸들을 거느라고 서당을 둘러쌌던 것이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소원이 있소이다.”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던지 15 살밖에 되지 아니한 형인 호의 늠름한 답이었고 아우인 박은 형의 눈만 쳐다보고 있었다.

 

서당에서 잡혀 가서 죽게 펴면 어머니에게 불효가 되고 조장에게 죄가 되니 하직 인사나 드리게 해 주시오.”

 

여남은 샅밖에 되어 보이지 않은 아이의 말로 봐서 너무 대견스럽고 당연 한 일이라 생각한 금부도사는 어린 호의 효성에 눈물을 머금고

 

꼭 그래야 할까?”

, 마지막 소원입니다.”

조금의 거짓도 없겠지 ?”

. ”

 

옆에서 듣고 있던 사람들도 호의 어머니에 대한 효성에 감탄과 슬픔의 눈물을 아니 흘릴 수 없었다.

 

훈장과 다른 학동들의 이마에서는 땀이 버오 듯 흘렀건만 호와 박의 눈에서는 불덩이가 되었을 뿐 땀도 눈물도 흐르지 않고,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었다.

 

호와 박 두 형제는 포숭줄로 묶인 채 어머니가 계시는 집으로 향하였다. 어머니와 누이동생도 집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머리를 감아 빗고 사당에 엎드려 있었다.

 

어머니 ! ”

다 알고 있다. 네 아버지의 뜻이다.”

어버나 ! ”

선비의 아들, 충신의 아들로 부끄럽지 않아야 하느니라.”

, 어머니 ! ”

 

금부도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어머니와 호와 박과 누이동생은 사당에서 절을 두 번 하고 물러났다.

 

어머니 ! 죽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이미 가셨으니 자식이 어찌 살겠습니까. 어머니가 고생하실 일이 걱정 이옵고 누이동생이 장차 출가 할 몸으로 역적척의 여식이 되어 남의 종으로 갈 것을 생각하니 원통하기 한이 없습니다. 비록 천한 종이 되더라도 여자의 도리로 마땅히 한 사람을 따를 것이요, 개와 돼지 같은 행실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호와 박이 어머니의 앞에 엎드려 일어나지 않음을 보는 이들은, 죽음을 앞 둔 마당에서도 어머니의 앞날을 생각하는 효성에 감동되어 눈물을 감추지 못했고, 잔뜩 찌푸린 무더운 날씨는 비 오듯 땀을 흘리게 했다. 사랑 앞 대나무에 앉은 까마귀 몇 마려가 금부도사 일행을 노려보며 까악까악 울고 있었다.

 

효자가 나는 집에 충신이 난다는데, 저 호와 박의 효성은 지극하건만 역적 의 누명을 쓰게 되었으니 충신과 역적도 종이의 앞뒤와 같다고나 할지 모를 일이다.

호와 박은 다시 얼어나서 어머니게 절을 하였다.

눈물이 글썽글썽하던 누이가

 

오라버니 ! ”

하고 울기 시작하자, 지금까지 눈에서 불빛만 튕기고 이를 갈던 두 형제의 눈에서도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금부도사와 그 뒤 에 선 나졸들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어서 돌아 서라 ! ”

 

금부도사의 눈물 섞인 목소리 였다.

 

어머니 ! ”

어머니 ! ”

오라버니 ! ”

너는 이 세상에 남을 수 있는 진양 하씨 단계의 유일한 피다.” |

! 오라버니 !”

잔뜩 찌푸린 날씨에 바람이 일고 뇌성이 나고 번개가 번쩍거리고 콩알 같은 빗방울이 뚜닥 뚜닥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를 따르렷다.”

 

금부도사의 목소리는 떨렸다.

또 까마귀들이 까악까악 요란을 피웠다. 까마귀는 효도를 하는 짐승이라는 데 까마귀들도 호와 박의 효성을 잘 봐 달라는 뜻인가.

어명이 아니 라면 저 애를 못 잡았노라 하며 산으로 피신시킬 수도 있으리라고 금부도사는 부진없는 생각도 해 보았다.

 

나도 자식이 있는데....... 저만한 자식이 있는 데....... 벼슬이 도대체 뭐람.’

 

호와 박이 처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자 까마귀 들이 또 더욱 요란하게 짖어대었다.

 

이 내가 바로 단계가 출생하자 사홀 동안 붉은 물이 흘렸다는 단계천이 외다.”

 

비봉산에 소나기가 많이 왔는지, 금부도사가 돌아가는 걸을 막듯이 단계천 에는 황토물이 꽉차케 흘렸다.

 

호와 박의 유척은 찾아볼 킬이 없고 그의 아버지 단계의 유허비가 지금의 선산 고등학교 옆을 지냐며 흐르는 단계천변에 외로이 서 있으며, 단계의 묘가 선산읍 고방살 뒷산에 있으나 가끔 단계의 곧은 정신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그의 무덤을 찾고 있을 뿐이다.

 

참고 문헌선산의 맥락.

 

 

 

 

 

 

 

 

 

 

출전 <한미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6

賢(현),秀(수)

29

鎭(진),駿(준)

32

根(근)

27

運(운),圖(도)

30

永(영),錫(석)

33

 

28

載(재),致(치)

31

根(근),泰(태)

濟(제)

34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진주 하씨(晋州河氏)는 남한(南韓)에 총 33,233가구, 178,83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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