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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한씨(韓)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韓(청주한씨)

 

본관(本貫): 청주(淸州)

시조(始祖): 한난(韓蘭)

유래(由來):

 

청주 한씨(淸州韓氏)의 시조(始祖)는 한난(韓蘭)인데, 기자(箕子)의 후예로 상당(上黨) 한씨(韓氏)를 습성(襲姓)하였다는 우량(友諒)의 32세손으로 전한다.

 「청주한씨족보(淸州韓氏族譜)」에 의하면 난(蘭)은 서기 928년(태조11)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을 정벌(征伐)할 때 장검(長劍)을 들고 함께 출정하여 삼한(三韓) 통합(統合)에 공(功)을 세워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태위(三重大匡太尉)에 올랐으며, 청주 방정리(淸州方井里)에 세거(世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은 청주(淸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한강(韓康)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초명은 경(璟).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감찰어사가 되었다가 금주수(金州守)가 되었다. 금주는 항상 전부(田賦)가 정액(定額)에 미달하여 수령이 많이 파면되었는데 이곳에 부임하여 둔전 ( 屯田 )을 경영, 곡식 2,000여석을 얻어 이민(吏民)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 공적으로 예부낭중(禮部郎中)에 제수되고 공부시랑 간의대부(工部侍郎諫議大夫)·국자대사성 한림학사(國子大司成翰林學士)를 지냈다. 충렬왕 때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고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옮겼다. 뒤에 찬성사로 치사(致仕)하였다.

충렬왕 때 시무(時務)에 관하여 건의하였는데, 그 내용은 종묘의 향사를 엄격히 할 것, 제사(諸司)의 시물(市物) 억매를 금할 것, 사체를 소중히 다룰 것, 살생을 금할 것, 사냥을 그치고 봉양을 절약하여 기갈을 진휼하게 할 것, ≪법화경≫을 숭상하고 독송할 것 등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한종유(韓宗愈)

1287(충렬왕 13) ∼ 1354(공민왕 3).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사고(師古), 호는 복재(復齋). 한양 출신. 밀직 영(英)의 아들이다. 1304년(충렬왕 30) 과거에 급제해 사한(史翰)에 들어갔고 충숙왕 때 사관수찬(史館修撰)이 되었다.

그 뒤 예문관응교가 되었고, 1320년(충숙왕 7) 정방 ( 政房 )의 전주(銓注 : 인사행정)에 참여하였다. 이 때 심왕 고(瀋王暠)가 왕위를 노려 충숙왕과 대립하자 왕을 위해 노력한 이조년 ( 李兆年 )과 더불어 의논해 간신을 잡아 물리쳐, 심왕에게 왕위를 전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331년(충혜왕 1)에는 밀직제학으로 지공거 ( 知貢擧 )가 되어 진사를 뽑게 되었다. 이 때 최안도 ( 崔安道 )의 아들 경(瓊)이 부정으로 합격하자 간관 허옹 ( 許邕 ), 정언 조렴 ( 趙廉 ) · 정천유 ( 鄭天濡 ) 등이 글을 올려, 시험이 공정하지 못하다며 다시 시험을 치르기를 청하였다.

또한 1339년(충숙왕 복위 8) 조적(曺 使 )의 난 때에는 정승 김륜 ( 金倫 )과 함께 이 난을 처리하는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1342년(충혜왕 복위 3)에는 조적의 난으로 충혜왕이 원나라에 불려갔는데 이 때 시종 충절로 충혜왕을 변호하였다. 그 결과 1등공신으로 책봉되었고, 부모와 아내와 자식에게도 벼슬이 주어졌으며, 전답과 노비도 받게 되었다.

1343년에는 한양군(漢陽君)에 봉해지고 찬성사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왕이 악양 ( 岳陽 )에 행차할 때에 왕에게 충성한 사람은 그와 이조년뿐이었는데, 이조년이 별세하자 원나라에서 원자(元子)를 부탁하고자 그를 불렀다.

1344년에 조칙으로 충목왕을 모시고 귀국해 정사를 보필하게 되어 좌정승에 임명되었다. 충정왕이 왕위에 오른 뒤 권신들이 정치를 멋대로 처리하자 부원군 ( 府院君 )으로 향리에 물러앉아 도읍에 나타나지를 않았다. 1352년(공민왕 1)에는 김승택(金承澤)과 함께 서연 ( 書筵 )에 들어가자 왕이 예우로써 대접하고 재상을 삼고자 했다고 한다.

 

한악(韓渥)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간의대부 ( 諫議大夫 ) 사기(謝奇)의 아들이다. 1310년(충선왕 2) 우대언 ( 右代言 ), 1320년(충숙왕 7) 선부전서(選部典書)를 지내고 이듬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어 왕이 원나라에 갈 때 호종하였다.

당시 고려의 왕위를 노리고 있던 심양왕 고(瀋陽王暠)가 여러가지로 왕을 참소하였는데 뛰어난 지략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함으로써 인정을 받았으며, 이 때의 공으로 1등공신이 되어 선력좌리공신(宣力佐理功臣)의 호를 받고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봉해졌다.

첨의평리(僉議評理)와 찬성사를 거쳐 1330년(충혜왕 즉위년)에 삼사사(三司事), 이듬해 중찬 ( 中贊 )을 역임하고 1340년(충혜왕 복위 1) 우정승에 이르렀다. 한어(漢語)와 몽고어에 능하였으며 성품이 신중하고 기량(器量)이 있었다고 한다. 충혜왕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사숙(思肅)이다

 

한수(韓修)

1333(충숙왕 복위 2) ∼ 1384(우왕 10).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맹운(孟雲), 호는 유항(柳巷). 중찬 ( 中贊 ) 악(渥)의 손자이다. 일찍부터 문재(文才)가 뛰어나 1347년(충목왕 3) 15세의 나이로 과거에 합격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충정왕 때 정방 ( 政房 )의 필도치(必 斤 赤 : 서기 일을 맡은 관원)에 임명되었으며, 왕이 왕위를 내놓고 강화로 쫓겨날 때 시종해 따라갔다. 1353년(공민왕 2) 전의주부(典儀注簿)로 기용되어 다시 필도치가 되었고 이어 전리좌랑 · 성균사예 · 비서소감 · 병부시랑 · 국자감좨주 등을 역임하였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안동으로 피난할 때 호종했으며, 귀경 후 사복시판사를 거쳐 좌대언 ( 左代言 )으로 승진하였다. 1365년 신돈 ( 辛旽 )이 집권하자, 왕에게 신돈이 바른 사람이 아니라며 멀리할 것을 아뢰었다가 예의판서(禮儀判書)로 밀려난 다음 곧 관직에서 물러났다.

1371년 신돈이 주살되자 왕이 다시 불러 이부상서 · 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로 발탁했으며, 곧 승선 ( 承宣 )에 임명됨으로써 전선(銓選 : 인사행정)을 관장하게 되었다. 우왕대에 밀직제학 · 동지밀직 등을 지냈으나 공민왕 시해에 관여한 한안 ( 韓安 )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일시 유배되었으며, 1378년 배소에서 돌아와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지고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이 되었다.

이어 청성군(淸城君)에 개봉(改封)되고 1383년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에 이르렀다. 시서(詩書)에 뛰어나 많은 작품을 남겼다. 초서와 예서에 능해 당대의 명필로 이름이 났으며, 노국대장공주묘비(魯國大長公主墓碑) · 회암사지공대사탑비(檜巖寺指空大師塔碑) 등과 현존하는 여주 신륵사보제선사사리석종비(神勒寺普濟禪師舍利石鐘碑)는 그의 필적이다.

이색 ( 李穡 )과는 일찍부터 교분이 깊었고, 또한 ≪ 유항집 柳巷集 ≫ 이라는 시집을 남겼다고 한다. ≪ 동문선 ≫ 에 〈 영모정행 永慕亭行 〉 등 시 여러 수가 수록되어 있고, 그 밖의 책에서도 그의 시문이 산견된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한상질(韓尙質)

? ∼ 1400(정종 2).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중질(仲質), 호는 죽소(竹所). 할아버지는 호부상서(戶部尙書) 공의(公義)이고, 아버지는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 수(脩)이며, 어머니는 길창군(吉昌君) 권적 ( 權適 )의 딸이다. 조선의 개국공신 상경(尙敬)이 그의 아우이고, 세조 때 공신 명회(明澮)는 그의 손자이다.

1374년(공민왕 23) 대군시학(大君侍學)을 지냈다. 그리고 1380년(우왕 6)에 좌랑으로서 문과에 급제하였다. 공양왕 때는 형조판서를 거쳐, 우부대언 · 우상시(右常侍) · 예문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390년(공양왕 2) 6월 천추사 ( 千秋使 )로서 명나라에 가서 윤이 ( 尹彛 ) · 이초(李初)의 속임을 변명하고 돌아와, 12월에 서북면도관찰출척사 겸 병마도절제사(西北面都觀察黜陟使兼兵馬都節制使)를 지냈다.

1392년 7월 조선왕조가 건국되자 예문관학사로서 주문사 ( 奏聞使 )를 자청해 명나라에 가서 ‘ 조선(朝鮮) ’ 이라는 국호를 승인받아 이듬해 2월에 돌아왔다. ‘ 조선 ’ 이라는 국호는 기로(耆老)와 백관(百官)이 도당 ( 都堂 )에 모여 국호를 의논할 때 거론되었다.

이성계 ( 李成桂 )의 고향인 ‘ 화령 ( 和寧 ) ’ 과, 단군 · 기자 · 위만의 세 조선을 상징하는 ‘ 조선 ’ 으로 압축되었다.

명나라는 기자조선을 의식하고 ‘ 조선 ’ 이라는 칭호를 새 왕조의 국호로 선정했으나, 조선은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문화 전통을 동시에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국호로 추천한 것이었다.

그것은 국호를 제정하기 이전인 1392년(태조 1) 8월에 이미 단군을 동방의 첫 수명군주(受命君主 : 命을 받은 군주)로서 국가에서 평양부로 해금 시제 ( 時祭 )를 지내도록 조처한 사실에서 확인된다.

1393년 9월 양광도관찰출척사(楊廣道觀察黜陟使)가 되고, 1397년 경상도관찰출척사를 거쳐, 그 해 예문춘추관대학사가 되었다. 성품이 총민 ( 聰敏 )하고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치적을 많이 쌓았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한상경(韓尙敬)

1360(공민왕 9) ∼ 1423(세종 5).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숙경(叔敬) · 경중(敬仲), 호는 신재(信齋). 할아버지는 호부상서 공의(公義)이고, 아버지는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 수(脩)이며, 어머니는 길창군(吉昌君) 권적 ( 權適 )의 딸이다.

1382년(우왕 8) 문과에 급제하여, 예의좌랑 · 우정언 · 전리정랑(典理正郎) · 예문응교 · 공부총랑(工部摠郎) · 종부영(宗簿令)을 거쳐, 1392년(공양왕 4) 밀직사우부대언에 승진하였다. 이 해 이성계 ( 李成桂 )를 추대하는 모의에 가담하고, 보새(寶璽)를 받들어 이성계에게 바쳤으며, 그 공으로 개국공신 3등에 추록되었다.

개국 후 중추원도승지가 되고,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 · 도평의사사사에 승진되었으며, 충청도도관찰사가 되어 서원군(西原君)에 봉하여졌다. 다시 경기좌도도관찰사에 보직되었다가 태종 때 참찬의정부사 · 이조판서를 거쳐,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 우의정 · 영의정에 이르렀다. 글씨를 잘 썼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한명회(韓明澮)

1415(태종 15) ∼ 1487(성종 18).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 · 사우당(四友堂).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 수(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문관제학 상질(尙質)이고, 아버지는 감찰 기(起)이며, 어머니는 예문관대제학 이적(李 詞 )의 딸이다. 두 딸은 장순왕후(章順王后 : 成宗妃)와 공혜왕후(恭惠王后 : 成宗妃)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불우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글을 읽어서 성취한 바 있었으나 과거에는 늘 실패하였다. 1452년(문종 2) 문음으로 경덕궁직(景德宮直)이 되었다. 이어 어린 단종이 즉위해 김종서 ( 金宗瑞 ) 등 대신이 집권하자, 친구인 교리 ( 校理 ) 권람 ( 權擥 )의 주선으로 수양대군 ( 首陽大君 )에게 접근하였다.

그리고 무사 홍달손 ( 洪達孫 ) 등 30여 명을 추천해 심복을 삼게 하였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심복 참모로서 대공을 세워 군기녹사(軍器錄事)가 되고, 정난공신 1등에 책봉된 뒤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에 올랐다. 이듬 해 동부승지,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부승지에 승진되었다.

그 해 가을 좌익공신 ( 佐翼功臣 ) 1등에 오르며 우승지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성삼문 ( 成三問 )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을 좌절시키고, 그들의 주살(誅殺)에 적극 협조함으로써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승진하였다.

1457년 이조판서에 올라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으며,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다. 1459년 황해 · 평안 · 함길 · 강원 등 4도의 체찰사 ( 體察使 )를 지내고, 1461년 상당부원군에 진봉되었다. 이듬해 우의정, 1463년 좌의정을 거쳐, 1466년 영의정에 올랐다.

권람 · 신숙주 ( 申叔舟 ) 등과 인척 관계를 맺고 세조 치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1466년 이시애 ( 李施愛 )가 함경도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신숙주와 함께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신문을 당했으나 혐의가 없어 곧 석방되었다.

1468년 세조가 죽자 세조의 유교 ( 遺敎 )에 따라 원상(院相 : 어린 왕을 보필하는 재상급의 대신)으로서 서정(庶政)을 결재하였다. 같은 해 남이 ( 南怡 )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 ( 翊戴功臣 ) 1등에 책록되고, 1469년(예종 1) 다시 영의정에 복직되었다.

예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하자 병조판서를 겸임하였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 ( 佐理功臣 ) 1등에 책록되고, 영춘추관사로서 최항 ( 崔恒 ) · 신숙주 등과 함께 ≪ 세조실록 ≫ 을 완성하였다.

또한 성종에게 학문을 진흥시킬 방안을 제시했고, 서적이 부족한 성균관의 장서 확충을 위해 경사(經史) 관계의 서적을 많이 인출해 비치하게 하였다. 1484년 70세로 궤장( 廓 杖)이 하사되었다.

세조 즉위 이래 성종조까지 고관 요직을 두루 역임, 군국 대사에 참여하였다. 특히, 세조는 그를 총애해 “ 나의 장량(張良) ” 이라고까지 하였다. 4차례에 걸쳐 1등공신으로 책봉되면서 많은 토지와 노비를 상으로 받아 권세와 부를 누렸다.

한강 남쪽에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 압구(狎鷗) ’ 라 하였다. 명나라 사신이 와서 구경하려 하자 궁중에서만 쓰는 용봉차일(龍鳳遮日)을 쳐서 화려하게 꾸미려 하였다.

그러나 성종이 허락하지 않자 이에 좋지 않은 기색을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무례함이 대간들의 탄핵 대상이 되어 외지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의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생모 윤비(尹妃) 폐사(廢死)에 관련하였다 해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가 뒤에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었다. 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한계희(韓繼禧)

1423(세종 5)∼1482(성종 1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순(子順). 수(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개국공신 상경(尙敬)이고, 아버지는 함길도관찰출척사 혜(惠)이며, 어머니는 성달생 ( 成達生 )의 딸이다.

1441년(세종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1447년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보임되었다가 곧 집현전정자로 뽑혔다. 이어 부수찬·지제교로서 경연관 ( 經筵官 )을 겸하고 부교리에 이르렀다. 세조가 즉위한 뒤로 신임을 두터이 받아서 1455년(세조 1) 우문학으로 세자에게 경학을 가르쳤다.

이듬해 좌필선·집의, 1457년 예문관직제학·지제교 겸 춘추관기주관으로 문한의 직을 역임한 뒤 세자우보덕(世子右輔德)을 겸하였다. 1458년 좌보덕·병조지사(兵曹知事)·참의, 1460년 우승지, 1461년 좌승지·공조참판·중추원부사, 1462년 이조참판으로서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겸하였다.

이듬해 인순부윤(仁順府尹)을 거쳐 1465년 이조판서, 1467년 중추부사가 되었다. 1468년 세조가 병환이 심할 때 약을 조제하는 임무를 맡았고, 죽기 전날에는 세조의 지시로 대보(大寶 : 임금의 인장)와 곤면(袞冕 : 임금의 정복)을 세자에게 전수하는 일을 주관하였다.

1469년 예종이 즉위하자 남이 ( 南怡 )를 제거한 공으로 추충정난익대공신(推忠定難翼戴功臣) 3등에 책록되고, 서원군(西平君)에 봉해졌다. 이듬 해 성종이 즉위해서는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하고, 1471년(성종 2)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1478년 좌찬성에 이르렀다.

그의 집안은 조선 초기의 명문 거족으로서 벼슬길에 가문의 배경이 큰 힘이 되었다. 하지만, 세종 때 집현전 장서각(藏書閣)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박람강기(博覽强記)로 쌓은 학식이 큰 바탕이 되었다.

학식과 단정한 성품으로 주위로부터 추앙되어 존중히 여김을 받았으며, 특히 서거정 ( 徐居正 )과 교분이 두터웠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한계순(韓繼純)

1431(세종 13)∼1486(성종 1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수옹(粹翁). 수(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개국공신 상경(尙敬)이고, 아버지는 함길도관찰출척사 혜(惠)이며, 어머니는 성달생 ( 成達生 )의 딸이다.

처음에는 문음으로 충의위 ( 忠義衛 )에 속했다가 세자익위사 우세마가 되고, 통례문봉례랑(通禮門奉禮郎)·사헌부감찰·종부시주부를 역임하였다. 1464년(세조 10) 공조정랑으로 승진하고, 다음해 사재감첨정이 되었다.

1467년 통정대부로서 동부승지에 특진되었고, 다음해 예종이 즉위하자 우부승지에 전임되었다. 그 해 남이 ( 南怡 )의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데 공을 세워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輸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 1등에 책록되고, 청평군(淸平君)에 봉해졌다.

1469년(예종 1) 우승지로 전임되고, 1470년(성종 1) 좌승지로 전임되었다. 다음해 자헌대부 ( 資憲大夫 )로서 공조판서에 승진하고, 성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 3등에 책록되고, 오위도총관을 겸하였다.

1472년 청평군으로서 충청도관찰사에 부임하고, 다음 해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전주(銓注)를 공평히 하였다. 1476년 정헌대부 ( 正憲大夫 )에 올랐으며, 1479년 지중추부사로서 다시 도총관을 겸임하였다.

창경궁 ( 昌慶宮 )을 건축할 때 선공제조(繕工提調)가 되어 공사를 관장했으며, 그 공로로 1484년 숭정대부 ( 崇政大夫 )에 올랐다. 사람됨이 온순하고 선량해 남을 해하지 않고 평소 거동이 예의 있고 단정하였다. 또한 일을 신중히 처리하고 사람을 공손하게 대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사신(史臣)은 재능과 학식이 없는데도 계미(繼美)·계희(繼禧) 두 형이 세조의 총애를 입은 것에 힘입어 승지에 발탁되고 높은 벼슬에 올랐다고 평하였다.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한확(韓確)

1403(태종 3) ∼ 1456(세조 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유(子柔), 호는 간이재(簡易齋). 방신(方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寧)이고, 아버지는 지순창군사(知淳昌郡事) 영정(永 數 )이며, 어머니는 김영렬(金英烈)의 딸이다. 덕종의 비(妃) 인수왕후(仁粹王后)의 아버지로, 성종의 외할아버지이다.

1417년(태종 17) 진헌부사(進獻副使)가 되어 노구산(盧龜山) 등과 같이 명나라 성조(成祖)의 후궁으로 선발된 황씨(黃氏)와 누나를 호송하였다. 누나가 여비(麗妃)로 책봉되자 명나라의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에 제수되었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승습사(承襲使)로 명나라에 들어갔고, 1419년(세종 1) 1월 명나라의 책봉사(冊封使)가 되어 부사인 홍로시승(鴻 豈 寺丞) 유천(劉泉)과 함께 귀환하였다. 1420년 1월 광록시소경으로서 예조참판 하연 ( 河演 )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태종 이래 추진했던 금과 은의 공물면제를 허락받고 귀국하였다.

1424년 명나라 성조가 북정(北征) 중 유목천(楡木川)에서 죽자 여비도 자결하였다. 그러자 명나라에서는 또 그의 누이동생을 선종 ( 宣宗 )의 후궁으로 간선하였다. 그래서 1429년 조종생(趙從生)과 함께 진헌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명나라 사신이 입국할 때마다 선위사 ( 宣慰使 )로 파견되어 접대하였다.

1435년 행중추원부사 · 지중추원사 등을 거쳐, 1438년 중추원사, 1439년 판한성부사 · 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440년 병조판서 · 함길도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1443년 동지중추원사로 의금부제조를 겸하였다. 1446년까지 이조판서를 역임하면서 인사에 공정을 기해 자못 명망이 있었다.

1446년 판중추원사가 되고, 이듬해 평안도도관찰사 겸 평양윤으로 파견되고, 1448년에는 병마절도사까지도 겸임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판중추원사를 지내고,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2년(단종 즉위년) 좌찬성이 된 뒤, 1453년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 ( 首陽大君 )을 도와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고, 서성부원군(西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455년(세조 1) 좌의정이 되고, 좌익공신 1등에 올라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다시 봉해졌다. 1456년 사은 겸 주청사로 명나라에 가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양위라고 설득하였다.

귀국 도중 사하포(沙河浦)에서 졸하였다. 누나와 누이동생이 명나라 성조와 선종의 총애를 받음을 계기로 현달했지만, 넓은 도량과 온순하면서도 대범한 성품으로 상하의 신망이 있었다. 또한 명나라 황실과의 유대와 공정하고 결단성 있는 정사로 외교와 내치에 크게 공헌하였다. 1470년(성종 1)에 세조묘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양절(襄節)이다.

 

한효순(韓孝純)

1543(중종 38) ∼ 1621(광해군 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면숙(勉叔), 호는 월탄(月灘).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상경(尙敬)의 후손으로, 사무(士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승원(承元)이고, 아버지는 여필(汝弼)이며, 어머니는 유엄(柳 螟 )의 딸이다.

1568년(선조 1) 생원이 되고, 1576년 식년문과 병과에 급제, 검열 · 수찬을 거쳐 영해부사에 임명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8월 영해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경상좌도관찰사에 승진, 순찰사를 겸임해 동해안 지역을 방비하며 군량조달에 공을 세웠다.

1594년 병조참판, 1596년 경상도 · 전라도 · 충청도의 체찰부사(體察副使)가 되었다. 그 해 한산도무과(閑山島武科)에 시관 ( 試官 )으로서 통제사 이순신 ( 李舜臣 )과 함께 수군강화에 힘썼다. 그 뒤 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남해 지역의 순찰사로 해상군비강화에 계속 노력하였다.

일찍이 1599년 전라좌수사 이순신 막하의 전선감조군관(戰船監造軍官)으로 있으면서 거북선 건조에 공이 많았던 나대용 ( 羅大用 )의 건의를 받아들여 거북선 모양의 소형 무장선인 창선( 柶 船) 25척을 건조하도록 하였다. 1604년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다음해 평안도관찰사 · 판중추부사 등을 거쳐, 1606년 우찬성 ·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610년(광해군 2) 다시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권신 이이첨 ( 李爾瞻 )과 부화뇌동해 광해군 난정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1616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폐모론을 주장해 이에 반대하는 이항복 ( 李恒福 ) · 기자헌 ( 奇自獻 ) 등을 탄핵, 유배시켰으며, 결국은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 유폐(幽閉)하였다. 판중추부사로 졸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관직이 추탈되었다.

 

한여해(韓如海)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한여해1633(인조 1) 27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생원과 24인 중 2등으로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했다. 1637년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적인 강화를 분통해 하며 벼슬에 나가지 않고 호산(湖山)에 은거했다. 1659(효종 10)에 참봉에 보하고 학행(學行)과 재국(才局)으로 추천하여 위졸(衛卒현감·좌랑 등에 임명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늙어서 우로(優老)의 은전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으며 87세로 경기도 여주 집에서 죽었다.

출전(디지털 충주문화대전)

 

한응인(韓應寅)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고 우의정(右議政)을 지낸 응인(應寅) 등은 가문을 한층 더 중흥시킨 인물들이다.

[1554~1614]1576(선조 9) 생원·진사 시험에 모두 급제하고 이듬해 알성시 병과에 8등으로 급제하여 예문관에 들어갔다. 승정원주서로 일하면서 기사(記事)하는 데 밝고 민첩하였다. 이어 예조좌랑·병조좌랑·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을 역임하였고, 1584(선조 17)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아버지의 상기(喪期)를 마친 뒤 성균관직장을 지냈다. 1588년 선천군수로 임명되어 이듬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을 적발한 공으로 호조참의를 거쳐 승정원도승지가 되었다.이듬해 예조판서에 올라 진주사(陳奏使)로 다시 명나라에 가서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하여 조선에 길을 빌려 달라는 사실을 고하여 명나라의 조선에 대한 의심을 풀게 했다. 1592(선조 25) 귀국하는 길에 의주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개성에 이르자 피난길에 오른 왕을 따라 평양으로 갔다가 제도도순찰사에 임명되어 임진강 방어에 임하였다.그러나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유인 작전에 속아 전군이 붕괴하자, 왕을 뒤따라 의주의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 공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전세가 불리하자 요동으로 건너가 원병(援兵)을 청하여 순안사(巡安使) 낙상지(駱尙志)가 군병을 이끌고 와 의주를 함께 지키다가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여송(李如松)이 원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자 중국어에 능해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이여송의 막부(幕府)에서 평양성 탈환에 공을 세웠다.적이 물러가고 서울이 수복되자 능묘를 보살피고 도처에 뒹구는 시체를 묻어 주었으며, 호적과 지도를 정리하는 등 사회 질서 회복에 힘을 쏟았다. 또 호조판서가 되어 군량미 보급에 힘썼는데, 10만 명의 군사들에게 차질 없이 군수 물자를 제공함으로써 칭송을 받았다. 1595(선조 28) 세자책봉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평안감사로 있으면서 당시 관내에 있던 많은 명나라 장병과 화합을 도모하는 데 힘썼고, 1599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로 가서 정유재란의 원군에 대하여 사례하고 귀국한 뒤 의정부우찬성이 되었다.1600(선조 33) 이조판서, 1601년 병조판서, 1607년 우의정에 이르렀다. 1608선조가 자신의 병환이 위중해지자 한응인을 비롯하여 한준겸(韓浚謙) 7인을 불러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한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었으나, 1613(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삭탈관직이 된 뒤 사사리[안산시 상록구 사사동] 선영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이듬해 향년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623년 인조반정 후 관작이 다시 복구되고 왕은 예관을 파견하여 치제하며 특명으로 부조지전(不祧之典)을 명했다. 한응인은 풍채가 풍만 준수하였고, 기국과 식견이 응중(凝重) 원대하였으며, 남을 접대할 때는 언제나 화기애애하였고,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 및 일가친척 간에 우애가 남달랐다. 특히 아버지와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3년간 여막에 있는 동안 여러 차례 소명(召命)했으나 사양하는 상소를 올려 여막에서 상기를 지냈다.

출전(디지털 충주문화대전)

 

 

한호(韓濩)

1543(중종 38) ∼ 1605(선조38). 조선 중기의 서예가. 본관은 삼화 ( 三和 ). 자는 경홍(景洪), 호는 석봉(石峯) · 청사(淸沙). 군수 대기(大基)의 5대 손으로, 정랑 세관(世寬)의 손자이다.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83년(선조 16) 와서 ( 瓦署 ) 별제 ( 別提 )에 제수되었다.

글씨로 출세하여 사자관 ( 寫字官 )으로 국가의 여러 문서와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고, 중국에 사절이 갈 때도 서사관(書寫官)으로 파견되었다. 벼슬은 흡곡 현령( 縕 谷縣令)과 가평 군수(加平郡守)를 지냈다.

그의 묘갈(墓碣:묘비)에 의하면, “ 송도 ( 松都 )에서 났으며, 점(占)보는 사람이 말하기를 ‘ 옥토끼가 동쪽에 났으니 낙양(洛陽)의 종이 값이 높아지리라.

이 아이는 반드시 글씨를 잘 써서 이름이 날 것이다. ’ 라고 하였다. 자라면서 글씨 쓰기에 힘썼고, 꿈에 왕희지(王羲之)에게서 글씨를 받아, 이로부터 마음속으로 자부(自負)하고 법첩(法帖:잘 쓴 글씨로 만든 서첩)을 대할 때마다 신(神)이 돕는 것 같아 마침내 해서(楷書) · 행서(行書) · 초서(草書)에 그 묘(妙)를 다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 고 하였다. 그의 서법(書法)은 조선 초기부터 성행하던 조맹부(趙孟 琅 )의 서체를 따르지 않고 왕희지를 배웠다.

그러나 그가 배운 것은 진위(眞僞)가 문제되는 악의론(樂毅論) · 동방삭찬(東方朔贊) · 황정경(黃庭經) 등의 소해(小楷:작은 본보기)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조법(趙法)보다 뒤떨어져서 진당인(晉唐人)의 높고 굳센 기운(氣韻)이 모자라는 저속한 구렁으로 떨어졌다.

또한, 한미(寒微:생활 수준이 낮고 신분이 변변하지 못함)한 출신으로 오랫동안 사자관(寫字官:문서를 베끼던 일을 맡은 벼슬)으로 있었기 때문에 예술적인 천분(天分:타고난 재질)을 발휘하지 못하고 틀에 맞추려는 노력이 앞섰다.

그러나 워낙 많이 썼으므로 공(工)과 힘(筆力)이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뒤엎는다 하여도 동기창(董其昌)에게 미치지 못하니, 이러한 경지는 알지 못하는 자들과는 더불어 말할 수 없다고 김정희 (金正喜)는 말하였다.

이로부터 국가의 문서를 다루는 사자관의 특유한 서체가 창출될 만큼 그의 영향은 컸으며 또 이로부터 사자관제도가 이루어졌다.

양주에 있는 김광계비(金光啓碑) · 황주서대수비(黃注書大受碑) · 이윤식비(李允湜碑) · 이별제공즙비(李別提公楫碑), 고양에 있는 권도원수대첩비전면(權都元帥大捷碑前面) · 기응세비(奇應世碑), 장단 ( 長湍 ) 윤감정변묘표액(尹監正 豆 墓表額), 과천(果川) 유용비(柳容碑) · 허초당엽묘표음(許草堂曄墓表陰), 포천(抱川) 이판서몽량비(李判書夢亮碑), 남양 ( 南陽 ) 홍영상섬비(洪領相暹碑), 용인 정의흥희린갈(鄭義興姬 紐 碣) · 정대헌유비(鄭大憲裕碑), 개성 서화담경덕비(徐花潭敬德碑), 합천 박사간소갈(朴司諫紹碣), 평양 기자묘비(箕子廟碑) 등을 썼다.

≪ 동국금석평 東國金石評 ≫ 에는 모든 글씨체에 숙달되기는 하였으나 속되다고 평하였다. 그로 부터 비롯되어 사자관체(寫字官體)라는 서체가 형성되었고, 이러한 서체를 중국에서는 간록체(干祿體)라 한다.

 

한교(韓橋)

인조(仁祖) 때의 학자(學者)로 학명(學名)을 날렸다.

 

한흥일(韓興一)

효종(孝宗) 때 우의정(右議政)을 역임하였다.

1. 생몰 1587(선조 20)1651(효종 2) 2. 급제 - 371624(인조 2) 정시(庭試) 병과8(丙科8) 3. 암행어사 연보 - 421629(인조 7) 4도의 암행 어사 중 한사람으로 결과에 대해 아뢰다 4. 관련 기록 인조 020 07/04/11(병신). 4도의 암행 어사를 인견하고 그 결과를 묻다이날 윤대(輪對) 4()의 암행 어사인 여이징(呂爾徵김광현(金光炫한흥일(韓興一심지원(沈之源) 등을 인견하고 상이 이르기를, “그대들이 민간에 출입하였으니, 민간의 병들고 괴로운 사정을 아마도 자세히 들었을 것이다. 지난 시절에 비하여 어떻던가?” 하니, 광현이 아뢰기를, “호서(湖西)는 작년에 흉년이 들어서 기근이 심한데다 서량(西粮오결수포(五結收布조예가 등등 지난 시절에 없었던 역()이 있어서 백성들이 매우 고통스러워하였습니다.” 하였고, 흥일이 아뢰기를, “진휼청에서 모속(募粟)하는 일이 너무나 남잡(濫雜)하였습니다. 신역(身役)이 있거나 면천(免賤허통(許通)이 안 된 자들이 모두 주부(主簿)가 되었는가 하면 입에서 아직 젖냄새가 가시지 않은 애들이 봉사(奉事)가 되어 있고, 풀무장이·땜장이들이 모두 사섬시 주부(司贍寺主簿)가 되어 후일 면역(免役)을 받을 계책들을 세우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을 거행하는 자들이 적격자가 아닌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그렇게 남잡한 것이다.” 하였다. 원전34 323 분류*왕실-국왕(國王).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군사-병참(兵站). *재정-(). *인사-관리(管理) (자료 : 조선왕조실록, 원문번역 민족문화추진회)

 

출전(kocca 문화콘텐즈닷컴)

 

한세량(韓世良)

숙종(肅宗) 때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상오(相五).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중영(重英)이고, 아버지는 서령(署令) 익창(翊昌)이며, 어머니는 홍시립(洪時立)의 딸이다. 1699(숙종 25) 직장(直長)으로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1713년 중국사신이 되돌아갈 때 평양에 머무르면서 대접소홀을 문제삼아 행패를 부리자 중로문안사로 나갔으며, 이듬해 승지가 되었다. 그 뒤 계속하여 왕의 측근에서 승지로 왕을 보필하였다.

1718년 여주목사로 나갔는데, 이때 사헌부로부터 재물을 탐한다는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이듬해 다시 승지가 되어 중앙으로 돌아온 뒤 1721(경종 1) 분병조참의가 되었다.

이 해 노론이 왕세제(王世弟 :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주장하자 소론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 등과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 그는 이 일로 노론의 강력한 반발을 받아 절도에 위리안치하라는 대간들의 탄핵이 있었으나 왕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이 해 공조참의가 된 뒤 함경도관찰사로 나갔다.

 

출전(다움 백과사전)

 

 

한용구(韓用龜)

순조(純祖) 때 영의정(領議政)을 역임하였다.

1772(영조 48) 성균관 재학시 황감제(黃柑製)에서 장원급제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76년 주서가 되고, 이어 예조좌랑을 지냈다. 1779(정조 3) 문신전강(文臣殿講 : 3품 이하의 문신들을 대상으로 어전에서 經書考講하게 한 시험)에서 다시 장원으로 뽑혔다.

그 뒤 응교(應敎대사간을 거쳐 이조참의로 있을 때 올린 소에서 왕을 모독하였다 하여 삭주(朔州)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와 다시 이조참의에 오른 뒤 형조참판·대사헌·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799년 평안도관찰사 재직시 평양에 대화재(大火災)가 발생하여 민가 175호가 불에 탄 사건을 당하였다.

그 해 진하 겸 사은부사(進賀兼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서 예조판서를 거쳐 1805(순조 5) 우의정에 올랐으나 이듬해김달순(金達淳)이 사사될 때에 이에 관련되어, 관직을 사퇴하였다.

다시 관직에 나와 진하사(進賀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1812년 이후 여러 해를 좌의정 겸 세자사부(左議政兼世子師傅)로 있으면서 사직소를 거듭 올렸으나, 국사(國事)가 어렵고 그의 뒤를 이을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끝내 사퇴가 허락되지 않을 만큼 왕으로부터 신임이 두터웠다.

1821년 영의정으로 승진하고 효의왕후(孝懿王后)의 장례를 치른 다음 사퇴하였다. 시호는 익정(翼貞)이다.

출전(다움 백과사전)

 

한계원(韓啓源)

고종(高宗) 때 우의정(右議政)을 역임하였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공우(公佑), 호는 유하(柳下). 증조는 광직(光稙), 할아버지는 치구(致九)이며, 아버지는 진호(鎭㦿)이다. 외할아버지는 정의준(丁義準)이다.

 

1835(헌종 1) 별시문과에 급제, 이듬해 홍문관 관원으로 발탁되었다. 1840년 진위 겸 진향사행(陳慰兼進香使行) 때 서장관(書狀官)으로 완창군 시인(完昌君時仁윤명규(尹命圭)를 수행하였다. 1854(철종 5) 이조참의를 지냈으며, 1858년 순원왕후(純元王后 : 趙大妃)의 인산(因山) 때 배종승지(陪從承旨)로 수행하여 가자되었다.

1861년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이듬해 경상좌도 암행어사 임승준(任承準)이 그가 전에 경주부윤 때 진공재감(進貢裁減)을 임의로 변경해 처분하였다고 서계(書啓)를 올려 죄를 받았다. 1864(고종 1) 성균관대사성, 1865년 공조판서·형조판서·의정부좌참찬, 1866년 예조판서·판의금부사, 1868년 이조판서·공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869년 평안도관찰사로 외직에 있을 때, 재해를 입은 백성의 구휼 문제와 도둑이 성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처방의 장계를 올린 기록이 보인다. 1872년 우의정에 이르렀는데, 1873년 전 동부승지 최익현(崔益鉉)이 소를 올려 대신들이 건백(建白)하지 않는 풍조를 논하고 국사(國事)를 걱정하자, 좌의정 강로(姜㳣)와 소를 올려 죄를 청하였다.

고종이 이미 최익현에게 죄를 주어 귀양보냈으니 스스로를 책망하지 말라고 이해시켰으나, 계속 영의정 홍순목(洪淳穆), 좌의정 강로와 함께 최익현의 상소 내용이 지나치다며 죄를 물을 것을 청하였다. 같은 해 전장령 김영훈(金永薰)이 그가 평안감사 재직시에 부신(符信)을 소홀히 하였다고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김제군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1개월이 채 못 되어 특별히 방면되었으며, 1874년 다시 등용되었다.

1878년 대사헌 이인명(李寅命)에 의해 효휘전(孝徽殿)의 예척일(禮陟日)에 곡()하지 않았다고 탄핵받아 다시 춘천부로 유배되었는데, 이 때 삼사(三司)에서 더 무거운 처벌을 내릴 것을 다섯 번이나 청하였으나 고종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5개월 뒤 왕세자의 병환이 나아진 것을 축하하는 진하사면(陳賀赦免)으로 귀양에서 풀려났다.

사간원에서 그의 방면을 철회할 것을 극구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고, 다음해인 1879년 판부사(判府事)로 등용되었다. 1881년 이재선(李載先)의 역모사건을 사사로움에 치우쳐 제대로 밝히지 않고 성급히 마무리지었다고 다시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역시 왕이 그를 두둔하여 유서(諭書)를 내려 지나치게 인책하지 말도록 하였다. 이로 보아 고종이 상당히 신임하고 아꼈던 것 같다. 1882년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올랐다.

출전(다움 백과사전)

 

한봉수(韓鳳洙)

일명 봉서(鳳瑞봉용(鳳用봉룡(鳳龍). 충청북도 청주 출신. 19078월 의병장 김규환(金奎煥)을 만나 감화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의병에 가담하게 되었다. 청주 세교장(細橋場)에서 기의하여 46개월 동안 331패의 전과를 거둔 유격전의 명수였는데, 17세부터 명포수로 알려질 정도로 총의 명수이기도 하였다.

진천(鎭川) 문배리에서 일본군 헌병 중위 시마자키(島崎善治) 3명을 사살하고 그 무기를 노획한 것을 시초로, 30명 정도의 의병을 이끌고 게릴라전으로 미원(米院진천·괴산·횡성·장호원 등으로 출몰하면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 뒤 상해(上海)로 건너갈 생각으로 서울 선교사 집에 숨어서 기회를 노리다가 남대문역에서 일본경찰에게 붙잡혀 교수형을 받았으나, 일제의 소위 합방대사령(合邦大赦令)’으로 출옥하였다. 3·1운동 때에는 청주에서 시위하여 다시 26월의 옥고를 치렀다. 1963년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출전(다움 백과사전)

 

 

한상렬(韓相烈)

한말(韓末)의 의병장(義兵將)으로 유명하다.

일명 상열(相說). 자는 문극(文極). 강원도 횡성 출신. 동수(東洙)의 아들이다.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한국군대 강제해산으로 국권이 일본에게 침탈되자 그 해 8월에 국권을 회복할 목적으로 동지 200여 명을 규합한 뒤 향리인 횡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홍천·횡성·원주·지평·평창·영월 등지에서 반일투쟁을 전개, 일본군과 무려 500여 차에 걸친 전투를 통해서 많은 일본군을 사살하고 무기·탄약 등을 노획하였다. 천성이 강직하고 불의에 굽힐 줄 모르는 성품을 타고났다. 19084월 초 횡성 주둔 일본수비대가 그의 처자를 납치한 뒤 협박하며 귀순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횡성읍을 습격하여 이들을 대경실색하게 하였다. 일제가 경술국치를 앞두고 의병에 대하여 일대탄압을 가하므로 국내에서의 의병운동 전개가 어려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자, 의병부대를 해산하고 그뒤 1920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대한의용부·대한독립단 등 애국단체의 참모로서 조국광복을 위하여 활동하다가 1926919일 민족진영의 분열을 책동하던 주중청년총연맹(駐中靑年總聯盟)의 공산당원의 흉탄에 51세로 죽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출전(다움 백과사전)

 

한용운(韓龍雲)

「님의 침묵」으로 유명한 만해(萬海) 용운(龍雲)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불교의 대중화와 항일독립사상의 고취에 힘썼고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4세 때 임오군란(1882)이 일어났으며, 6세 때부터 향리 서당에서 10년 동안 한학(漢學)을 익혔다. 14세에 고향에서 성혼의 예식을 올렸다. 189416세 되던 해 동학란(東學亂)과 갑오경장이 일어났다.

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그 자신의 술회대로 넓은 세계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1896년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입산하여 처음에는 절의 일을 거들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출가 직후에는 오세암에 머무르면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선()을 닦았다. 이후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이 깊은 나머지 블라디보스톡 등 시베리아와 만주 등을 여행하였다.

1905년 재입산하여 설악산 백담사(百潭寺)에서 연곡(連谷)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득도(得度)하였다. 불교에 입문한 뒤로는 주로 교학적(敎學的) 관심을 가지고, 대장경을 열람하였으며, 특히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즉 불교의 대중화 작업에 주력하였다. 1910년에는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다.

1914불교대전 佛敎大典과 함께 청나라 승려 내림(來琳)의 증보본에 의거하여 채근담 菜根譚주해본을 저술하였다. 19085월부터 약 6개월간 일본을 방문, 주로 토쿄(東京)와 교토(京都)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물을 익히고, 일본의 풍물을 몸소 체험하였다. 일본 여행 중에 3·1독립운동 때의 동지가 된 최린(崔麟) 등과 교유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국권은 물론, 한국어마저 쓸 수 없는 피압박 민족이 되자, 그는 국치의 슬픔을 안은 채 중국 동북삼성(東北三省)으로 갔다. 이곳에서 만주지방 여러 곳에 있던 우리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면서 그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하였다. 1918년 월간 유심 惟心이라는 불교잡지를 간행하였다.

불교의 홍포와 민족정신의 고취를 목적으로 간행된 이 잡지는 뒷날 그가 관계한 불교잡지와 함께 가장 괄목할 만한 문화사업의 하나이다. 19193·1독립운동 때 백용성(白龍城)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참여하였다. 그는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둘러싸고 최남선(崔南善)과 의견 충돌을 하였다.

내용이 좀더 과감하고 혁신적이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으나, 결국 마지막의 행동강령인 공약 3장만을 삽입시키는 데 그쳤다. 1920년 만세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재판을 받아 3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에도 일본 경찰의 감시 아래에서 강연 등 여러 방법으로 조국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였다. 1925년 오세암에서 선서(禪書) 십현담주해 十玄談註解를 탈고하였다.

1926년 한국 근대시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인정받는 대표적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였다. 이곳에 수록된 88편의 시는 대체로 민족의 독립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사랑의 노래로서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27년 일제에 대항하는 단체였던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는 주도적 소임을 맡았다. 그는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자리를 겸직하였다.

나중에 신간회는 광주학생의거 등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전개, 추진되었다. 1930불교라는 잡지를 인수하여 그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전까지는 권상로(權相老)가 맡아오던 이 잡지를 인수하여 불교를 널리 알리는 데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 특히,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하였으며, 승려의 자질향상·기강확립·생활불교 등을 제창하였다.

193355세 때 부인 유씨(兪氏)와 다시 결합하였다. 1935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흑풍 黑風을 연재하였고, 이듬해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장편 후회 後悔를 연재하였다. 이러한 소설을 쓴 까닭은 원고료로 생활에 보탬을 얻기 위한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도 소설을 통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의도가 더 큰 것으로 이해된다.

1938년 그가 직접 지도해오던 불교계통의 민족투쟁비밀결사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이 일어났고, 많은 후배 동지들이 검거되고 자신도 고초를 겪었다. 이 시기에 조선일보박명 薄命이라는 소설을 연재하였다. 1939년 회갑을 맞으면서 경상남도 사천군다솔사(多率寺)에서 몇몇 동지들과 함께 자축연을 가졌다. 다솔사는 당시 민족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본거지였다.

1944629일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에서 중풍으로 별세하였다. 동지들에 의하여 미아리 사설 화장장에서 다비된 뒤 망우리 공동묘지에 유골이 안치되었다.

친하던 벗으로는 이시영(李始榮김동삼(金東三신채호(申采浩정인보(鄭寅普박광(朴珖홍명희(洪命熹송월면(宋月面최범술(崔凡述) 등이 있었으며, 신채호의 비문은 바로 그가 쓴 것이다. 1962년에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출전(다움 백과사전)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남한(南韓)에 총 142,894가구, 597,59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韓配夏(한배하) 선생의 일화

선정을 베풀었던 동래부사

한배하가 동래부사로 있을 때 가뭄이 들어 절망 상태가 되자 그는 장작더미에 올라가 누워 불을 지르라고 했다.
목민의 장이 무력해 이토록 한발이 심하니 자기가 죽으면 비가 내릴 것이라는 뜻에서였다. 누가 감히 불을 지를 수 있으랴마는 하도 명이 엄한지라 불을 질렀다. 그러나 부사의 몸에 불이 닿으려 할 때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해 가뭄이 해소되었다.

그 뒤 한배하는 재상이 되어 선정했으며, 꿈에 동래에서 지내는 제향에 갔다가 첨저(尖箸)를 실제로 놓고 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1650(효종 1) ∼ 1722(경종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하경(夏卿), 호는 지곡(芝谷). 덕급(德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수원(壽遠)이고, 아버지는 남원부사 성보(聖輔)이며, 어머니는 이준성(李畯成)의 딸이다.

 

韓達洙(한달수) 선생의 일화.

평생 걱정이 없는 사람

어느 고을에 韓達洙(한달수)라 하는 古來(고래)로부터 근심걱정이 하나도 없이 살기로 소문이 난 사람이 있었는데 주변 뭇사람들의 한없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하도 그 소문이 자자하며 마침내 궁궐에 계신 임금님의 귀에까지 들리게 되자 천하의 지배자인 임금자신도 국사 일을 보자면 허구한 날 머리가 아프고 몇날며칠 잠을 설칠 때가 많은데,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이기에 그렇게 살 수 있나 싶어 궁궐로 그 사람을 데려오게 하였다.

인금의 부름을 받은 달수는 임금의 부름이지만 하나도 서두르는 기색이 없이 느긋한 마음으로 터벅터벅 걸어서 닷새 만에 궁궐에 도착하다.
임금님을 만난 자리에서 국왕이
「너는 대체 무슨 조화로 한가지의 걱정도 없이 살 수느냐?」고 물으니, 달수는
「예!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저는 세상만물에 대하여 조그마한 욕심도 없습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으니 자연히 근심걱정이 저에게서 사라졌습니다.」고 짧게 답하는 것이었다.
국왕은
「과연 너다운 훌륭한 답변이로다.」 라하며 칭찬한 뒤
「세상의 이치란 두꺼운 책 속에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고 소박한 민초들 생각에서도 잘 드러나는 것이다.」하시며 달수의 답변에 흡족해 한 국왕은 주과(酒果)를 대접하고 나서 궁궐을 나설 때 보화덩이(금덩어리)를 하사 하였다.

달수는 임금이 주신 보물을 소중히 간직하여 자기가 사는 고을 앞까지 무사히 도착하였는데 마을 앞을 흐르는 강변으로 난 도로를 지나다가 주먹만 한 그 보물보따리를 그만 강 속에 실수로 빠뜨리고 말았다.
평생 걱정이 없다던 「천하의 무사태평」 한달수에게 처음으로 걱정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그 아까운 금덩이를 잃어 상심이 크던 달수는 몸보신을 할 요랑 으로 며칠 후 고을의 닷새장날 잉어를 한 마리 사다가 고아먹기 위해 잉어의 배를 가르니 뭉툭한 것이 나오기에 잘 살펴보니 나흘 전 자기가 잃었던 황금덩이가 잉어 뱃속에 들어 있었다.

그리하여 닷새도 안 되어 걱정거리가 사라져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
걱정이 없는 사람은 다르다니까.」
「원래 걱정이 없는 사람은 하늘이 도와준다니까.」
「걱정을 안 하니끼 복이 따르는 것이여.」 등등 다들 한마디씩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걱정은 많이 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안한다고 해서 없어져버리는 것도 아닌데 다만 정도이 지나친 걱정이나 쓸데없는 걱정은 좋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출전: 광주의 설화>

 

 

韓明澮(한명회) 선생의 일화.

 

韓明澮(한명회)申叔舟(신숙주)連婚(연혼)을 맺어 세력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권람이 샘이 나서 한명회와 혼인을 맺으려고 했다.

한명회는 시 난처했다. 그의 청을 거절할 방법을 찾지 못해 신숙주에게 상의 하자 신숙주가 웃으며 말했다.

쉬운 일인데 그러시오. 우리 세 사람은 전하께 공로가 같소. 한데 이미 나와 사돈하고 또 권람과 혼인 한다면, 임금이 우리 세 사람이 지나치게 가깝다고 의심할게 아니겠소? 이런 말로 설득해보시오.”

, 좋은 생각이오.”

한명회가 권람에게 신숙주에게서 들은 말을 했다.

그러자 권람이 알아듣고 깊이 뉘우쳤다.

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 했소. 역시 지준은 전하의 장자방 이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韓明澮(한명회) 선생의 일화.

 

한명회는 수양을 도와 그를 보위에 앉혔다.

그러는 동안 많은 피를 보았다. 피의 소용돌이의 가운데에는 거의 빠짐없이 한명회가 있었다. 권력을 잡은 한명회는 둘을 예종과 성종의 왕후로 만들어 왕실과 끈끈한 인맥을 다져 놓았다. 그가 세조를 모시고 영화를 누릴 때였다.

어느 신숙주와 더불어 세조를 모시고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한 세조기 신숙주의 팔을 잡고 장난을 쳤다.

경도 나의 팔을 잡아 보라!”

세조가 말하자 신숙주는 술김에 세조의 팔을 덤석잡았다.

아이고 아파, 웬 팔힘이 이리 센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세자(예종)의 얼굴 빛이 순간에 변했다.

세조가 세자에게 일렀다.

 

제자야, 나는 이럴 수 있지만, 너는 불가하느니라세조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흥겹게 놀았다.

그러나 한명회가 보는 눈은 달랐다.

세조가 괘씸하게 여긴다면 신숙주가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술이 취해 실수한 것처럼 보여야했다.

한명회는 집에 돌아와 청지기를 불러 일렀다.

범옹은 아무리 술에 취했더라도 반드시 일어나 불을 켜고 책을 읽느니라. 네가 그를 찾아가서 오늘은 절대로 불을 켜지 말고 그대로 자라고 전하라.”

청지기가 신숙주의 집에 가보니 그는 불을 켜고 책을 읽고 있었다. 청지지가 한명회의 말을 전했다.

신숙주는 서둘러 불을 끄고 자리에 들었다.

한밤중에 세조가 술에서 깨어 눈을 폈다. 내관을 불러 신숙주가 깨어 있는지 보고 오도록 일렀다. 내관이 보고 와서 말 했다.

오늘은 불이 꺼져 있었사옵니다.”

그러면 그렇지. 범옹이 술에 취하지 않고서야 과인의 팔을 그렇게 세게 잡았을 리 없지.”

한명회의 꾀가 아니었다면 신숙주는 곤욕을 치를 뻔했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韓明澮(한명회) 선생의 일화.

 

14525월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한명회는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한명회가 권람을 만나 은밀히 말했다.

어런 임금의 지리를 엿보는 종친이 앞으로 많아질 것일세. 그리고 안평대군이 제일 먼저 왕위를 노릴 게야.”

이 사람아, 농담이라도 그런 말 말게.”

곧 환난이 일어나게 되어 있네, 자네는 아무런 생각이 없는가?’ 권람은 한명회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라고 느낌이 없겠나. 장차 내가 어찌 해야 하나?’

재난을 막으려면 세상을 구제하고 난을 다스릴 임금이 나와야 하네.”

그가 누군가?’

수양대군은 활달하기가 한 고조와 같고, 매우 영특하고 출중한 무예는 당태종 같네. 나는 수양에게 천명이 있음을 아네.”

내가 어찌해야 하나?’

항상 곁에 모시고 있으면서 수양의 마음 하나 돌려놓지 못하나?’

자네를 수양에게 소개하겠네. ”

 

이때 한명회는 아무 말이 없었다.

 

어느 권람이 수양에게 말했다

나리, 지준(한맹회의 지)을 불러 옆에 두시지요.” 무슨 말이오?’

나리에게 반드시 지준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 사람을 어디에 쓰게요?’

지준의 꾀와 수단은 이 세상에서 아무도 띠를 자가 없습니다. 군께오서 절조를 지키려면 모르거니와 정차 나리를 다루려거든 자준이 아니고는 불가할 것이오.”

지준이 그 정도요?’

불러서 써보시옵소서.”

야심을 품은 수양은 곧장 한명회를 불러 옆에 두었다. 그러고는 한명회를 가리켜 자준은 나의 장자방(한 고조들 도운 책사 장량을 일 걸음)이야 히고 매우 좋아했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韓明澮(한명회) 선생의 일화.

 

그는 민대생의 사위가 되었다. 장모가 그를 대놓고 괄시했다.

아이고, 저것도 사람이라고. 먹을 것, 다 먹고 입을 것 다 입네. 아이고 내가 복장 터져‘”

장인 민대생은 한명회의 관상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어 아내를 나무랐다.

부인은 말을 삼가시오. 비록 한 서방이 지금은 병신처럼 지내지만 크게 것이니, 그때 기서 후회하지 밀고 그를 다른 사위와 똑같이 대하시오.”

어느 세월에 현달한다는 말이오. 한 서방은 사람 되기는 이미 글렀어,

허허 닥치시오!”

권람이 그를 수앙대군에게 소개하였는데, 이때 한명회는 마치 고기가 물을 만난 그의 재주를 마음껏 발휘했다. 권람과 한명회의 관계는 관중과 포숙 같았다. 한명회가 권람에게 말했다

문장과 도덕은 내가 그대에게 양보하겠네만, 사업을 경영하는 데는 양보 할 수 없네.”

권람은 그의 말을 알이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韓明澮(한명회) 선생의 일화.

 

그가 영통사에서 글을 읽을 때였다.

얼굴이 괴상하게 생긴 중이 나타나 그에게 말했다.

 

그대의 머리 위에 빛이 있으나 귀한 정조일세. 명넌 안으로 반드시 그대의 뜻얻을 젓일세.”

그의 등과 배에는 검은 사마귀가 있었다. 사람마디 이 일을 매우 괴이하게 여겼다.

그는 개성의 경덕궁의 궁지기였다. 명절 때에 부중에 있는 관원 들이 만월대에서 크게 잔치를 벌였다. 모인 사람들이 술에 취해 의 논했다.

우리들은 모두 한양 친구들 아닌가. 이 고도에 와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으니, 이것도 인연일세. 우리가 계를 만들어 우정을 돈독히 하는 것이 어떻겠나?’

암 좋고말고.”

모두 찬성했다. 이때 한명회기 옆에 있다가 끼어들었다.

나도 한몫 끼워 주시오.”

칠삭둥이가 사람 구실 하겠다네. 그는 자신의 분수를 모르는 자로군

사람림들은 그를 몹시 멸시했다.

 

다음해에 그는 개국공신인 할아버지가 좌명공신에 오르자 계원 들이 몹시 부끄럽게 여겼다. 이런 연유로 세상 사람들은 세력을 업고 남을멸시 하는 사람을 송도계원이라고 말했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韓明澮(한명회) 선생의 일화.

 

韓明澮(한명회)의 자는 자준이며, 그는 한 시대를 풍미한 빼어난 모사꾼이었다.

출생부터 특이했던 그는 수태한지 일곱 만에 세상에 태어났다. 아직 몸이 온전히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가 태어나자 집안 식구들이 꺼려하며 기르지 않으려 하자 유모가 아기를 솜으로 싸서 밀실에 오랜 후에야 몸이 제대로 이뤄지고 자라남에 따라 비 로소 골격이 갖춰졌다

젊은 시절, 그가 어느 날밤 산골짜기를 지나다가 범을 만났다. 범은 눈에 파란 불을 켜고 그를 안내하여 큰길가에 데려다주었다. 한명회가 범에게 말했다.

멀리 와서 그냥 보내 주니 그 후의를 알 수 있겠네.”

범이 이 말을 알이 듣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려 있다가 날이 밝은 무렴에 떠났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韓石峯(한석봉)선생의 일화.

 

한번은 사신을 따라 연경에 간 적이 있었다. 마침 한 재상이 검은 비단으로 가리개를 만들어 서재에 걸어놓고는 천하의 명필을 모아 자기 마음에 들게 글씨를 써주면 후하게 상을 주겠다고 하였다.

韓濩(한호)도 거기에 가 보았더니, 가리개는 현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고 쥐 수염으로 만든 극상품 붓은 금박물이 담겨 있는 유리 주발에 잠겨 있었다. 글씨로 이름난 사람들 수십 명이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데, 이 관경을 본 한호는 글 쓰고 싶은 흥취가 문득 솟아났다.

썩 앞으로 나가 붓을 들어서 금박물 속에 휘젓다가 홀연 붓을 치켜들고 뿌려버리니 온 가리개에 금박물이 튀었다.

 

보는 사람들이 크게 놀랐고 주인 역시 화를 내는데, 한호는 태연히 아무 걱정 말라고 하였다.

다시 붓을 잡고 벌떡 일어나 혼신의 힘을 다해 붓을 휘두르는데, 해서와 초서가 서로 섞여 있었으며 앞서 떨어진 금박 물도 모조리 글자의 점과 획이 되어버려 하나도 빠진 것이 없었다. 그 집을 가득 메운 구경꾼들이 탄성을 지르지 않는 자가 없었고 주인도 크게 기뻐하며 잔치를 베풀어 대접하고 후하게 상금을 주니 그 이름이 천하를 울렸다.

                                                         (청구야담에서 인용.)

 

韓百謙(한백겸) 선생의 일화

 

상암동은 실학의 선구자인 韓百謙(한백겸)1608년 이후부터 자리를 잡고 살았던 곳이다. 원래 상암동은 수상리(水上里)와 휴암동(休岩洞)에서 비롯되었으며 수상리는 수이촌(水伊村)이 변한 것이라 하는데, 한백겸은 물이촌구암기(勿移村久菴記)에서 물위치(수이촌)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한백겸이 상암동에 터전을 잡게 된 것은 동생 준겸(浚謙)이 이 곳의 북쪽 수리(數里)되는 곳에 농토를 가지고 살면서 이 마을 북쪽 산록의 밭을 형인 그에게 나누어 주었으므로 이곳에 살게 된 것이라 한다. 백겸은 물 좋고 산수 좋은 곳에서 만년을 보낼 생각을 하고 수이촌이라는 마을 이름을 물이촌(勿移村)으로 고치고 자신이 거처하는 집에 구암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이는 그 마을에서 옮겨가지 않고 오래 살 뜻을 나타낸 것이다. 한백겸(1552~1615)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서 본관은 청주이고, 자는 명길(鳴吉)이며, 호는 구암(久菴)이다. 그는 민순(閔純)에게 소학과 근사록(近思錄)을 배웠는데 의리에 관한 연구에 힘써 문경논맹(文經論孟)에도 정통했다.

그는 역학에 밝아 선조 때 주역전의(周易傳義)의 교정을 맡아 보았고 동국지리지를 저술하여 실학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동국지리지좭는 한서의 조선전과 후한서고구려전, 읍루전, 삼한전 등에서 4군과 고구려의 여러 성, 백제국도, 신라소경지(新羅小京志), 고려제경(高麗諸京) 등에 관한 기사를 뽑고, 간간히 필자의 의견을 붙여서 지은 역사지리책이다. 동국지리지는 한백겸의 생전에 간행되지 못하고 아들 교흥(敎興)에 의해 빛을 보게 되었다.

<다음: “에서 인용.>

 

 

 

출전 <한미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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