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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함씨:양근함씨(咸)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咸(강릉:양근함씨)

 

 

본관(本貫): 강릉(江陵):양근(楊根)

시조(始祖): 함규(咸規)

유래(由來):

 

강릉 함씨(江陵咸氏)의 원조(遠祖) 함혁(咸赫)은 아득한 옛날 삼한(三韓) 초(初) 한강(漢江)을 중심으로 여러 부족(部族)이 소국(少國)을 형성할 때 용문산 서록(龍門山西麓 : 현재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상곡)에 석성(石城)을 쌓고 웅거(雄據)한 촌장(村長)으로 세칭(世稱) 함왕주악(咸王周鍔)이라 불리웠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양근(楊根 : 양평의 옛 지명)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며, 15세손(世孫) 신(信 : 일명 훈)이 785년(신라 원성왕 1) 김주원(金周元 : 강릉 김씨의 시조)을 따라 강릉(江陵)에서 살게 되어 본관(本貫)을 강릉(江陵)으로 개칭(改稱)하게 되었다.

21세손 규(規)가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 개국(高麗開國)에 공(功)을 세워 익찬개국공신(翊贊開國功臣)으로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광평시랑(廣評侍郞)을 지내고, 몽고군(蒙古軍)이 침입했을 때 대사마 대장군(大司馬大將軍)으로 출전하여 적병(敵兵)을 물리쳐 평난좌명공신(平難佐命功臣)의 호(號)를 받았으므로, 후손들이 함규(咸規)를 시조로 하여 계대(繼代)하여 왔다.

 

그러므로 모든 함씨(咸氏)는 혁(赫)을 원조로 하는 동원분파(同源分派)임이 확실하여 1936년 병자보(丙子譜) 중간(重刊) 시 합보(合譜) 되었다고 한다.

함씨(咸氏)의 본관(本貫)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를 비롯한 문헌(文獻)에 66본(本)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양근(楊根)·강릉(江陵)을 제외한 본관(本貫)은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다.

 

가문의 중요 인물

 

함유일(咸有一)

1106(예종 1) ∼ 1185(명종 15). 고려 중기의 관인. 자는 형천(亨天). 태조공신(太祖功臣) 규(規)의 5세손이며, 상의 봉어동정(尙衣奉御同正) 덕후(德侯)의 아들이다.

1135년(인종 13) 서경반란을 평정할 때 서리 ( 胥吏 )로 종군하여 공로가 있었으므로 발탁되어 선군기사(選軍記事)가 되었다. 청빈하였으며 공무에 충실하였다. 추밀원사(樞密院使) 왕충(王 食 )의 천거로 내시 ( 內侍 )로 들어와 군주(軍廚 : 禁軍의 식사담당)를 담당하여 업무를 잘 수행하였다.

뒤에 보성의 수령이 되어서도 치적이 있었다. 명종 때 병부낭중(兵部郎中) · 상서좌승(尙書左丞)을 거쳐 공부상서로 퇴관하였다. 일찍이 의종 때는 교로도감(橋路都監)이 되어 도성 안의 무당과 음사(淫祠 : 귀신을 모신 집)가 많아 민심을 현혹시키므로 음사는 모두 불지르고 무당은 교외로 내쫓아 미신을 배척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함순(咸淳)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장가. 자는 자진(子眞). 고려 건국공신 규(規)의 6세손이며, 명종 때 공부상서(工部尙書)로 치사(致仕)한 유일 ( 有一 )의 아들이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나고 절행(節行)이 있었다.

또한, 순박하고 중후하여 정도(正道)로 책임을 삼으며 효경과 충신을 바탕으로 한 문사(文辭)가 탁월하였다. 최충(崔 食 )이 설립한 문헌공도 ( 文憲公徒 ) 출신으로 급제 후 양양과 남방 어느 고을의 지방관이 되었고, 최충헌 ( 崔忠獻 ) 집권시에는 사직 ( 司直 )이라는 한직에 머물렀던 것 같다.

한직에 만족하지 못하였으나, 무신정권이라는 한계 때문에 당시 이인로 ( 李仁老 ) · 오세재(吳世材) · 임춘 ( 林椿 ) · 조통(趙通) · 황보항 ( 皇甫抗 ) · 이담지 ( 李湛之 ) 등 명유(名儒)들과 교유하였으며, 진(晉)나라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본떠 강좌칠현(江左七賢)을 조직하고 시와 술로 많은 나날을 보냈다.

 

함부림(咸傅霖)

1360(공민왕 9) ∼ 1410(태종 10).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윤물 (潤物), 호는 난계(蘭溪). 아버지는 검교중추원학사(檢校中樞院學士) 승경(承慶)이다.

1385년(우왕 11) 문과에 급제해 예문검열(藝文檢閱)을 거쳐 좌정언으로 승진하였다. 1389년 공양왕이 즉위하자 헌납으로 재직중 정지 ( 鄭地 ) · 이림 ( 李琳 ) · 왕안덕(王安德) · 우인열 ( 禹仁烈 ) · 우홍수 ( 禹洪壽 ) 등 구신들을 탄핵하다가 왕의 미움을 받아 춘주지사(春州知事)로 좌천되었다.

그 뒤 다시 기용되어 형조정랑이 되었다. 그러나 중방 ( 重房 )의 무신들이 문신을 멸시하자 이에 항거하다가 파직되었다. 1392년(공양왕 4) 이성계 ( 李成桂 )가 실권을 잡자 병조정랑 겸 도평의사사경력사도사에 복직되었다. 그 해 이성계 추대에 참여해 개국공신 3등으로 개성소윤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형조의랑에 이어 대사성 · 좌산기상시로서 상서소윤 (尙瑞少尹)을 겸하고 명성군(溟城君)에 봉해졌다. 태종 초기에 충청도관찰출척사 · 예문관제학 · 동북면도순문사 · 동북면도순문찰리사 겸 병마도절제사 겸 영흥부윤 등을 역임하였다. 1404년(태종 4) 참지의정부사로서 대사헌에 올랐다.

다음 해 노비변정도감제조와 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406년에 계림부윤 · 경상도관찰출척사를 지냈다. 다음 해 다시 참지의정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8년에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1410년 파직되었다.

성격이 강직해 직언을 서슴지 않았으며, 서리를 다스리는 데에 능숙해 관직을 맡을 때마다 칭송을 받았다. 1405년에는 앞서 1398년(태조 7)의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 鄭道傳 )과 더불어 왕자 방석(芳碩)을 옹립했다는 혐의로 탄핵을 받은 일이 있다. 시호는 정평(定平)이다.

 

함우치(咸禹治)

1408(태종 8)∼1479(성종 10).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문명(文命), 호는 송담(松潭). 아버지는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부림(傅霖)이다.

음보(蔭補)로 감찰이 되고, 고부군수·군기시부정·나주목사를 거쳐, 1451년(문종 1)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에 올랐다. 1453년(단종 1)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455년(세조 1) 공주목사에 이어 1457년 함길도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459년에는 대사헌을 거쳐 중추원부사를 역임하고, 같은 해에 정조사 ( 正朝使 )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관찰사를 두루 역임하고 개성부유수가 되었는데, 특히 전라도관찰사로 재임할 때는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하였다. 1465년 형조참판이 되어 동평군(東平君)에 봉해졌으며, 1470년(성종 1)에는 형조판서에 올라 예종의 상례 ( 喪禮 )를 주관하였다.

이듬해 좌리공신 ( 佐理功臣 ) 4등에 책록되고 좌우참찬을 역임하였으며, 뒤에 봉조하 ( 奉朝賀 )가 되었다. 청렴하고 근면한 관리로서 명성이 높았다. 시호는 평양(平襄)이다.

 

함헌(咸軒)

1508(중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가중(可中), 호는 칠봉(七峰). 개국공신 부림(傅霖)의 4대손으로, 아버지는 부호군 좌무(左武)이다. 1534년(중종 29)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간성군수가 되었다.

1552년(명종 7) 예빈시정(禮賓寺正)으로 있을 때 동지사 ( 冬至使 )의 서장관 ( 書狀官 )이 되어 명나라 서울인 북경(北京)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이천부사가 되었다. 1562년 삼척부사를 지냈으며, 재임중 관리들의 기강을 확립하고 백성들을 구휼하여 치적을 남겼다.

만년에는 학풍의 퇴폐를 통탄하고 강릉에 오봉서원 ( 五峯書院 )을 짓고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올 때 가져온 공자(孔子)의 진상을 비치하여 추모하면서 후진을 가르쳤으며, 이황 ( 李滉 )· 정광필 ( 鄭光弼 ) 등과 교유하였다. 저서로는 ≪칠봉문집≫ 1책이 있다.

 

함일형(咸一亨)

평북 용천(龍川) 사람이다.1920112일 임시정부 연통제의 용천군 군감(郡監)으로 임명되어 참사 김경염(參事 金敬念), 경감 황정현(警監 黃正憲) 등과 더불어 독립단(獨立團)과 연락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국내의 동향을 보고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전(독립유공자 땅찾기)

함석은(咸錫殷)

평안북도 용천 출신. 19193·1운동이 발발하자, 평양의 숭덕학교(崇德學校) 교원으로 평안도지방 학생운동의 책임자가 되어 평양의 각 학교 교사 및 학생을 규합,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만주 관전현(寬甸縣)으로 망명, 그곳에서 대한청년단을 조직하여 애국사상의 고취, 독립운동의 선전, 청년단결에 주력하였다.

1920년 안병찬(安秉瓚김찬성(金燦星김승만(金承萬) 등이 주동이 되어 각지에 산재한 청년단체를 규합, 대한청년단연합회를 결성하자, 이에 참여하여 편집부장으로 기관지 발간에 진력하였다.

이 해 516일 일본군의 피습을 받아 총상을 입고 붙잡혀 총살형이 집행되었으나, 죽음 직전에 중국인의 도움으로 소생하였다.

그뒤 안동현(安東縣)에 은거하다가 무기구입사건으로 다시 일본군에 붙잡혀 3년간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 다시 만주로 가서 활동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출전(다움 백과사전)

 

함태영(咸台永)

1884(고종 21) 방랑벽이 심한 아버지를 찾아 어머니와 함께 상경하여, 조선 말기 격동하는 내외정세하에서 사숙(私塾)을 전전하면서 학문을 깨치는 한편, 밀려오는 신문화에 적응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895년재판소구성법 공포에 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이 설치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법조인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에 입학, 6개월 과정을 수석으로 수료하였다. 이듬해법관양성소 동기였던 이준(李儁)의 뒤를 이어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 검사시보로 임명되면서 법관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재직 중 강직한 성품과 불의를 응징하는 성격을 그대로 과시하였다.

189810월 독립협회 주최로 종로에서 만민공동회가 조직되고 시국에 대한 6개 조의 개혁안을 결의하여 고종에게 그 실행을 주청하였는데, 사태전개에 불안을 느낀 고종이 독립협회에 혁파령을 내리고 이상재(李商在) 등 중심인물 17인을 검거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당시 한성재판소 검사로 이 사건을 담당한 그는 사건을 공정하게 조사한 결과 내란죄를 적용할 수 없음을 알고 경미한 처벌을 받도록 하였다가 파면당하였다. 이후 고등재판소 검사, 평리원 검사, 법부 법률기초위원, 대심원(大審院) 판사, 복심법원(覆審法院) 판사를 역임하면서도 강직함은 변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당시 집권층의 미움을 받아 면관(免官복직되기를 여러 차례 거듭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공직에서 벗어나 사인(私人)으로 돌아갔다. 한편 그가 기독교에 입교한 정확한 연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아버지가 일찍부터 기독교신자로 장로의 직분을 가졌던 것으로 보아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되며, 나라 잃은 설움을 교회활동을 통하여 극복해 나갔다. 1919년 조국광복을 위한 독립운동계획이 구체화되자 교회세력을 배경으로 3·1운동을 막후에서 주도하였다.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 계통의 독립운동은 두 곳에서 규합되었는데, 연동교회와 평양신학교에 적을 두고 있던 그가 감리교세력을 흡수하여 그 중심적 위치에서 3·1운동을 이끈 것은 주목할만하다. 이 밖에도 천도교계와의 연락, 파리강화회의, 미국 대통령에게의 독립선언서 발송, 독립선언서의 지방배포 등을 담당하는 등 주요 역할을 하였으나, 자신은 다른 민족대표들이 잡힐 경우 그들의 가족을 보호하고 독립운동을 계속하기 위하여 최린(崔麟) 등의 완곡한 부탁을 받아 33인의 민족대표로는 서명하지 않았다.

거족적인 3·1독립운동이 계획대로 전개된 뒤 주동인물로 잡혀, 이듬해 10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3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종교활동에 힘썼고, 광복 후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의 고문을 지냈고, 1946년 미군정의 자문기관이었던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의 의원을 지냈다. 1949년 제2대 심계원장(審計院長), 1951년 한국신학대학장을 지냈다. 1952년에는 발췌개헌에 성공한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제3대 부통령에 당선되어 1956년 임기만료 때까지 재임하였다.

출전(다움 백과사전)

 

 

출전 <한미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32

達(달),泰(태)

35

楨(정),澈(철)

38

鎭(진),基(기)

33

宗(종)

36

榮(영),根(근)

39

 

34

澤(택)

37

基(기),瀾(란)

40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강릉·양근함씨(江陵·楊根咸氏)는 남한(南韓)에 총 14,882가구, 61,41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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