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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김해허씨(許)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許(김해허씨)

 

 

본관(本貫): 김해(金海)

시조(始祖): 허염(許琰)

유래(由來):

 

 김해허씨(金海許氏)의 시조(始祖) 허염(許琰)은 가락국(駕洛國) 수로왕비(首露王妃)인 허황후(許黃后)의 35세손으로 전(傳)하며,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通譜)」에 의하면 그는 고려(高麗)때 삼중대광(三重大匡)을 지내고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시조(始祖)의 세거지(世居地)인 김해(金海)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가락군 인전파(駕洛君仁全派)·호은공기파(湖隱公麒派)·중승공린파(中承公麟派)·전직공인부파(典直公仁副派)·증성군구년파(甑城君龜年派)·판서공언룡파(判書公彦龍派)·상서공상파(尙書公相派) 등 크게 7파로 분파(分派)되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허유전(許有全)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때 지공거(知貢擧:시험관)를 지낸 유전(有全)이 충숙왕(忠肅王) 때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지고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에 이어 정승(政丞)이 되었다.

 

허옹(許邕)

옹(邕)은 문과에 급제한 후 헌납(獻納)이 되었고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지냈으며 성품이 청렴강직(淸廉剛直)했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한 뒤 헌납이 되고, 1331(충혜왕 1)에 밀직제학(密直提學) 한종유(韓宗愈), 우대언 이군해(李君侅)가 과시를 맡아 보면서 감찰대부 최안도(崔安道)의 아들 경()을 부정으로 합격시키자 정언 조렴(趙廉정천유(鄭天濡)와 함께 이를 탄핵, 과거의 재실시를 요구하였으나 오히려 하옥될 뻔하였다.

그러나 박련(朴連)이 간관(諫官)은 죄줄 수 없다 하므로 중지되었다. 1336(충숙왕 복위 6) 감찰장령(監察掌令)을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갔다가, 1338년 낭사(郎舍)로서 앞서 급제한 최경의 첩장(牒狀)에 서명을 거부하여 왕을 난처하게 하였다.

뒤에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이르렀다. 청렴하고 강직하였으며, 문장과 덕행이 탁월하여 당시 이색(李穡)과 교유, 만년의 은거생활을 산수와 낚시로 낙을 삼았다.

출전(다움 백과사전)

 

허백기(許伯琦)

조선조(朝鮮朝)에 와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자는 여진(汝珍), 호는 삼송(三松호재(浩齋).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찬()이고, 아버지는 직제학 정()이며, 어머니는 유조(兪造)의 딸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1519(중종 14) 진사시를 거쳐, 같은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사관(史官)과 주서가 되었다.

1524년 형조와 병조의 좌랑을 지내고 1526년 형조정랑, 1528년 경상도 도사, 그리고 이듬해는 진위사(陳慰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41년 헌납·장령, 1544년 사간·교리·동부승지를 역임하고 이듬해 형조참의, 1553(명종 8) 판결사를 지낸 다음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1562년 동지중추부사로서 관직에서 물러났다. 시호는 정헌(正憲)이다.

출전(다움 백과사전)

 

허수겸(許守謙)

목사(牧使)를 역임했다.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이옥(而玉백형(伯亨). 아버지는 억부(億富)이다. 1588(선조 2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을 지내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자로서 왕을 의주까지 호종(扈從)하였다.

1596년 부여현감으로 있을 때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일어났다. 이 때 적이 오기도 전에 겁을 먹고 아랫사람들이 군기(軍器)를 적에게 실어다주었다는 이유로 죄를 입었다.

, 강진현감이 되었으나 1602년 사헌부에서 징렴(徵斂)을 많이 하고 중망이 가볍다고 탄핵하여 파직되었다. 병조정랑을 지냈으며, 외임을 주로 하여 공주목사에 이르렀다.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출전(다움 백과사전)

 

허위(許蔿)

한말(韓末)의 의병장(義兵將) 위(蔿)는 3백명의 선발대로 일본 통감부(日本統監府)를 격파하려다 실패하고 일본군(日本軍)에게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監獄)에서 옥사했다.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왕산(旺山), 자는 계형(季馨). 아버지는 진사 조()이다.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 희()와 맏형 훈()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895(고종 32) 8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이어 단발령이 내려져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이기찬(李起燦이은찬(李殷贊조동호(趙東鎬이기하(李起夏) 등과 협의하여 의병을 일으키기로 했다. 18963월 김천읍에서 수백 명의 의병으로 부대를 편성하여 이기찬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장이 되었다. 이들은 김산(金山성주에 진을 치고 대구로 진격하기 위해 각지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했으나 공주와 대구 관군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이은찬·조동호 등은 관군에게 붙잡혔다.

그는 잔여의병을 수습, 김천 직지사(直指寺)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충청북도 진천까지 진격했으나, 의병 해산을 명하는 고종의 밀지를 받고 부대를 해산한 후 진보로 가서 학문에 전념했다. 18993월 신기선(申箕善)의 천거로 영희전봉사(永禧殿奉事)가 되었으며, 그뒤 소경원봉사(昭慶園奉事성균관박사·주차일본공사수원(駐箚日本公使隨員중추원의관·평리원수반판사(平理院首班判事) 등을 거쳐 1904년 평리원서리재판장이 되었다.

이어 의정부참찬으로 있으면서 학교건립·전기증설·노비해방·은행설치 등 10조목의 상소를 올렸다.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이상천(李相天박규병(朴圭秉)과 함께 일본을 규탄하는 격문을 살포했으며, 그해 12월에는 일진회(日進會)를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정우회(政友會)를 조직했다. 그는 이 일로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었다가 의정부참찬직을 사임하고 풀려났다.

19053월 비서원승(秘書院丞)이 되었으나 찬정 최익현(崔益鉉), 판서 김학진(金鶴鎭)과 함께 다시 일본군에 체포되어 4개월간 구금되었다가 강제 귀향조치를 당했다. 같은 해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경상도·전라도·강원도·경기도 등을 돌아다니며 곽종석(郭鍾錫이학균(李學均유인석(柳麟錫정환직(鄭煥直) 등을 만나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고, 이어 군대가 해산되자 9월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뒤 적성·철원·파주·안협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병력을 증강하면서 일제 군경과 전투를 벌이고 친일 매국노들을 처단했다. 이어 전국의 의병부대가 연합하여 일본을 몰아내는 전쟁을 벌일 것을 계획하여, 이인영(李麟榮)과 상의한 뒤 190711월 전국의 의병장들에게 연합의병부대를 편성하여 서울로 진격하자는 격문을 보냈다. 48개 부대의 의병 1만여 명이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여 13도 창의군(十三道倡義軍)이 조직되자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진동창의대장(鎭東倡義大將)이 되었다.

19081월말 300여 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공했으나 지원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패배했다. 이어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하여 문경으로 귀향하자 대리총대장 겸 군사장(軍師長)이 되어 총지휘를 맡게 되었으나 일본군의 강력한 반격으로 서울진공작전은 좌절되었다. 그뒤 임진강·한탄강 유역을 무대로 조인환(趙仁煥김수민(金秀敏김응두(金應斗이은찬의 의병부대와 함께 연합부대를 편성하여 일본군과 유격전을 벌이고 매국노를 처단했다.

항상 군율을 엄히 하여 민폐가 없도록 했으며, 군수물자를 조달할 때는 군표(軍票)를 발행하여 뒤에 보상할 것을 약속했다. 19084월 이강년(李康秊유인석·박정빈(朴正彬) 등과 함께 거국적인 의병항전을 호소하는 격문을 전국의 의병부대에 발송했으며, 5월에는 박노천(朴魯天이기학(李基學) 등을 서울에 보내 고종의 복위, 외교권 회복, 이권침탈 중지 등 30개조의 요구조건을 통감부에 제출하고 요구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결사항전할 것을 선언했다.

그해 611일 경기도 영평군 유동(柳洞)에서 일본군 헌병대에 붙잡혀 1021일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요약)

허위는 구한말의 의병장으로 독립유공자이다. 1895(고종 32) 8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이어 단발령이 내려져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김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899년 관리로 등용되어 성균관박사, 의정부참찬 등을 지냈다.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일본을 규탄하는 격문을 살포했으며, 그해 12월에는 일진회를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정우회를 조직했다. 그는 이 일로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었다가 의정부참찬직을 사임하고 풀려났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고, 이어 군대가 해산되자 9월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어 연합의병부대를 편성하여 서울 근교까지 진격했으나 패배했다. 19086월 경기도에서 일본군 헌병대에 붙잡혀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출전(다움 백과사전)

 

허겸(許兼),

독립운동가인 겸(兼)·빈(斌)·병률(秉律)·형(炯) 등이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 바쳤다.

 

허형(許炯)

평안남도 안주출신. 19193·1운동 후에 서울에서 조선독립청년단을 조직,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안국동 이도제(李道濟)의 집에서 노령(露領)지방의 이동휘(李東輝)가 경상북도 경주에 거주하는 최익선(崔益善)에게 보내는 우리들의 행동을 찬조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보내주기 바란다.”는 내용의 서한을 강우규(姜宇奎)로부터 받아 이를 오태수(吳泰洙)에게 전달하였다.

같은해 8월 초순 원산에서 강우규와 함께 사이토(齋藤實)총독을 폭살하기 위하여 서울로 들어왔다. 강우규의 심부름으로 폭탄 1개를 더 가져오기 위하여 원산으로 간 사이 강우규가 사이토에게 폭탄을 투척하였다.

917일 이 사건의 공범으로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16월을 복역하였다. 19219월 다시 한흥근(韓興根) 관계 폭탄은닉혐의로 붙잡혔으나 예심 6개월 후 면소(免訴)되었다.

1922년부터는 평안남도 안주에서 동아일보사·조선일보사·중앙일보사의 지국장을 지내면서 계몽운동과 민족정신앙양에 기여하였다.

192610월 강중건사건(姜重健事件)으로 정주경찰서에 붙잡혀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1927년 신간회 안주지회 부회장 겸 정치부장을 지내면서 독립운동에 주력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출전(다움 백과사전)

 

허병률(許秉律),

경상북도 경산 출신. 1917년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基中)이 조직한 광복회(光復會)에 가입,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19199월경 양한위(梁漢緯권태일(權泰鎰)로부터 상해판 독립신문및 경고문 등을 전달받아 부호와 관공리에게 발송, 최대한의 지원을 호소하여 모금한 8,000원의 군자금을 1920년 상해(上海)로 가서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그 해 8월에 박용선(朴容善조한명(趙漢明이동찬(李東燦) 등과 군자금 모집을 모의하고 권총과 탄약을 휴대, 서울 서린동에 사는 엄홍섭(嚴弘燮)을 설득하여 2만원을 군자금으로 교부받아 곧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송금하는 등 군자금모집활동을 하였다.

일본경찰에 붙잡혀 19216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출전(다움 백과사전)

 

허빈(許斌)

일명 성묵·(문무일. 호는 백도. 1919년 황해도 안악에서 조직된 동창청년회에 가입했고 이창실(李昌實)과 함께 구월산에 들어가 임시정부와 연락하면서 독립신문을 몰래 반입·배포했다.

192012월 서울에서 개최된 조선청년회연합회 창립총회에 동창청년회 대표로 참여하여 의사로 활동했다.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징역 6월을 선고받고 복역한 뒤, 1922년 출옥하여 만주로 망명했다. 1924년 북간도에 동계중학을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9253월 김혁(金赫김좌진(金佐鎭나중소·조성환(曺成煥) 등과 함께 신민부를 창립하여 중앙집행위원·교육부위원장·선전부위원장을 지냈다.

192541일자로 기관지 신민보를 창간했으나 19264월 김일성(金一星강경애 등 사회주의자의 투고를 실은 것을 계기로 일제 하얼빈 영사관과 중국군벌의 습격을 받아 체포되어 신의주로 압송되었다. 192710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한 뒤, 1929년 가석방되었으나 옥고의 후유증으로 병사했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출전(다움 백과사전)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김해허씨(金海許氏)는 남한(南韓)에 총 29,313가구, 121,60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전 <한미족대성보>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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