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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허씨(許)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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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양천허씨)

 

 

본관(本貫): 양천(陽川)

시조(始祖): 허선문(許宣文)

유래(由來):

 

 양천 허씨(陽川許氏)의 시조(始祖)는 가락국(駕洛國) 김수로왕비(金首露王妃)의 30세손으로 전하는 허선문(許宣文)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그는 공암촌(孔巖村‥경기도 김포군 양천)에 살면서 농사(農事)에 힘써 많은 양곡(糧穀)을 비축(備蓄)하였는데,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을 정벌(征伐)할 때 군량이 부족하여 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군량(軍糧)을 보급해 주었다. 태조는 그 공을 가상히 여겨 선문에게 공암을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그리하여 본관(本貫)을 양천(陽川)으로 하였다고 한다.

 

가문의 중요 인물

 

허원(許元)

선문(宣文)의 손자(孫子) 원(元)이 고려 목종(穆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내사사인(內史舍人) 지제고(知制誥) 태자사의(太子司議) 등을 지냈다.

 

허정(許正)

선문의 증손(曾孫) 정(正)은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낸 후 태자태보(太子太保)에 이르렀다.

 

허재(許載)

 정(正)의 아들 재(載)는 일찍이 병마사(兵馬使)에 재임 시 여진의 정세를 파악하여 변경수비의 방책을 왕에게 올려 채택되기도 하였다.

 

허공(許珙)

1233(고종 20) ∼ 1291(충렬왕 17).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공암(孔巖 : 지금의 서울 양천구). 초명은 의(儀), 자는 온궤( 北 藿 ).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지낸 수(遂)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났으며, 1258년(고종 45)에 평장사 ( 平章事 ) 최자 ( 崔滋 )의 문하에서 병과로 급제, 승선 ( 承宣 ) 유경(柳敬)의 추천으로 최령(崔寧) · 원공식(元公植)과 함께 내시 ( 內侍 )로 추천되어 정사점필원(政事點筆員)이 되자,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정방3걸(政房三傑)이라 불렀다.

이후 국학박사(國學博士)에 보임되었고 원종 초에는 각문지후(閣門祗候)에 제수되었으며, 1267년(원종 8) 호부시랑(戶部侍郎)으로서 신종 · 희종 · 강종의 실록 ( 實錄 )을 편찬하는 데 참여했고, 1269년 우부승선 이부시랑 지어사대사(右副承宣吏部侍郎知御史臺事)로 진출하였다.

이 때 권신 임연 ( 林衍 )이 정권을 잡고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그의 아들 유무(惟茂)를 딸과 혼인시키려 하는 것을 거절해 그의 미움을 샀다. 그 해 임연이 왕을 폐하고 안경공 창(安慶公 銖 )을 옹립하였는데 이 때 많은 조신(朝臣)들이 살해되었으나, 마침 처의 장례로 양천(陽川)에 가 있어서 화를 면하였다.

그 뒤 첨서추밀원사(詹書樞密院事)를 거쳐 1275년(충렬왕 1) 감찰제헌(監察提憲)에 제수되었다. 1279년(충렬왕 5)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로 있을 때 원나라가 일본 정벌을 위해 전함의 건조를 명하자 경상도 도지휘사가 되어 이를 담당하였다.

당시 전라도 도지휘사 홍자번 ( 洪子藩 )이 일을 반도 마치지 못했을 때 이미 마치고 돌아와 그의 유능함에 크게 탄복하였다. 1281년(충렬왕 7)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서 성절사 ( 聖節使 )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밀직사사(密直司使)로서 지공거 ( 知貢擧 )가 되어 이익방(李益邦) 등 33인의 진사를 취하였다.

이어 세자조호(世子調護)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제수받았다. 이듬해 참문학세자보(參文學世子保)가 되었고, 1284년(충렬왕 10) 수국사 ( 修國史 )가 되어 원부(元傅) · 한강 ( 韓康 ) 등과 더불어 ≪ 고금록 古今錄 ≫ 을 편찬했으며, 이어 첨의중찬 ( 僉議中贊 )에 임명되었다.

1290년(충렬왕 16) 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합단(哈丹 : 원의 반란군)이 침입했는데, 이 때 홍자번과 함께 서울을 수비하였다. 이후 적(賊)이 이미 가까이 들어왔다는 유언비어가 돌아 민심이 흉흉했고 조신들도 모두 강화로 피난할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홀로 “ 어찌 유언비어를 믿고 마음대로 국도(國都)를 옮기리오! ” 하며 반대하였다. 이듬해 원나라가 이를 토벌하려고 군사를 보내왔을 때 군사를 이끌고 이에 참여하였다. 1310년(충선왕 복위 2) 충렬왕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허종(許琮)

1434(세종 16) ∼ 1494(성종 2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 ( 陽川 ). 자는 종경(宗卿) · 종지(宗之), 호는 상우당(尙友堂). 기( 皎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양양도호부사 비(扉)이고, 아버지는 군수 손(蓀)이며, 어머니는 부녹사 최안선(崔安善)의 딸이다. 좌의정 침(琛)의 형이다.

1456년(세조 2)에 생원시를 거쳐, 1457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의영고직장 겸 세자우정자(義盈庫直長兼世子右正字)를 거쳐, 1458년 군기시직장 겸 세자우정자가 되었다. 1459년 언로 개방, 이단 배척, 경연 실시 등을 주장하는 소를 올려 세조의 신임을 얻으면서 선전관을 겸하였다.

그리고 그 해 지평 이영은 ( 李永垠 ), 승문원부교리 정효상 ( 鄭孝常 ) 등과 함께 사가독서의 혜택을 받았으며, 이어 통례문봉례랑 지제교 세자좌정자(通禮門奉禮郎知製敎世子左正字)가 되었다. 1460년 여진족의 침입 때 평안도병마절제사도사로 출정했고, 조정으로 돌아와 성균관주부 · 예문관봉교 등을 거쳐 이듬해 형조도관좌랑이 되었다.

그 뒤 함길도도사 · 사간원정언 · 함길도경차관 · 훈련원판관 등을 거쳐, 1465년 성균관사예에 올랐다. 그리고 평안 · 황해 · 강원 · 함길도체찰사 한명회 ( 韓明澮 )의 종사관이 되어 북변경영에 공헌하고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1466년 함길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아버지상을 당해 사직했다가, 1467년 이시애 ( 李施愛 )의 난을 계기로 기복(起復 : 상중에 국가의 필요에 의해 관직에 나오던 제도)되었다. 조석문 ( 曺錫文 ) · 강순 ( 康純 ) · 어유소 ( 魚有沼 ) · 남이 ( 南怡 ) 등과 함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 1등에 책록되고 양천군(陽川君)에 봉해졌다.

1469년(예종 1) 평안도관찰사 · 전라도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대사헌에 오르고, 이듬해 병조판서가 되었다. 1471년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된 뒤, 지중추부사 · 판중추부사 ·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거쳐 1477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1477년 10월 건주위(建州衛) 여진족이 침입하자 평안도순찰사로 파견되었고, 이듬해 의정부좌참찬이 되었다가 할머니상으로 사직하였다. 1481년 북변 방어를 위한 〈 평안도연변제읍적로요해산천험이도 平安道沿邊諸邑賊路要害山川險易圖 〉 를 제작해 올리고 호조판서가 되었다.

이듬 해 임원준 ( 任元濬 ) 등과 함께 ≪ 소문충공집 蘇文忠公集 ≫ 을 주해(註解)하고 우찬성이 되었다. 1483년에는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했고, 세조비 윤씨의 국상 때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가 되었다.

1485년에 어머니상으로 사직했으나, 1487년 기복되어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과 부사 왕창(王敞)의 원접사 · 반송사로 활약한 공으로 병조판서에 임용되었다.

1489년 강원도축성사로 파견되어 축성 · 병기를 고험하고 곧 영안도관찰사가 되었다. 1491년 여진족 우디거(兀狄哈)가 함길도 방면으로 침입하자, 북정도원수(北征都元帥)가 되어 이를 격파하고, 이듬해에 우의정에 올랐다.

문무를 겸비해 국방과 문예에 큰 공을 남겼고, 의학에도 조예가 깊어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를 겸임하였다. 중종 때의 명의인 김순몽(金順蒙) · 하종해 ( 河宗海 ) 등을 가르쳤고, 천문 · 역법에도 조예가 깊었다.

서거정 ( 徐居正 ) · 노사신 ( 盧思愼 ) 등과 ≪ 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 ≫ 을, 서거정 · 노사신 · 어세겸 ( 魚世謙 ) · 유순 ( 柳洵 ) · 유윤겸 ( 柳允謙 ) 등과 ≪ 연주시격 聯珠詩格 ≫ · ≪ 황산곡시집 黃山谷詩集 ≫ 을 언해하였다. 또한 윤호 ( 尹壕 ) 등과 ≪ 신찬구급간이방 新撰救急簡易方 ≫ 을 편찬하였다.

문집으로는 ≪ 상우당집 ≫ 이 있고, 편서에는 ≪ 의방유취 醫方類聚 ≫ 를 요약한 ≪ 의문정요 醫門精要 ≫ 가 있다. 성종조의 청백리로 녹선되었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허침(許琛)

1444(세종 26) ∼ 1505(연산군 1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 ( 陽川 ). 자는 헌지(獻之), 호는 이헌( 蓬 軒). 기( 皎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양양도호부사 비(扉)이고, 아버지는 군수 손(蓀)이며, 어머니는 부녹사 최안선(崔安善)의 딸이다. 우의정 종(琮)의 동생이다.

1462년(세조 8) 진사시에 합격하고, 1475년(성종 6) 참봉으로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감찰이 되었다. 1476년 채수 ( 蔡壽 ) 등과 함께 사가독서문신에 뽑혀 장의사 ( 藏義寺 )에서 독서를 했으며, 이후 전적 · 부수찬 · 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478년 지평이 된 뒤, 병조정랑 · 지제교 ( 知製敎 ) 등을 역임하였다. 1482년 진현시 ( 進賢試 )에 병과로 급제하고, 필선이 되어 세자의 그릇됨을 깨우치기에 노력하였다. 1488년 보덕이 되었다가 곧 홍문관직제학 겸 예문관응교로 옮겼다. 그리고 이듬해 ≪ 삼강행실 ≫ 을 산정(刪定)하였다.

1490년 동부승지로 초수(超授)되었으며, 같은 해 좌부승지 · 우승지를 역임하였다. 1491년 좌승지, 1492년 전라도관찰사, 1493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곧 대사헌으로 자리를 옮겼다. 1494년 예조참판이 되고, 천추사 ( 千秋使 )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런 뒤 1498년(연산군 4)까지 병조참판 · 경연특진관(經筵特進官) · 실록청당상 등을 역임했으나, 김일손 ( 金馹孫 )의 사초사건에 연루되어 첨지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 이어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1499년 동지중추부사로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영춘추관사 신승선 ( 愼承善 ) 등과 함께 ≪ 성종실록 ≫ 을 편찬하였다.

1500년 호조참판 · 이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형조참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뒤 경기도관찰사 · 이조판서를 거쳐, 1503년 우참찬이 되었다. 1504년 우의정 재직 당시 연산군의 생모 윤비(尹妃) 폐출(廢出)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처벌되는 가운데, 당시 할머니상으로 불참했던 덕에 화를 면하였다. 그 해 좌의정에 올랐다.

조위 ( 曺偉 ) · 유호인 ( 兪好仁 ) 등과 교우하면서 성종의 총애를 받았고, 연산군의 폭정을 바로잡지는 못했지만 많은 조신들을 구명하였다. 성종조의 청백리 ( 淸白吏 )에 녹선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허욱(許頊)

1548(명종 3)∼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 ( 陽川 ). 자는 공신(公愼), 호는 부훤(負暄). 확(確)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헌 흡(洽)이고, 아버지는 응(凝)이며, 어머니는 신광수(申光守)의 딸이다.

1572년(선조 5)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현감 때부터 치적을 쌓고 1591년 공주목사가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강을 굳게 지켜서 호서·호남 지방을 방어하는 데 공을 세웠다. 또한, 승장(僧將) 영규 ( 靈圭 )를 불러 도내의 승군을 뽑은 뒤 장수로 삼았고, 의병장 조헌 ( 趙憲 )과 함께 청주성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1593년 충청도관찰사가 된 뒤, 서울 수복을 위해 군대를 통진 ( 通津 )·독산성(禿山城) 등지로 주둔시키다가 도원수 권율 ( 權慄 )로부터 내포(內浦)가 풍년임에도 불구하고 군량을 충분히 확보치 못한다고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곧 이조의 요청과 유성룡 ( 柳成龍 )의 추천으로 형조참의에 임명되고, 청량사(請糧使)로 명나라에 건너가 산둥지방의 곡식 2만 2,700섬을 얻어왔다. 그 뒤 강계부사로서 여진족의 움직임을 정탐해 보고하였다. 이어 의주부윤·평안도관찰사·병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1604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불타고 남은 역대의 실록을 다시 인출(印出)해 사고 ( 史庫 )에 봉안(奉安)할 때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 활약하였다. 그 뒤 한성부판윤에 특별히 제수되었다가 다시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호조판서가 되었다. 1606년 우의정에 올랐고, 이어 좌의정이 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는 유영경 ( 柳永慶 )의 일파로 몰려 파직되었고, 이어 능창군 전(綾昌君佺)의 추대사건에 관련되어 1616년(광해군 8) 원주에 부처(付處)되었다. 1618년 유배지인 원주에서 죽었다. 인조반정 후에 관작이 복구되었고, 시호는 정목(貞穆)이다.

 

허엽(許曄)

1517(중종 12) ∼ 1580(선조 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 ( 陽川 ). 자는 태휘(太輝), 호는 초당 ( 草堂 ). 창(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담(聃)이고, 아버지는 증이조참판 한(澣)이며, 어머니는 돈녕부판관 성희(成喜)의 딸이다. 봉( 燈 ) · 균(筠)의 아버지이다.

진사시를 거쳐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551년 부교리를 거쳐 1553년 사가독서한 뒤, 장령으로 있을 때 재물을 탐한 죄로 파직되었다. 1559년 필선으로 기용되고, 이듬해 대사성에 이르렀다.

1562년 지제교를 겸했을 때 박계현 ( 朴啓賢 )과 함께 왕의 소명을 받고 옥취정(玉翠亭)에 들어가 율시 ( 律詩 )로 화답하였다. 그 해 동부승지로 참찬관이 되어 경연 ( 經筵 )에 참석해 조광조 ( 趙光祖 )의 신원(伸寃 : 원통함을 풀어버림.)을 청하고 허자 ( 許磁 ) · 구수담 ( 具壽聃 )의 무죄를 논한 사건으로 파직되었다. 1563년 삼척부사로 기용되었으나 과격한 언론 때문에 다시 파직되었다.

1568년(선조 1) 진하사 ( 進賀使 )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향약의 설치 · 시행을 건의하였다. 1575년 부제학을 거쳐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하였다. 그 뒤 동지중추부사의 한직에 전임되었다가 상주의 객관에서 객사하였다.

어려서 나식 ( 羅湜 )에게 ≪ 소학 ≫ · ≪ 근사록 ≫ 등을 배웠고, 서경덕 ( 徐敬德 )의 문인으로 학문을 익혔으며, 노수성(盧守成)과 벗하였다. 동 · 서인(東西人)의 대립시 김효원 ( 金孝元 )과 함께 동인의 영수가 되어 당시 사류의 지도급 인물이 되었다.

벼슬을 30년 간이나 지냈는데도 생활이 검소하였다. ≪ 율곡집 ≫ 에는 그가 이론이 모순된 점이 많고 문장이나 글의 뜻에 잘 통달되지 못했다고 하였다. 또한 이황 ( 李滉 )은 차라리 학식이 없었다면 착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개탄하였다. 박순 ( 朴淳 )과는 동문이었으나 당파가 서로 달라 사이가 벌어졌고, 말년에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김정국(金正國)이 찬수한 ≪ 경민편 警民編 ≫ 을 보충 반포하고, ≪ 삼강이륜행실 三綱二倫行實 ≫ 의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청백리에 녹선(錄選)되고, 개성의 화곡서원 ( 花谷書院 )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 초당집 ≫ · ≪ 전언왕행록 前言往行錄 ≫ 등이 있다.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명종 18) ∼ 1589(선조 22).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본관은 양천 ( 陽川 ).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 강원도 강릉(江陵) 출생. 엽(曄)의 딸이고, 봉( 燈 )의 동생이며 균(筠)의 누이이다. 가문은 현상(賢相) 공(珙)의 혈통을 이은 명문으로 누대의 문한가(文翰家)로 유명한 학자와 인물을 배출하였다. 아버지가 첫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에게서 성(筬)과 두 딸을 낳고 사별한 뒤에 강릉김씨(江陵金氏) 광철(光轍)의 딸을 재취하여 봉 · 초희 · 균 3남매를 두었다.

허난설헌은 천재적 가문에서 성장하면서 어릴 때에 오빠와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다.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나 8세에 〈 광한전백옥루상량문 廣寒殿白玉樓上梁文 〉 을 지어서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허씨가문과 친교가 있었던 이달 ( 李達 )에게 시를 배웠다.

허난설헌은 15세 무렵에 안동김씨(安東金氏) 성립(誠立)과 혼인하였다. 그러나 원만한 부부가 되지 못하였다. 남편은 급제한 뒤에 관직에 나갔다. 그러나 가정의 즐거움보다 노류장화(路柳墻花)의 풍류를 즐겼다. 거기에다가 고부간에 불화하여 시어머니의 학대와 질시 속에 살았다.

사랑하던 남매를 잃은 뒤에 설상가상으로 뱃속의 아이까지 잃는 아픔을 겪었다. 또한, 친정집에서 옥사(獄事)가 있었고, 동생 균마저 귀양가는 등의 비극이 연속되었다.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먹(墨 묵)으로 고뇌를 달래며, 생의 울부짖음에 항거하다 2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과 계속된 가정의 참화 때문에, 허난설헌의 시 213수 가운데에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신선시가 128수나 될 만큼 신선사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허균이 허난설헌의 작품 일부를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 난설헌집 ≫ 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다.

≪ 난설헌집 ≫ 은 1711년에는 일본에서도 분다이 (文台屋次郎)가 간행하여 애송되었다. 유고집에 ≪ 난설헌집 ≫ 이 있다. 국한문가사 〈 규원가 閨怨歌 〉 와 〈 봉선화가 鳳仙花歌 〉 가 있다. 그러나 〈 규원가 〉 는 허균의 첩 무옥(巫玉)이 지었다고도 한다고 하고 〈 봉선화가 〉 는 정일당김씨(貞一堂金氏)가 지었다고도 한다.

 

허균(許筠)

1569(선조 2) ∼ 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 ( 陽川 ).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 · 학산(鶴山) · 성소(惺所) · 백월거사(白月居士). 아버지는 서경덕 ( 徐敬德 )의 문인으로서 학자 ·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동지중추부사 ( 同知中樞府事 ) 엽(曄)이다.

어머니는 후취인 강릉김씨(江陵金氏)로서 예조판서 광철(光轍)의 딸이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성(筬)이 이복형이다. 봉( 燈 )과 난설헌(蘭雪軒)이 동복형제이다.

허균은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9세 때에 시를 지을 줄 알았다. 12세 때에 아버지를 잃고 더욱 시공부에 전념하였다. 학문은 유성룡 ( 柳成龍 )에게 나아가 배웠다.

시는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하나인 이달 ( 李達 )에게 배웠다. 이달은 둘째 형의 친구로서 당시 원주의 손곡리(蓀谷里)에 살고 있었다. 그에게 시의 묘체를 깨닫게 해주었다. 인생관과 문학관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허균은 26세 때인 1594년(선조 27)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고 설서 ( 說書 )를 지냈다. 1597년에 문과 중시 ( 重試 )에 장원하였다. 이듬해에 황해도 도사 ( 都事 )가 되었다.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여섯 달만에 파직되었다.

그 뒤에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 · 형조정랑을 지냈다. 1602년 사예 ( 司藝 ) ·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였다. 이 해에 원접사 이정구 ( 李廷龜 )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1604년 수안군수(遂安郡守)로 부임하였다가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또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나왔다.

허균은 1606년에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쳤다. 누이 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되었다.

그러나 석 달이 못 되어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다는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그 뒤에 공주목사로 기용되어 서류(庶流)들과 가까이 지냈다. 또다시 파직 당한 뒤에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계생(桂生)을 만났다. 천민 출신의 시인 유희경(柳希慶)과도 교분을 두터웠다.

허균은 1609년(광해군 1)에 명나라 책봉사가 왔을 때에 이상의 ( 李尙毅 )의 종사관이 되었다. 이 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되었다. 1610년에 전시 ( 殿試 )의 시관으로 있으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 ( 咸悅 )로 유배되었다. 그 뒤에 몇 년간은 태인 ( 泰仁 )에 은거하였다.

허균은 1613년 계축옥사에 평소 친교가 있던 서류출신의 서양갑 ( 徐羊甲 ) · 심우영 ( 沈友英 )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이첨 ( 李爾瞻 )에게 아부하여 대북(大北)에 참여하였다. 1614년에 천추사 ( 千秋使 )가 되어 중국에 다녀왔다.

그 이듬해에는 동지 겸 진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이 두 차례의 사행에서 많은 명나라 학자들과 사귀었으며 귀국할 때에 ≪ 태평광기 太平廣記 ≫ 를 비롯하여 많은 책을 가지고 왔다. 그 가운데에는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허균은 1617년 좌참찬이 되었다. 폐모론을 주장하다가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 ( 奇自獻 )과 사이가 벌어지고 기자헌은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 아들 기준격(奇俊格)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허균의 죄상을 폭로하는 상소를 올렸다. 허균도 상소를 올려 변명하였다.

1618년 8월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다., 허균의 심복 현응민(玄應旻)이 붙였다는 것이 탄로났다.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 심문시킨 끝에 역적모의를 하였다 하여 허균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허균에 대한 평가는 당시의 총명하고 영발(英發)하여 능히 시를 아는 사람이라 하여 문장과 식견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람됨에 대하여서는 경박하다거나 인륜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하여 행실을 더럽혔다는 등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의 생애를 통해 보면 몇 차례에 걸친 파직의 이유가 대개 그러한 부정적 견해를 대변해 주고 있다.

허균은 국문학사에서는 우리 나라 최초의 소설인 〈 홍길동전 〉 을 지은 작가로 인정되고 있다. 한때 그가 지었다는 것에 대하여 이론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18년 아래인 이식 ( 李植 )이 지은 ≪ 택당집 澤堂集 ≫ 의 기록을 뒤엎을 만한 근거가 없는 이상 그를 〈 홍길동전 〉 의 작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생애와 그의 논설 〈 호민론 豪民論 〉 에 나타난 이상적인 혁명가상을 연결시켜 보면 그 구체적인 형상화가 홍길동으로 나타났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허균의 문집에 실린 〈 관론 官論 〉 · 〈 정론 政論 〉 · 〈 병론 兵論 〉 · 〈 유재론 遺才論 〉 등에서 그는 민본사상과 국방정책과 신분계급의 타파 및 인재등용과 붕당배척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내정개혁을 주장한 그의 이론은 원시유교사상에 바탕을 둔 것이다. 백성들의 복리증진을 정치의 최종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허균은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한 유가로서 학문의 기본을 유학에 두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이단으로 지목되던 불교 · 도교에 대하여 사상적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특히, 불교에 대해서는 한때 출가하여 중이 되려는 생각도 있었다.

불교의 오묘한 진리를 접하지 않았더라면 한평생을 헛되이 보낼 뻔하였다는 술회를 하기도 하였다. 불교를 믿는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고서도 자기의 신념에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음을 시와 편지글에서 밝히고 있다.

허균은 도교사상에 대해서는 주로 그 양생술과 신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은둔사상에도 지극한 동경을 나타내었다. 은둔생활의 방법에 대하여 쓴 〈 한정록 閑情錄 〉 이 있어 그의 관심을 보여 주고 있다.

허균 자신이 서학 ( 西學 )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없다. 그러나 몇몇 기록에 의하면 허균이 중국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가지고 온 것을 계기로 하늘을 섬기는 학을 하였다고 하였다. 이 점은 그가 새로운 문물과 서학의 이론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허균은 예교(禮敎)에만 얽매어 있던 당시 선비사회에서 보면 이단시할 만큼 다각문화에 대한 이해를 가졌던 인물이며, 편협한 자기만의 시각에서 벗어나 핍박받는 하층민의 입장에서 정치관과 학문관을 피력해 나간 시대의 선각자였다.

허균은 그의 문집 ≪ 성소부부고 惺所覆 螺 藁 ≫ 를 자신이 편찬하여 죽기 전에 외손에게 전하였다고 한다. 그 부록에 〈 한정록 〉 이 있다. 그가 스물다섯살 때에 쓴 시평론집 ≪ 학산초담 鶴山樵談 ≫ 이 ≪ 성소부부고 ≫ 가운데에 실려 있는 〈 성수시화 惺 馬 詩話 〉 와 함께 그의 시비평 안목을 보여 주는 좋은 자료가 된다.

반대파에 의해서도 인정받은 그의 시에 대한 감식안은 시선집 ≪ 국조시산 國朝詩刪 ≫ 을 통하여 오늘날까지도 평가받고 있다. 허균의 저서 ≪ 국조시산 ≫ 에 덧붙여 자신의 가문에서 여섯 사람의 시를 뽑아 모은 ≪ 허문세고 許門世藁 ≫ 가 전한다.

이 밖에 ≪ 고시선 古詩選 ≫ · ≪ 당시선 唐詩選 ≫ · ≪ 송오가시초 宋五家詩抄 ≫ · ≪ 명사가시선 明四家詩選 ≫ · ≪ 사체성당 四體盛唐 ≫ 등의 시선집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또, 임진왜란의 모든 사실을 적은 〈 동정록 東征錄 〉 은 ≪ 선조실록 ≫ 편찬에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고 하는데 역시 전하지 않는다. 전하지 않는 저작으로 〈 계축남유초 癸丑南遊草 〉 · 〈 을병조천록 乙丙朝天錄 〉 · 〈 서변비로고 西邊備虜考 〉 · 〈 한년참기 旱年讖記 〉 등이 있다.

 

허목(許穆)

1595(선조 28) ∼ 1682(숙종 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 ( 陽川 ). 자는 문보(文甫) · 화보(和甫), 호는 미수(眉 馬 ). 찬성 자(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별제 강( 艮 )이고, 아버지는 현감 교(喬)이며, 어머니는 정랑 임제 ( 林悌 )의 딸이다. 부인은 영의정 이원익 ( 李元翼 )의 손녀이다.

1615년(광해군 7) 정언눌(鄭彦 竊 )에게 글을 배우고, 1617년 거창현감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가서 문위(文緯)를 사사하였다. 또한 그의 소개로 정구 ( 鄭逑 )를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다. 1624년(인조 2) 광주 ( 廣州 )의 우천(牛川)에 살면서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독서와 글씨에 전념해 그의 독특한 전서(篆書)를 완성하였다.

1626년 인조의 생모 계운궁 구씨(啓運宮具氏)의 복상(服喪)문제와 관련해 유신(儒臣) 박지계 ( 朴知誡 )가 원종의 추숭론(追崇論)을 제창하자, 동학의 재임(齋任)으로서 임금의 뜻에 영합해 예를 혼란시킨다고 유벌(儒罰)을 가하였다.

이에 인조는 그에게 정거(停擧 : 일정 기간 동안 과거를 못 보게 하던 벌)를 명하였다. 뒤에 벌이 풀렸는데도 과거를 보지 않고 자봉산에 은거해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을 당해 영동(嶺東)으로 피난했다가 이듬해 강릉 · 원주를 거쳐 상주에 이르렀다.

1638년 의령의 모의촌(慕義村)에서 살다가 1641년 다시 사천으로 옮겼다. 그 뒤 창원 · 칠원 ( 漆原 ) 등지로 전전하다가 1646년 마침내 경기도 연천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음 해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상중에 ≪ 경례유찬 經禮類纂 ≫ 을 편찬하기 시작해 3년 뒤에는 상례편(喪禮篇)을 완성하였다.

1650년(효종 1) 정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1개월 만에 사임하였다. 이듬해 내시교관이 된 뒤 조지서별좌(造紙署別坐) · 공조좌랑 등을 거쳐 용궁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57년 공조정랑에 이어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효종을 만나 소를 올려 군덕(君德)과 정폐(政弊)를 논하고 사임을 청하였다. 그 뒤 사복시주부로 옮겼으나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659년 장령이 되어 군덕을 논하는 소를 올렸으며, 또한 당시 송시열 ( 宋時烈 ) · 송준길 ( 宋浚吉 ) 등이 주도하는 북벌정책에 신중할 것을 효종에게 간하는 옥궤명(玉 廓 銘)을 지어 바쳤다. 이어 둔전의 폐단을 논하였다. 그 해 효종이 죽자 소를 올려 상례를 논했고,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60년(현종 1) 경연 ( 經筵 )에 출입했고, 다시 장령이 되었다. 그 때 효종에 대한 조대비(趙大妃 : 인조의 繼妃)의 복상기간이 잘못되었으므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상소해 정계에 큰 파문을 던졌다. 이를 기해복제라 한다. 당시 송시열 등 서인 ( 西人 )은 ≪ 경국대전 ≫ 에 의거해 맏아들과 중자(衆子)의 구별 없이 조대비는 기년복(朞年服 : 1年喪)을 입어야 한다고 건의해 그대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실은 의례 ( 儀禮 ) 주소(註疏 : 경서 등에 해석을 덧붙인 것)에 의거해 효종이 체이부정(體而不正), 즉 아들이기는 하지만 맏아들이 아닌 서자에 해당된다고 해석해 기년복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고 또 종묘의 제사를 주재해 사실상 맏아들 노릇을 했으니 어머니의 맏아들에 대한 복으로서 자최삼년(齊衰三年)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복제논쟁의 시비로 정계가 소란해지자 왕은 그를 삼척부사로 임명하였다. 여기서 그는 향약을 만들어 교화에 힘썼으며, ≪ 척주지 陟州誌 ≫ 를 편찬하는 한편, ≪ 정체전중설 正體傳重說 ≫ 을 지어 삼년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였다.

1674년 효종 비 인선왕후 ( 仁宣王后 )가 죽자 조대비의 복제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조정에서는 대공복(大功服)으로 9개월을 정했으나 대구 유생 도신징(都愼徵)의 상소로 다시 기해복제가 거론되었다.

≪ 경국대전 ≫ 에 따르면 맏아들 · 중자의 구별 없이 부모는 아들을 위해 기년복을 입는다고 규정했으나, 며느리의 경우 맏며느리는 기년, 중자처는 대공으로 구별해 규정하였다.

그런데 인선왕후에게 대공복(大功服)을 적용함은 중자처(衆子妻)로 대우함이고, 따라서 효종을 중자로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근거는 ≪ 경국대전 ≫ 이 아니라 고례(古禮)의 체이부정설이었다.

이는 효종의 복제와 모순되는 것으로서 새로 즉위한 숙종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이러한 일로 송시열 등 서인은 몰리게 되고 그의 견해가 받아들여져 대공복을 기년복으로 고치게 되었다.

이로써 서인은 실각하고 남인의 집권과 더불어 그는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사직소를 올렸고, 병이 나자 숙종은 어의를 보내어 간호하기까지 하였다. 1675년(숙종 1) 이조참판 · 비국당상(備局堂上) · 귀후서제조(歸厚署提調) 등을 거쳐 자헌대부 ( 資憲大夫 )에 승진하고, 의정부우참찬 겸 성균관제조로 특진하였다.

이어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승진되어 과거를 보지 않고도 유일(遺逸)로서 삼공 ( 三公 )에 올랐다. 그 해 덕원 ( 德源 )에 유배중이던 송시열에 대한 처벌문제를 놓고 영의정 허적 ( 許積 )의 의견에 맞서 가혹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남인은 송시열의 처벌에 온건론을 주장하던 탁남(濁南)과 청남(淸南)으로 갈라졌고, 그는 청남의 영수가 되었다.

그 뒤 지덕사(至德祠)의 창건을 건의하고, 체부(體府) ·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 지패법(紙牌法) · 축성(築城) 등을 반대했으며, 그 해 왕으로부터 궤장( 廓 杖)이 하사되었다. 이듬해 차자 ( 箚子 )를 올려 치병사(治兵事) · 조병거(造兵車) 등 시폐(時弊)를 논하였다.

그러나 사임을 아무리 청해도 허락하지 않아 성묘를 핑계로 고향에 돌아왔으나 대비의 병환소식을 듣고 다시 예궐하였다. 특명으로 기로소당상(耆老所堂上)이 되었는데 음사(蔭仕)로서 기로소에 든 것은 특례였다.

1677년 비변사를 폐지하고 북벌준비를 위해 체부를 설치할 것과 재정보전책으로 호포법(戶布法) 실시를 주장하는 윤휴(尹 頊 )에 맞서 그 폐(弊)를 논하고 반대하였다. 이듬해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해, 나라에서 집을 지어주자 은거당(恩居堂)이라 명명하였다.

1679년 강화도에서 투서(投書)의 역변(逆變)이 일어나자 상경해 영의정 허적의 전횡을 맹렬히 비난하는 소를 올렸다. 이듬해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관작을 삭탈당하고 고향에서 저술과 후진양성에 전심하였다.

그는 이기론 ( 理氣論 )에 있어서 기(氣)는 이(理)에서 나오고 이는 기에서 행하므로, 이기를 분리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독특한 도해법(圖解法)으로 해설한 ≪ 심학도 心學圖 ≫ 와 ≪ 요순우전수심법도 堯舜禹傳授心法圖 ≫ 를 지어 후학들을 교육하였다.

사후 1688년 관작이 회복되고, 숙종은 예장(禮葬)의 명령을 내려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했으며, 자손을 등용하도록 하고 문집을 간행하게 하였다. 그림 · 글씨 · 문장에 모두 능했으며, 글씨는 특히 전서에 뛰어나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작품으로 삼척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시흥의 영상이원익비(領相李元翼碑), 파주의 이성중표문(李誠中表文)이 있고, 그림으로 묵죽도 ( 墨竹圖 )가 전한다. 저서로는 ≪ 동사 東事 ≫ · ≪ 방국왕조례 邦國王朝禮 ≫ · ≪ 경설 經說 ≫ · ≪ 경례유찬 經禮類纂 ≫ · ≪ 미수기언 眉 馬 記言 ≫ 이 있다.

1691년 그의 신위(神位)를 봉안하는 사액서원으로 미강서원(嵋江書院)이 마전군(麻田郡)에 세워졌고, 나주의 미천서원(眉川書院), 창원의 회원서원 ( 檜原書院 )에도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허적(許積)

1610(광해군 2) ∼ 1680(숙종 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 ( 陽川 ). 자는 여차(汝車), 호는 묵재(默齋) · 휴옹(休翁). 초(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잠(潛)이고, 아버지는 부사 한( 淹 )이며, 어머니는 김제(金悌)의 딸이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하고, 163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검열 · 부수찬을 지내고, 1641년 의주부윤으로 관향사 ( 管餉使 )를 겸하였다. 1645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나 1647년 일본사신 다이라(平成辛)를 위법으로 접대한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그 뒤 다시 기용되어 1653년(효종 4) 호조참판, 1655년 호조판서를 거쳐, 1659년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그 해 효종이 승하하면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 ( 服喪問題 )가 일어나자, 남인으로서 서인의 기년설(朞年說 : 만 1년설)에 맞서 3년설을 주장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1662년(현종 3)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1664년 우의정이 되었다. 같은 해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 좌의정에 올랐다. 1671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이듬해 송시열 ( 宋時烈 )의 논척을 받아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1674년(숙종 즉위년) 인선대비(仁宣大妃)가 죽어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다시 일어나자, 서인의 대공설(大功說 : 9개월설)에 맞서 기년설을 주장하였다. 이번에는 그 주장이 받아들여지면서 다시 영의정에 복직하고 남인이 집권하였다.

그 뒤 송시열의 처벌문제로 남인이 청남(淸南) · 탁남(濁南)으로 분열되자, 탁남의 영수가 되어 청남을 밀어내었다. 1676년 사은 겸 진주변무사(謝恩兼陳奏辨誣使)로 청나라에 세 번째 다녀온 뒤, 오도도체찰사가 되었다.

1678년 재정 고갈을 막기 위해 상평통보의 주조 · 통용을 건의하였다. 왕의 신임을 받아 궤장( 廓 杖)이 하사되고 기로소 ( 耆老所 )에 들어갔다. 1680년 할아버지 잠(潛)이 시호를 받게 되어 그 축하연을 베풀 때 궁중의 유악( 烽 幄)을 함부로 사용해 왕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그 와중에 서자 견(堅)의 모역사건에 휘말려 들어 사사(賜死)되었다. 1689년 숙종이 그의 애매한 죽음을 알게 되어 무고한 서인 김익훈 ( 金益勳 ) · 이사명 ( 李師命 ) 등을 죽이고, 관작을 추복하였다.

식견이 넓고 총명한 재질로서 충성을 다하였으며, 재상이 되어 자기에게 내리는 왕의 은혜는 친구들에게 돌리고 녹봉으로 친구들을 구제하였다. 일찍이 사헌부에 있을 때에는 이조판서 이경석 ( 李景奭 ), 병조판서 이시백 ( 李時白 ) 등의 인사 부정을 과감히 탄핵해 백관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남인으로서 서인의 송시열 등과 가까이 지냈다.

 

허준(許浚)

1546(명종 1) ∼ 1615(광해군 7). 조선 중기의 의관(醫官). 본관은 양천 ( 陽川 ).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 김포 출신. 할아버지 곤(琨)은 무과 출신으로 경상도우수사(慶尙道右水使)를 지냈고, 아버지 윤( 烈 )도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냈다.

그런데 그는 무과에 지원하지 않고 29세인 1574년(선조 7) 의과에 급제하여 의관으로 내의원 ( 內醫院 )에 봉직하면서 내의 · 태의 · 어의로서 명성을 높였을 뿐 아니라 ≪ 동의보감 ≫ 을 편술하여 우리 나라 의학의 실력을 청나라 및 일본에까지 과시하였다.

1575년 2월에 어의로서 명나라의 안광익(安光翼)과 함께 임금의 병에 입진(入診 : 진찰을 맡음)하여 많은 효과를 보게 하였으며, 1578년 9월에는 내의원첨정으로 당시에 새로 출판된 ≪ 신간보주동인유혈침구도경 新刊補註銅人 侖 穴鍼灸圖經 ≫ 을 하사받았다.

1581년에 고양생(高陽生)의 원저인 ≪ 찬도맥결 纂圖 疸 訣 ≫ 을 교정하여 ≪ 찬도방론맥결집성 纂圖方論 疸 訣集成 ≫ 4권을 편성하여 맥법진단의 원리를 밝혔다.

1587년 10월에 어의로서 태의 양예수(楊禮壽) · 이공기(李公沂) · 남응명(南應命) 등과 함께 입진하여 상체(上體)가 평복(平復 : 병이 나아 건강이 회복됨)함으로써 호피(虎皮) 일영(一令 : 가죽 하나)을 받았으며, 1590년 12월에 왕자의 두창(痘瘡 : 천연두)이 쾌차하였으므로 당상(堂上 : 정3품 이상의 벼슬)의 가자(加資 : 정3품 이상의 품계를 올림)를 받았다.

이 때에 정원 ( 政院 ) · 사헌부 · 사간원에서 허준의 의료에 관한 공로는 인정하나 의관으로서 당상가자를 받는 것은 지나친 상사라 하여 여러 차례 그 가자를 거두기를 계청(啓請 : 왕에게 청을 올림)하였으나, 그것은 당연한 처사라고 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허준은 선조의 피난지인 의주까지 호종(扈從 : 왕의 가마를 수행함)하여 왕의 곁을 조금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모셔 호종공신 ( 扈從功臣 )이 되었으며, 그 뒤에도 어의로서 내의원에 계속 출사하여 의료의 모든 행정에 참여하면서 왕의 건강을 돌보았다.

그러던 중 1596년에 선조의 명을 받들어 유의 ( 儒醫 ) 정작(鄭 殯 ), 태의 양예수 · 김응탁(金應鐸) · 이명원(李命源) · 정예남(鄭禮男) 등과 함께 내의원에 편집국을 설치하고 ≪ 동의보감 ≫ 을 편집하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해에 다시 정유재란을 만나 의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편집의 일은 중단되었다.

그 뒤 선조는 다시 허준에게 명하여 단독으로 의서 편집의 일을 맡기고 내장방서(內藏方書) 500권을 내어 고증하게 하였는데, 허준은 어의로서 내의원에서 의무에 종사하면서 조금도 쉬지 않고 편집의 일에 전심하여 10여년 만인 1610년(광해군 2)에 완성을 보게 되었는데, 25권 25책이다.

≪ 동의보감 ≫ 은 그 당시의 의학지식을 거의 망라한 임상의학의 백과전서로서 내경(內景) · 외형(外形) · 잡병(雜病) · 탕액(湯液) · 침구(鍼灸) 등 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우리 나라의 의학실력을 동양 여러 나라에 드러나게 한 동양의학의 보감으로서, 출판된 뒤 곧 일본과 중국에 전해져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출판되어 귀중한 한방임상의학서가 되었다.

허준은 ≪ 동의보감 ≫ 이외에도 많은 의방서 등을 증보 개편하거나, 또는 알기 쉽게 한글로써 해석, 출판하였다. 1601년 세조 때에 편찬한 ≪ 구급방 救急方 ≫ 을 ≪ 언해구급방 諺解救急方 ≫ 으로 주해하였으며, 임원준 ( 任元濬 )의 ≪ 창진집 瘡疹集 ≫ 을 ≪ 두창집요 痘瘡集要 ≫ 로 그 이름을 바꾸어 언해, 간행하였다.

1608년에는 노중례 ( 盧重禮 )의 ≪ 태산요록 胎産要錄 ≫ 을 ≪ 언해태산집요 諺解胎産集要 ≫ 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그리고 1612년에는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들을 구료하기 위하여 ≪ 신찬벽온방 新纂 陽 瘟方 ≫ 1권과 ≪ 벽역신방 陽 疫神方 ≫ 1권을 편집하여 내의원에서 간행, 반포하게 하였다.

전자인 ≪ 신찬벽온방 ≫ 은 그 전해 12월에 함경도와 강원도 양도에서 온역(瘟疫)이 유행하여 남으로 내려와서 각 도에 전파되므로 이미 전해오던 ≪ 간이벽온방 簡易 陽 瘟方 ≫ 을 다시 알기 쉽게 개편한 것이다. 후자인 ≪ 벽역신방 ≫ 은 그 해 12월에 각 지방에서 발진성(發疹性)의 열병인 당독역(唐毒疫)의 유행을 방지하기 위하여 편집하였다.

이러한 의방서들의 편찬은 ≪ 동의보감 ≫ 과 함께 우리 나라 명의로서의 관록을 더욱 자랑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허준은 내의 · 태의 · 어의로서 선조의 총애를 계속 받아왔다.

1601년에는 내의로서 정헌대부 ( 正憲大夫 ) ·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서임하였고, 1604년 6월에는 충근정량호성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 3등에 복명하면서 숙마(熟馬) 한 필을 하사받았으며, 1606년 정월에 양평군 정일품 보국숭록대부(陽平君正一品輔國崇祿大夫)를 가자받았다.

그런데 종래 우리 나라의 계급으로는 의업은 중서급(中庶級)에 속하였는데, 허준이 대신들과 계급을 같이하는 동반(東班 : 양반 중 文班)의 부원군(府院君 : 정1품 공신에게 주는 작호)과 보국(輔國 : 정1품인 輔國崇祿大夫의 준말)의 지위를 누리게 됨으로써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개정할 것을 계청하였다.

처음에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고집하였으나 선조도 끈질긴 계속적인 계청에 할 수 없이 그 가자를 한때 보류하도록 하였다.

1607년 11월에 선조의 환후가 점차로 위독하게 되어 그 다음해 2월에 죽을 때까지 허준은 입진의 수의 ( 首醫 )로서 다른 어의들을 독려하여 어약을 논하는 모든 일을 전담하였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어의로서 왕의 측근에서 총애를 받아왔다.

선조가 죽은 뒤 종래의 예에 따라 주치의 수의에게 책임을 물어 형식적으로 대죄(待罪)를 하게 되었으나 광해군의 만류로 사면되었다.

1613년 11월에 70세를 일기로 죽게 되자, 호성(扈聖) 공로의 어의로서 선조가 일찍이 보류하였던 부원군과 보국의 가자를 추증하였다. 허준은 의인으로서 최고의 명예인 당상의 부군과 보국의 지위를 누렸다.

 

허숙

숙종(肅宗) 때 화가(畵家)로 유명.

 

허원(許遠)

과학자(科學者)로 이름을 날림.

 

허재욱(許在旭)

한말(韓末)의 의병대장(義兵隊將) 재욱(在旭)은 양천 허씨(陽川許氏)의 가문을 자랑되게 하였다.

 

許穆(허목) 선생의 일화

1

허적의 아들

허미수와 허적의 아버지가 절에서 함께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절에서는 매월 보름이면 중이 하나씩 없어졌다. 허적의 아버지가 살펴보니 이무기가 나타나 중을 잡아먹기 때문이었다.

허적의 아버지는 이무기를 칼로 죽였다. 그러자 이무기의 기운인 파란 줄기가 그의 집으로 뻗치는 것이었다.
허미수는 그것이 상서롭지 못한 조짐이라고 판단하여 그 집에서 아들을 낳는 족족 없애도록 충고했다. 허적의 아버지는 그의 충고를 따라 두 아이를 없앴다.

셋째 아이를 낳자 허미수는 그 아이마저 허가(許家)의 멸족을 초래할 것이라 하여 죽이려 했으나 허적의 아버지는 더는 죽일 수 없노라며 아이를 살려두었다. 그러나 허미수는 그 아이로 인한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미리 알고 형제간에 파적(破籍)하였다고 한다.
허적은 아주 뛰어난 신동이었으나 결국 역적이 되어 가문에 화를 입혔다.

 

2

   陟州東海碑(척주동해비)

1661년(현종 2) 삼척부사로 부임한 許穆(허목)은 매년 겪는 물난리로 고생하는 부민들의 고통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당시 삼척은 파도가 심하여 조수가 읍내까지 올라오고, 오십천(五十川)이 자주 범람하여 피해가 극심했다. 이를 염려하던 허목이 동해송(東海頌)을 지어 정라진(汀羅津) 앞 만리도에 척주동해비를 세우자 바다가 조용해졌고 다시는 물난리가 없었다고 한다.

그 후 비가 파손되어 다시 조수가 일게 되자, 1710년(숙종 36) 비문을 그대로 베껴 지금의 위치에 세웠다고 한다.
그러자 바다는 다시 조용해지고 그토록 부민들을 괴롭히는 수해는 없어졌다고 한다.

 

 

 

陟州東海碑(척주동해비)

 

瀛海漭瀁(영해망양) 百川朝宗(백천조종) 其大無窮(기대무궁)

東北沙海(동북사해) 無潮無汐(무조무석) 號爲大澤(호위대택)

積水稽天(적수계천) 渤潏汪濊(발휼왕예) 海動有曀(해동유애)

明明暘谷(명명양곡) 太陽之門(태양지문) 羲伯司賓(희백사빈)

析木之次(석목지차) 牝牛之宮(빈우지궁) 日本無東(일본무동)

鮫人之珍(교인지진) 涵海百産(함해백산) 汗汗漫漫(한한만만)

奇物譎詭(기물휼궤) 宛宛之祥(완완지상) 興德而章(흥적이장)

蚌之胎珠(방지태주) 與日盛衰(여일성쇠) 旁氣昇霏(방기승비)

天吳九首(천오구수) 怪夔一股(괴기일고) 颷回且雨(표회차우)

出日朝暾(출일조돈) 轇軋炫煌(교알현황) 紫赤滄滄(자적창창)

三五月盈(삼오월영) 水鏡圓靈(수경원영) 列宿韜光(열숙도광)

扶桑沙華(부상사화) 黑齒麻羅(흑치마라) 撮髻莆家(촬계보가)

蜑蠻之蠔(단만지호) 爪蛙之猴(조와지후) 佛齊之牛(불제지우)

海外雜種(해외잡종) 絶黨殊俗(절당수속) 同囿咸育(동유함육)

古聖遠德(고성원덕) 百蠻重譯(백만중역) 無遠不服(무원불복)

皇哉凞哉(황재희재) 大治廣博(대치광박) 遺風邈哉(유풍막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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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바다 가없이 일렁이고 온갖 냇물이 흘러드니 그 큼이 끝이 없어라.

동북은 모래바다 밀물썰물 없으므로 大澤(대택: 동해를 이름)이라 이름 했내.

쌓인 물은 하늘에 다다르고 출렁댐이 넓고도 아득하니 바다의 움직임엔 음산함이 서려 있네.

밝디 밝은 暘谷(양곡: 해 뜨는 곳)은 해 뜨는 문이로다.

羲伯(희백: 요순 때 천지와 사시를 다스린 관원)이 공손히 해를 맞으니

析木(석목: 동쪽에 있는 두 별)의 위치요, 牝牛(빈우: 丑方의 두 별)의 궁으로 해 돋는 동쪽의 끝이로다.

鮫人(교인: 물속의 괴물)의 보배와 바다의 온갖 산물 많기도 하여라.

기이한 물건 조화를 부려 너울대는 상스러움은 덕을 이루어 나타남이로다. 조개는 진주를 잉태하고 달과 함께 성하고 이지러지며 기운을 토하고 김을 토하고 머리 아홉인 天吳(천오: 머리는 범 몸은 사람인 水伯)와 외발달린 괴물 소는 태풍을 일으키고 비를 뿌리네.

아침에 돋는 햇빛 찬란하고 눈부시니 자줏빛 붉은 빛이 일렁거린다.

삼오야 둥실 뜬달 물은 거울이 되어 주위를 신령스럽게 비추니 늘어선 별들이 빛을 감추네. 扶桑(부상: 해가 밤에 머무는 나무)沙華(사화: 동해에 있는 나라)黑齒(흑치: 남만에 있는 종족) 麻羅(마라: 남만에 있는 종족), 상투 튼 莆家(보가: 종족의 이름)蜑蠻(단만: 종족의 이름)의 굴과 조개 爪蛙(조와: 부족 이름)의 원숭이, 佛齋(불재: 부족 이름)의 소들은 바다 밖 잡종으로 무리도 다르고 풍속도 다른데 한 곳에서 함께 자라네.

옛 성왕의 성덕이 멀리 미쳐서 모 든 오랑캐들에게 거듭 알려져 멀리 까지 복종하지 않는 곳이 없었네.

아아! 크고도 빛나도다.

큰 다스림은 널리 퍼져 남겨진 풍모는 끝이 없어라.

 

 

都護府使 陽川 許穆 先生碑文

 

<참고>척주동해비란?

강원도 삼척시 정상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비석의 비문.

19711216일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었다.

1661(현종 2) 삼척부사 허목(許穆)이 세운 것으로, 조수를 물리치는 능력이 있다 하여 퇴조비(退潮碑)라고도 한다. 당시 삼척은 파도가 심하여 조수가 읍내까지 올라오고, 오십천(五十川)이 자주 범람하여 피해가 극심했다. 이를 염려하던 허목이 동해송(東海頌)을 지어 정라진(汀羅津) 앞 만리도에 동해비를 세우자 바다가 조용해졌다고 한다. 그 후 비가 파손되어 다시 조수가 일게 되자, 1710(숙종 36) 비문을 그대로 베껴 지금의 위치에 세웠다. 비문은 고전자체(古篆字體)로 씌어졌는데, 전서체(篆書體)의 대가인 허목의 필체이다.

 

 

3

허미수 태생 설화

조선조에 그 유명한 시인은 많지만 임백호도 시인으로 명망이 높았던 분이다. 그런데 그 임백호는 남들이 자는 조용한 밤에 글공부를 주로 하고 낮에는 낮잠을 자는 그런 버릇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 글방에서 잠을 자는데 꿈을 꾸었다.

꿈에 갑자기 자기 방안에 황금색 날개가 달린 새가 날라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기 방을 날라서 빙빙 세 번 돌고는 휭 나가는데 너무 이상하고 신기한 꿈이었다.
잠을 깨고 꿈을 생각하니 아무리 봐도 보통이 아닌 꿈이라고 생각해서 꿈을 해몽해 보기로 하였다.

주역과 오행에 도통한 그는 그 꿈을 해몽해 보니까 그 상당히 좋은 길몽이라는 것을 알았다.
길몽 중에서도 이것은 태몽이라 무릎을 탁 치면서
「야! 이 태몽을 우리 집안에서 꾸었는데 우리 집안에서 좋은 아기가 태어나야 되지 않겠느냐!」
그르면서 생각해 보니 자기 집안에 이 태몽을 받아들임만 젊은 며느리가 있었으므로, 자기 며느리한테 이 태몽을 주어서 자기 집 손으로 태어나게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며느리를 불렀는데, 때마침 시집간 딸이 짐에 와 있었다.

며느리를 부르는데 딸이 아버지 앞에 나타나서
「아버지 왜 부르십니까?」
「아니다 너는 아니야. 우리 며느리 아기를 좀 부르는 거니까 너 가서 언니 빨리 좀 나한테 오라 하여라.」
「아이고 아버님. 언니는 지금 머리를 감고 있어서 한참 걸리는데요.」
그 당시만 해도 머리가 요즈음 사람처럼 짧은 게 아니고 길어서 한번 깜으려면 상당히 긴 시간이 걸렸다.
할 수 없이
「그러냐? 그러면 언제쯤 끝나는 거야?」
「아이 지금 시작했는데요. 뭐 아직도 멀었어요.」
「하! 이거 시를 넘기면 안 되는데.. 그래도 가서 빨리 오라고 얘기해봐라. 내가 급히 찾으니까 지금 들어와 보라고 일러라.」 했더니 언니에게 갔다가 돌아온 딸이
「도저히 못 온다고 합니다.」
「아아! 야단 났는데... 시를 넘기는 아무 효험이 없어지는데......」

하면서 그 아까운 꿈을 그냥 버릴 수가 없어 딸에게라도 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여, 그 꿈 이야기를 딸한테 해주어 꿈을 딸에게 넘겨주었다.

관연 딸은 그 뒤 태기가 있어 열달이 지난 뒤 귀여운 옥동자를 낳았는데, 그가 그 유명한 허목(許穆) 선생이라는 것이다.

 

 

 

許浚(허준)  선생이 남긴 일화

1

코끼리

허준이 명의로 이름을 얻기 전 약을 찾으려고 사신 일행과 함께 중국의 무려산에 도착했는데, 길가에 한 무리의 코끼리 떼가 있다가 한 놈이 허준의 말 앞으로 나와 가로막으며 옷을 끌었다.
그가 말에서 내리니 코끼리가 엎드려 절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함께 가자는 듯 하므로 그가 응낙하자 그를 태우고 깊은 산 속의 굴로 달려갔다. 굴 안에 세 마리의 아기 코끼리들이 피를 흘리고 누워 있으므로 허준이 약을 내어 치료했다.

아기들이 낫자 어미가 다시 그를 태워 옥하관에 내려놓고 가 다시 사신들과 합류하게 되었다. 일의 자초지종을 듣고 난 일행이 모두 경탄하였고 이로 인해 허준은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후일 내의에 오르게 되고 임란 때 호성공신으로 양평군에 봉해졌다.

 

2

스승의 도움을 받은 허준

허준이 젊어서 이인을 만나 의술을 배웠다.
10년을 약조하고 공부를 하던 중 스승이 없는 사이 함부로 과부 아들의 병을 고쳐주었다가 8년 만에 쫓겨 갔다.
그 뒤 의술로 명성을 쌓아 중국 천자 딸의 병을 고쳐 달라고 초빙되어 가는 길에, 호랑이 입에서 비녀를 꺼내주고 절구와 쇠, 더러운 베를 얻었으나 베가 죽은 이를 살리는 회혼포(廻魂布)인 줄 몰라보고 버렸다.

그는 환자의 병을 사맥(蛇脈)으로 진단했으나 고칠 방도를 몰라 말미를 얻어 고민하던 중 어떤 이인이 나타나 그것이 용맥이며 절구와 쇠로 고칠 수 있음을 알려주어 치료해 주었다.

귀국한 후 다시 중국으로 불려가 큰 구렁이로 변한 천자 딸을 고쳐 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역시 방도를 몰라 죽을 고민을 하고 있는데 스승이 나타나 처방을 알려주어 원래의 몸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큰 명성을 얻고 높은 벼슬을 받은 뒤 귀국하였다.


비문은 고전자체(古篆字體)로 씌어졌는데, 전서체(篆書體)의 대가인 허목의 필체를 지금도 거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許蘭雪軒(허난설헌) 여사의 일화.

 

본관은 양천(陽川).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 ()의 딸이고, ()의 여동생이며, ()의 누나이다. 문한가(文翰家)로 유명한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용모가 아름답고 천품이 뛰어났다 한다.

오빠와 동생 사이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집안과 교분이 있던 이달(李達)에게서 시를 배웠다.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 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지어 신동이라고까지 했다.

 

15세에 김성립(金誠立)과 혼인했으나 결혼생활이 순탄하지 못했다. 남편은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나 기방을 드나들며 풍류를 즐겼고, 시어머니는 시기와 질투로 그녀를 학대했다.

게다가 어린 남매를 잃고 뱃속의 아이마저 유산했다. 친정집에는 옥사(獄事)가 있었고, 동생 허균도 귀양가버리자 삶의 의욕을 잃고 시를 지으며 나날을 보내다가 27세로 요절했다.

213수가 전하며, 그중 신선시가 128수이다. 그녀의 시는 봉건적 현실을 초월한 도가사상의 신선시와 삶의 고민을 그대로 드러낸 작품으로 대별된다. 후에 허균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시를 보여주어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발간되는 계기가 되었다. 유고집으로 난설헌집이 있다.

<인용: 다움 백과사전>

 

許蘭雪軒(허난설헌)許筠(허균)의 일화

 

조선 최고 女類詩人(녀류시인) 許蘭雪軒(허난설헌)洪吉童傳(홍길동전)“ 許筠(허균)의 누나이다.

 

요즘도 남매작가가 흔하지 않은데 조선시대에

유명한 남매작가가 있었다

바로 洪吉童傳(홍길동전)을 쓴 許筠(허균)과 누나 許蘭雪軒(허난설헌) 이다.

 

홍길동은 아버지가 재상이라는 높은 벼슬자리에 있었지만

서얼(庶孼:첩의 자식)로 태어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무시당했던 洪吉童(홍길동)

집을 나와 活貧黨(활빈당)을 만들고. 그는 탐욕이 많고

나쁜 짓 을 일삼는 벼슬아치들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을 도와주는 義賊(의적)활동을 했다.

이러한 내용의 홍길동전을 쓴 사람이 바로

허균(許筠:1569-1618)이다

 

그는 그 내용에서 부패한 정치는 개혁해야 하다고 역설했지만

오늘날 까지도 깨끗한 정치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듯 하다.

 

 

허난설헌(許蘭雪軒:1563-1589)은 조선 최고의 여성작가로

꼽힌다

조선시대는 여성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때였지만

아버지 허엽과 오빠 허봉은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난 난설헌에게 공부를 가르쳐

자유롭게 생각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런데 난설헌이 결혼한 후 남편과의 사이가 좋지 않고

심한 시집살이에 불행하게도 어린 아들과 딸 마져 잃게 되어

그는 주로 자기 자신에 대한 내용을 무려 1000여 편이

넘는 글을 썻지만

세상을 떠날 때는 내가 쓴 글을 모두 태워 없애라고 했다한다

 

그러나 동생 허균이 200여편이 넘는 시를 명나라 시인에게

보여주었다고 한다

명나라 시인 주지번은 난설헌의 시에 감탄하여

시집 난설헌집을 냈다고 한다.

이것은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끓었고 이후 일본에서도

번역되어 많은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허난설헌은 우리나라보다 중국과 일본에서

먼저 유명해진 시인이다.

강원도 강릉에는 許筠(허균)과 허난산설헌 기념관이 있는데

두 남매의 업적을 볼수있는 자료들이 있고

이들이 살던 집도 되살려 놓았다고 한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은 반역을 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당했고 그의 집안은 그의 느명으로 망했다

그러나 허균과 허난설헌은 지금 누구나

알정도로 유명해지고

이 기념관은 세월을 훌적 뛰어 넘는 이들 남매의 문학적

업적과 그들의 인생을 살펴 볼수 있는 곳 라고 한다.

<안용: 우대받는 세대>

 

 

출전 <한미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31

萬(만)

36

範(범)

41

學(학)

32

旭(욱)

37

康(강)

42

秉(병)

33

會(회)

38

宰(재)

43

演(연)

34

行(행)

39

廷(정)

44

卿(경)

35

茂(무)

40

揆(규)

45

振(진)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남한(南韓)에 총 27,337가구, 114,86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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