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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태인허씨(許)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許(태인허씨)

 

 

본관(本貫): 태인(泰仁)

시조(始祖): 허사문(許士文)

유래(由來):

 

 태인 허씨(泰仁許氏)의 시조(始祖) 허사문(許士文)은 수로왕비(首露王妃) 허황옥(許黃玉)의 30세손으로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부마(駙馬)였으며 시산군(詩山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가문의 중요 인물

 

허포(許褒)

사문의 후손 포(褒)가 고려 때 기천 현령(奇川縣令)·풍해도 관찰사(豊海道觀察使) 등을 지낸 후 태산군(泰山君)에 봉해졌다.

 

허엄(許儼)

병부 시랑(兵部侍郞)을 역임하였다.

 

허벽(許壁)

엄의 아들로 이부 시랑(吏部侍郞)을 지냈고 시산부원군(詩山府院君)에 봉해진 벽(壁)이 유명했다.

 

허경(許慶)

?∼1115(예종 10). 고려 중기의 문신. 헌종 때 과거에 급제, 문학 ( 文學 )으로 이름이 알려지고 청렴하고 충직하여 조정의 신임을 받았다.

숙종이 잠저 ( 潛邸 )에 있을 때 불러 부료(府僚)로 삼았으며, 즉위한 뒤 추밀원승선(樞密院承宣)을 제수받고 금중(禁中)에 출입하여 왕의 총애를 받았다. 1101년(숙종 6)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즉위사(卽位使)가 되어 당시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곽상(郭尙)과 요(遼)에 다녀왔다.

예종이 즉위하자 이부시랑 추밀원좌승선(吏部侍郎樞密院左承宣)에 제수되었으며, 1109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를 거쳐 형부상서 추밀원사(刑部尙書樞密院使),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에 올랐다.

1113년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檢校太尉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를 더하고 치사(致仕)하였다. 시호는 순평(順平)이다.

 

허사문(許斯文)

경의 둘째 아들 사문(斯文)이 낙안 군수(樂安郡守)를 역임했다.

 

허사행(許斯行)

경의 네째 사행(斯行)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허사제(許斯悌)

경의 막내 사제(斯悌)는 사평(司評)을 지내 태인 허씨 가문을 빛냈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허씨(泰仁許氏)는 남한(南韓)에 총 1,305가구, 5,95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許興(허흥)의 결심

 

 

보리죽 10년 고생

 

경기도 여주 땅에 허씨 성을 가진 선비가 있었다. 가난한 처지에서 늙도록 과거 공부 에 열중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다행히 허선버는 생전에 성품이 온화하고 덕망이 높았던 까닭에 이웃과 먼 친척의 도움으로 근근히 살았고 사후의 장례도 체면을 잃지 않게 치를 수 있었다.

 

이 때 허선비에게는 장성한 아들 삼형제가 있었다. 이 아들들 역시 부친을 따라 어려서부터 과거 공부를 하였다.

부친의 장례식을 마친 날, 둘째 아들 허홍이 형과 아우에게 이런 의견을 꺼내었다.

 

이제까지 아버님 덕으로 이웃과 친척의 도움을 받았지만 앞으로는 그나마도 끊겨 업 에 풀칠도 못할 것 같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우리 형제가 제각기 살림을 따로 나누는 것이 좋겠는데 어떻습니까.

형과 동생은 졸지에 어떻게 해야 될지 몰랐다. 그래서 형은,

아는 것이라고는 글밖에 없는데 장차 무슨 수로 딴 살림을 하라는 건가?하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허홍은 진작부터 생각해 두었던 일이 있었다.

형님과 아우는 역시 글공부를 계속하십시오. 나는 무슨 짓을 해서든지 돈을 벌겠습니다. 넉넉잡고 10년이면 돈을 모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형님과 아우는 내가 보살펴 드리겠으니 안심하십시오.

형과 아우는 결국 이 의견을 따랐다.

 

허흥은 우선 형수와 계수를 따로 얻은 오막살이에 옮겨 살게 하였다. 그리고 형과 아 우는 근처 조용한 절에 가서 과거 공부를 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그런 다음,

지금 남은 것은 세 마지기 논과 헐어져가는 집, 그리고 어린 계집 종 하나뿐이오. 이것은 나한테 맡겨 주시오.하고 말하였다.

이렇게 살림도 나눈 후, 허흥은 아내의 패물을 팔아서 고스란히 미역과 바꾸어 왔다.

 

미역을 젊어진 허흥은 그 날부터 일가와 친척을 차례로 찾아가,

이것은 변변치 않으나 이제까지 신세 진 보답으로 드리는 것이니 받아 주십시오.하고 미역을 조금씩 나눠 주었다. 친척들은 고마움의 표시로 양식거리를 보태주려 하였다. 그러나 허흥은,

 

정 주시려면 목화나 얼마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마침 그 해는 목화가 풍년이라, 사람마다 허홍에게 몇 부대씩 선뜻 내어 주었다.

많은 목화를 얻은 허흥은 그것으로 실을 만들고 무명을 썼다. 무명을 판돈으로 다시 목화를 사서 또 무명을 짜서 팔았다.

 

일은 허홍 내외와 어린 종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하였다. 그동안 먹을 것이 라고는 끼니마다 멀건 보리죽뿐이었다. 그것도 허흉 내외는 반 그릇만 먹고 어린 종은 또박또박 한 그릇을 주었다.

 

일을 많이 시키고 배를 골리게 해서 미안하다. 그러나 견디기 어려우면 다른 데에 가도 좋다.

하는 주인의 말에 어린 종은,

아니옵니다. 저는 황송해서 ------

하고 뒷말을 잇지 못하였다. 어쨌든 주인보다는 많은 죽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해서 3년이 지난 후에는 논과 밭을 조금 살 수 있었다. 논에는 벼를, 밭에는 담배를 심었다.

 

허홍은 날이 갈수록 더욱 부지런히 일을 하였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한시도 쉴 줄을 몰랐다.

 

이러한 정성과 부지런함으로 논밭은 언제나 대풍이었다. 아무리 홍수가 나고 가뭄이 들어도 여전히 풍작이었다.

 

7년의 세월이 흘러 10리 둘레의 기름진 땅은 거의 손에 넣게 되었다. 하지만 사는 집은 여전히 오막살이였고, 먹는 음식도 변함없이 반 사발의 보리죽뿐이었다.

 

그런 어느 날, 공부하던 형과 아우가 허흥을 찾아 왔다. 7년 만에 처음으로 만난 것이다.

 

3형제는 반가움과 기쁨으로 어쩔 줄 몰랐다.

이날 저녁 허홍의 아내는 흰 쌀밥과 고기반찬, 좋은 술까지 곁들여 푸짐하게 차려 내왔다. 그러자 허홍의 안색이 변하며,

이게 무슨 짓이오. 어서 상을 물려가오. 그리고 날마다 하는 대로 보리죽을 끓여 와요!

하고 큰 소리로 아내를 꾸짖었다.

 

허홍의 아내는 무안해서 낯이 새파래졌다. 그러나 더욱 난처하고 야속하게 느낀 사람은 형과 아우였다.

 

, 이렇게 부자가 되었어도 모처럼 온 형제에게 밥 한 그릇 안 먹이도록 인색해졌느냐? 너만 잘살면 형제는 굶어도 좋단 말이지?

형이 펄쩍 뛰며 호통을 치자, 허흥은 조용히 타이르듯이 이렇게 말하였다.

 

큰 뜻을 이루자면 굳은 결심을 해야 된다고 들었습니다. 보시다시피 나는 지금 잘 먹고 잘 살 만큼 살림은 늘었습니다. 그렇지만 처음 결심한 10년 기한이 아직 차지 않았는데 어찌 도중에 뜻을 굽혀 사치스레 살 수 있습니까? 형님과 아우도 학문이 많이 진보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아직 서울 큰 과거가 남아 있으니, 앞으로 3년간의 양식과 과거 비용을 미리 드릴 것이니 3년 후에 다시 만나도록 합시다.

 

형과 아우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절에 들어가 3년 동 안 더욱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리하여 서울 과거에 형제가 나란히 급제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오려고 여주 고을에 막 들어섰는데, 동생이 보낸 가마가 기다리고 있고, 그 옆에 십여 명의 하인과 교꾼이 대령하고 있었다.

 

이뿐이 아니었다. 하인을 따라 주막에 들어가니 갈아 업을 새 옷도 마련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기쁨과 반가움을 금하지 못하였다.

 

허흥은 마을 밖 멀리까지 나와 형과 아우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큰 잔칫상이 벌어지고, 축하의 인사말이 끝나자 허흥은 형 앞에 절을 하고 꿇어 앉았다.

 

그동안 형님과 아우에게 지나친 고생을 시켰습니다. 지금의 이것은 오로지 형님과 아우가 잘 참고, 부지런히 공부하신 덕인가 합니다. 이제 우리 삼형제가 살 수 있는 집 도 마련해 놓았으니 먼저 그곳으로 가십시다.

 

허흥을 따라간 형과 아우는 고래 등 같은 큰 기와집이 나란히 세 채나 있는 것을 보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거기에다 각 집에는 하인이 따로 있었고, 세간들도 꽉 차 있었다.

 

진짜 몸만 들어가면 되는 것이었다. 바로 이때 이들은, 무슨 일이든 굳은 결심으로 끝까지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또한 허흥은 형과 아우가 벼슬이 높아졌을 때, 무술 공부를 시작하여 마침내 무과 시 험에 합격하였다고 한다.

출전<불교설화집 정두서 저>

 

 

 

출전 <한미족대성보>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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