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ail : juntonggahun@naver.com
>> 한국의 성씨


하양허씨(許)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許(하양허씨)

 

 

본관(本貫): 하양(河陽)

시조(始祖): 허강안(許康安)

유래(由來):

 

 하양 허씨(河陽許氏)는 고려(高麗)때 호부 낭장(戶部郞將)을 역임한 허강안(許康安)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강안은 가락국(駕洛國) 허황후(許皇后)의 33세손으로 전(傳)하며, 말년(末年)에 호장(戶長)을 지냈고 하주(河州)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였다.

 그리하여 본관(本貫)을 하주(河州)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다가 지명(地名)이 개칭됨에 따라 화성(花城)으로 개관(改貫)하였으며 그 후 하양(河陽)으로 하고 있다.

 

가문의 중요 인물

 

허작린(許綽麟)

강안의 손자 작린(綽麟)이 고려(高麗)에서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을 지냈다.

 

허신(許愼)

강안의 증손(曾孫) 신(愼)은 호부주사(戶部主事)·동정(同正)등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허주(許周)

1359(공민왕 8)∼1440(세종 22).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하양 ( 河陽 ). 자는 백방(伯方)·백공(伯公). 할아버지는 도관정랑(都官正郎) 윤창(允昌)이고, 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 귀룡(貴龍)이며, 어머니는 통례부사(通禮副使) 이길(李吉)의 딸이다.

문과에 급제해 전법정랑(典法正郎)에 오르고, 1385년(우왕 11) 지양주사(知襄州事)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성을 쌓았다. 1388년 지안성군사·장령을 거쳐, 1390년 공부총랑(工部摠郎)·경기우도염문계정사(京畿右道廉問計定使)로서 이성계 ( 李成桂 )일파의 전제개혁에 참가하였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내부경(內府卿)에 임명되었는데, 그의 인척들이 고위 관직을 점유함으로써 조선의 거족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1397년(태조 6) 사헌중승(司憲中丞)을 겸직하고, 그 해에 노비변정도감도청사가 되어 노비 소유에 대한 소송 사건을 공정하게 처리하였다.

1399년(정종 1) 노비변정도감이 폐지되자, 판사수감사(判司水監事)·지형조사(知刑曹事)를 역임하였다. 1401년(태종 1)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로서 경상도안렴출척사(慶尙道按廉黜陟事)가 되었으나, 새로 개간된 토지 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해 이듬해 양주에 유배되었다.

1405년 형조참의를 거쳐, 이듬해 호조좌참의 판홍주사가 되었다가 병으로 사임하였다. 그러다가 1409년 전라도관찰사, 이듬해 참지의정부사·한성부윤·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낸 뒤 병으로 사직하였다.

1416년 개성유후사유후로 복직되고, 1418년(세종 즉위년) 판한성부사로 재직 중 다시금 병으로 사퇴하였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성품이 강직해 공사를 분명하게 처리하였다. 또한 가법(家法)이 엄격해 사당의 모든 행사를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좇아 행하였다. 시호는 간숙(簡肅)이다.

 

허조(許稠)

1369(공민왕 18) ∼ 1439(세종 21).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하양 ( 河陽 ). 자는 중통(仲通), 호는 경암(敬菴). 판전객시사 수(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관정랑(都官正郎) 윤창(允昌)이고, 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 귀룡(貴龍)이며, 어머니는 통례문부사 이길(李吉)의 딸이다. 권근 ( 權近 )의 문인이다.

1383년(우왕 9) 진사시, 1385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390년(공양왕 2) 식년문과에 급제해 전의시승(典儀寺丞)이 되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좌보궐 ( 左補闕 ) · 봉상시승(奉常寺丞)으로서 지제교를 겸해 예악제도(禮樂制度)를 바로잡는 데 힘썼다.

1397년 전적이 되어 석전 ( 釋奠 )의 의식을 개정했으며, 1399년(정종 1) 좌보궐로서 지제교를 겸하였다. 태종이 즉위하자 사헌부잡단(司憲府雜端)으로 발탁되었으나, 강직한 발언으로 왕의 뜻을 거슬러 완산판관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강직한 성품이 다시 인정받아 1402년(태종 2) 이조정랑, 1404년 호군 · 집현전직제학으로서 세자시강원좌문학이 되었다. 1406년 경승부소윤(敬承府少尹), 이듬해 예문관직제학으로서 세자시강원문학을 겸임하였다.

세자가 명나라에 들어가게 되자 집의에 올라 서장관으로 수행하였다. 이 때 명나라의 여러 제도를 자세히 조사하였다. 그리고 귀국 중에 들렀던 궐리(闕里)의 공자묘(孔子廟)를 본떠 조선의 문묘에서 허형(許衡)을 제향하고 양웅(揚雄)을 몰아내었다.

1408년 판사섬시사(判司贍寺事)로 세자시강원우보덕을 겸했으나, 조대림사건(趙大臨事件)에 연루되어 춘주 ( 春州 )로 귀양갔다. 그러나 곧 경승부윤으로 복직했으며, 1411년 예조참의가 되어 의례상정소제조를 겸임하였다. 이 때 사부학당을 신설하고 왕실의 각종 의식과 일반의 상제(喪制)를 정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태종조에 이루어진 많은 예악제도는 거의 그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다시피 하였다. 뒤에 이조 · 병조의 참의를 거쳐 평안도순찰사가 되었는데, 도내의 민폐를 자세히 조사 · 보고하면서 조세 감면과 왕의 수렵 자제를 극간하기도 하였다.

1415년 한성부윤 · 예문관제학, 1416년 예조참판 · 제조, 1418년 개성유후사유후 · 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세종 즉위 후에는 공안부윤(恭安府尹) · 예조판서로서 부민고소금지법 ( 部民告訴禁止法 )을 제의해 시행케 하였다. 또한 시관이 되어 많은 인재를 발탁하였다.

1422년(세종 4) 이조판서가 되자 구임법 ( 久任法 )을 제정해 전곡을 다루는 경관(京官)은 3년, 수령은 6년 임기를 채우도록 정하였다. 그리고 죄인의 자식이라도 직접 지은 죄가 없으면 처벌하지 않도록 하는 법제를 만들었다. 또한 이듬해에는 ≪ 속육전 續六典 ≫ 의 편수에도 참가하였다.

1426년 참찬 · 빈객이 되었다가 이조판서에 재임했는데, 이때 대간들의 간언을 두호(斗護 : 남을 두둔해 돌보아 줌.)해 언로를 넓힐 것을 주장하였다. 1428년 판중군도총제부사가 되어서는 동북방의 적을 막기 위해 평안도에 성곽을 쌓고 전선 ( 戰船 )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1430년 찬성을 거쳐, 1432년 다시금 이조판서에 올라 관리 임명에 공정을 기하는 한편, 효자순손(孝子順孫)과 충현(忠賢)들의 자손을 발탁해 예교(禮敎)를 장려하는 데 힘썼다. 이듬해 세종이 파저강야인(婆渚江野人) 이만주(李滿住) 등을 치려고 하였을 때는 후환이 있을 수 있다면서 극력 반대하였다.

1435년 지성균관사가 되고, 이듬해에는 예조판서를 겸임하였다. 과거시험에서 사장 ( 詞章 )보다는 강경 ( 講經 )을 중시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초장강경(初場講經)을 주장했으나, 이를 성사시키지는 못하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사장 중시의 경향이 강했던 때문이었다.

1438년에는 세종을 도와 신숙주 ( 申叔舟 ) 등 진사 100인과 하위지 ( 河緯地 ) 등 문신급제자 33인을 뽑았고, 같은 해 우의정 영집현전춘추관사 세자부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궤장( 廓 杖)이 하사되고 좌의정 영춘추관사에 올랐으나, 그 해에 죽었다.

≪ 소학 ≫ · ≪ 중용 ≫ 을 즐겨 읽었고 효행이 지극했으며,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 특히, 유교적 윤리관을 보급해야 하는 조선 초기에 태종 · 세종을 도와 예악제도를 정비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세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허성(許誠)

1382(우왕 8) ∼ 1441(세종 2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하양 ( 河陽 ). 자는 맹명(孟明). 윤창(允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귀룡(貴龍)이고, 아버지는 한성부판윤 주(周)이며, 어머니는 이원상(李元 莎 )의 딸이다. 1402년(태종 2) 식년문과에 동진사 ( 同進士 )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을 거쳐, 사간원우정언이 되었다.

그 뒤 형조 · 예조 · 병조의 좌랑을 거쳐, 1411년 지평에 올랐다. 곧 공조정랑에 올랐고, 장령이 되었다. 1421년(세종 3) 지사간원사 ( 知司諫院事 )가 되고, 우사간과 동부대언(同副代言)을 거쳐, 지신사 ( 知申事 )가 되었다. 1431년에 대사헌에 올랐고, 곧이어 형조참판과 예조참판을 지낸 뒤 경기도도관찰사가 되었다.

1435년 예조판서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임하였다. 이듬해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1438년 중추원사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다. 1440년 예문관대제학에 이르러 병으로 사임하였다. 성격이 강직하고 불의를 못 참았으며, 총명함으로 왕의 총애를 받았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허후(許珝)

 조(稠)의 아들 후(珝)는 문종(文宗)때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세종실록(世宗實錄)」편찬에 참여했고, 단종(端宗)때 좌찬성(左贊成)이 되어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등과 함께 문종(文宗)의 유명을 받들어 어린 단종(端宗)을 보필하는데 앞장섰으며,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나자 이를 개탄하여 고기를 먹지 않아 의심을 받다가 거제도(巨濟島)에 유배되어 죽음을 당했다.

 

허계(許誡)

?∼1502(연산군 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하양 ( 河陽 ). 윤창(允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귀룡(貴龍)이고, 아버지는 중추원부사 척(倜)이며, 어머니는 고안승(高安勝)의 딸이다. 1459년(세조 5) 진사로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예문관검열로 등용되어 집의를 거쳐, 1475년(성종 6) 장령이 되고, 1488년 좌통례 ( 左通禮 )가 되었다. 이듬해 부제학이 되고, 이어 우부승지·호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490년(성종 21) 밀양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푼 공으로 표리(表裏 : 왕이 내린 안팎의 옷감)가 하사되었다. 1493년 형조참의가 되고, 곧 대사간이 되었다. 병조참의를 거쳐, 경주부윤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글씨에 뛰어나 당시의 금석문 중에는 그의 작품이 많았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심공숙신도비문(沈恭肅神道碑文)과 판서윤계겸묘비문(判書尹繼謙墓碑文)이 있다.

 

 

許稠(허조) 선생의 일화 .

 

한때 許稠(허조) 는 행사를 주관하는 이조판서였는데, 술잔을 들고 물러나오다가 그만 실족해서 계단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다들 경악을 금치 못하는 상황에서 세종이 급히 다가가 한 말은 허 판서 다치지 않았나.”였다. 호조가 황망한 가운데 다시 계단 위에 올라와 사죄를 하자 세종은 계단을 넓혀서 앞으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라고 말했다.

 

마땅히 벌을 주어야 하는 상황에서 세종은 오히려 그의 몸이 상하지 않았는지를 묻고, 이어서 그가 무안하지 않도록 계단을 넓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세종보다 28세나 연상으로 줄곧 태종의 사람을 자처하던 許稠(허조)가 세종의 충성스러운 신하로 바뀌게 된 데이는 이때의 경험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許稠(허조) 선생의 일화

 

許稠(허조)는 일찍이 권근(權近)에게 배워 학업에 힘썼으며, 항상 사서(四書)<소학(小學)> <근사록(近思錄)> <성리학(性理學)> <명신언행록(明信言行錄)> 등의 서를 애독하고, 자손에게 소학의 예로 가르치고 행하게 하였다.

사람을 쓰는 데 공정하여 반드시 현우(賢愚)를 분간하였으며, 효자와 순손(順孫)은 다 거용(擧用)하였다.

   언관이 죄에 몰리면, 이를 적극 구호하였고, 사람의 과실을 말하지 않았으며, 일가 간에 화목하고 친구에게 미쁘고, 형을 섬기기를 아버지와 같이 하였다. 태종은 세종에게 참 재상이요, 우리에게 기둥이요, 주춧돌이라고 소개했으며, 세종은 그를 사랑하고 신임하였다.

   주현(州縣)에서 공창폐지론이 일어나 정부에 문의하였는데, 모두 혁파에 찬성하였으나, 그는 이를 폐지하면 그보다 더 큰 폐단이 있을 것을 말하여 그대로 두게 했다.

[출처] 조선 문신 허조(許稠)

 

許稠(허조) 선생의 일화

 

각종 의식과 상제를 정하는 데 크게 공헌한 許稠(허조).

1390(공양왕 2)許稠(허조)는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섰다.

강직한 성품으로 태종의 인정을 받았다. 1411년에 예조참의가 되어 의 례상소제조를 겸임했다.

허조는 사부학당을 신설하고 왕실의 각종 의식과 일반의 喪制(상제)를 정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태종을 도와 많은 예악제도가 정비했다. 그리고 그는 죄인에게 실시해온 연제법을 폐기 시키는 데도 크게 이바지했다. 필원잡기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 가전해온다.

許稠(허조)가 방정 공평 청렴 근신하여 매닭이 울면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관대를 차리고 바로 앉아서 종일토록 게으른 기색을 나타 내지 않았다.

그는 정성껏 나라의 일을 생각하여 사사로운 일에 미치지 않았다. 나랏일을 의논할 때는 훌로 자기의 신념을 지져서 다른 사 람들에게 맞추어 오르내리지 않았다.

일찍이 예조판서로 있을 때 위아래 벼슬아치들의 의복 빚깔을 마련하여 제도를 분명하게 했다. 어느 밤이었다. 허조가 책상 앞에 단정하게 앉아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도둑이 그의 집에 들어와서 물건을 모두 가져갔다. 許稠(허조)는 졸지도 않으면서 마치 진흙으로 만들어 놓은 허수아비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도둑 이 떠 지 오래 되어 집안사람들이 도둑맞은 사실을 얄고 뒤쫓아 갔다.

그러냐 도둑을 따라 잡지는 못했다.

집안사랑들이 분통해 했다.

이보다 더 심도둑이 마음속에서 싸우고 있는데, 어느 여가에 바깥 도둑 걱정을 할 건가. 하고 許稠(허조) 말했다.

<출전 인물 조선왕조실록>

 

 

 

출전 <한미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34

永(영)

39

源(원)

44

浩(호)

35

東(동)

40

植(식)

45

榮(영)

36

烈(열)

41

炳(병)

46

煥(환)

37

在(재)

42

奎(규)

47

基(기)

38

鉉(현)

43

鐘(종)

48

欽(흠)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하양 허씨(河陽許氏)는 남한(南韓)에 총 3,596가구, 14,78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게시물 목록
번호 제 목 글쓴이 등록일 조회
785 연주 현.jpg 연주현씨(玄) [1] 청남 14-08-30 5000
하양 허.jpg 하양허씨(許) 청남 14-08-30 4951
783 태인 허.jpg 태인허씨(許) 청남 14-08-30 3263
782 양천 허.jpg 양천허씨(許) 청남 14-08-30 5132
781 김해 허.jpg 김해허씨(許) 청남 14-08-30 4684
780 영해해씨(海) 청남 14-08-30 2483
779 강릉 함.jpg 강릉함씨:양근함씨(咸) 청남 14-08-30 5679
778 충주한씨(漢) 청남 14-08-30 3223
777 천주 한.jpg 청주한씨(韓) 청남 14-08-30 6051
776 곡산 한.jpg 곡산한씨(韓) 청남 14-08-30 4691
775 달성 하.jpg 달성하씨(夏) 청남 14-08-30 3414
774 진양 하1.jpg 진주하씨: 진양하씨(河) 청남 14-08-30 14942
773 대흥필씨(弼) 청남 14-08-30 2839
772 홍천 피.jpg 홍천 피씨(皮) 청남 14-08-30 2838
771 괴산 피.jpg 괴산피씨(皮) 청남 14-08-30 3103
770 임구 풍.jpg 임구풍씨(馮) 청남 14-08-30 3226
769 신창 표.jpg 신창표씨(表) 청남 14-08-30 5195
768 풍덕포씨(包) 청남 14-08-30 2799
767 충주 평.jpg 충주평씨(平) 청남 14-08-30 2849
766 희천편씨(扁) 청남 14-08-30 2671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