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ail : juntonggahun@naver.com
>> 한국의 성씨


연주현씨(玄)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연주현씨)

 

 

본관(本貫): 연주(延州)

시조(始祖): 현담윤(玄覃胤)

유래(由來):

 

현씨(玄氏)의 시조 현담윤(玄覃胤)은 본래 평안도(平安道) 연주(延州) 출신으로 고려(高麗) 의종조(毅宗朝)에 장군(將軍)을 지내고 명종(明宗) 때 일어난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라 연산군(燕山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현담윤(玄覃胤)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시조의 봉군지명(封君地名)인 연주(延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현씨(玄氏)의 본관(本貫)은 연주를 비롯하여, 성주(星州창원(昌原순천(順天) 등 무려 106()이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현존(現存)하는 본관은 30여 본에 불과하며 이들의 관향도 모두가 시랑공(侍郞公) 현담윤(玄覃胤)을 시조로 받드는 동조동근(同祖同根)의 자손들이 살았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므로 1747(영조 23) 정묘보(丁卯譜)를 편수(編修) 할 때 연주현씨(延州玄氏)로 단일화(單一化)하였고, 1982년에 간행된 임술보(壬戌譜) 때도 문중(門中)의 합의(合議)에 따라 본관을 연주로 통일(統一)하였다.

 

가문의 중요 인물

 

현덕수(玄德秀)

시조 담윤(覃胤)의 아들 3형제 중 덕수(德秀)와 이후(利厚) 두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반적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을 평정하는 데 훈공을 세워 맏아들 덕수가 내시지후(內侍祗侯)와 안남 부사(安南府使)를 거쳐 경상도 안렴사(慶尙道按廉使)를 역임한 후 신종(神宗)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에 올라 팔거군(八 君)에 봉해졌다가 후에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으로 이봉(移封)되어 그의 후손들이 성주 현씨(星州玄氏)로 분적(分籍)하였다.

 

현이후(玄利厚)

담윤의 둘째 이후(利厚)는 경상도 안렴사(慶尙道按廉使)를 지내고 광성군(廣城君)에 봉해졌다.

 

현덕유(玄德裕)

1186(명종 16) 문과(文科)에 급제했던 덕유(德裕)는 시조의 셋째 아들로 이부(吏部)와 예부(禮部)의 시랑(侍郞)을 거쳐 서경유수(西京留守)로 나갔다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낸 후 대사공(大司空)에 이르러 회원군(檜原君)에 봉해져서 그의 후손들이 창원 현씨(昌原玄氏)로 분관(分貫)하였다.

 

현원미

성산부원군 덕수(德秀)의 둘째 아들 원미()는 영동정(令同正)으로 순천군(順天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순천 현씨(順天玄氏)로 분관(分貫)하였다.

 

현규(玄珪)

조선조(朝鮮朝)에 와서 9세손 규()가 세종조(世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를 지내고 고부 군수(古阜郡守)로 나갔다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와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역임하였다.

 

현득원(玄得元)

규의 아들 득원(得元)은 어릴 때부터 기절(氣節)이 탁월하고 효우(孝友) 또한 돈독하였는데, 세종조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1454년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고 민정을 보살폈으나 이듬해 단종(端宗)이 손위(遜位)하자 벼슬을 버리고 아들 보손(寶孫)과 같이 영천(永川) 묵방동( 坊洞)으로 돌아와 은

거하며 종신토록 절의를 지키다가 여생을 마쳤다.

 

현익수(玄翼洙)

()의 아들 익수(翼洙)는 가세(家勢)가 빈궁했으나 청백(淸白)하여 처사(處士)로 일컬어졌으며 지릉 참봉(智陵參奉)에 천거되었으나 노부모(老父母)의 봉양을 위해 나가지 않고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였다.

 

현석규(玄錫圭)

죽창한화(竹窓閑話)에 의하면 좌참찬(左參贊) 효생(孝生)의 아들인 석규(錫圭)가 한양(漢陽)에 과거를 보러 갔을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제천정(濟川亭)에서 여러 왕자(王子)들과 함께 잔치를 베풀고 있는데 과거를 보려고 몰려든 선비 중에 한 선비를 가리키며 불러 오도록 했다. 세조(世祖)는 그 선비에게 예의를 갖추어 손님으로 접대하면서 이름과 사는 곳을 묻고는 좌중(座中)을 둘러보며 "누가 이중에 처녀 딸을 둔 이가 있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먼 길을 오느라고 의관(衣冠)이 헤어지고 형용(形容)은 초췌한 그 선비를 쳐다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세조(世祖)의 사람보는 식견을 알고는 "내 손자 서원군(瑞原君)에게 처녀 딸이 있어 지금 혼인(婚姻) 처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하니, 세조(世祖)"좋은 사위를 구하려면 이 사람 보

다 나은 이가 없다" 하니 세조는 "옛날부터 큰 인물은 초야(草野)에서 많이 나왔으니 혼인(婚姻)을 정하기로 하시지요" 하며 권했다.

뒤에 서원군(瑞原君)이 그 선비의 집안을 알아보니 영남(嶺南)에서 문명(文名)을 떨치고 있는 가문이어서 사위를 삼았는데, 그 선비가 바로 석규(錫圭)였다.

그는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 청렴하고 공정하게 정사(政事)를 처리하였고, 형조 판서(刑曹判書우참찬(右參贊) 등을 역임하면서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현상벽(玄尙璧)

당대에 이름난 성리학자(性理學者)로 손꼽힌 상벽(尙璧)관봉문답(冠峰問答)」「관봉유고(冠峰遺稿)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자는 언명(彦明), 호는 관봉(冠峯).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영조 때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장릉참봉·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를 지냈다.

시재(詩才)가 뛰어나 많은 저작을 남겼으며, 또 성리학에도 일가를 이루어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입각하여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이라는 성리학의 정통성을 이어받아 이간(李柬)과 함께 낙론(洛論)에 속하여 인()과 물()의 성()이 같다고 주장하였다.

한원진(韓元震)에게 답한 별지는 그의 대표적인 성리설의 집약으로, 중용의 천명지성(天命之性)맹자의 성선설을 인용하여 태극(太極)을 통한 오성(五性)의 본원을 밝힘으로써 이이(李珥)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계승, 발전시켰다.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예론(禮論)에도 정통하였다. 저서로는 관봉문답·관봉유집이 있다.

출전(다움 백과사전)

 

현약호(玄若昊)

학자(學者) 약호(若昊)가 유명하였다.

 

현재덕(玄在德)

문장과 글씨에 능했던 덕윤(德潤재덕(在德) 등이 가문의 번영을 이루었다.

 초명은 응원(應遠). 자는 사열(士說), 호는 엄산(弇山). 사자관(寫字官) 김천수(金天秀)의 외손이다.

1790(정조 14) 의과(醫科)에 급제하여, 장영감서(壯營監書)를 거쳐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글씨를 잘 써서 정조로부터 벼루를 하사받았으며, 한때 편장(扁障비판(碑版)을 많이 썼다고 한다.

특히 초서에 뛰어났는데, 속도감이 넘치는 독특한 운필(運筆)로 일가를 이루어 엄산체라 불렸다. 우리나라의 옛 글씨를 모사하여 초휘(草彙)를 편집하였는데, 그 내용이 충실하여 신위(申緯김정희(金正喜)로부터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출전(다움 백과사전)

 

현덕윤(玄德潤)

본관은 천녕(川寧). 자는 도이(道以), 호는 금곡(錦谷). 아버지는 한일(漢一)이다.

1705(숙종 31) 역과에 합격하고, 부산훈도로 재임 중에는 덕망이 높아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우니, 사람들이 훈도제(訓導制)가 실시된 뒤 처음 있는 일이라 하였다.

그 뒤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위계를 받고 부호군을 지냈다. 그는 시와 문장에 능하였고, 서예에도 뛰어나 초서와 예서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출전(다움 백과사전)

 

현병근(玄炳瑾)

한말(韓末)에 와서는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로 유명한 병근(炳瑾)과 익철(益哲) 이 대()를 이어 가문을 빛냈다.

 

현익철(玄益哲)

호는 묵관(默觀). 19193·1운동 후 만주로 망명해 남만주의 한인자치기관인 한족회(韓族會)에 가입했다. 19202월 한족회 내의 소장파인 현정경(玄正卿이시열(李時說) 및 국내에서 새로 온 장명환(張明煥) 등과 함께 광한단을 결성, 일제기관 파괴와 주구처단 활동을 전개했다. 1921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3년 동안 복역한 후 1924년 다시 만주로 건너가 대한통의부에서 활동했다.

1924년 전만통일의회주비회에 참가하고 이어 19251월에 결성된 정의부(正義府)에 참여했다.

19264월 양기탁(梁起鐸고할신·현정경·이규풍(李奎豊최소수(崔素水김봉국(金鳳國이동구(李東求) 등과 함께 지린[吉林]에서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결성,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1927년 고려혁명당이 와해되자 정의부·신민부(新民府참의부(參議府)의 통합을 중심으로 한 민족유일당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신민부·참의부의 내분으로 전체 통합이 실패하자, 1929년 정의부를 주축으로 신민부의 민정위원회 계열과 참의부의 심용준(沈龍俊) 계열만의 3부통합회의 개최를 주도했다. 그 결과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이 발족되고 이어 41일 국민부가 발족되자 중앙집행위원장이 되고, 12월 국민부를 영도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의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30년 당간부들이 체포됨에 따라 중앙책임비서로 취임했으며, 현정경·고할신·이웅 등의 국민부·조선혁명당 해체, 마르크스-레닌파 사회주의자들과의 연합론에 반대해 양세봉·고이허 등과 함께 국민부를 지지했다.

19317월 자금교섭문제로 펑톈[奉天]에 갔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되었다.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병보석되자 일본경찰의 감시를 피해 국외로 탈출, 만주를 거쳐 상하이[上海]로 갔다.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결성에 참여했으나, 민족주의 좌파와의 연합에 반대하고 탈퇴했다.

19374월 난징[南京]에서 조선혁명당을 재건하고 이청천·양기탁·최동오(崔東旿유동열(柳東說) 등과 함께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그해 8월 김구(金九)의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등이 민족주의 우파 중심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조직하자, 이에 참여해 운영위원으로 활동했다. 일본군의 중국내륙 공세가 계속되어 중국국민당 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이동하자 연합회도 후난 성[湖南省] 창사[長沙]로 남하했다. 19385월 연합회 주축단체인 한국국민당·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의 통합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창사의 남목청(南木廳)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다가 전 조선혁명당 간부 이운한(李雲漢)에게 저격당해 죽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출전(다움 백과사전)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현씨(玄氏)는 남한(南漢)에 총 17,297가구, 72,14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玄錫圭(현석구) 선생의 일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경서와 역사에 통달한 현석규는 영남(嶺南) 지방의 재능 있는 선비로 이름을 떨쳤다.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黎室記述) 권6(야언별집)에 의하면,
세종세조와의 특별한 인연으로 효령대군의 손자 서원군의 딸과 결혼하게 된 현석규는 1460년(세조 6) 문과에 급제(及第)한 후 벼슬이 도승지에 이르렀다. 경서와 역사에 정통하고 글을 잘 지은 현석규는 향비파를 잘 타는 명수로 이름이 높았다.

성종 때 그는 평안도감사로 임명되자 내시들을 대상으로 하여 임금을 사모하는 장가 형식의 가사를 지어 읊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 사실을 듣고 왕은 더욱 그를 사랑했다. 한석규는 그 후 벼슬을 그만두고 경기도 풍덕군의 별장에 은퇴하여 살 때 향비파를 타면서 한가하게 지냈다. 그가 향비파 명수로 된 것도 바로 이때였다고 한다.

 

 

 

 

출전 <한미족대성보>.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게시물 목록
번호 제 목 글쓴이 등록일 조회
연주 현.jpg 연주현씨(玄) [1] 청남 14-08-30 5000
784 하양 허.jpg 하양허씨(許) 청남 14-08-30 4948
783 태인 허.jpg 태인허씨(許) 청남 14-08-30 3263
782 양천 허.jpg 양천허씨(許) 청남 14-08-30 5131
781 김해 허.jpg 김해허씨(許) 청남 14-08-30 4682
780 영해해씨(海) 청남 14-08-30 2482
779 강릉 함.jpg 강릉함씨:양근함씨(咸) 청남 14-08-30 5678
778 충주한씨(漢) 청남 14-08-30 3223
777 천주 한.jpg 청주한씨(韓) 청남 14-08-30 6049
776 곡산 한.jpg 곡산한씨(韓) 청남 14-08-30 4689
775 달성 하.jpg 달성하씨(夏) 청남 14-08-30 3413
774 진양 하1.jpg 진주하씨: 진양하씨(河) 청남 14-08-30 14941
773 대흥필씨(弼) 청남 14-08-30 2838
772 홍천 피.jpg 홍천 피씨(皮) 청남 14-08-30 2837
771 괴산 피.jpg 괴산피씨(皮) 청남 14-08-30 3101
770 임구 풍.jpg 임구풍씨(馮) 청남 14-08-30 3226
769 신창 표.jpg 신창표씨(表) 청남 14-08-30 5195
768 풍덕포씨(包) 청남 14-08-30 2799
767 충주 평.jpg 충주평씨(平) 청남 14-08-30 2848
766 희천편씨(扁) 청남 14-08-30 2670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