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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탐진최씨(崔)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崔(탐진최씨)

 

 

본관(本貫): 탐진(耽津)

시조(始祖): 최사전(崔思全)

유래(由來):

 

탐진 최씨(耽津崔氏)는 고려 때 상약원직장(尙藥院直長)을 지낸 최철(崔哲)을 원조(遠祖)로 하고 고려 때 장작감(將作監)을 지낸 정(靖)의 아들 최사전(崔思全)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으나 사전의 아들 변(弁)과 열(烈) 이하의 기록은 누차의 전란으로 문헌이 실전(失傳)되어 각파(各派) 중시조(中始祖)들의 세거지를 따서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사전(思全)은 경주 최씨(慶州崔氏)에서 분적(分籍)한 해주 최씨(海州崔氏)의 시조(始祖) 최 온(崔 溫)의 증손(曾孫)이다.

사전(思全)은 처음에 의술(醫術)로써 조정에 나갔으나 1126년(인종4) 이자겸(李資謙)이 궁궐을 범하고 함부로 권세를 부리자 왕과 협의하여 자겸의 심복 척준경(拓俊京)을 설복하여 이자겸을 제거한 공으로 공신(功臣)에 책록되어 병부 상서(兵部尙書)에 올랐다. 그후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으로 수태위(守太尉)·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며, 만년에 스스로 은총이 넘친다 하여 치사(致辭)하기를 원했다. 그는 두 아들 변(弁)과 열(烈)을 두었는데, 변(弁)이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올랐고 둘째 아들 열(烈)은 [효인(孝仁)]이란 칭호를 왕으로부터 받았다.

일찍이 사전(思全)은 두 아들에게 금 술병을 한 벌씩 주었는데 그가 죽은 후에 첩(妾)이 그 하나를 훔쳐내었다.

변(弁)이 화가 나서 매를 치려고 하니 열(烈)이 말하기를 "이는 선군(先君)이 사랑하시던 사람이라 마땅히 가산(家産)을 기울여서라도 구제해야 옳겠거늘 하물며 이 물건이 문제가 되겠소. 제가 얻은 것이 또 있으니 청컨대 이것을 형님에게 드리리다."하였다. 왕이 듣고 가상히 여겨 "효자요 또 인인(仁人)이라고 할 만하다."하며 어필로 <효인(孝仁)>이라고 써 주었다고 한다.

 

가문의 중요 인물

 

최응규(崔應奎)

화성파(華城派)는 중조(中祖) 응규(應奎)가 고려 때 중서령(中書令)을 지냈다.

 

최상(崔尙)

응규의 아들 상(尙)은 1056년(문종10) 예부낭중(禮部郎中)으로 감찰어사(監察御使)를 거쳐 1065년(문종19) 예부상서(禮部尙書)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거란에 다녀와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최원습(崔原鈒)

상(尙)의 아들 원습(原鈒)은 태복시정(太僕寺正)을 지냈다.

 

최원길(崔原吉)

원길(原吉)은 중랑장(中郞將)에 올랐다.

 

최준량(崔浚良)

강진금천파(康津錦川派)의 중조(中祖) 준량(浚良)은 생원(生員)으로 우문관 대제학(右文館大提學)에 추증되었다.

 

최령(崔齡)

준량의 아들 령(齡)이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냈다.

 

최직림(崔直霖)

령(齡)의 아들 직림(直霖)은 판도판서(版圖判書)로 오산군(鰲山君)에 봉해졌다.

 

최봉(崔鳳)

직림의 아들 봉(鳳)이 조선 때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지냈다.

 

최만(崔滿)

봉의 아들 만(滿)이 조선 세종(世宗) 때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역임했다.

 

최학령(崔鶴齡)

만경파(萬頃派) 중조(中祖) 효로(孝老)의 현손(玄孫)이고 능참봉을 지낸 숙(淑)의 아들 학령(鶴齡)은 당대의 명신(名臣) 김인후(金麟厚)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1539년(중종34) 진사로 정시문과에 장원했으나 어사의 홍패(紅牌)에 틀린 글자가 있다고 받기를 거절하고 돌려보낸 뒤 포의(布衣)로 고향으로 돌아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학문으로 일생을 보냈다.

 

최표(崔彪)

보성조내파(寶城兆內派) 중조(中祖) 총(聰)의 아들 표(彪)는 당대에 명성을 날린 학자 이 색(李 穡)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공양왕(恭讓王) 때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고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에서 물러났다.

 

최귀령(崔龜靈)

표의 아들 귀령(龜靈)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담양부사(潭陽府使)를 지냈고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강호(江湖)에 숨어 살았다.

 

최윤덕(崔允德)

광주성서파(光州城西派) 중조(中祖) 윤덕(允德)은 고려 말 영도첨의(領都僉議)로 조선이 개국한 후 광산으로 귀양가서 살았다.

 

최호(崔灝)

윤덕의 손자 호(灝)가 중종 때 계공랑(啓功郞)에 이르렀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한성판윤 겸 오위도총부 총관(五衛都摠府摠管)에 추증되었다.

 

최언웅(崔彦雄)

호의 손자 언웅(彦雄)은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최부(崔溥)

금남파(錦南派) 중조(中祖) 정원(井元)의 손자 부(溥)는 학자 김종직(金宗直) 문하에서 글을 배워 1482년(성종13) 진사로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교리(校理)로 [동국통감(東國通鑑)] 및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뒤에 호당(湖堂)에 뽑혔다.

 

최해(崔海)

만경율리파(萬頃栗里派) 중조(中祖) 해(海)는 세조(世祖) 때 벽동군수(碧潼郡守)를 지냈다.

 

최한춘(崔漢春)

해의 아들 한춘(漢春)은 의영고직장(義盈庫直長)을 역임하였다.

 

최경란(崔景瀾)

한춘의 증손 경란(景瀾)은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지내다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만경율리(萬頃栗里)에 은거(隱居)함으로 후손들이 문호를 열었다.

 

최경(崔涇)

채희귀한도(蔡姬歸漢圖)를 그린 조선 성종(成宗) 때의 화가 경(涇)이 소헌왕후(昭憲王后)와 세조·예종·덕종의 초상을 그린 공으로 성종(成宗)이 안구마(鞍具馬)를 하사하였으며 1484년 당상관(堂上官)에 올랐다.

 

최홍전(崔弘甸)

사전의 후손 홍전(弘甸)은 문장에 능했고 천문(天文)·지리(地理)·역상(易象) 등에 밝았으며, 1679년(숙종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후 낭관(郎官)을 지냈다.

 

최중일(崔中一)

중일(中一)은 1450년(세종32) 진사로 문과에 급제한 후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를 역임하였고 부교리(副校理) 겸 독서당 응교(讀書堂應敎)·지평(持平)을 거쳐 사간(司諫)에 이르렀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탐진 최씨(耽津崔氏)는 남한에 총 14,609가구, 61,8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전 <한미족대성보>.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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