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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천최씨(崔)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崔(통천최씨)

 

 

본관(本貫): 통천(通川)

시조(始祖): 최경현(崔景賢)

유래(由來):

 

통천 최씨(通川崔氏)의 시조는 고려 때 정의대부(正義大夫)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중서좌상시(中書左常侍), 감찰어사(監察御使) 등을 역임한 최경현(崔景賢)이다. 그의 두 아들 사순(事舜)과 우순(遇舜)의 후대에서 증손 유(侑)가 문하평리(門下平理)를 지냈으며, 녹(祿)의 아들 운해(雲海)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호군(護軍)으로 고우(高郵)의 싸움에서 전공을 세워 통천 최씨(通川崔氏)의 가문을 빛낸 대표적 인물이다.

 

가문의 중요 인물

 

최운해(崔雲海)

1347(충목왕 3) ∼ 1404(태종 4). 고려 말 · 조선 초의 무신. 본관은 통천(通川). 자는 호보(浩甫). 호군 ( 護軍 ) 녹(祿)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전공(戰功)으로 공민왕 때 충용위산원(忠勇衛散員)에 기용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전공총랑(典工摠郎)이 되었다.

1385년(우왕 11) 충주병마사가 되어 왜구를 무찔렀다. 그 뒤 순흥 · 영주등처조전병마사 겸 경상도병선도관영사(順興榮州等處助戰兵馬使兼慶尙道兵船都管領事)가 되어 여러 번 왜구를 격퇴했으며, 마침내 순흥부사가 되었다.

이 때 왜구가 객관 ( 客館 )에 웅거하며 매일 침략하자 이를 격퇴하고, 노획한 우마(牛馬)와 재화(財貨)를 병사와 주민에게 나누어주었으며, 또 굶주리는 백성을 잘 구호해 칭송을 받았다. 이러한 전공을 세워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초수(超授)되었다.

왜구가 다시 원주 · 충주 · 단양 · 제천 등지에 쳐들어오자 조전도병마사(助戰都兵馬使)가 되어 이를 물리치고 충주목사가 되었다. 전주목사를 거쳐 밀직부사가 되어 충근좌명공신(忠勤佐命功臣)의 호를 받았다. 그 뒤 양광도 · 광주등처절제사 겸 판광주목사(楊廣道廣州等處節制使兼判廣州牧使)로 왜구를 물리쳐 전공을 세웠다.

1388년 전라도 부원수 ( 副元帥 )로 요동정벌 때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조민수 ( 曺敏修 )의 막하로 출정했던 도순문사 ( 都巡問使 ) 정지 ( 鄭地 ) 등과 함께 왜구를 격파하였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개국원종공신 ( 開國原從功臣 )이 되고, 이듬 해 문하평리 ( 門下評理 )로 양광도절제사가 되어 박위(朴 輹 ) 등과 함께 왜구를 격파하였다.

1396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 경상도병마도절제사가 되어 영해(寧海 :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에서 왜구를 격퇴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1397년 항복했던 왜구들이 지울주사(知蔚州事) 이은(李殷) 등을 납치해간 지난 해의 사건이 폭로되어 청해도수군(靑海道水軍)에 충군되었다.

그 뒤 풀려 나와 1399년(정종 1) 전라도조전절제사로 왜구를 방어하였다. 이듬 해에는 참판삼군부사(參判三軍府事)로 예문관학사 송제대(宋齊岱)와 함께 남경 ( 南京 )에 다녀오다가 서원군(瑞原郡)에서 군수 박희무(朴希茂)를 구타하였다. 이 사건으로 한때 음죽(陰竹 : 지금의 경기도 이천시)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1402년(태종 2)에는 이성도절제사(泥城道節制使)로 태조를 시위했고, 강계안무사(江界安撫使)와 서북면순문사(西北面巡問使)를 거쳐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로 사직하였다. 특히 왜구를 무찔러 여러 번 공을 세운 바 있어 명장의 칭호를 얻었다. 윤덕(潤德) 등 네 아들을 두었다. 시호는 양장(襄莊)이다.

 

최윤덕(崔潤德)

1376(우왕 2) ∼ 1445(세종 27).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통천(通川). 자는 여화(汝和) · 백수(白修), 호는 임곡(霖谷).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운해(雲海)이다.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는 국경의 수비에 나가 있어 한마을에 사는 양수척 ( 楊水尺 )에 의하여 양육되었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으며, 어느날 소에게 꼴을 먹이러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 화살 하나로 쏘아죽였다. 그 뒤 음관(蔭官)으로 기용되어 아버지를 따라 여러 번 전공을 세우고 부사직이 되었다. 1402년(태종 2)에 낭장이 되고, 곧 호군을 거쳐 이듬해 대호군이 되었다.

1406년 지태안군사(知泰安郡事)가 되었다가 1410년 무과에 급제하여 상호군이 되었다. 동북면조전병마사(東北面助戰兵馬使)가 되었다가 이듬해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에 올랐다. 1413년 경성등처절제사(鏡城等處節制使)가 되어 동맹가첩목아(童孟哥帖木兒)를 복속시켜서 야인들의 준동을 막았다.

영길도도순문찰리사(永吉道都巡問察理使) · 우군총제 · 중군도총제 등을 역임하였다. 1419년(세종 1)에 의정부참찬으로 삼군도통사가 되어 체찰사 이종무 ( 李從茂 )와 함께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1421년에는 공조판서가 되어 정조사 ( 正朝使 )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곧 평안도도절제사가 되었다. 1426년 좌군도총제부사, 1428년에 병조판서에 올랐다.

1433년 파저강(婆猪江)의 야인인 이만주(李滿住)가 함길도 여연 ( 閭延 )에 침입했을 때 평안도도절제사가 되어 이만주를 대파했고, 이 공으로 우의정에 특진되었다. 이듬해 적이 또 변방을 침입하자 평안도도안무찰리사(平安道都安撫察理使)로 나가 이를 진압했다.

돌아와서는 무관으로서 재상의 직에 있을 수 없다는 소를 올려 무관직에 전임할 수 있도록 요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435년에 좌의정으로 승진했고, 이듬해 영중추원사에 전임된 뒤 1445년에 궤장( 廓 杖)을 하사받았다. 성품이 자애롭고 근검해서 공무의 여가를 이용, 묵은 땅에 농사를 지었다.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남편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여인의 호소를 듣고 그 호랑이를 잡은 뒤에 배를 갈라 남편의 뼈를 찾아 장사를 지내게 해 준 일도 있다.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통천의 상렬사(尙烈祠)와 안주의 청천사(淸川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최입

한편 녹(祿)의 후손이며 자양(自陽)의 아들인 입( )은 조선(朝鮮)중기의 학자로서 문장에 능하고 학문이 뛰어났으며, 임진왜란 때 승문제조(承文提調)로 외교문서 작성의 제1인자였고, 여러차례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문명(文名)을 날렸다. 특히 시(詩)와 글씨가 뛰어나 그의 문장과 차천로(車天輅)의 시(詩), 한호(韓濩)의 글씨는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불리웠다.

 

최숙손(崔淑孫)

윤덕(潤德)의 아들 숙손(淑孫)이 조선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다.

 

최광손(崔廣孫)

숙손의 동생 광손(廣孫)은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최윤옥(崔潤玉)

윤덕의 동생 윤옥(潤玉)은 수찬관(修撰官)을 역임하여 명문(名門)인 통천 최씨(通川崔氏) 가문을 유명하게 했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통천최씨(通川崔氏)는 남한에 총 1,910가구, 7,75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崔潤德(최윤덕) 선생의 일화. 통천.

 

崔潤德(최윤덕)은 세종의 시대를 대표하는 무장으로 북방 개척과 방어에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그의 이력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무과로 입신한 무반임에도 최고의 문반직인 좌의정까지 올랐다는 사실이다.

세속적 성공의 일차적인 관건은 물론 자신의 뛰어난 능력이겠지만, ‘지음(知音)’이라는 오래된 성어가 웅변하듯, 그것을 알아보고 후원하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절실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최윤덕의 현달(顯達)은 문반 중심의 사회에서도 균형을 잃지 않은 세종의 판단력과 실천력을 보여주는 한 증거가 될 것이다.

 

 

崔潤德(최윤덕) 선생의 일화.

최윤덕은 5(우왕 71381) 때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그때 아버지는 변방을 지키느라 나가 있었기 때문에 같은 마을에 사는 양수척(楊水尺)에게서 양육되었다. 양수척은 사냥을 하거나 버드나무로 그릇 등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천민이다. 아버지가 무반이었으므로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지는 않았겠지만, 양수척에게서 길러졌으니 일반적인 경우보다 거칠고 험한 환경이었을 것이다.

최윤덕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힘과 용기를 발휘했다.

야사에는 그런 일화가 여럿 기록되어 있다.

그는 특히 활을 잘 쏘았는데, 산에서 소와 말을 먹이는 도중에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자 화살 하나로 쏘아 죽이고는 돌아와 양수척에게 얼룩무늬를 가진 큰 짐승이 나오기에 쏘아 죽였다고 말했다. 호랑이라는 짐승을 몰랐다는 사실은 그가 상당히 어린 나이였음을 알려준다.

 

 

 

崔潤德(최윤덕) 선생의 일화.

 

서거정의 아버지 서미성이 합포(合浦, 예전 경상남도 마산)를 지킬 때 최윤덕을 기르던 양수척이 찾아와 그의 뛰어난 무예를 극찬했다.

서미성이 한번 시험해 보겠다.”고 하고 함께 사냥을 나갔는데, 崔潤德(최윤덕)은 이리저리 달리며 쏘아 맞히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감탄했지만, 서미성은 좀 더 날카로웠다.

그는 웃으면서 이 아이가 손이 빠르긴 하지만 아직 사냥꾼의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한 뒤 활쏘기와 말 달리기를 가르쳤고, 그 결과 崔潤德(최윤덕)은 명장이 되었다고 한다.

 

 

 

 

崔潤德(최윤덕) 선생의 일화.

 

태종부터 세종 초반까지 여진족은 점차 남하해 연해주, 두만강, 압록강 유역은 물론 조선의 군사력이 미치지 못한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까지 넘나들었다. 그들은 조선에 복종하면서 평화롭게 지내다가도 갑자기 침략과 약탈을 자행해 변방의 골칫거리로 떠올랐다. 가장 피해가 큰 곳은 최북방인 여연(閭延)과 경원(慶源)이었다.

첫 피해는 태종 104~5월에 올량합(兀良哈) 등이 경원 등지를 습격해 군사 90여 명을 죽이고 남녀 80여 명과 말과 소 120여 마리를 빼앗아간 사건이었다.

최윤덕은 즉시 경성병마사(鏡城兵馬使, 3)에 임명되어 현지로 파견되었으며, 그 뒤 계속해서 경성절제사(鏡城節制使, 3)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 2, 태종 12)경성등처절제사(鏡城等處節制使, 태종 13)로 재임하면서 야인의 습격을 효과적으로 퇴치했다.

 

 

최윤덕은 병조판서(세종 10년 윤4)에 임명됨으로써 국방 정책을 주도하는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최윤덕의 국방 정책에서 특징적인 부분은 축성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했다는 것으로 지적된다. “예로부터 안위(安危)란 때를 타고 서로 바뀌는 법입니다. 오늘은 편안하다고 해도 훗날 위태로울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도랑을 깊이 파고 성을 높이 쌓아 방어를 견고히 하면 만대라도 의외의 사변이란 없을 것입니다(세종 17328).”는 발언은 그런 생각을 압축하고 있다.

앞서 공조판서가 되었을 때도 도성 성곽을 보수했지만, 병조판서에 제수되자 그는 관련 사업을 더욱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崔潤德(최윤덕) 선생의 일화.

 

최윤덕이 태안군수로 있을 때(태종 6) 화살통의 쇠장식이 헐어 떨어지자 공인(工人)이 관가의 쇠를 사용해 고쳤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되자 도로 떼어내게 했다(<행장>).

이런 청렴하고 검박한 성품은 오래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찬성으로 평안도 도절제사 판안주목사(判安州牧使)를 겸임할 때 그는 공무가 끝나면 관청 뒤 빈 땅에 오이를 심고 손수 가꿨다.

하루는 어떤 백성이 소송하러 왔는데 농부의 행색을 한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대감은 어디 계시느냐고 물었다. 최윤덕은 아무 곳에 있다고 대답하고는 들어가 옷을 바꿔 입고 판결에 나섰다.

 

 

崔潤德(최윤덕) 선생의 일화.

 

崔潤德(최윤덕)은 백성을 사랑하는 의분(義憤)도 컸다. 어떤 아낙의 남편이 호랑이에게 잡아먹혔다는 사실을 알자 그 호랑이를 추적해 쏘아 죽인 뒤 그 배를 갈라 유해를 꺼내 예우를 갖춰 매장해주었다. 그 아낙은 물론 그 고을 백성들이 그를 부모처럼 사모했다고 한다

어느 정도 과장되었을 수는 있어도 이런 일화들이 허구는 아닐 것이다. 생계를 유지하려는 절박한 노동은 아니지만 어떤 지위의 인물인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의 행색을 하고 일하는 소박함이나 자신의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호랑이를 잡아 원수를 갚아준 헌신은 예나 지금이나 드물고 고귀한 것이 분명하다.

리고 그것이 패기 넘치는 젊은 날의 일화가 아니라 고관에 오른 노년의 일들이라는 사실은 더욱 드물고 고귀하다.

 

출전 <한미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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