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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최씨(崔)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崔(해주최씨)

 

 

본관(本貫): 해주(海州)

시조(始祖): 최온(崔溫)

유래(由來):

 

해주 최씨(海主崔氏)의 시조(始祖)는 해주(海州)의 목민관(牧民官)으로 선정을 베풀었으며 또한 문명(文名)이 높았꼬 뒤에 판이부사(判吏部事)를 역임한 최온(崔 溫)이다. 선조(先祖)들이 일찍이 대령군(大寧郡) 수양산(首陽山)밑에서 누대(累代)에 걸쳐 세거(世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해주(海州)로 삼고 문호(文戶)를 열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최충(崔沖)

984(성종 3) ∼ 1068(문종22). 고려 전기의 문신. 사학십이도(私學十二徒)의 하나인 문헌공도 ( 文憲公徒 )의 창시자이다. 본관은 해주 ( 海州 ). 자는 호연(浩然), 호는 성재(惺齋) · 월포(月圃) · 방회재(放晦齋). 온(溫)의 아들이다.

1005년(목종 8)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우습유 ( 右拾遺 )에 올랐고, 1013년(현종 4)에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된 역대의 문적을 재편수하는 국사수찬관(國史修撰官)을 겸해 ≪ 칠대실록 七代實錄 ≫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우보궐(右輔闕) · 기거사인 ( 起居舍人 ) · 중추직학사(中樞直學事)를 역임하고, 1025년에 한림학사 내사사인 지제고(翰林學士內史舍人知制誥)를 거쳐 예부시랑 간의대부(禮部侍郎諫議大夫)에 올랐다.

1033년(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이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어 ≪ 설원 說苑 ≫ 육정육사(六正六邪)의 글과 한(漢)의 자사6조(刺史六條)의 글을 각 관청에 붙이게 하여 좋은 정치를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 뒤 형부상서 중추사(刑部尙書中樞使)로 전임되었다.

정종 초에 지공거 ( 知貢擧 )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1037년(정종 3) 참지정사수국사(參知政事修國史)로 ≪ 현종실록 ≫ 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판서북로병마사(尙書左僕射參知政事判西北路兵馬使)로 영원(寧遠) · 평로(平虜) 등에 진(鎭)을 설치하였다.

변경에서 돌아와 내사시랑평장사 ( 內史侍郎平章事 )에 올랐고, 수사도 수국사 상주국(守司徒修國史上柱國)이 더해졌다가 곧 문하시랑평장사 ( 門下侍郎平章事 )로 옮겼다.

문종이 즉위하자 문하시중이 되어 율령서산(律令書算)을 정했고, 곧 수태보(守太保)가 더해졌다. 1050년(문종 4)에 개부의동삼사 수태부(開府儀同三司守太傅)가 더해지고 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의 호가 내려졌다.

또한, 시중으로 도병마사를 겸하자 서북 주(州) · 진(鎭)의 공역(工役) 금지를 청해 시행하게 했으며, 동여진(東女眞)에 대한 대비책을 건의하였다.

1053년 나이가 많은 것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자, 이를 만류하는 조서와 함께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 秊 謀同德治理功臣)의 호와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겸문하시중 상주국 치사(開府儀同三司守太師兼門下侍中上柱國致仕)라는 훈작을 받았다.

1055년 내사령 ( 內史令 )이 되었고, 다시 추충찬도좌리동덕홍문의유보정강제공신(推忠贊道佐理同德弘文懿儒保定康濟功臣)이라는 호를 받았다.

이렇게 관인으로 현달했을 뿐만 아니라 치사 후에 교육과 인재양성에도 힘썼다. 당시 개경에는 사학십이도라는 이름난 사숙(私塾)이 있었는데, 최충의 구재학당(九齋學堂)은 그 가운데서도 성황을 이루어 과거에 급제하는 생도가 많았다. ≪ 고려사 ≫ 열전에, “ 동방학교의 일어남이 충에서 비롯해 그를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일컬었다. ” 라고 하였다.

문종 초는 거란 침입의 전화가 아문 뒤, 세상은 태평해졌지만 아직 국학 ( 國學 )은 유명무실이고, 향학(鄕學)도 갖추어지지 못한 때였으므로 문교(文敎)의 새바람이 점차 요구되었다. 특히, 문반 ( 文班 ) 현직자를 우대하면서 그들 중심의 국가질서가 정착되고 있었으며, 또 왕실 · 외척이 세력을 부리게 됨에 따라 이들과 대결하려면 과거에 급제해야만 하였다. 그가 사숙을 열자, 문전성시를 이룬 것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연유한 것이다.

그리하여 송악산(松岳山) 아래에 공부하는 내용에 따라 방의 이름을 낙성재(樂聖齋) · 대중재(大中齋) · 성명재(誠明齋) · 경업재(敬業齋) · 조도재(造道齋) · 솔성재(率性齋) · 진덕재(進德齋) · 대화재(大和齋) · 대빙재(待聘齋) 등으로 지어 구재학당을 마련, 본격적인 사립학교를 시작하였다.

그는 질서와 법도를 갖춘 교육사업을 전개해, 당시 이곳의 학생은 시중(侍中) 최공도(崔公徒) 또는 최충도(崔 食 徒), 뒤에는 시호를 따서 문헌공도라 불렸다.

구재(九齋)에서는 구경(九經 : 周易 · 尙書 · 毛詩 · 儀禮 · 周禮 · 禮記 · 春秋左氏傳 · 春秋公羊傳 · 春秋穀梁傳) · 삼사(三史 : 史記 · 漢書 · 後漢書)를 중심으로 시부(詩賦)와 사장 ( 詞章 ), 즉 문학이나 유교 교육의 일방적인 요청에 따라 문장공부도 많이 시켰다. 그러나 과거를 위한 교육에 그치지 않고, 조직적이며 함축성 있는 인격도야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의 교육방침은 하과 ( 夏課 )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즉, 여름에는 피서를 겸해 개경 탄현 ( 炭峴 ) 밖에 있는 귀법사 ( 歸法寺 ) 등의 산사(山寺) · 승방을 빌려 공부하였다. 특히 과거에 합격한 제자 중 아직 관리가 되지 못한 자를 선정해 함께 생도들을 가르쳤다.

간혹 저명한 학자나 대관들이 들르면, 생도들과 함께 초에 금을 긋고 시간 내에 시를 지어 읊는 각촉부시회(刻燭賦詩會)를 개최하였다. 이 때 성적을 발표해 차례로 불러앉히고 소작(小酌)을 베푸는데 진퇴의 절도와 장유(長幼)의 서열이 분명해 종일토록 서로 수창(酬唱)하는 것이 볼만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감탄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최충의 교육사업은 큰 반향을 일으켜 과거를 볼 사람은 그의 도중(徒中)에 속하기를 원하였다. 또 이것을 모방해 개경에 11개소, 합하여 12도의 사학이 다투어 세워지게 되었다.

이들 도의 설립자는 모두가 학식과 명망이 있고 벼슬과 지체가 높았으며, 대체로 과거시험관을 지내고 유학에 힘쓴 선비들이었다. 따라서, 사학은 관학을 압도해 널리 오래도록 번창해나갔다.

그 중에서도 그의 도가 제일 먼저 이루어지고 가장 권위가 있었으며, 성황을 이루어, 그는 한국사립학교의 원조가 되었으며, 해동공자로 칭송되었던 것이다.

그 뒤 그의 사업은 자손에게 계승되어 자손들이 문행(文行)으로 출세했을 뿐 아니라, 후진교육에 힘써 문헌공도는 연면히 학계의 중심체가 되었다.

최충의 문장은 시구 몇 절과 약간의 금석문자가 전해질 뿐인데, 이것은 무인의 난으로 문신이 살해되고 그들의 문집도 불태워질 때 함께 없어진 탓이라 한다. 지금 볼 수 있는 것은 원주 거돈사(居頓寺)의 원공국사승묘지탑비문(圓空國師勝妙之塔碑文)과 직산 홍경사 ( 弘慶寺 )의 갈기(碣記)가 남아 있다.

정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가 뒤에 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문헌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최유선(崔惟善)

? ∼ 1075(문종 29). 고려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 ( 海州 ). 중서령 ( 中書令 ) 충( 食 )의 아들이다. 1030년(현종 21) 과거에 급제하여 7품으로 한림원에 들어갔다. 그뒤 1047년(문종 1) 어사잡단(御史雜端)을 거쳐 1052년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역임했다.

1055년 지중추원사로 공부시랑 이득로(李得路)와 조상회장사(弔喪會葬使)가 되어 거란 흥종 ( 興宗 )의 장례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그 뒤, 1061년 판상서예부사(判尙書禮部事)를 거쳐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어 추충찬화강정수제공신(推忠贊化康靖綏濟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 ·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상주국(開府儀同三司守太師上柱國)을 거쳐 문하시중 ( 門下侍中 )이 되었다.

대를 이은 유종(儒宗)으로 학문이 깊고 사리에 밝았으며 여러 차례 지공거 ( 知貢擧 )가 되었다. 수태위 중서령(守太尉中書令)에 추증되었으며,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화(文和)이다.

 

최유길(崔惟吉)

생몰년 미상. 고려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 ( 海州 ). 중서령 ( 中書令 ) 충( 食 )의 아들이다. 1073년(문종 27) 호부시랑(戶部侍郎)이 된 뒤, 1075년에 태자빈객 상서우복야(太子賓客尙書右僕射)를 거쳐 상서좌복야가 되었다. 1077년 수사공 판삼사사(守司空判三司事)가 된 뒤 수사공 섭상서령(守司空攝尙書令)에 이르렀다.

 

최사제(崔思齊)

? ∼ 1091(선종 8). 고려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 ( 海州 ). 충( 食 )의 손자로, 유선(惟善)의 아들이다. 1054년(문종 8) 과거에 급제한 뒤, 1081년 예부상서로 사은사 ( 謝恩使 )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온 뒤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었다.

1088년(선종 5) 중추원사, 이듬해 참지정사 ( 參知政事 )를 역임, 1090년 수사공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감수국사 판이부사 상주국(守司空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監修國史判吏部事上柱國)에 이르렀다. 시호는 양평(良平)이다.

 

최사량(崔思諒)

?∼1092(선종 9). 고려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 ( 海州 ). 자는 익보(益甫).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1076년(문종 30) 공부시랑으로 사은사 ( 謝恩使 )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오고, 1084년(선종 1)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지공거 ( 知貢擧 )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1086년에는 중추원사로 승진하고, 이듬해에는 참지정사 겸 서경유수사(參知政事兼西京留守事)가 되고 이 해에 검교태자태사 수국사(檢校太子太師修國史)를 겸하였다.

이어 병으로 사직하자 왕이 전례를 깨뜨리고 치사(致仕)한 자의 예에 따라 녹봉의 절반을 주게 하였다. 성품이 단정하고 신중하였으며 문병(文柄 : 학문의 중심·주도권)을 잡아 중망이 있었다.시호는 강경(康敬)이다.

 

최사추(崔思諏)

1034(덕종 3) ∼ 1115(예종 10). 고려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 ( 海州 ). 자는 가언(嘉言). 초명은 사순(思順). 문하시중을 지낸 충( 食 )의 손자이며, 상서령을 지낸 유길(惟吉)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힘쓰고 글짓기를 잘했으며,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왕이 그가 명문가의 아들로 학문에 해박하고 견문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내시 ( 內侍 )로 삼아 문답을 해보니, 대답이 왕의 뜻에 맞아 매우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선종 때 전중소감(殿中少監)과 지상서호부사(知尙書戶部事)를 역임하였고, 1088년(선종 5)에는 예빈소경(禮賓少卿)으로 동지공거 ( 同知貢擧 )를 겸하였다.

그 뒤 서경부유수(西京副留守)가 되었는데, 1092년에 왕이 서경에 행차하고 요나라의 사신 왕정(王鼎)이 오자 그 관반(館伴 : 國賓을 대접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 때 그가 매일 밤 홀로 앉아 글을 짓는다는 말을 왕정이 듣고 꾀를 내어 그의 글을 가져다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그런데 이 글은 임금에게 간하기 위해 올린 소로, 그 내용은 요나라가 태평이 오래 계속되어 군사장비를 갖추지 않는다는 것과 송나라가 남하(南夏)를 치는 일을 말한 것이다. 왕은 빈객 접대에 능한 그를 가상히 여겨 손수 조서(詔書)를 써서 표창하고, 뒤 이어 어사대부 ( 御史大夫 )에 임명하였다.

1094년(헌종 즉위년)에 동지중추원사 좌산기상시(同知中樞院事左散騎常侍)가 되었고, 이듬 해 이부상서 지중추원사(吏部尙書知中樞院事)에 올랐다. 숙종이 즉위하면서 수사공 추밀원사 한림학사 승지(守司空樞密院使翰林學士承旨)에 임명되었으며, 뒤 이어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가 되었다.

1097년(숙종 2) 중서시랑평장사 판형부사 서경유수사(中書侍郎平章事判刑部事西京留守事), 1100년에 문하시랑평장사가 되었다. 이듬 해에는 남경개창도감 ( 南京開創都監 )이 설치되자 윤관 ( 尹瓘 ) 등과 궁궐터를 살펴 정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1103년에는 수태위 판이부사(守太尉判吏部事)에 임명되었다. 그 해 반역을 도모한 대장군 고문개(高文蓋) · 장홍점(張洪占) · 이궁제(李弓濟), 장군 김자진 ( 金子珍 ) 등을 잡아 귀양보내고, 그 공으로 문하시중에 임명되고 보정공신(輔正功臣)의 호를 받았다.

1104년에 수태보(守太保)가 되었으나, 나이가 많이 들었다는 이유를 들어 벼슬에서 물러났다. 예종 때 수태사 중서령(守太師中書令)이 더해져서 치사하였다. 이자겸 ( 李資謙 )이 그의 사위였는데, 이자겸의 딸이 예종의 비가 되어 태자를 낳자 추성봉국공신 대령군 개국후(推誠奉國功臣大寧郡開國侯)에 봉해졌다. 숙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최약

생몰년 미상. 고려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 ( 海州 ). 중서령 ( 中書令 )을 지낸 충( 食 )의 후손으로, 평장사 ( 平章事 ) 사제(思齊)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 1116년(예종 11) 지제고 ( 知制誥 )로서 정사를 돌보지 않고 대동강에서 유연(遊宴)하는 예종에게 간하여 중지하게 하였으나, 뒤에 이 일로 무고를 당하여 춘주부사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그 뒤 예부상서한림학사(禮部尙書翰林學士)에 이르렀다.

 

최원(崔源)

사추(思諏)의 아들 원(源)은 고려 때 우복야(右僕射)를 지냈다.

 

최관(崔灌)

?∼1152(의종 6). 고려 중기의 문신. 1129년(인종 7) 병부낭중으로 천청절(天淸節)을 하례하기 위하여 금나라에 다녀왔으며, 1141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가 되었다. 다음해 간의대부 ( 諫議大夫 ) 최유청 ( 崔惟淸 )과 함께 금나라에 가서 책명(冊命)을 내려준 데 대하여 감사의 뜻을 전하였으며, 1145년 추밀원사 판삼사사(樞密院使判三司事)를 거쳐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를 지냈다. 의종 때 재상의 반열인 평장사 ( 平章事 )에 올라 치사하였다.

 

 

최주(崔湊)

주(湊)는 1137년(인종 15) 좌산기상시(左散騎尙侍), 추밀원 부사(樞密院府事), 태자빈객(太子賓客), 병부 상서, 지추밀원사,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역임한 후 1140년(인종 18) 판형부사(判刑部事)로 있으며 김부식(金富軾) 등과 함께 시폐(時弊)의 시정책을 상소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그 후 평장사(平章事), 태자태부를 거쳐 1145년(인종 23)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랐다.

 

최윤의(崔允儀)

1102(숙종 7) ∼ 1162(의종 16). 고려 중기의 문신 · 학자. 본관은 해주 ( 海州 ). 초명은 천우 ( 天祐 ). 중서령 ( 中書令 ) 충( 食 )의 5대손으로, 수사공 좌복야 참지정사 주국(守司空左僕射參知政事柱國) 용(湧)의 아들이다.

1128년(인종 6) 감문위녹사(監門衛錄事)로서 과거에 급제한 뒤,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 태학박사를 거쳐, 우정언지제고(右正言知制誥)가 되었고, 1136년 좌사간으로 조제사(弔祭使)가 되어 금(金)나라에 다녀왔다.

1148년(의종 2) 중서사인 ( 中書舍人 )으로 우상시(右常侍) 정함(鄭 歟 )과 함께 궁내시종(宮內侍從) 김거공 ( 金巨公 ), 환자(宦者) 지숙(之淑) 등을 탄핵, 축출하였다.

그 뒤 시예부시랑(試禮部侍郎) ·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를 거쳐 1151년 어사대부 동지추밀원사(御史大夫同知樞密院事), 이듬해 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 등을 역임, 1154년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서 지공거 ( 知貢擧 )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권판상서병부사(權判尙書兵部事), 동북면병마판사 겸 판중군병마사가 된 다음에 1162년 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門下侍郎平章事判吏部事)가 되었다.

그가 편찬한 ≪ 상정고금예문 詳定古今禮文 ≫ 은 고종 때(1234),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출판되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 의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영렬(英烈)이다.

 

최자(崔滋)

1188(명종 18) ∼ 1260(원종 1).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 ( 海州 ). 초명은 종유(宗裕) 또는 안(安). 자는 수덕(樹德), 호는 동산수(東山 馬 ). 명유(名儒)인 문헌공 충( 食 )의 6대손이다. 우복야 민(敏)의 아들이다.

1212년(강종 1) 문과에 급제하여 상주사록(尙州司錄)이 되었다. 치적이 우수하여 국자감 학유(國子監學諭)에 이르렀다. 그 뒤에 10년간은 관운이 트이지 않다가 〈 우미인초가 虞美人草歌 〉 · 〈 수정배시 水精盃詩 〉 로써 이규보 ( 李奎報 )에게 알려져 이것이 출세의 계기가 되었다.

최이 ( 崔怡 )가 문병(文柄)을 잡을 만한 후계자를 묻자, 이규보는 최자를 첫째로 추천하였다. 그래서 문재(文才)를 열번 시험하였다. 다섯번 1등을 하고 다섯번은 2등을 하였다. 다시 이재(吏才)를 시험하려고 급전도감녹사(給田都監錄事)를 시키자 민첩하고 근면하여 인정을 받았다.

한 때에 제주태수로 있었다. 고종 때에 정언을 거쳐서 상주목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내직으로 전중소감(殿中少監) ·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를 역임하였다. 1233년(고종 20)에 최린(崔璘) · 권술(權述)과 함께 금나라로 문안사행을 갔다.

한 때에 충청 · 전라 안찰사가 되었다. 그 뒤에 국자감대사성 ·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 상서우복야 · 한림학사 승지를 역임하고, 추밀부사가 되어 1250년 2월 중서사인 ( 中書舍人 ) 홍진 ( 洪縉 )과 함께 몽고에 들어갔다.

1256년 11월 중서평장사 ( 中書平章事 )가 되었다. 다시 수태사(守太師) · 문하시랑 ·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 판이부사(判吏部事)가 더해졌다. 1258년 유경 ( 柳璥 ) · 김준(金俊, 金仁俊) 등이 최의(崔 洑 )를 죽여서 4대째 내려오던 최씨정권이 무너졌다.

이 때에 수상으로서 난국을 잘 타개하였다. 1259년 1월 몽고의 침입이 있자 고관들 사이에서는 항복과 항전을 두고 중론이 분분하였다. 추밀원사 김보정(金寶鼎)과 함께 강도(江都 ; 강화도)는 땅이 넓고 사람이 적어 지키기 어렵다고 하면서 나아가 항복할 것을 주장하였다. 특히, 시문에 뛰어나서 당대에 크게 문명을 떨쳤다.

문학평론사상 최자는 이인로 ( 李仁老 )와 함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이규보의 문학관을 잇고 있다. 문학비평을 본격적인 궤도에 올려놓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또한, 학식과 행정력을 겸비하여 많은 치적을 쌓았다.

그러나 최충헌의 노속(奴屬 ; 노비)으로 있는 김준이 최이의 신임을 받는 것을 보고 김준의 아들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열어 웃음거리가 된 일도 있었다.

최자의 저서로 ≪ 최문충공가집 崔文忠公家集 ≫ 10권이 있었으나 전하지 않는다. ≪ 속파한집 續破閑集 ≫ (補閑集으로 고쳐 부름) 3권이 현전한다. ≪ 삼한시귀감 三韓詩龜鑑 ≫ 에 시 1편이, ≪ 동문선 東文選 ≫ 에 부(賦) 2편, 시 10편, 기타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시호는 문청 ( 文淸 )이다.

 

최홍윤(崔洪胤)

 ?∼1229(고종 16). 고려 후기의 문신. 한림학사를 거쳐 1201년(신종 4) 예부시랑, 1205년(희종 1) 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 1210년 추밀원부사를 지냈으며, 3차에 걸쳐 동지공거 ( 同知貢擧 )·지공거(知貢擧)로서 과거를 주관하였다.

진각국사(眞覺國師) 및 이규보 ( 李奎報 )와도 교분이 있었으며, 고종 때 평장사 ( 平章事 )에 올라 치사(致仕)하였다. 시호는 경문(景文)이다.

 

최유염

그는 성품이 담박하고 겸손하여 명예를 탐하지 않았으며 오랫동안 벼슬을 하면서도 10년 동안이나 지위를 옮기지 않으니 당시의 여론은 오히려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충렬왕이 그 명성을 일찍부터 들었다가 1274년에 즉위하자 감찰잡단(監察雜端)을 제수하였으며, 이로부터 4대(四代)의 왕조에 걸쳐 벼슬하여 국가의 원로가 되었다. 원나라에서 고려의 노비법을 개정하고자 할 때 이를 반대하여 중지시킨 공으로 공신에 책록되었고, 심양왕(瀋陽王)이 충숙왕(忠肅王)의 폐위를 책동하다 실패한 뒤 고려를 원나라의 내지(內地)로 편입시키도록 책동하자 85세의 노령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연경(燕京)에 가서 이들의 음모를 분쇄하고 왔다.

 

최춘명(崔椿命)

? ∼ 1250(고종 37). 고려 후기의 충신. 본관은 해주 ( 海州 ). 충( 食 )의 후손이다. 1231년(고종 18) 자주부사(慈州副使)로서 관민을 이끌고 몽고군에 포위된 성을 고수하여 항복하지 않았다.

그 뒤 화의를 맺게 되자 조정에서는 몽고원수 살리타(撤禮塔)의 힐책을 받아 내시낭중(內侍郎中) 송국첨 ( 宋國瞻 )을 보내어 항복을 설유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어 삼군장수가 항복하게 되자 살리타는 회안공 정(淮安公 詐 )에게 자주(慈州)의 항복을 독촉하였다.

이에 정은 후군진주(後軍陳主) 대집성(大集成)과 몽고관리를 보내어 조정과 삼군이 항복한 사실을 알리고 속히 항복하라 하였으나 조지(朝旨)가 이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몽고관리가 대집성으로 하여금 성안에 들어가 권유하게 하였으나 여러 차례 거부하였다.

이에 처형하라는 몽고관리들의 압력으로 서경에 투옥되자 왕이 재추(宰樞)에게 물으니 모두 감형하기를 청하였으나 대집성이 최우 ( 崔瑀 )를 움직여 처형하게 하였다. 재추들이 더 이상 고집하지 못하였으나 유승단 ( 兪升旦 )이 홀로 반대하였다.

최우가 거듭 내시 이백전(李白全)을 보내어 처형하려고 하였을 때도 사색(辭色)은 태연하였다. 이를 본 몽고관리는 비록 그가 몽고에는 명을 거역하였지만 고려에는 충신이니 살려주라는 청을 하여 석방되었다. 뒤에 논공행상에서 1등공신에 올라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발탁되었다.

 

최황(崔滉)

1529(중종 24)∼1603(선조3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 ( 海州 ). 자는 언명(彦明), 호는 월담(月潭). 한양 출신. 감찰 문손(文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훈련원도정 경(瓊)이고, 아버지는 군수 여주(汝舟)이며, 어머니는 한세륜(韓世倫)의 딸이다. 이중호 ( 李仲虎 )의 문인이다.

1566년(명종 2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72년(선조 5) 학유를 거쳐 검열이 되었고, 사국(史局)에 뽑혀 직필로써 김성일 ( 金誠一 )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 뒤 공조·형조의 좌랑, 정언, 해운판관을 지내고, 경상도도사가 되어서는 군적 ( 軍籍 )을 잘 다스렸다.

1576년 수안군수로서 선정을 베풀어 고을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웠으며, 그 이듬해 함경도암행어사로 나가 그 지방의 기한(饑寒)과 국방대책 8조를 상소하였다. 그 뒤 집의·사간·예조참판·대사간·이조참판·한성판윤·대사헌 등을 거쳐 1590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간에 1583년에는 성절사로, 1589년에는 사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평난(平難)·광국(光國) 공신에 각각 3등으로 녹훈되고 해성군(海城君)에 봉하여졌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평양까지 선조를 호종하였으며, 왕비와 세자빈을 배종(陪從), 희천에 피난하였고, 이듬해 검찰사(檢察使)가 되어 왕과 함께 환도하여 좌찬성·세자이사(世子貳師)로 지경연사를 겸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최만리(崔萬理)

? ∼ 1445(세종 27). 조선 초기의 문신 · 학자. 본관은 해주 ( 海州 ). 자는 자명(子明), 호는 강호산인(江湖散人). 고려시대 해동공자로 불리던 최충(崔 食 )의 12대손이며 하(荷)의 아들이다. 1419년(세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그 이듬해 집현전박사로 임명되었다. 그 뒤 집현전학사를 거쳐 그 실무책임자인 부제학에까지 올랐다.

개괄적인 관력을 보면, 1427년 3월 교리로서 문과중시에 급제하였고, 그 해 7월에 응교에 올랐으며, 1437년 직제학, 1438년 부제학, 1439년 강원도관찰사, 1440년 집현전부제학으로 복귀하였다. 그 뒤 1444년에 훈민정음창제에 대한 반대상소문제로 즉일 친국을 받고 다음날 석방, 복직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부정과 타협을 모르는 깨끗한 관원으로서 일관하였으며 진퇴가 뚜렷하였다. 그는 집현전의 실무책임자인 부제학으로서 14차에 걸쳐 상소를 올렸다. 그 중 불교배척 상소가 6회, 첨사원(詹事院) 설치반대상소가 3회로서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밖에 일본과의 교역에서 석류황(石硫黃)의 대가를 지나치게 후하게 지불한 것에 대한 책임추궁, 진사시에서 시(詩)의 출제법이 잘못됨을 지적한 것, 그리고 이적(李迹)의 사형결정이 모호하다고 감형을 주장한 것과 사직상소 및 한글반대상소가 있다.

불교배척상소의 대부분은 흥천사 ( 興天寺 )의 사리각 중수 및 경찬회(慶讚會)의 혁파를 청하는 것이었고, 첨사원 설치를 반대한 상소는 세종이 건강상의 이유로 세자에게 섭정시키려 하므로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한 것이었다. 그는 훈민정음이 완성될 때까지 세종의 뜻을 잘 받들어 반대한 일이 없었다.

그런데 세종은 훈민정음을 완성하고 비밀리에 궁중의 의사청(議事廳)에 최항 ( 崔恒 ) 이하 집현전 소장학사와 동궁 · 진평대군(晋平大君) 등을 참가시켜 원나라의 웅충(熊忠)이 엮은 ≪ 고금운회거요 古今韻會擧要 ≫ 의 자음을 한글로 달아 일대 자음의 개변운동을 하려 하였다.

세종은 당시 우리나라의 한자음이 체계 없이 사용되는 것이어서 어느 정도 중국체계에 맞도록 새 운서를 편찬하여 당시 한자음을 개혁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에 그는 집현전의 중진학자들과 함께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것이 유명한 한글반대상소문이었다.

이 상소문은 여러 학사의 합작으로 보이며, 조목에 따라서는 한글창제의 불필요성, 한글의 무용론을 주장한 것으로 사대주의적 성향이 짙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진의는 세종의 한자음 개혁에 반대한 것이 된다.

즉, 세종의 최만리에 대한 친국내용을 보면, “ 내가 만일 이 운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누가 바로잡을 것이냐. ” 라고 한 것을 보면 최만리 등의 상소는 ≪ 고금운회거요 ≫ 의 번역사업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 고금운회거요 ≫ 의 번역사업은 뒤에 ≪ 동국정운 ≫ 의 사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중국에서 ≪ 홍무정운 洪武正韻 ≫ 이 실패작이었던 것과 같이 우리의 ≪ 동국정운 ≫ 도 그 한자음이 실시될 수 없어 결국 실패로 돌아간 것이라고 한다면, 그의 ≪ 고금운회거요 ≫ 번역사업의 반대상소 견해는 그러한 의미에서 정당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소문의 내용이 사대주의라고 비판을 받고 있는 것도 당시 지배층이 일반적으로 사대주의적 경향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에 대한 평가는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최경회(崔慶會)

1532(중종 27) ∼ 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해주 ( 海州 ).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 · 일휴당(日休堂). 전라남도 능주(陵州) 출신. 충( 食 )의 후손이며, 혼(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범(尹範)이고, 아버지는 천부(天符)이다. 경장(慶長)의 형이다.

양응정 ( 梁應鼎 ) · 기대승 ( 奇大升 )에게 수학하였으며, 1561년(명종 16)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567년(선조 즉위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영해군수 등을 지냈는데 임진왜란 때는 상중(喪中)이라서 전라남도 화순에서 집을 지키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경운 ( 慶雲 ) · 경장(慶長)과 함께 고을사람들을 효유(曉諭)하여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 때는 고경명 ( 高敬命 )이 이미 전사한 뒤여서 그의 휘하였던 문홍헌(文弘獻) 등이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이에 합류함으로써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규합, 금산 · 무주에서 전주 · 남원으로 향하는 일본군을 장수에서 막아 싸웠고, 금산에서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여 우지치(牛旨峙)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 싸움은 진주승첩(제1차진주전투)을 보다 쉽게 하였다. 이 공로로 경상우병사에 임명되었다.

1593년 6월 가토(加藤淸正) 등이 진주성을 다시 공격하여오자 창의사 김천일 ( 金千鎰 ), 충청병사 황진 ( 黃進 ), 복수의병장(復讐義兵將) 고종후 ( 高從厚 ) 등과 함께 진주성을 사수하였으나 9일 만에 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자살하였다.

화순현읍지에 그의 〈 투강시 投江詩 〉 가 실려 있다. 진주의 창렬사 ( 彰烈祠 ), 능주의 포충사 ( 褒忠祠 )에 제향되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최경창(崔慶昌)

1539(중종 34) ∼ 1583(선조 16). 조선 중기의 시인. 본관은 해주 ( 海州 ). 자는 가운(嘉運), 호는 고죽(孤竹). 전라도 영암 출생. 충( 食 )의 18대손이며 자(滋)의 13대손이다. 수인(守仁)의 아들이다. 박순 ( 朴淳 )의 문하인이다.

최경창은 백광훈 ( 白光勳 ) · 이후백 ( 李後白 )과 함께 양응정 ( 梁應鼎 )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555년(명종 10) 17세 때에 을묘왜란으로 왜구를 만나자, 퉁소를 구슬피 불어 왜구들을 향수에 젖게 하여 물리쳤다는 일화가 있다. 1561년 23세 때부터 상상(上庠)에서 수학하였다.

1568년(선조 1)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예조 · 병조의 원외랑 ( 員外郎 )을 거쳐 1575년에 사간원정언에 올랐다. 1576년 영광군수로 좌천되었다. 이 때에 뜻밖의 외직 발령에 충격을 받고 사직하였다. 그 뒤에 가난에 시달렸다. 다음해에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으로 복직하였다.

최경창은 1582년 53세에 선조가 종성부사(鍾城府使)로 특수(特授)하였다. 그러나 북평사의 무고한 참소가 있었다. 그리고 대간에서 갑작스러운 승진을 문제삼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선조는 성균관직강으로 명을 고쳤다. 최경창은 상경 도중에 종성객관에서 객사하였다.

최경창은 학문과 문장에 능하여 이이(李珥) · 송익필 ( 宋翼弼 ) · 최립(崔 凌 ) 등과 무이동(武夷洞)에서 수창(酬唱 ; 시가를 서로 주고받으며 부름)하였다. 또한 정철 ( 鄭澈 ) · 서익 ( 徐益 ) 등과 삼청동에서 교류하였다. 당시(唐詩)에 뛰어나 백광훈 · 이달 ( 李達 )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렸다. 그의 시는 청절하고 담백하다는 평을 얻었다. 문장에도 뛰어나 이이 · 송익필 등과 함께 8문장으로 일컬어졌다. 서화에도 뛰어났다. 숙종 때에 청백리에 녹선되고 강진(康津)의 서봉서원 ( 瑞峯書院 )에 봉향되었다. 저서로 ≪ 고죽유고 ≫ 가 있다

 

최규서(崔奎瑞)

1650(효종 1) ∼ 1735(영조 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 ( 海州 ). 자는 문숙(文叔), 호는 간재(艮齋) · 소릉(少陵) · 파릉(巴陵). 광주 ( 廣州 ) 출신. 삼당시인으로 꼽히는 경창(慶昌)의 현손이며, 집(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해(振海)이고, 아버지는 현감 석영(碩英)이다.

1669년(현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0년(숙종 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출사하였다. 이 때 서인의 나문에서 뛰어난 재주로 시명(時名)을 얻어 언관이 되었다.

정언으로 있을 때 “ 서북인을 통청(通淸)하라. ” 는 왕의 하교에 맞서 “ 인문(人文)이 황폐하고 가합자(可合者)가 없다. ” 는 논지로 소를 올려 논객(論客)의 면모를 보였다. 또한, 서인이 노소로 갈라졌을 때 나양좌(羅良佐)를 옹호하는 등 소론에 가담하였다.

1685년 지평에 올랐고, 이어 이조좌랑 · 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이 때도 최석정 ( 崔錫鼎 )의 파직을 변호하는 등 소론의 소장으로 활약하였다. 1689년 대사간에 올랐는데, 이 때 남인에 맞서 희빈 장씨(嬉嬪張氏)의 책봉을 반대하는 데에 앞장 섰다.

그 뒤 1694년 외직으로 전라도관찰사로 나갔으며, 이어 강화유수를 역임하였다.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하면서 부제학, 형조 · 예조 판서, 대제학 등 현직(顯職)을 누렸다.

1711년 소론의 최석정 등이 삭탈관작되고, 1716년 병신처분(丙申處分)으로 소론이 실세를 거듭하자 지중추부사 등의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 광주(廣州)로 내려가 여생을 마치려하였다. 이 때 많은 사직소를 올린 것으로 유명하다.

1721년(경종 1) 소론이 득세하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이 되었고, 1723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이 무렵 노론들이 연잉군(延 艀 君 : 뒤의 영조)의 대리청정 등을 추진할 때 이에 맞서는 등 소론정권의 주역을 맡았으나, 강경파 김일경 ( 金一鏡 ) 등이 신임사화를 일으킬 때는 완소(緩少)로 온건하게 대처하였다.

이어 치사(致仕)를 빌어 봉조하 ( 奉朝賀 )를 받고 일선에서 물러나 성묘를 핑계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1724년(영조 즉위년) 영조가 즉위하여 노론이 집권했을 때에도 무사하였다. ]

1728년 무신난(戊申亂)이 일어날 때, 용인에 있으면서 이 정보를 입수하고는 80세의 노구를 이끌고 제일 먼저 조정으로 달려와 이를 알린 다음, ‘ 역정포고의(逆情布告議) ’ 라는 토난책(討難策)을 건의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원옥(寃獄)이 없을 것을 당부, 완소계열을 보호하려고 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 일사부정(一絲扶鼎) ’ 이라는 영조의 어필이 내려졌고, 이어 공신에 녹훈하려고 하자 이를 끝까지 거절하였다. 당인(黨人)의 중심 인물이었으나 온건하게 대처하였다. 또 지방관으로 나갔을 때에는 많은 선정을 베풀었다.

특히, 전라감사로 있을 때 선정으로 이름나 사람들이 부서한(簿書閑 : 관청 문서가 한가함.), 공방한(工房閑 : 아전들이 한가함.), 기악한(妓樂閑 : 기생 · 풍악이 한가함.)의 ‘ 삼한(三閑) ’ 이라 했다 한다.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시문집으로 ≪ 간재집 ≫ 15권이 있다.

 

최인(崔麟)

1878(고종 15)∼1958. 종교인. 3·1독립만세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으나 뒤에 변절하였다. 호는 고우(古友), 도호(道號)는 여암(如庵). 함경남도 함흥 출신.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덕언(德彦)의 아들이다.

도필두(都必斗)에게서 한학(漢學)을 배우고, 18세에 상경하여 각지를 유람하였다. 불교에 귀의하려고 금강산 장안사에 들어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1895년(고종 32) 함경남도관찰부 집사가 되었다. 1902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한국인들이 조직한 일심회(一心會)에 가입, 정부 개혁을 추진하다 발각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잠시 피신하였다가 귀국, 외부주사(外部主事)가 되었다. 1904년 한국 황실특파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동경부립 제일중학교(東京府立第一中學校)에 입학했는데, 이 때 일본유학생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다.

1906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에 입학, 1909년에 졸업하고 이듬해 귀국하였다. 33세 때 손병희 ( 孫秉熙 )의 권유로 천도교 ( 天道敎 )에 입교하고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 교장에 취임하였다. 한편, 안창호 ( 安昌浩 )의 발의로 조직된 비밀결사 신민회 ( 新民會 )에 가입하여 배일구국운동에 투신하였다.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윌슨(Wilson, T.W.)은 전후 처리 문제해결을 위한 방안 중 식민지 문제는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해결해야 하며 폴란드 민족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제창하였다. 또한 1919년 1월중에 프랑스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는 등 세계의 정세가 점차 약소국에 유리한 쪽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에 손병희를 비롯한 천도교인 권동진 ( 權東鎭 )· 오세창 ( 吳世昌 ) 등과 협의, 파리강화회의가 열리는 것을 기회로 조선민족도 궐기하여 독립의 열망이 충만함을 보여 주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3·1독립만세운동에 관한 세부적 계획이 추진되기 시작하는데, 이 때 그 계획의 실행을 맡아 보았다.

이 해 2월 중앙학교(中央學校) 교장 송진우 ( 宋鎭禹 ), 교사 현상윤 ( 玄相允 ) 및 최남선 ( 崔南善 ) 등을 만나 독립만세운동에 관한 계획을 설명하고 찬동을 얻어냈다. 이들은 다시 만나 당시의 이름 있는 인사들 및 기독교도 등을 설득해 이 운동 계획에 참여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에 관한 교섭은 결국 보람없이 끝났으나, 신흥사 ( 新興寺 )의 한용운 ( 韓龍雲 )에게 그 계획을 설명하여 찬동을 얻어내었다.

또한 독립만세운동의 일원화 방침을 역설, 마침내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합을 성취시켰다. 최남선에게 독립선언서의 골자 및 방략을 제시하여 초안을 작성하도록 하였으며, 작성된 초안을 각 대표들에게 회람, 동의를 얻은 뒤 날인을 받아 활자판으로 만들어, 잠시 집에 감추어 두었다가 보성사 ( 普成社 )에 보내 인쇄하였다.

3월 1일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대표 33인 중 28인과 함께 태화관(泰華館)에 모여 대한독립을 선언한 뒤, 일본 경찰에 붙잡혀 출판법 및 위반 보안법, 치안방해 등의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천도교 교세 확장에 힘써 도령(道領)·대도정(大道正)· 장로 ( 長老 ) 등을 지냈고, 1927년 구미 30여 개 국을 유람하였다.

그러나 그 뒤 변절하여 1934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가 되고, 1937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사장에 취임하였으며, 1939년 임전보국단(臨戰報國團) 단장에 취임하는 등 광복 때까지 친일 활동으로 일관하였다. 1950년 6·25전쟁 중 납북되었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해주 최씨(海州崔氏)는 남한(南韓)에 총 38,628가구, 161,78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崔沖(최충) 선생의 일화.

 

崔沖(최충)은 간혹 이름난 선비들이 찾아오면 여러 제자들과 더불어 각촉부시’(초에 금을 그어놓고 그 금까지 타기 전에 시부를 짓는 것)라는 시 짓기 대회를 열어 그 성적대로 차례로 앉히고 술잔을 돌리는 행사도 열었다.

각촉부시가 진행되는 동안은 그야말로 進退(진퇴)節度(절도)長幼(장유)의 서열이 분명할 뿐만 아니라 종일토록 수창하는 모습이 질서 정연하고 의식을 갖추었으므로 보는 사람마다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이로써 崔沖(최충)9재학당에서 배운 학도들의 명성은 國子監(국자감)을 능가하여 여기서 공부한 학도들은 崔沖(최충)의 벼슬이름을 따 흔히 시중 최공도라 일컬어졌으며, 그가 죽은 후에는 시호를 따라 문헌공도라고 불렸다.

 

 

출전 <한미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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