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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철원최씨(崔)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崔(동주:철원최씨)

 

 

본관(本貫): 동주(東州):철원(鐵原)

시조(始祖): 최준옹(崔俊邕)

유래(由來):

 

동주(東州)는 철원(鐵原)의 옛 이름으로 강원도 북서부, 영서지방 북부에 위치하는 지명이다.

 

동주 최씨(東州崔氏)의 시조 (始祖) 최준옹(崔俊邕)은 득성시조 소벌도리(蘇伐都利)의 후손으로 고려 태조(太祖)를 도와 통합삼한공신(統合三韓功臣)으로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太師)에 이르렀다.

 

가문의 중요 인물

 

최석(崔奭)

생몰년 미상. 고려 중기의 문신. 초명은 석(錫). 태조 때의 공신 준옹(俊邕)의 후손으로, 평장사 ( 平章事 ) 유청(惟淸)의 아버지이다.

1051년(문종 5)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좌습유 ( 左拾遺 )를 지내고, 1075년 형부시랑으로 요나라에 가서 천안절(天安節)을 축하한 뒤 귀국하여 전중감 지어사대사(殿中監知御史臺事)가 되었다.

1077년 좌간의대부 ( 左諫議大夫 )를 거쳐 1080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병마사가 되어 정주지방의 여진족을 정벌하였다. 1082년 이부시랑으로 지공거 ( 知貢擧 )를 겸임하였다.

이듬해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를 거쳐 1086년(선종 3) 문하시랑평장사 ( 門下侍郎平章事 ), 이듬해 권판상서이부사(權判尙書吏部事)· 수국사 ( 修國史 )를 역임하였다.

1088년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로 지공거가 되어 동지공거 ( 同知貢擧 ) 최사추 ( 崔思諏 )와 함께 을과 김부필(金富弼) 등을 시취 ( 試取 )하였다.

이어 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이예부사(守太保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判吏禮部事)에 이르렀다. 최유선(崔惟善)· 이정공 ( 李靖恭 ) 등과 함께 당대의 문인으로 명성을 떨쳤다. 시호는 예숙(譽肅)이다.

 

최유청(崔惟淸)

1095(헌종 1) ∼ 1174(명종 4). 고려 중기의 학자이자 문신.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직재(直哉). 6세조 준옹(俊邕)은 태조를 도운 공신 ( 功臣 )이며, 문종 · 순종 · 선종 3조(三朝)를 섬긴 중신 석(奭, 錫)의 아들이다. 예종 때 과거에 급제했으나 아직 학문을 이루지 못했다며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그 뒤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으나 인종 초에 이자겸 ( 李資謙 )의 간계로 평장사 ( 平章事 ) 한교여(韓 股 如)가 유배될 때 매서(妹 淚 )인 정극영 ( 鄭克永 )과 함께 파직되었다. 이자겸이 몰락한 뒤 내시 ( 內侍 )가 되었고, 좌사간 ( 左司諫 ) · 상주수(尙州守) · 시어사 ( 侍御史 )를 역임하였다.

1132년(인종 10)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郎)으로 진주사 ( 陳奏使 )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어사중승(御史中丞) · 전중소감(殿中少監)을 거쳐, 1142년 간의대부 ( 諫議大夫 )로서 금나라에 가서 책명(冊命)에 감사를 올렸는데, 그의 말과 행동에 금인(金人)들이 탄복했다고 한다.

그 뒤 호부시랑(戶部侍郎)에 제수되었고, 동북면병마부사(東北面兵馬副使) · 승선 ( 承宣 )을 역임하였다. 1144년에는 동지공거 ( 同知貢擧 )로서 지공거(知貢擧) 한유충 ( 韓惟忠 )과 함께 진사 ( 進士 ) 김돈중 ( 金敦中 ) 등 26인에게 급제를 사(賜)하게 하였다.

1147년(의종 1) 한림학사 ( 翰林學士 )로 ≪ 서경 ≫ 의 〈 열명 說命 〉 3편을 의종에게 강설하였다. 그 해에 어사대부 동지추밀원사 (御史大夫同知樞密院事)가 되었다.

이듬해 지추밀원사 판삼사사(知樞密院事判三司事) · 병부상서(兵部尙書)를 거쳐 1149년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 참지정사 판상서형부사(參知政事判尙書刑部事), 이듬해 중서시랑평장사 ( 中書侍郎平章事 )에 올랐다.

1151년 판병부사(判兵部事)를 겸직했으나, 처남인 내시낭중(內侍郎中) 정서(鄭敍)와 왕의 동생 대령후 경(大寧侯暻)이 참소를 입은 사건에 연루되어 남경유수사(南京留守使)로 좌천되었다. 1157년 대령후 경이 천안부(天安府)로 유배될 때 다시 충주목사(忠州牧使) · 광주목사(廣州牧使) 등으로 좌천되었다.

1161년 봉원전대학사(奉元殿大學士)가 되었으나, 반대하는 자들이 있어 중서시랑평장사로 치사(致仕)하였다. 1170년 정중부 ( 鄭仲夫 )의 난 때 여러 무인들의 보호로 화를 면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자 다시 중서시랑평장사로 제수되고, 1172년(명종 2) 수사공 집현전대학사 판예부사(守司空集賢殿大學士判禮部事)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경사자집 ( 經史子集 )에 밝았고 불경 ( 佛經 )에도 조예가 깊었다. ≪ 남도집 南都集 ≫ · ≪ 유문사실 柳文事實 ≫ · ≪ 최문숙공집 崔文淑公集 ≫ · ≪ 이한림집주 李翰林集註 ≫ 등을 편찬했으며, 시호는 문숙(文淑)이다.

 

최당

1135(인종 13)∼1211(희종 7).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창원(昌原). 태조 때의 공신 준옹(俊邕)의 후손으로 평장사 ( 平章事 ) 유청(惟淸)의 아들이다.

1171년(명종 1) 우정언으로 승선 이준의(李俊儀)와 문극겸 ( 文克謙 )의 대성 ( 臺省 ) 겸관을 사면(辭免)하게 하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 좌천되었다.

이어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郎)을 거쳐 1183년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국자감시 ( 國子監試 )를 주관하여 오몽림(吳夢霖)·김우(金瑀) 등을 뽑았다. 1197년 참지정사로 지공거 ( 知貢擧 )가 되어 동지공거 ( 同知貢擧 )인 좌간의대부 ( 左諫議大夫 ) 민공규(閔公珪)와 함께 진사 방연보(房衍寶) 등 30인을 뽑았다.

신종 때에 중서시랑평장사 ( 中書侍郎平章事 )가 되고, 1199년(신종 2) 수태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守太尉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로 치사(致仕)하였다.

쌍명재(雙明齋)를 설치하였고, 최선 ( 崔詵 )· 장자목 ( 張自牧 )· 고영중 ( 高瑩中 )· 백광신 ( 白光臣 )·이준창(李俊昌)·현덕수(玄德守)· 이세장 ( 李世長 )·조통(趙通) 등과 함께 기로회 ( 耆老會 )를 조직하여 시주(詩酒)로써 소일하니 당시에 지상선(地上仙)으로 불렸다. 시호는 정안(靖安)이다.

 

최선(崔詵)

? ∼ 1209(희종 5).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창원(昌原 : 지금의 강원도 鐵原). 태조 때의 공신 준옹(俊邕)의 후손이며, 평장사 ( 平章事 ) 유청(惟淸)의 아들이다.

1178년(명종 8) 공부낭중으로 흥화도찰방사(興化道察訪使)를 겸임하였다. 1180년 우사간으로 명종의 아우인 원경국사(元敬國師) 충희( 食 曦)가 궁중에서 궁녀들과 음란한 행위를 한다고 탄핵하였다가 파면되었다.

1186년 판장작감(判將作監)이 되어 대사성 황보 탁(皇甫倬), 좌산기상시 ( 左散騎常侍 ) 이지명(李知命)과 함께 양공준(梁公俊) 등 22인과 명경(明經) 5인을 시취 ( 試取 )하였다.

1192년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로서 이부상서 정국검 ( 鄭國儉 ) 등과 함께 ≪ 속자치통감 續資治通鑑 ≫ 을 교정하고 이어 ≪ 태평어람 太平御覽 ≫ 을 교정하여 간행하였다.

1194년 동지공거 ( 同知貢擧 )로 지공거인 추밀원사 최유가(崔瑜賈)와 함께 진사 ( 進士 )를 취하고 김군수(金君綬) 등 31인에게 급제를 사(賜)하게 하였다. 1197년(신종 즉위년) 지추밀원사를 거쳐 참지정사 ( 參知政事 )를 역임하였다.

1200년 수태부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이부사(守太傅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判吏部事)에 특진되고 이듬해 개부의동삼사 상주국(開府儀同三司上柱國)이 되었다.

1202년 식목도감사(式目都監事)로 활동하였으며, 1204년 당시의 집정자였던 최충헌 ( 崔忠獻 )과 함께 신종의 선위(禪位)를 의논하였다. 1209년 문하시랑평장사로 죽었다. 희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최종준(崔宗峻)

종준(宗峻)은 1201년(신종 4)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고종 초에 좌승선(左承宣)을 거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이부 상서(吏部尙書) 등을 역임하고 뒤에 문하시중에 이르러 궤장을 하사받았으며, 특히 의학에 정통하여 [신집어의촬요방(新集御醫撮要方)]을 저술했다.

 

최종자

종준의 동생 종자도 1225년(고종 12) 위위경(衛尉卿)으로 과거시험의 감독관을 거쳐 1236년(고종 23) 우복야(右僕射)에 이르렀다.

 

최인(崔璘)

당( )의 손자 인(璘)은 성격이 호탕하여 술과 놀이를 좋아했으며 30세에 독서를 시작한 뒤 강종 때 급제하여 대간(臺諫)을 지내고 여러 차례 몽고에 사신으로 가서 외교적으로 공을 쌓았다.

 

최징(崔澄)

인의 아우 징(澄)은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최유(崔濡)

징(澄)의 아들 유(濡)는 1090년(선종 7)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교감(校書校勘), 중서 사인(中書舍人)을 거쳐 1111년(예종 6) 시어사가 되었고 1128년(인종 6) 이부상서(吏部尙書)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금(金)나라에 다녀왔으며 1138년(인종 16) 문하시랑 평장사에 올랐다.

 

최온

? ∼ 1268(원종 9).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창원(昌原). 평장사 ( 平章事 ) 유청(惟淸)의 증손으로, 좌복야 ( 左僕射 ) 종자(宗梓)의 아들이다. 고종 때 과거에 급제, 1258년(고종 45) 추밀원사로 당시의 집정자인 최의(崔 洑 )를 제거하려는 김준 ( 金俊 ) 등의 모의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아들인 견룡행수(牽龍行首) 문본(文本)이 중랑장 ( 中郎將 ) 이주 ( 李柱 ) 등과 함께 이 모의를 최의에게 밀고하였다. 최의가 제거된 뒤에 앞서의 밀고가 발각되어 김준과 유경 ( 柳璥 )이 문본을 죽이려 하였으나 왕이 이를 반대하고 귀양보냈다.

이에 대하여 원망하자 김준 등이 탄핵하여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그 뒤 장군 이주인(李柱仁)의 청으로 풀려나와 1260년 추밀원사에 복직되고 수사공좌복야(守司空左僕射)를 역임하였다.

1262년 판공부사(判工部事), 이듬해 수태부 중서시랑평장사(守太傅中書侍郎平章事)에 올랐다. 시호는 문신(文信)이다.

 

최옹(崔雍)

? ∼ 1292(충렬왕 18).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주(東州 : 지금의 강원도 철원). 초명은 기( 尻 ), 자는 대화(大和). 증조할아버지는 중서시랑평장사 ( 中書侍郎平章事 ) 유청(惟淸)이고, 할아버지는 영(瑩)이며, 아버지는 잡직서영(雜職署令) 양(讓)이다.

집안이 대대로 문학으로 알려진 명문출신으로 성품이 근후하고 말이 적었다. 젊어서 학문을 즐기어 동지 10인과 함께 10년간 독서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몇 년이 못 되어 다른 사람은 모두 포기하고 갔으나 그는 홀로 힘써 배워서 읽지 않은 책이 없어, 당시 박학으로 일컬어졌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대관승(大官丞)을 거쳐 전리좌랑(典理佐郎)이 되었으며, 충렬왕은 태손(太孫) 때부터 맞이하여 사부(師傅)로 삼았는데 즉위함에 따라 국자사업(國子司業)을 지내며 ≪ 통감 通鑑 ≫ 을 강론하였다.

이어 국학전주(國學典酒) · 세자궁령(世子宮令)을 거쳐 1292년(충렬왕 18) 부지밀직사사 문한학사(副知密直司事文翰學士)에 올라 치사(致仕)하였다.

 

최영(崔瑩)

1316(충숙왕 3) ∼ 1388(우왕 14). 고려 후기의 명장 · 재상. 본관은 창원(昌原). 평장사 ( 平章事 ) 유청(惟淸)의 5세손, 사헌규정(司憲糾正) 원직(元直)의 아들이다. 풍채가 괴걸하고 힘이 뛰어났다.

처음에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 휘하에서 왜구를 토벌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워 우달치 〔 于達赤 : 司門人 〕 가 되었다. 1352년(공민왕 1)에 안우 ( 安祐 ) · 최원 ( 崔源 ) 등과 함께 조일신 ( 趙日新 )의 난을 평정하여 호군 ( 護軍 )이 되었고, 1354년에 대호군이 되었다.

당시 원나라에서 고려에 원병을 청하자 유탁 ( 柳濯 ) · 염제신 ( 廉悌臣 ) 등 40여 명의 장수와 함께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원나라에 갔다. 그 때 원나라의 승상 ( 丞相 ) 탈탈(脫脫) 등을 좇아 중국 가오유 〔 高郵 〕 등지에서 싸웠다. 1355년에는 회안로(淮安路)에서 적을 막았으며 팔리장(八里莊)에서 싸워 용맹을 떨친 뒤 돌아왔다.

이듬해부터 고려가 배원정책(排元政策)을 쓰게 되자 서북면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로 서북면병마사 인당(印 槻 )과 함께 원나라에 속했던 압록강 서쪽의 8참(站)을 공격하여 파사부(婆娑府 : 九連城) 등 3참을 쳐부수었다. 1357년 동북면체복사를 거쳐 이듬해 양광전라도왜구체복사(楊廣全羅道倭寇體覆使)가 되어 배 400여 척으로 오예포(吾乂浦)에 침입한 왜구를 복병을 이용해 격파하였다.

1359년 홍건적 4만 명이 침입하여 서경 ( 西京 )을 함락시키자, 여러 장수와 함께 생양(生陽) · 철화 ( 鐵和 ) · 서경 · 함종 ( 咸從 ) 등지에서 적을 무찔렀다. 이듬해 평양윤 겸 서북면순문사를 거쳐 그 이듬해 서북면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 · 좌산기상시 ( 左散騎常侍 )가 되었다.

1361년에 홍건적 10만 명이 다시 침입해 개성을 함락시키자, 이듬해 안우 · 이방실 ( 李芳實 ) 등과 함께 이를 격퇴하여 개성을 수복하였다. 그 공으로 훈(勳) 1등에 도형벽상공신(圖形壁上功臣)이 되었고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올랐다. 이어 양광도진변사(楊廣道鎭邊使)를 겸하였다가 도순문사를 겸하였다.

1363년에는 김용 ( 金鏞 )이 공민왕을 시해하려 했던 흥왕사 ( 興王寺 )의 변(變)을 평정시켰다. 그 공으로 훈 1등에 진충분의좌명공신(盡忠奮義佐命功臣)이 되었고, 이어 판밀직사사 평리(判密直司事評理)를 거쳐 찬성사 ( 贊成事 )가 되었다.

1364년 원나라에 있던 최유 ( 崔濡 )가 덕흥군(德興君 : 충선왕의 셋째아들)을 왕으로 받들고 군사 1만 명으로 압록강을 건너 선주(宣州 : 평안북도 선천)에 웅거하였다. 이에 서북면도순위사(西北面都巡慰使)로서 이성계 ( 李成桂 ) 등과 함께 수주(隨州 : 평안북도 정주)의 달천(獺川)에서 싸워 물리쳤다.

또, 연주(延州 : 평안북도 운산)에 침입한 동녕로만호(東寧路萬戶) 박백야대(朴伯也大)를 장수를 보내 격퇴시켰다. 이듬해 교동 ( 喬桐 ) · 강화(江華)에 왜구가 출몰하자 동서강도지휘사(東西江都指揮使)가 되어 동강(東江)에 나가 지켰다.

이 때 신돈 ( 辛旽 )의 참소로 계림윤(鷄林尹)으로 좌천되었다가 귀양길에 올랐다. 1371년 신돈이 처형되자 6년 만에 풀려나 다시 찬성사가 되었다. 1373년에는 육도도순찰사(六道都巡察使)로 있으면서 군호 ( 軍戶 )를 편적(編籍)하여 전함(戰艦)을 만들게 하였다. 또, 나이 70세 이상인 사람들로부터 쌀을 거두어 군수(軍需)에 보충함으로써 백성들의 원망을 사기도 하였다.

1374년 경상 · 전라 · 양광도도순문사가 되었을 때, 육도도순찰사 시절에 6도를 혼란스럽게 하였다는 이유로 대사헌 김속명 ( 金續命 ) 등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도리어 김속명이 파면되고 진충분의선위좌명정란공신(盡忠奮義宣威佐命定亂功臣)의 호가 하사되었다.

그 해 명나라가 제주도의 말 2,000필을 요구하였는데, 제주도의 호목(胡牧)이 300필만 보내왔다. 이에 제주도를 치기로 하고, 양광 · 전라 · 경상도도통사(楊廣全羅慶尙道都統使)가 되어 도병마사 염흥방 ( 廉興邦 )과 함께 전함 314척과 군사 2만 5,600명을 지휘, 제주도를 평정하였다. 그리고 1375년(우왕 1)에는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다.

1376년 연산 ( 連山 ) 개태사 ( 開泰寺 )에 침입한 왜구에게 원수(元帥) 박인계 ( 朴仁桂 )가 패배하자, 민심이 흉흉하였다. 이 때 노구를 이끌고 출정하기를 자원하여 홍산(鴻山 :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렀으며, 그 공으로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377년에는 도통사가 되어 강화 · 통진 ( 通津 )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는 한편, 왕으로 하여금 교동 · 강화의 사전 ( 私田 )을 혁파하여 군자(軍資)에 충당하게 하였다.

이 무렵 왜구가 침입하여 개성을 위협하므로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군사로서 굳게 지킬 것을 주장하고 이를 반대하였다. 1378년 왜구가 승천부(昇天府 : 지금의 淵 德)에 침입하자, 이성계 · 양백연 ( 楊伯淵 ) 등과 함께 적을 섬멸하고 그 공으로 안사공신(安社功臣)이 되었다.

1380년에는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가 되어 동서강(東西江)에 나가 왜구를 막다가 병에 걸렸다. 이 때 왕은 공을 기록한 철권(鐵券)과 공을 치하하는 교서를 내렸다. 이듬해 아버지에게는 순충아량염검보세익찬공신(純忠雅亮廉儉輔世翊贊功臣) · 벽상삼한삼중대광 ( 壁上三韓三重大匡 ) · 판문하사(判門下事) ·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 · 상호군 ( 上護軍 ) · 동원부원군(東原府院君)이 증직되고, 어머니 지씨(智氏)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이 되었다. 그 자신은 수시중(守侍中)이 되었다가 이어 영삼사사(領三司事)를 지냈고, 1384년 문하시중을 거쳐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올랐다.

1388년 다시 문하시중이 되어 왕의 밀령(密令)으로 부패와 횡포가 심하던 염흥방 · 임견미 ( 林堅味 )와 그 일당을 숙청하였다. 그 해 그의 딸이 우왕의 비(寧妃)가 되었다. 이 때 명나라가 철령위 ( 鐵嶺衛 )의 설치를 통고하고 철령 이북과 이서 · 이동을 요동(遼東)에 예속시키려 하였다. 이에 요동정벌을 결심하고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왕과 함께 평양에 가서 군사를 독려하였다.

한편, 좌군도통사 조민수 ( 曺敏修 ), 우군도통사 이성계로 하여금 군사 3만 8,800여 명으로 요동을 정벌하게 하였으나, 이성계가 조민수를 설득하여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함으로써 요동정벌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렇게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고 기세가 오른 이성계의 막강한 원정군을 막지 못하여 결국 도성을 점령당하고 말았다. 이는 고려 말기의 군벌(軍閥) 대립에서 고려왕조를 수호하려는 구파 군벌이 고려왕조를 부정하려는 신진 군벌에게 패배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강직용맹하고 청렴했던 그는 이성계에게 잡혀 고향인 고봉현(高峯縣 : 지금의 경기도 고양)으로 유배되었다. 그 뒤 다시 합포(合浦 :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 · 충주로 옮겨졌다가 공료죄(攻遼罪 : 요동을 공격한 죄)로 개성에 압송되어 순군옥 ( 巡軍獄 )에 갇혔고, 그 해 12월에 참수(斬首)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개성 사람들은 저자의 문을 닫고 슬퍼하였으며, 온 백성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성계는 새 왕조를 세우고 나서 6년 만에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넋을 위로하였다. 개풍군(開 淵 郡) 덕물산(德物山)에 있는 그의 무덤은 풀이 나지 않는다 하여 적분(赤墳)으로 불린다. 그 산 위에는 장군당 ( 將軍堂 )이 있어 무당들에게 숭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최남선

1890(고종 27) ∼ 1957. 문화운동가 · 작가 · 사학자. 본관은 동주(東州 : 지금의 鐵原). 아명은 창흥(昌興). 자는 공륙(公六). 호는 육당(六堂) · 한샘 · 남악주인(南嶽主人) · 곡교인(曲橋人) · 육당학인(六堂學人) · 축한생(逐閑生) · 대몽(大夢) · 백운향도(白雲香徒). 서울 출신. 아버지는 전형적인 중인계층 출신인 헌규(獻圭)이며, 어머니는 강씨(姜氏)이다.

1895년(고종 32)부터 글방에 다니기 시작하였으며, 1902년 경성학당(京城學堂)에 입학하였고, 1904년 10월 황실 유학생으로 뽑혀 일본에 건너가 동경부립제일중학교(東京府立第一中學校)에 입학하였으나 석 달 만에 자퇴하고 귀국하였다.

1906년 3월 사비생(私費生)으로 다시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사범부 지리역사과에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6월 이 학교에서 개최된 모의국회에서 경술국치문제를 의제로 내걸자 격분한 일군의 한국인 유학생들과 함께 이 학교를 자퇴하고 귀국하였다.

1907년 18세의 나이로 출판기관인 신문관 ( 新文館 )을 창설하고 민중을 계몽, 교도하는 내용의 책을 출판하기 시작하였다. 1908년 근대화의 역군인 소년을 개화, 계몽하여 민족사에 새 국면을 타개하려는 의도로 종합잡지 ≪ 소년 少年 ≫ 을 창간하고, 창간호에 〈 해에게서 소년에게 〉 를 실어 한국 근대시사에서 최초로 신체시를 선보였다.

이후 1919년 3 · 1만세운동 때는 독립선언문을 작성하였다. 문학과 문화 · 언론 등 다방면에 걸친 활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문관의 설립 · 운영과 ≪ 소년 ≫ · ≪ 붉은 저고리 ≫ · ≪ 아이들 보기 ≫ · ≪ 청춘 靑春 ≫ 등의 잡지 발간을 통하여 대중의 계몽 · 교도를 꾀하는 한편, 창가 · 신체시 등 새로운 형태의 시가들을 발표하여 한국 근대문학사에 새로운 시가 양식이 발붙일 터전을 닦았다. 당시까지 창가 · 신체시를 제작, 발표한 사람은 이광수 ( 李光洙 )가 있었는데 양과 질에서 그를 앞질렀던 것이다.

둘째, 그때까지 쓰여온 문장들이 대개 문주언종(文主言從)의 한문투가 중심이었는데 이것을 새 시대에 맞도록 구어체로 고치고 그와 동시에 우리말 위주가 되게 하여 여러 간행물과 잡지 매체를 통해서 그것을 선전, 보급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 이전까지 우리 주변의 지배적 경향인 문어체 문장이 지양, 극복되고, 아울러 낡고 고루한 말투가 없어지는 등 문장개혁이 이루어졌다.

셋째, 민족문화가 형성, 전개된 모습을 한국사 · 민속 · 지리연구와 문헌의 수집 · 정리 · 발간을 통해 밝히기도 하였다. 이것은 민족사의 테두리를 파악하려는 의도와 함께 그 바닥에는 한국민족의 정신적 지주를 탐구하고 현양하려는 속셈이 깔려 있었다. 나아가 민족주의 사상을 집약시킨 ‘ 조선정신(朝鮮精神) ’ 을 제창하기까지 하였다.

한편, 여러 분야에서 방대한 양의 업적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다섯 분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 한국사에 대한 연구로, 이는 ≪ 청춘 ≫ 1918년 6월호에 발표한 〈 계고차존 稽古箚存 〉 에서 비롯된다. 이 글은 당시로 보아서는 상당 수준의 논문으로 그 내용이 단군시대에서부터 부여 · 옥저 · 예맥 등에 걸치는 것이었다.

1920년대에는 〈 조선역사통속강화 朝鮮歷史通俗講話 〉 · 〈 삼국유사해제 三國遺事解題 〉 · 〈 불함문화론 不咸文化論 〉 · 〈 단군신전(檀君神典)의 고의(古義) 〉 등을 발표하였고, 1930년대 이후에 ≪ 역사일감 歷史日鑑 ≫ · ≪ 고사통 故事通 ≫ 등 방대한 규모의 작업을 이룩하였다.

② 문화유산의 발굴 · 정리 및 그 평가 시도로 이는 다시 조선광문회 ( 朝鮮光文會 ) · 동명사 ( 東明社 ) · 계명구락부 ( 啓明俱樂部 ) 등의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조선광문회 단계에서는 우리 고전소설인 〈 춘향전 〉 · 〈 옥루몽 〉 · 〈 사씨남정기 〉 · 〈 흥부놀부전 〉 · 〈 심청전 〉 · 〈 장화홍련전 〉 · 〈 조웅전 〉 등을 정리, 발간하였고, 동시에 ≪ 동국통감 東國通鑑 ≫ · ≪ 열하일기 熱河日記 ≫ 등 한문 고전들도 복각, 보급하였다.

동명사 때에는 ≪ 조선어사전 ≫ 편찬을 기도하였으며, 이는 계명구락부 때로 이어졌다. 이때 한글 연구가의 한 사람인 박승빈 ( 朴勝彬 )과 제휴하여 사전편찬사업을 구체화시켜나갔다. 또한, ≪ 삼국유사 ≫ 의 주석정리 해제를 하고 ≪ 금오신화 ≫ 의 보급판도 간행하였다.

③ 국토 산하 순례예찬과 그 현양 노력은 ≪ 심춘순례 尋春巡禮 ≫ · ≪ 백두산근참기 白頭山勤參記 ≫ · ≪ 송막연운록 松漠燕雲錄 ≫ 등으로 대표된다. 이 글들을 통하여 한반도 전역뿐만 아니라 만주와 몽고에 이르기까지 여러 명소 · 고적들을 더듬고 거기서 우리 민족의 옛날을 되새겼다.

④ 시조부흥운동을 중심으로 한 민족문학운동은 시조의 창작 활동과 그 이론을 다진 일들로 대표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민족적 시가 양식으로서 시조가 재정리, 창작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카프의 계급지상주의에 맞서 다수의 작품을 제작, 발표하였다.

이것의 집대성이 창작시조집 ≪ 백팔번뇌 百八煩惱 ≫ 이다. 또한, 〈 조선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 〉 · 〈 시조 태반으로서의 조선민성(朝鮮民性)과 민속 〉 등을 발표하여 시조부흥운동의 논리적 근거를 세웠다.

⑤ 민속학에 대한 연구는 ≪ 동국세시기 ≫ 등 당시까지 사본으로 전해오던 것을 수집, 간행한 것을 비롯하여, 〈 단군론 檀君論 〉 · 〈 신라 경문왕과 희랍의 미다스왕 〉 등의 발표로 나타났으며, 〈 불함문화론 〉 등은 민속학적으로 주목되는 논문이다.

그는 단군을 건국의 시조인 개인이 아니라 원시사회의 신앙에 근거를 둔 종교적 제사장으로 이해하였다. 그가 불함문화권으로 주장한 동북아시아계의 여러 민족의 공통된 신앙, 즉 샤머니즘을 배경으로 단군신화를 이해하려고 한 것은 우리 신화와 문화에 대한 최초의 민속학적 연구 시도로 인정되고 있다.

이와 같이 다양한 활동으로 인하여 우리 민족문화운동사에 높은 봉우리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3 · 1운동으로 구금 투옥되고 나서 석방된 뒤 계속 일제의 감시 · 규제를 받아 친일의 길을 걸었다.

그리하여 식민지정책 수행 과정에서 생긴 한국사 연구기구인 조선사편수회에 관계를 가졌고, 이어 만주 건국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뿐만 아니라 일제 말기에는 침략전쟁을 미화, 선전하는 언론 활동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광복 후에는 민족정기를 강조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비난과 공격의 과녁이 되었다.

총체적으로 보면 유능한 계몽운동자였고, 우리 민족의 근대화 과정에 중요한 임무를 담당한 문화운동가의 한 사람이다. 죽은 뒤 1958년 말년에 기거한 서울 우이동 소원(素園)에 기념비가 세워졌고, 1975년 15권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 육당최남선전집 ≫ 이 간행되었다.

 

최두선(崔斗善)

1894(고종 31)∼1974. 교육가·언론인·정치가. 본관은 동주(東州:鐵原). 호는 각천(覺泉). 서울 출신. 남선(南善)의 동생이다. 휘문의숙(徽文義塾)을 거쳐 1917년 일본 와세다대학 (早稻田大學)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63년 고려대학교, 1968년 와세다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김성수(金性洙)를 알게 되어 1918년 김성수가 경영하던 중앙고등보통학교 학감에 취임, 다음해에 교장이 되었다. 1922∼1925년까지 독일의 마부르크대학·예나대학·베를린대학에서 수학하고, 다시 중앙학교 교장으로 일하다가, 1932년 보성전문학교 상무이사에 취임하여 그 운영을 맡았다. 1938년 교육계를 떠나 경성방직주식회사 상무이사에 취임하고 광복과 함께 사장이 되었다. 1947년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 1963년까지 16년 동안 재직하면서 ≪동아일보≫ 육성과 언론창달에 크게 공헌하였다. 동아일보사 사장 재직중인 1960년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활약하였다.

또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하여 1972년까지 일하였다. 이듬해에는 정부의 친선사절로 미국 조야와 교류하였고, 그해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활동하였다. 제3공화국의 초대국무총리에 취임하여 민정이양 후의 민심수습에 진력하였으나, 대일굴욕외교반대 등 난국에 부딪혀 6개월만인 1964년 5월 퇴임하였다.

그해 서독정부 초청으로 서독을 방문하였고, 다시 경성방직주식회사 회장에 취임하였으며, 1965년 대통령특사로서 친선외교사절단을 이끌고 아프리카 9개국을 순방하였다. 1970년 국토통일원 자문위원에 위촉되고, 한독협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또, 1971년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1000만이산가족찾기운동을 북한적십자사에 제의하여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을 실현시켰다. 청조소성훈장과 국민훈장무궁화장이 수여되었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철원 최씨(東州, 鐵原崔氏)는 남한에 총 2,518가구 10,56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崔塋(최영) 선생의 일화.

목에 재를 뿌린 딸

최영장군은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녀에게는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다. 그런데 최영장군은 사윗감은 자신이 직접 시험하여 자기만한 재능이 있는 사람을 고르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 젊은이를 불러서 먼저 자기의 재주를 보여주었다. 즉, 최영장군이 목을 자르고 난 뒤 그 목이 다시 붙어 소생하는 재능이었다.

딸은 아버지가 다시 살아나면 자신의 혼인이 성사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떨어진 목에 매운재를 뿌려 아버지의 목이 다시 붙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출전 <한미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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