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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 추씨: 전주추씨(秋)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秋(추계: 전주추씨)

 

 

본관(本貫): 추계(秋溪):전주(全州)

시조(始祖): 추엽

유래(由來):

 

추씨(秋氏)는 중국 성씨(姓氏)로 송(宋)나라 고종(高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추 엽(秋 )이 고려 인종(仁宗) 때 가솔(家率)을 이끌고 함흥(咸興) 연화도(蓮花島)에 정착하여 우리나라 추씨(秋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추씨(秋氏)는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의 문헌(文獻)에 47본(本)까지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가 동원분파(同源分派)이며 현존(現存)하는 관향(貫鄕)은 전주(全州), 추계(秋溪) 두 본(本)이다.

 

가문의 중요 인물

 

추황(秋簧)

 

 

추씨구백년사(秋氏九百年史)에 의하면 엽( )의 아들 황(簧)이 1209년(희종5) 성균시험(成均試驗)에 장원하고 1213년(강종3) 문과에 급제한 후 예부 상서(禮部尙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등을 지냈다.

 

추적(秋適)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신. 추계추씨(秋溪秋氏)의 시조이다. 호는 노당(露堂). 충렬왕초 과거에 급제하여 안동서기(安東書記) · 직사관 ( 直史館 )을 거쳐 좌사간 ( 左司諫 )에 올랐다.

1298년(충렬왕 24) 환관 황석량(黃石良)이 권세를 이용, 자신의 고향인 합덕부곡(合德部曲 : 현재 충청남도 당진군 합덕읍)을 현(縣)으로 승격시키려고 할 때, 그 서명을 거부하자 황석량의 참소로 순마소 ( 巡馬所 )에 투옥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시랑으로서 북계 용주 ( 龍州 )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충렬왕 말년 안향 ( 安珦 )에 의하여 발탁되어 이성(李晟) · 최원충(崔元 食 ) 등과 함께 7품 이하의 관리, 혹은 생원들에 대한 유학교육을 담당하였으며, 한문교양서인 ≪ 명심보감 ≫ 을 편찬하였다고 한다. 민부상서(民部尙書) · 예문관제학에 이르러 치사(致仕)하였다. 국학 교수(國學敎授)에 이르러 명심보감(明心寶鑑)을 중국에 전파하였다.

 

추수경(秋水鏡)

1530(중종 25)∼1600(선조 33).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청하 ( 淸河 ), 호는 세심당(洗心堂). 추계추씨(秋溪秋氏)의 시조 적(適)의 후손이며, 안찰사 섭(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병부상서 서(墅)이고, 아버지는 이부시랑 천일(天日)이다.

중국 오현군(五賢郡) 출신. 1591년(선조 24) 명나라의 무강자사(武康刺史)가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부장 ( 副將 )으로 아들 노(蘆)·적(荻)을 데리고 원병의 일원으로 환국하였다.

그 뒤 곽산·동래 등지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고 전주에서 살았다. 완산부원군 ( 完山府院君 )에 추봉됨으로써 후손들이 본관을 전주로 삼았다. 부여의 충현사(忠賢祠)에 제향되었다

 

추익한(秋益漢)

적(適)의 후손 익한(益漢)이 세종(世宗) 때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내고 향리(鄕里)로 돌아가 시서(詩書)로 자락(自樂)하다가 어린 단종(端宗)이 영월(寧越)로 유배되어 오자 머루, 다래 등을 따다 바치며 충성(忠誠)을 다 하였다.

1457년(세조3) 단종이 살해되자 그도 따라 죽으니 세상 사람들은 당시 단종의 시신을 거둔 엄흥도(嚴興道)와 더불어 <살아 생전 추충신(秋忠臣)이요 죽어서는 엄충신(嚴忠臣)>이라고 일컬었으며, 지금도 영월(寧越)에 있는 영모전(永慕殿)에는 그의 충성을 기려 백마를 탄 단종(端宗)의 혼백에게 머루를 진상하는 그림이 전해지고 있다.

 

추치경(秋致鏡)

한말(韓末) 칠의사(七義士)의 한 사람이었던 치경(致鏡)이 충주(忠州) 장현(長峴) 전투에서 일본군(日本軍)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여 충절의 가풍을 이었다.

 

추용만(秋鏞滿), 추용소(秋鏞召)

용만(鏞滿)과 용소(鏞召) 형제는 합천(陜川)에서 결사대를 조직하고 일본(日本) 수비대를 공격하다 순국하여 당대에 이름을 떨쳤따.

 

추기엽(秋琪燁)

전북 익산(全北益山)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윤현보와 함께 영암(靈岩), 동해(東海) 등지에서 활약한 기엽(琪燁)이 유명하다.

 

추교철(秋敎哲)

군자금 마련을 하다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를 교철(敎哲)등이 뀌어났다.

 

추규영(秋圭暎)

독립 애국단을 조직하여 단장이 되어 동지규합에 노력하고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하여 군자금 모금에 공헌한 규영(圭暎)을 비롯하여 많은 애국열사(愛國烈士)들이 배출되었다.

 

 

秋益漢(추익한) 선생의 일화.

충신 추익환

단종이 배소에서 외로이 지낼 때 추익한이 자주 머루를 따다 드렸다. 하루는 추익한의 꿈에 단종이 백마를 타고 지나가기에 행선지 물었더니 태백산으로 간다고 하는데 추익한이 이상하게 여겨 배소에 가보았더니 이미 사사되었다.

추익한은 꿈에 단종을 만난 길을 따라 달려가다가 끝내 단종을 찾지 못하고 죽었다. 그래서 영월읍 서낭당에서는 백마를 탄 단종과 머루를 바치는 추익한의 그림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秋適(추적)  선새의 일화,

큰길로 가자.

「명심보감」을 지으신 유명한 추적선생은 인군이 하는 일에 잘못이 생기면 이를 간언하는 관관(館官)이었다.

한번은 그 일로 다른 사람의 무고를 받아 채포되어 순마소(巡馬所)에 구금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선생의 무고를 아는 포졸들이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골목길로 몰래 갈까요?」하니
「간관(諫官)으로서 바른 일을 하다가 압송(押送) 당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니, 다른 사람들이 다 보는 큰길로 가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하시며 정의로운 자기의 소신에 당당하였다고 한다.

 

 

 

秋千石(추천석)의 일화.

 

내 혼백(魂魄) 남의 육신(肉身)

 

 

쓸쓸한 가을바람은 겨울을 재촉하는 듯 요란한 속에 밤은 깊어만 가고 있다.

진천에 사는 추천석(秋千石)은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는 환상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어디론가 아득히 멀어져 가는 자신을 의식할 때엔 이미 자기의 몸은 굳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아내와 아들이 목 놓아 우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웬일인지 자기를 붙들고 울고 있었다.

그럼 내가 죽었단 말인가.

추천석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말짱하게 살아 있는 자기를 죽었다고 붙들고 울고 있으니 실로 어이가 없었다.

 

, 여보 ! 내가 죽기는 왜 죽어 잠깐 눈을 붙였을 뿐인데 죽었다고 울고 있으니 말이요?

 

추천석은 아내를 밀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울고 있는 아내는 아무 반응도 없이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사지(四肢)도 굳어버려 말을 듣지 않는다. 또한 아들까지도 아버지를 부르며 통곡을 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오밤중에 왜들 이렇게 울고 법석이며, 이건 또 웬 송장이란 말인가?뒷걸음을 치면서 추천석은 방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도대체 누군가? 언제 본 사람의 얼굴 같기도 하고, 그렇다! 물그릇에 비춰 본 내 얼굴이로구나.

 

그것은 추천석의 죽은 시체였다.

지금 살아서 생각하며 움직이고 있는 것은 다만 그 의 영혼뿐인 것이다. 영혼은 언제까지나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추천석의 영혼은 살아 있는 것이다. 아내와 자식은 추천석의 시신을 붙들고 신세타령을 하며 곡성을 높였다.

 

아내는 그 시신에 얼굴을 대고 몸부림을 쳐도 혼백만의 추천석은 민망스럽기만 했 다. 이미 그는 이 세상 사람은 아니기에 말이 오갈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대문 밖에서 무서운 외침이 들려왔다.

 

추천석은 대령하라.

저 세상 염라대왕의 사자들이 와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무서운 차림새에 창과 칼을 들고 있었다. 추천석은 그들에게 끌리어 집을 떠나서 저승으로 떠나버렸다. 칼날 같은 바윗길과 가시덤불을 헤치며 염라대왕에게로 갔다.

명부를 들척거리며 위엄 있게 앉아 있는 염라대왕 앞에 추천석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너는 어디 살다 온 누구냐?

네 소인은 충청도 진천에 살다온 추천석이라 하옵니다.

분명 너는 진천에서 살았느냐?

대왕님 잘못된 일이라도 있사옵니까?

 

사자들은 머리를 숙인 채 쩔쩔 매는 눈치였으며, 염라대왕은 노기를 띤 어조로,

내가 언제 이 사람을 잡아오라고 했더냐?

, 그 사람이 추천석이 분명하오며 무술년(戊戌年) 칠월 칠일 생 추천석이 올시다.

이런 어리석은 것들. 추천석이가 어디 한 사람 뿐이더냐? 생일이 같은 동명(同名)의 추천석이는 용인 땅에 서 있단 말이다. 그렇게 소상히 일러줬건만 잘못 듣고들 ! 당장에 이 추천석이는 진천으로 돌려보내고 그 길로 용인 땅의 추천석이를 잡아 들여라.

 

이리하여 진천에 살던 추천석이는 사자들의 착각으로 잘못 끌려왔던 것이다. 사자들 은 추천석이를 데리고 진천 땅에 내려왔다.

추천석은 아내와 아들을 다시 만나는 기쁨에 겨워 서둘러 집으로 갔다. 그가 살던 마을에 당도한 것은 밤이었다. 마을은 고요하고 집도 그대로였다. 문틈으로 스며 들어 가보니 아내와 아들은 하얀 소복을 입고 있었다.

 

방안 젯상에는 자기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것으로 보아 장례가 이미 끝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내 육신은 없어졌으니 육신이 있어야 인간의 형태로 다시 살아날 것이 아닌가?

 

여보 마누라 내가 다시 살아 왔어요.

그러나 아무 말이 없다. 흔백 만의 말이 아내에게 들릴 리 없었다. 영혼의 추천석은 낭패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 갈 바를 몰랐다. 그의 육신은 땅속에서 이미 썩고 있을 것 이다.

 

추천석의 영혼은 막연했다. 그의 영혼은 마당으로 나와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회생(回生)하여야 할 텐데 하고 여러 가지로 궁리하였다. 마침내 묘방을 생각해냈다.

 

그 것은 용인 땅 추천석의 혼백은 저승으로 가고 그 시신은 아직 그냥 있을 것이니 그의 육신을 쓰고 사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하고 진천 추천석의 영혼은 용인땅 추천석의 집으로 갔다.

 

방안에는 그의 아내와 아들이 시체에 매달려 아우성치며 통곡하고 있었다. 그 틈에 진천 추천석의 혼백은 용인 추천석의 시체로 들어가 버렸다.

 

이로써 그 시체는 다시 따뜻해지고 차츰 움직이게 되었다. 그러자 통곡하고 있던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아버지 시체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놀랐다. 죽었던 시신은 틀림없이 살아서 움직였다. 슬피 울던 가족들은 눈물을 거두며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진천의 추천석은 자다가 깨는 사람처럼 기지개를 피며 몸을 일으켰다.

 

눈을 떠 보니 옆에 앉아 있는 여인은 몸이 비대하고 아직도 생산할 수 있는 건강한 여인이었다. 그들 가족들은 너무도 기뻐서 살아나는 남편과 또 아버지를 얼싸안고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러나 남의 시체를 빌리어 다시 살아난 진천의 추천석은 저승에 억울하게 잡혀갔다가 염라대왕으로부터 풀려난 뒤의 모든 일이 꿈에서 겪은 일처럼 소상히 생각났다.

 

그런데 딱한 일은 이 사실을 어떻게 이야기하느냐가 문제이다.

그러나 나는 분명코 이 집에서 살던 추천석은 아니다. 어차피 떠나야 할 몸이니까, 이해하든가 말든가 사실대로 말해주고 떠날 수밖에 없다. 그는 정중한 자세로 앉으면서,

 

여보세요 부인, 나는 당신의 남편이 아니오. 나는 진천 땅에서 살던 추천석인데 염라대왕의 부름을 받고 저승에 가보니, 저승사자의 잘못으로 용인 땅에 사는 추천석을 데려가야 할 것인데, 잘못 되었다 하여 나는 이 세상에 다시 왔으나, 나의 육신은 이미 장례를 지냈는지라 갈 데가 없어서 당신 남편의 육신에 내 혼백이 들어간 것이요.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여인은 조용한 말로 아이들에게 주의를 준다.

 

얘들아, 조용히들 해라. 아버지가 아직도 덜 깨나시어서 헛소리를 하고 계시니....여보, 정신이 들도록 시원한 꿀물이라도 타다 드릴까요.

 

여인은 헛소리로만 들은 것이다. 꿀물을 마신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러나 큰 대 접으로 가득히 타온 꿀물을 사양하지 않고 마시었으며, 정신은 점점 들었다. 그는 자기가 저승에서 겪어온 일을 다시 자세히 일러주었다.

 

추천석은 그날 밤을 그 집에서 지내고 다음 날은 주저 없이 떠나는 것이었다.

 

잘 쉬고 갑니다. 언젠가는 이 신세를 꼭 갚으리다.

그 집 여인과 아들 딸들은 남편과 아버지를 부르며 매달려, 집을 두고 어디를 가느냐고 만류하였다.

그러나 추천석은 자기의 아내와 자식들이 사는 진천을 향하여 달음질 을 쳤다. 그러나 용인의 여인과 아이들은 남편과 아버지가 아직도 정신이 덜 든 탓이라 생각하고 놓칠 새라 뒤를 따르고 있었다.

 

추천석은 드디어 진천 집에 당도했고 그리운 가족들이 사는 집으로 뛰어 들었다.

 

여보 ! 마누라 내가 살아왔소.

하면서 상복을 입고 있는 가족들에게 달려들었다.

 

도대체 당신이 누구신데 살아 왔다는 것이요. 미친 사람 다 보겠군!

여보 마누라, 저승에 갔던 내가 다시 살아왔단 말이요.

 

아내와 자식들은 처음 보는 미친 사람인지라 동네 사람들을 부르며 당장에 쫓아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처럼 부인과 아들들이 외치는 소리에 동네 사람들은 장꾼 모이듯 몰려왔다.

이러한 광경이 일어나자 용인서 따라온 여인과 그녀의 아들딸들은 난감한 처지에 있는 추천석에게 애원하며 말하는 것이었다.

 

여보, 제발 정신을 가다듬고 어서 집으로 돌아갑시다. 이게 무슨 꼴이며 이 댁에 이렇게 폐를 끼쳐서 어떻게 합니까. 우리 남편이 실성을 했나 봅니다.…… 여보, 어서 집으로 갑시다.

 

용인 여인이 추천석을 얼싸안으며 변명을 하는 것을 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남의 과수를 희롱하려 한다고 추천석에게 욕설하는 것이었다.

 

용인 여인은 당연히 받을 욕설인 듯 감수하면서 남편을 붙잡고 사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추천석은 용인 여인을 뿌리치며 더욱 화를 내고 또 화를 내면서 자기의 아내가 아니라고 부인(否認)하였다.

 

이와 는 반대로 진천 부인은 여러 사람 보기에 창피하여 뒤로 물러서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저 미친 자를 내몰아 달라고 하니 참으로 답답하고 기막힌 일이었다.

 

추천석은 하는 수 없이 진천 고을 원님에게 진정하여 공정한 판단을 바랄 수밖에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진천 고을 원님을 찾아가 전후사정을 울면서 말했다.

 

소인은 분명 죽었다가 되살아온 진천 땅에서 살던 추천석이 올시다. 육신은 땅에 묻혔지만, 저의 흔백이 용인에 사는 동성동명(同姓同名)인 추천석의 육신을 벌어 회생(回生)하였사옵니다. 원님께서는 명철한 판결을 내려주소서.

 

추천석은 눈물을 거두어라. 그리고 함께 온 가족들도 내 말을 잘 들어라. 이 세상 사람이 죽고 산다는 것은, 그 육신이 죽고 사는 것으로 판가름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생사를 근본적으로 추구해 보면, 사람의 육신이란 각각 그 혼백이 머무르기 위하여 잠시 이용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육신의 주인 되는 혼백이 버리고 가면 육신은 금방 변하고 썩어서 없어지고 만다.

예컨대 누에가 자기가 만든 고치 속에서 번데기가 되었다가 때가 되면 나비의 몸으혹 바꾸어, 다시 누에가 될 알을 낳은 뒤 에는 그 폼은 아낌없이 버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누에의 번데기나 나비의 모양은 변하 고 없어져 버리지만, 그 몸을 지키던 생명체인 혼백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이처럼 진천의 추천석도 사자의 잘못으로 저승에 갔다가 다시 살아 왔으나 자기의 육신이 이미 매장되었으므로 할 수 없이 용인 땅에 살던 추천석이가 버리고 간 육신을 빌린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진천 땅 추천석은 조상의 내력과 그 가족의 생년월일은 물론이요, ·밭 등의 재산에 이르기까지 소상히 알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지금의 저 추천석은 진천에서 살던 추천석의 혼백임이 틀림없다고 판단한다. 그러므로 앞으로 생거진천(生居鎭川)타가 사거용인(死居龍仁)할 것을 판결하노니, 양가의 가족도 그대로 실행하라.

라고 명령하였다.

 

그 까닭은 지금의 추천석의 육신은, 용인 땅에 살던 추천석의 육신이 틀렴 없으나 그 혼백은 진천땅에 살고 있는 동안은 자신이 주장하는 진천의 가족과 함께 살다가, 세상을 뜬 뒤에 버리고 간 육신은 본래 용인에 살던 추천석의 것이므로 용인의 가족이 찾아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니 실로 현명한 판결이라 하겠다.

 

출전< 불교설화전서>

 

 

 

 

 

 

 

 

출전 <한미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7

烈(열)

32

熙(희)

37

勳(훈)

28

在(재)

33

基(기)

38

孝(효)

29

錫(석)

34

鎔(용)

39

鎭(진)

30

潤(윤)

35

澈(철)

40

汶(문)

31

根(근)

36

東(동)

41

植(식)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추계,전주 추씨(秋溪,全州秋氏)는 남한에 총 10,439가구, 43,55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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