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太(영순태씨)
본관(本貫): 영순(永順)
시조(始祖): 태금취(太金就)
유래(由來):
영순 태씨(永順太氏)는 태씨(太氏)의 도시조(都始祖) 태중상(太仲象)의 18세손으로 상장군(上將軍)을 지냈고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영천군(永川君)에 봉해진 태웅성(太雄成)의 아들 태금취(太金就:일명 금룡)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있다.
협계태씨족보(陜溪太氏族譜)에 의하면 금취는 고려 고종(高宗) 때 금교(金郊)에서 몽고군(蒙古軍)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워 대장군(大將軍)에 올라 영순(永順:경북 상주의 옛 지명) 군(君)에 봉해져, 상주군(尙州郡) 북면(北面) 임하촌(林下村)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협계 태씨(浹溪太氏)에서 분적(分籍)하여 관향(貫鄕)을 영순(永順)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태두남(太斗南)
1486(성종 17) ∼ 1536(중종 3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순 ( 永順 ). 자는 망이(望而), 호는 서암(西菴). 발해국왕 대조영 ( 大祚榮 )의 후손이며, 유광(有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치생(致生)이고, 아버지는 효정 ( 孝貞 )이다.
어려서부터 기재(奇才)가 남달랐으므로, 김양진 ( 金楊震 )이 그를 데려와 기르고 훈회(訓誨)하였다. 1513년(중종 8) 생원 · 진사 양시에 합격하였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형조좌랑 · 정랑과 개령현감 · 경상도도사 · 사예 · 사도시첨정 · 전라도암행어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장령 · 남원부사 · 선산부사, 직강 · 사섬시정(司贍寺正) · 집의 등을 지냈다. 1536년 종부시정(宗簿寺正)이 되어 춘추관편수관을 겸임하였다.
이 때 권신 김안로 ( 金安老 )의 미움을 산 스승 김양진의 장례를 정성껏 보살폈다가 미움을 받아 성주목사로 좌천되어 재직중 51세로 죽었다. 담론을 잘하였으며, 시문에 뛰어났다. 옥천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 쇄언 磨 言 ≫ 이 있다.
태언룡(太偃龍), 태순민(太舜民)
진사(進士)를 지냈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영순 태씨(永順太氏)는 남한에 총 902가구, 3,63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전 <한미족대성보>.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