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崔(양천최씨)
본관(本貫): 양천(陽川)
시조(始祖): 최원(崔遠)
유래(由來):
양천 최씨(陽川崔氏)는 경주 최씨(慶州崔氏)에서 분적(分籍)한 전주 최씨(全州崔氏) 시조 최순작(崔純爵)을 파조(派祖)로 하여, 고려 초에 봉선대부(奉善大夫), 밀직부사 (密直副使)를 지냈고 공을 세워 양천백(陽川伯)에 봉해진 최원(崔遠)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양천(陽川)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최관(崔灌)
원(遠)의 아들 관(灌)이 고려 때 만호(萬戶)에 올랐다.
최운(崔澐)
운(澐)이 소윤(少尹)을 지냈다.
최숙정(崔淑貞)
1433(세종 15) ∼ 1480(성종 1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 ( 陽川 ). 자는 국화(國華). 호는 소요재(逍遙齋) · 사숙재(私淑齋). 우보(雨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승흡(承洽)이고, 아버지는 오위사정(五衛司正) 중생(仲生)이며, 어머니는 안선복(安善福)의 딸이다.
1461년(세조 7) 진사시에 합격하고, 1462년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한 뒤 사관 ( 史官 )으로 발탁되었다. 1464년 문풍진흥을 위한 본관(本官)으로서 예문관직을 겸비하고 유학을 습업(習業)하게 한 겸예문직의 운영과 함께 겸예문직에 제수되고 사학문(史學門)에 배속되었다.
1466년 문과중시에 3등, 계속해서 발영시 ( 拔英試 )에 2등으로 급제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일으키기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의 혜택을 입었다.
1470년(성종 1) 형조좌랑 · 경연시독관에 개수(改授)되면서 춘추관기주관이 되어 ≪ 세조실록 ≫ 과 ≪ 예종실록 ≫ 의 편수에 참여하고, 실록편수가 끝난 뒤 1계(階)가 가자(加資)되었다.
1472년 사헌부지평, 이후 예문관교리 · 경연시독관 · 경연시강관 등을 역임하고, 1476년 12월에 찬진(撰進)된 ≪ 삼국사절요 ≫ 의 편찬에 예문관부응교로서 참여하였다. 1477년 예문관직제학 ·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이듬해 찬진된 ≪ 동문선 ≫ 의 편집에 참여하고, 같은 해 통정대부에 오르면서 여주목사(驪州牧使)로 파견되었다.
1479년 “ 두량(斗量)을 부정하게 사용하였다. ” 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그 이듬해 홍문관부제학으로 복직되었다. 일세의 명현이었다는 평판과 높은 시격(詩格)이 있다는 평을 들었다. 저서로는 1813년(순조 13)에 간행된 ≪ 소요재집 ≫ 2권이 있다.
최숙경(崔淑卿)
숙정의 아우 숙경(淑卿)도 성종(成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府使)를 역임했다.
최종호(崔終浩)
병마절도사(兵馬節度事)를 역임했다.
최연(崔淵)
부사(府事)를 역임했다.
최택(崔澤)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출전 <한미족대성보>.
항렬(行列)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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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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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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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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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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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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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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燮(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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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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鉉(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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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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植(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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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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益(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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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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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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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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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양천 최씨(陽川崔氏)는 남한에 총 1,452가구, 5,93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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