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ail : juntonggahun@naver.com
>> 한국의 성씨


영천최씨(崔)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崔(영천최씨)

 

 

본관(本貫): 영천(永川)

시조(始祖): 최한(崔漢)

유래(由來):

 

영천 최씨(永川崔氏) 시조(始祖) 최한(崔漢)은 경주 최씨(慶州崔氏)에서 분적(分籍)한 최 균(崔 均:완산 부원군 전주 최씨 일파)의 9세손 최 식(崔 寔)의 둘째 아들이다. 한(漢)은 고려 때 예종(睿宗)과 명종(明宗) 양대에 걸쳐 벼슬을 하면서 공을 세워 연산(燃山:영천의 별호)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영천(永川)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최완(崔玩)

시조 한(漢)의 아들 완(玩)이 문과에 장원하여 상찰사(上察使)를 지냈다.

 

최집

완의 동생 집은 좌정승(左政丞)을 지냈다.

 

최상례(崔尙禮)

완玩)의 아들 상례(尙禮)는 절도사를 역임했다.

 

최윤기(崔允琪)

완의 증손 윤기(允琪)는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했다.

 

최무선(崔茂宣)

1325(충숙왕 12)∼1395(태조 4). 고려 후기의 무기 발명가. 본관은 영주(永州:현재의 영천). 광흥창사(廣興倉使) 동순(東洵)의 아들이다. 우리 나라에서 화약과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처음 제작, 사용하였다. 무관인 그는 고려 말기에 한창 기승을 부리던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화약과 총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연구에 임하였다.

그 결과, 화약을 만드는 세 가지 재료, 즉 초석·유황·분탄 중에서 유황과 분탄은 쉽게 구할 수 있으나 초석을 만드는 것이 가장 어렵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래서 화약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중국에서 배우기로 하고, 중국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무역항 벽란도에 가서 중국으로부터 오는 상객들 중에서 초석(염초)의 제조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을 찾았다.

그러던 중 중국의 강남지방에서 온 이원(李元)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후하게 대접하는 등 지극한 정성과, 화약을 만들어 국가를 살리겠다는 집념으로 이원을 감동시켜 초석을 흙에서 추출(抽出)하는 방법을 배우고, 드디어 화약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간단한 화약을 이용한 무기, 즉 화전 ( 火箭 ) 등을 만들어 실험해 본 그는, 마침내 자신을 얻어 화약과 각종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연구하고 만들 화통도감(火筒都監)의 설치를 몇 번에 걸쳐 건의하였다. 그리고는 끝에 허락받아 우리 나라에서 화약과 화약무기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1377년 10월부터 시작하였다.

화통도감에서 제조된 각종 화기들은 모두 18가지로, 이 중에서 총포의 종류는 대장군 ( 大將軍 )·이장군(二將軍)·삼장군(三將軍)·육화석포(六火石砲:완구의 일종)· 화포 ( 火砲 )·신포(信砲)·화통(火筒) 등이며, 화전(火箭)·철령전(鐵翎箭)· 피령전 ( 皮翎箭 ) 등은 발사물, 그 밖에 질려포(疾藜砲)·철탄자(鐵彈子)·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유화(流火)·촉천화(觸天火)와 로켓무기로 주화 ( 走火 )가 있다.

1380년(우왕 6)에 왜구가 500여 척의 선박을 이끌고 금강 하구의 진포로 쳐들어왔을 때 원수(元帥)· 나세 ( 羅世 )와 함께 각종 화기로 무장한 전함을 이끌고 나아가 싸워 격파시키는 큰 공을 세웠다. 고려에서는 지문하부사 ( 知門下府事 )라는 벼슬까지 올랐으며, 조선 초에는 나이가 많아 등용되지는 못하였으나, 죽은 후에 그의 공을 생각하여 의정부우정승(議政府右政丞)·영성부원군(永城府院君)을 추증(追贈)하였다.

아들 해산(海山)과 손자 공손(功孫)도 화약과 화기 연구에 참여하였다. 저서로는 ≪화약수련법 火藥修鍊法≫을 남겼으나 전하지 않고 있다.

 

최흥효(崔興孝)

생몰년 미상. 고려 말 조선 전기의 문신 · 서예가.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백원(百源), 호는 월곡(月谷). 판사 일(壹)의 아들이다. 1411년(태종 11) 식년문과에 급제하였고, 1414년 승문원교리로 있을 때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하륜 ( 河崙 )의 비위에 거슬려 파직당하였다.

이후 재등용되었으나 1420년(세종 2) 인녕부판관(仁寧府判官)에서 또다시 삭직되었다. 이듬해 우헌납으로 복직되고 이어 예문관직제학을 지냈다. 조선 초기 서예가 중에서 뛰어난 인물로 조맹부체(趙孟 琅 體)의 초서를 잘 썼다고 한다.

조신 (曺伸)의 ≪ 소문쇄록 瑄 聞 磨 錄 ≫ 에 “ 최흥효의 초서와 안평대군의 행서가 일세에 성행되었다. ” 하였고, ≪ 중종실록 ≫ 권83에서도 우리나라의 조맹부체로 안평대군과 함께 최흥효 · 박경(朴耕)을 대표로 든 것을 보면 그의 명성을 알 수 있다.

또한 ≪ 세종실록 ≫ 권33에도 태종이 죽자 선왕의 명복을 위하여 유계문 ( 柳季聞 ) · 안지 ( 安止 ) · 최흥효에게 〈 금자법화경 金字法華經 〉 을 쓰게 하였다 한다. 금석으로 강릉의 〈 최참판치운비 崔參判致雲碑 〉 가 있다.

≪ 근묵 槿墨 ≫ 등에 그의 전적이 약간 전하며, ≪ 동국명필 東國名筆 ≫ · ≪ 대동서법 大東書法 ≫ 등에 필적이 모각되어 있다.

 

최해산(崔海山)

1380(우왕 6) ∼ 1443(세종 25). 조선 초기 화포 ( 火砲 ) 분야에 공이 큰 무신. 본관은 영주(永州 : 현재의 영천). 검교참찬문하부사(檢校參贊門下府使) 무선(茂宣)의 아들이다. 15세가 되어서야 글자를 해독할 수 있었으나, 아버지의 유고(遺稿)인 ≪ 화약수련법 火藥修鍊法 ≫ 의 비법을 전수받았다. 1401년(태종 1) 군기시 ( 軍器寺 )에 등용, 주부 ( 主簿 )를 거쳐 경기우도 병선군기점고별감(京畿右道兵船軍器點考別監)이 되었다.

1409년 군기감승(軍器監丞)에 오르고, 그 해 10월에는 화차를 만들어 왕이 참석한 가운데 해온정(解 蚌 亭)에서 발사시험을 하였다. 또 1424년(세종 6) 12월에도 군기판사로서 왕을 모시고 광연루(廣延樓)에 나아가 화포 발사연습을 주관하였다.

1425년 군기감사를 지내고, 1431년 6월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가 되었다. 그 해 10월에는 그가 오랜 군기감 근무로 옳지 못한 일이 많았다 하여 조정 신하들이 그의 체직(遞職)을 품신했지만 세종의 두터운 신임으로 허락되지 않았고, 오히려 이듬해 공조우참판으로 승임되었다. 1개월 후 판경성군사(判鏡城郡事)로 전보되었을 때도 세종은 그가 외직으로 나갈 경우 군기감의 업무가 부실해진다 하여 중추원부사를 제수하였다.

1433년 좌군절제사로 도원수 최윤덕 ( 崔潤德 )과 함께 파저강(婆猪江) 토벌작전에 참전했을 때도 군기(軍機)를 이행하지 않은 관계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지만, 세종은 “ 그가 20여 년 동안 오로지 화포를 맡았으니 어찌 공이 없다고 하겠는가. 벼슬만 거두도록 하라. ” 고 하여 용서하였다.

그 뒤에도 제주안무사 · 중추원부사 · 강계절제사 등을 지냈다. 그는 전수받은 화약수련비법과 타고난 재능으로 성과 열을 다하여 화약병기를 비롯한 군장비 보강, 발전에 기여한 바 크다.

 

최문병(崔文炳)

?∼1599(선조 32).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일장(日章). 호는 성재(省齋).

자인에 살면서 학문에 힘쓰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천장산(千丈山)에서 적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며, 다시 청도의 의병장 박경전(朴慶傳)과 합세하여 두곡(杜谷)·선암(仙巖)·가지현(佳旨縣) 등지에서 적을 무찔렀다.

이어 다시 권응수 ( 權應銖 )와 합세하여 영천의 적을 물리친 공으로 1593년에는 동지중추부사 박진(朴晋)의 상주로 인하여 감목관 ( 監牧官 )이 되었다. 뒤에 한성부우윤에 추증되었고, 자인의 충현사(忠賢祠)에 제향되었다.

 

최서림(崔瑞林)

조선 때 학자(學者) 서림(瑞林)은 학문과 행의(行儀)가 훌륭하여 학행(學行)으로 참봉(參奉)에 기용되었다.

 

최인

인은 학문과 덕행이 당세(當世)에 고명(高明)하였다.

 

 

출전 <한미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2

翰(한),祥(상)

24

基(기),一(일)

26

洙(수),源(원)

23

鳳(봉),圭(규)

25

錫(석),鎭(진)

27

相(상)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영천 최씨(永川崔氏)는 남한에 총 4,037가구, 15,86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게시물 목록
번호 제 목 글쓴이 등록일 조회
745 초계 최.jpg 초계최씨(崔) 청남 14-08-30 5266
744 충주 최.jpg 충주최씨(崔) 청남 14-08-30 3395
743 청주 최.jpg 청주최씨(崔) 청남 14-08-30 2939
742 청송 취.jpg 청송최씨(崔) 청남 14-08-30 3494
741 진산최씨(崔) 청남 14-08-30 3259
740 직산 최.jpg 직산최씨(崔) 청남 14-08-30 3277
739 죽산 최.jpg 죽산최씨(崔) 청남 14-08-30 3799
738 전주 최1.jpg 전주최씨(崔) 청남 14-08-30 6318
737 월성최씨(崔) 청남 14-08-30 5814
736 원주 최.jpg 원주최씨(崔) 청남 14-08-30 3897
735 우봉 최.jpg 우봉최씨(崔) 청남 14-08-30 4488
734 용궁 최.jpg 용궁최씨(崔) 청남 14-08-30 2789
733 용강 최.jpg 용강최씨(崔) 청남 14-08-30 2524
732 완산 최.jpg 완산최씨(崔) 청남 14-08-30 3538
731 영흥 최.jpg 영흥최씨(崔) 청남 14-08-30 2925
영천 최.jpg 영천최씨(崔) 청남 14-08-30 5213
729 연풍 최.jpg 연풍최씨(崔) 청남 14-08-30 2642
728 영천 최.jpg 양천최씨(崔) [2] 청남 14-08-30 4216
727 양주 최.jpg 양주최씨(崔) 청남 14-08-30 3634
726 아산 최.jpg 아산최씨(崔) 청남 14-08-30 2701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