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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최씨(崔)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崔(전주최씨)

 

 

본관(本貫): 전주(全州)

시조(始祖): 최순작(崔純爵):최군옥(崔群玉):최균(崔均):최아(崔阿)

유래(由來):

 

우리나라 최씨(崔氏) 가운데서도 역사상 가장 많은 인재(人才)를 배출해낸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동본(同本)이면서도 계보(系譜)를 달리하는 4계통(系統)이 있다.[전주최씨연원보(全州崔氏淵源譜)]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정종(靖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숙종(肅宗)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와 신호위 상장군(神虎衛上將軍)을 지내고 완산부개국백(完山府開國伯)에 봉해진 최순작(崔純爵)을 시조(始祖)로 하는 계통과, 역시 고려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내고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봉해진 최군옥(崔群玉)을 시조로 하는 계통이 있으며, 또 다른 계통은 고려 인종(仁宗) 때 문과에 급제한 후 1174년(명종4) 동북로 도지휘사(東北路道指揮使)로 조위총(趙位寵)의 난에 순절하여 완산군(完山君)에 추봉된 최균(崔均)을 시조로 하는 일파와, 완산부개국백 문열공(文烈公) 최순작의 7세손으로 충숙왕(忠肅王)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라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진 최아(崔阿)를 시조로 하는 계통이 있다.

 

그러나 [전주최씨인물사(全州崔氏人物史)]에는 문성공(文成公) 최아(崔阿)가 원종(元宗) 때 보문각 대학사(寶文閣大學士)를 지낸 최정신(崔正臣:문열공 순작의 현손)의 3자(三子) 입평(立枰:정당문학과 상호군을 역임)의 맏아들로 기록되어 있고 문열공(文烈公) 순작계(純爵系)와 합보(合譜)가 이루어진 것으로 전하고 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최숭(崔崇)

문열공 순작(純爵)의 아들 숭(崇)이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역임했다.

 

최남부(崔南敷)

순작의 손자 남부(南敷)는 문종(文宗) 때 공부 상서(工部尙書)를 거쳐 수문전 태학(修文殿太學) 겸 대장군(大將軍)을 지냈다.

 

최전(崔佺)

남부의 아들 전(佺)은 희종조(熙宗朝)에 비서소윤(秘書小尹)을 지내다가 당대 권력가의 전횡을 개탄하여 병을 핑계하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최득평(崔得枰)

한편 강직한 성품으로 권력을 남용하던 무리들을 탄핵하다가 10여 년이나 귀양살이를 했던 정신(正臣)의 아들 득평(得枰)은 1278년(충렬왕4) 18세의 약관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형부 상서(刑部尙書)에 이르렀으나 성품이 너무 청백(淸白)하고 정직하여 미움을 받아 외직인 김해부사(金海府使)로 좌천되었다가 사임하고 청주(淸州)의 대율리(大栗里)에 살았다.

 

최재(崔宰)

1303(충렬왕 29)∼1378(우왕 4).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재지(宰之). 선부전서(選部典書) 득평(得枰)의 아들이다. 1321년(충숙왕 8) 동대비원녹사(東大悲院錄事)로 출발, 산원 ( 散員 )· 별장 ( 別將 )을 거쳐 1330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충숙왕 복위 연간에 중부령(中部令)과 감찰지평(監察持平)을 지내고, 충목왕 즉위 초에는 전법정랑(典法正郎)을 거쳐 지흥주사(知興州事)로 외보(外補)되어 백성을 잘 다스렸으나, 권신 인승단 ( 印承旦 )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1347년(충목왕 3) 정치도감 ( 整治都監 )이 설치되어 권문세가의 토지·노비 등의 부당한 탈점을 정리할 때 판관 ( 判官 )으로 참여했으며, 이듬해 경상도안찰사(慶尙道按察使)로 나갔다가 다시 전객부령(典客副令)·자섬사사(資贍司使)로 옮겼다.

1349년(충정왕 1) 양주수(襄州守)로 나가 있던 중 원나라의 강향사(降香使)가 존무사 ( 存撫使 )를 부당하게 욕보이는 것을 보고 개탄, 항의의 표시로 사직했으나 이로 인해 오히려 감찰장령(監察掌令)에 특진되었다.

공민왕 즉위 후 개성소윤(開城少尹)·전법총랑(典法摠郎)·감찰집의(監察執義)·상서우승(尙書右丞)·대부시사(大府寺事) 등의 관직을 차례로 역임하면서 왕으로부터 직접 칭찬을 받을 만큼 많은 치적을 올렸다. 1359년(공민왕 8) 다시 공주목사(公州牧使)로 출보되었으며, 1361년 상주목사(尙州牧使)로 옮겼다.

그 해 겨울 홍건적의 재침으로 피난하는 왕을 상주에서 맞게 되었는데, 호종했던 관리들의 참소로 파직되었으나 1364년 감찰대부(監察大夫)로 기용되고, 중대광 완산군(重大匡完山君)에 봉해졌다.

그 뒤 전리판서(典理判書)와 개성윤(開城尹)을 역임했으며, 1374년 벼슬을 사퇴하고 향리로 돌아갔다. 우왕 때 밀직부사 상의(密直副使商議)를 제수했으나 사양하였다. 성품이 강직해 사람들이 중히 여겼다고 한다. 시호는 문진(文眞)이다.

 

최유경(崔有慶)

1343(충혜왕 복위 4) ∼ 1413(태종 13). 여말선초 때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지(慶之), 호는 죽정(竹亭). 할아버지는 선부전서(選部典書) 상호군 득평(得枰)이고, 아버지는 감찰대부(監察大夫) 재(宰)이다. 어머니는 무안군부인(務安郡夫人) 박씨(朴氏)로 군부정랑(軍簿正郎) 윤류(允 蠟 )의 딸이다.

1372년(공민왕 21) 판도사좌랑(版圖司佐郎)이 되어 각 도의 의염(義鹽)의 염분 ( 鹽盆 )이 강호(强豪)에게 점령당하는 것을 진달하여 염창(鹽倉)에 속하게 하였다. 이어 사헌부장령이 되어 왕의 총애를 믿고 교만, 방자하게 불법을 자행하던 환관 ( 宦官 ) 윤충좌 ( 尹忠佐 )를 탄핵하였다.

1375년(우왕 1) 전법사총랑(典法司摠郎)을 거쳐 1388년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가 되어서는 전민(田民)의 폐단을 고찰하여 바로잡았다. 이 해 여름 요동정벌(遼東征伐) 때 서북면전운사 겸 찰방으로 있으면서 이성계 ( 李成桂 )의 위화도회군 ( 威化島回軍 )이 감행되자 우왕에게 고변하였다. 최영 ( 崔瑩 )이 실각한 뒤에도 창왕의 즉위와 함께 밀직부사(密直副使)로 발탁되었다. ]

1392년(태조 1)에 이성계가 즉위하여 개국공신에 이어 원종공신 ( 原從功臣 )을 녹훈할 때, 앞서 위화도회군을 우왕에게 고변했다 하여 일부 반대하는 자가 있었으나 이성계가 그 충의를 칭찬, 개국원종공신에 서훈되었다.

1395년에 경상도도관찰사가 되고, 1397년에는 지중추원사로서 경기 · 충청도 도체찰사가 되어 지방을 순유하고, 그 이듬해 중추원부사로서 왕의 사명을 띠고 서북면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 최영지 ( 崔永沚 )에게 궁온(宮 倍 )과 관교(官敎)를 전하여 선위(宣慰)하였다.

같은 해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로서 경기우도도관찰출척사(京畿右道都觀察黜陟使)로 나가는 등 태조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여러 차례 왕의 특사로 중임을 수행하였다.

1401년(태종 1) 대사헌이 되었고, 그 해 육조와 대간의 천거로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서 정조사 ( 正朝使 )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1404년 판한성부사로서 치사(致仕)하였다. 태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청주의 송천서원 ( 松泉書院 )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평도(平度)이다.

 

최사위(崔士威)

유경(有慶)의 장남 사위(士威)는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냈다.

 

최사의(崔士儀)

유경의 차남 사의(士儀)는 세종(世宗) 때 상호군(上護軍)을 거쳐 태종 때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최사규(崔士規)

유경의 삼남 사규(士規)는 중백부(仲伯父) 덕성(德成)에게 글을 배워 학행(學行)으로 도판관(都判官)에 천거되었고 도관 좌랑(都官佐郞), 영평 군수(永平郡守)를 거쳐 1405년(태종5) 24세 때에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최사강(崔士康)

1388(우왕 14)∼1443(세종 2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아버지는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유경(有慶)이며, 어머니는 시중 ( 侍中 ) 이종지(李宗之)의 딸이다.

부음으로 사관(仕官), 1416년(태종 16) 2월 중군경력(中軍經歷) 재직 중에 장녀가 태종 왕자인 성녕군(誠寧君)에게 출가하면서 현귀(顯貴), 곧 지사간원사 ( 知司諫院事 )에 초천(超遷)되었다.

1418년(세종 즉위년) 9월 다시 당상관에 오르면서 승정원동부대언(承政院同副代言)에 발탁, 우부대언을 거쳐 다음해 12월에 예조참의, 1420년 3월에 경기도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

1421년 12월 경상도도관찰사에 전임되고 이듬해 12월 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로 입조, 1423년 3월 병조참판, 이후 1431년까지 좌군동지총제·호조참판·대사헌·병조참판·이조참판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병조판서에 승진, 세종의 총애가 계속되는 가운데 1434년 1월 장남인 고봉례랑(故奉禮郎) 승녕(承寧)의 딸이 세종 왕자인 임영대군 ( 臨瀛大君 )에게 출가, 1436년 12월 의정부참찬에 개수되었다. 이듬해 2월 차녀가 다시 세종 왕자인 금성대군 ( 錦城大君 )과 혼인하였다.

또 같은 달에 전년의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 議政府擬議制) 실시와 관련된 찬성·참찬의 각 1인 증치 및 좌·우로 세분됨에 따라 의정부우참찬에 개수되었다. 1441년 9월 의정부우찬성에 승진, 이듬해 6월 판이조사(判吏曹事)를 겸대했고, 같은 해 8∼12월에 걸쳐 사은사 ( 謝恩使 )가 되어 명나라를 내왕하다가 이듬해 죽었다.

왕실과 연혼하면서 갑자기 현귀했으나 분수를 지킨 까닭에 세종의 은총이 떠나지 않았고, 이를 배경으로 의정부·육조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세종 성세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시호는 경절(敬節)이다.

 

최사용(崔士庸)

유경의 오남(五男) 사용(士庸)은 세종 원년에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을 지내고 실록청 당랑(實錄廳堂郞)에 뽑혀 서강원(書講院)에 들어갔다가 1423년(세종5)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상호군(上護軍)을 지냈다.

 

최기남(崔起南)

1559(명종 14)∼1619(광해군 1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흥숙(興叔). 호는 만곡(晩谷)·만옹(晩翁)·양암(養庵). 장사랑 명손(命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별제 업(嶪)이고, 아버지는 증좌승지 수준(秀俊)이며, 어머니는 증호조참의 남상질(南尙質)의 딸이다. 성혼 ( 成渾 )의 문인이다.

학문과 재행이 뛰어났으며, 1585년(선조 18) 사마시에 합격하고 태학에 입학하였다. 당시 호남 선비들이 올린 언사(言事)가 선조의 비위에 거슬려 그들이 하옥되자 태학생들이 상소할 때 소두(疏頭)가 되어 구원하였다. 1600년 왕자사부 ( 王子師傅 )에 임명되어 왕세자의 학문을 잘 이끌었다.

1602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병조좌랑· 지제교 ( 知製敎 )·시강원사서와 형조·예조·병조의 정랑을 두루 역임하고, 1605년 함경북도평사로 나갔다. 이듬해 내직에 들어와 예조·병조의 정랑과 세자시강원시강 등을 역임하고, 1612년(광해군 4) 통정대부 ( 通政大夫 )에 승계되어 영흥대도호부사에 임명되었다.

이 때 이이첨 ( 李爾瞻 )을 중심으로 한 대북파에 의하여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하는 옥사가 일어났는데, 그에 연루되어 삭직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가평에 은거하여 만곡정사(晩谷精舍)를 짓고 여생을 보냈다.

선조 때는 군정(軍政)에 관한 많은 상소를 올려 정치를 보좌하였고, 광해군 초기 홍문관에 있을 때에는 군국대무(軍國大務)에 대한 6조의 소를 올리는 등 여러 차례 시정혁폐(時政革弊)를 직언하였다. 뒤에 아들 명길(鳴吉)의 인조반정 공훈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최래길(崔來吉)

기남의 둘째 아들로 광해군(光海君) 때 별시문과(別詩文科)에 급제했던 래길(來吉)은 정사3등공신(靖社三等功臣)으로 장악원정(掌樂院正)을 거쳐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올라 이 괄(李 适)의 난이 일어나자 공주(公州)로 왕을 호종하여 완주군(完州君)에 봉해졌고, 한성부 좌우윤(左右尹)을 거쳐 참판(參判)을 역임한 후 장흥 부사(長興府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으며, 경기도 관찰사와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냈다.

 

최명길(崔鳴吉)

1586(선조 19) ∼ 1647(인조 2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 · 창랑(滄浪). 업(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수준(秀俊)이고, 아버지는 영흥부사 기남(起南)이다. 어머니는 참판 유영립 ( 柳永立 )의 딸이다.

일찍이 이항복 ( 李恒福 ) 문하에서 이시백 ( 李時白 ) · 장유 ( 張維 ) 등과 함께 수학한 바 있다. 1605년(선조 38) 생원시에서 장원하고, 그 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1614년(광해군 6) 병조좌랑으로 있다가 국내 정치문제와 관련한 조선인의 명나라 사신 일행과의 접촉 금지를 둘러싼 말썽으로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 뒤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 수년 간 복상(服喪)한 뒤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는데, 이 무렵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유폐 등 광해군의 난정이 극심할 때였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 정사공신 ( 靖社功臣 ) 1등이 되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이조참판이 되어 비변사 유사당상을 겸임하였다. 그 뒤 홍문관부제학 · 사헌부대사헌 등을 거쳤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강화(江華)의 수비조차 박약한 위험 속에서도 조정에서는 강화 문제가 발론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대세로 보아 강화가 불가피함을 역설하여 이로부터 강화가 논의되었다. 때문에 화의가 성립되어 후금군이 돌아간 뒤에도 많은 지탄을 받았다.

또 계운궁 신주 ( 神主 )의 흥경원(興慶園 : 인조의 생부, 뒤에 元宗으로 추존) 합부(合 欖 : 신주를 한 사당에 모셔 놓고 한 곳에서 제사지냄)에 따른 문제로 옥당 ( 玉堂 )의 배척을 받았으나 인조의 배려로 외직인 경기관찰사로 나갔다. 다시 우참찬 · 부제학 · 예조판서 등을 거쳐 1632년부터는 이조판서에 양관(兩館 :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이 무렵 후금은 명나라에 대한 공격에 조선이 원병을 보낼 것과 국경개시(國境開市) 등을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절화(絶和 : 화의를 단절함)의 의논이 높아졌는데 그는 당장은 후금의 요구에 어느 정도 응하여 몇 년 간은 무사할 수 있으나 종막(終幕)은 심히 우려된다고 하면서 원망을 불러일으켜 병화(兵禍)를 재촉함은 바른 대책이 아님을 지적하였다. 1635년 초 이조판서직을 면하고 몇 달 뒤에 호조판서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일찍부터 척화론 일색의 조정에서 홀로 강화론을 펴 극렬한 비난을 받았으나, 난전(亂前)에 이미 적극적인 대책을 펴지 못한다면 현실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강화론을 계속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제대로 조처하지 못한 채 일조에 적의 침입을 받으면 강도 ( 江都 )와 정방산성 ( 正方山城 )을 지키는 것으로는 도저히 지탱할 수 없음을 걱정하여 강력히 화의를 주장하였다.

이 해 겨울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는데, 12월 청군(淸軍)의 침입으로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주전론 일색 가운데 계속 주화론으로 일관하였다. 결국 정세가 결정적으로 기울어져 다음 해 정월 인조가 직접 나가 청태종에게 항복하였다.

이 때 진행 과정에서 김상헌 ( 金尙憲 )이 조선측의 강화문서를 찢고 통곡하니, 이를 주워 모으며 “ 조정에 이 문서를 찢어버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한 나 같은 자도 없어서는 안 된다. ” 라고 말했다는 사실은 시국에 대한 각기의 견해를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청군이 물러간 뒤, 그는 우의정으로서 흩어진 정사를 수습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에 국내가 점점 안정되었으며, 가을에 좌의정이 되고 다음 해 영의정에 올랐는데, 그 사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세폐(歲幣 : 매년 공물로서 바치는 폐물)를 줄이고 명나라를 치기 위한 징병 요구를 막았다. 1640년 사임했다가 1642년 가을에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이 때 임경업 ( 林慶業 ) 등이 명나라와의 내통하고 조선의 반청적(反淸的)인 움직임이 청나라에 알려져 다시 청나라에 불려가 김상헌 등과 함께 갇혀 수상으로서의 책임을 스스로 당하였다. 이후 1645년에 귀국하여 계속 인조를 보필하다가 죽었다.

성리학과 문장에 뛰어나 일가를 이루었으며, 글씨에 있어서도 동기창체(董其昌體)로 이름이 있었다. 특히, 한때 양명학 ( 陽明學 )을 독수(獨修 : 혼자서 은밀히 공부함)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교우 장유나, 계자(系子) 후량(後亮) 및 손자 석정(錫鼎) 등의 경우에도 양명학을 공부하여 강화학파의 기틀을 이루었다 한다. 저서로 ≪ 지천집 ≫ 19권과 ≪ 지천주차 遲川奏箚 ≫ 2책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최혜길(崔惠吉)

1591(선조 24)∼1662(현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적(子迪), 호는 유하(柳下). 업(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수준(秀俊)이고, 아버지는 부사 기남(起南)이며, 어머니는 유영립(柳永立)의 딸이다. 영의정 명길(鳴吉)의 아우이다.

1613년(광해군 5)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때 형 명진과 더불어 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 ( 靖社功臣 )에 책록되려 했으나, 한 집안에 여럿을 공신으로 할 수 없다 하여 책거(冊去)되고 공조좌랑에 특제되었다. 그 뒤 세자익위사 익찬 ( 翊贊 )이 되어 1625년(인조 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사간원정언이 되어 이유도(李有道)를 탄핵했다가 송화현감으로 나갔다. 곧 돌아와 이조좌랑·홍문관수찬·사헌부지평·사간·홍문관교리 등을 거쳐 1635년 승지가 되었고, 1638년 병조참의·대사간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이어서 1641년 우부빈객 ( 右副賓客 )으로 왕세자와 함께 심양(瀋陽)에 있다가 용골대(龍骨大)의 청병(淸兵)과 동행, 귀국하였다.

1644년 동지 겸 세폐사(冬至兼歲幣使)로 연경(燕京)에 다녀와 대사성이 되었고,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다. 1648년 이조참판이 되었으며 효종의 즉위와 더불어 도승지가 되어 측근에서 왕을 보살폈다. 1650년(효종 1) 경기도관찰사·이조참판을 거쳐 동지경연사 ( 同知經筵事 )가 되었으나, 이듬해 이조참판 때 전형(銓衡)에 실정(失政)이 많았음을 이유로 간원(諫院)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653년 영해부사로 복직되어 곧 강원도관찰사가 되었고, 1655년 개성유수가 되었다. 이 때 기근으로 백성들이 굶주리는 처참한 상황을 보고하고 해서연변(海西沿邊) 열읍(列邑)의 창곡(倉穀) 300∼400석을 옮겨 쓰게하여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에 협조해줄 것을 상소, 왕의 윤허를 받았다.

 

최석정(崔錫鼎)

1646(인조 24) ∼ 1715(숙종 41). 조선 후기의 문신 · 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석만(錫萬). 자는 여시(汝時) · 여화(汝和), 호는 존와(存窩) · 명곡(明谷). 기남(起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명길(鳴吉)이고, 아버지는 한성좌윤 완릉군(完陵君) 후량(後亮)이다. 어머니는 안헌징 ( 安獻徵 )의 딸이다. 응교 후상(後尙)에게 입양되었다.

9세에 이미 ≪ 시경 ≫ 과 ≪ 서경 ≫ 을 암송했고, 12세에 ≪ 주역 ≫ 을 도해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 신동으로 인정받았다. 남구만 ( 南九萬 ) · 이경억 ( 李慶億 )의 문인이고, 박세채 ( 朴世采 )와 종유(從遊)하면서 학문을 닦았다. 17세에 감시 ( 監試 ) 초시에 장원을 했고, 1666년(현종 7) 진사시에 장원했으며 동시에 생원시도 합격하였다.

1671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한림회천(翰林會薦)에 뽑혀 사관으로서 활동하다가 홍문록에 올라 홍문관원이 되었고, 응제시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아 호피(虎皮)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그 동안 남인의 영수 허적 ( 許積 )을 비판한 오도일 ( 吳道一 )을 변호하다가 삭직되기도 하였다. 또한 1676년(숙종 2)의 응지소에서는 윤휴(尹 頊 )를 비난하고 김수항 ( 金壽恒 )을 옹호하다가 삭출되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 이후 병조정랑 · 승정원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양부모의 상을 당해 일단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 후 1689년 기사환국까지 승정원승지 · 성균관대사성 · 홍문관부제학과 제학을 역임하였다. 1686년에는 조선인이 청나라의 국경을 넘어들어간 사건이 국제 문제로 비화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당시 호조참판으로서 부연(赴燕)하기도 하였다.

1685년에는 사학 유학생들이 이른바 ≪ 명재의서 明齋疑書 ≫ 가 이이(李珥)를 모함하여 욕했다고 비난하자 윤선거 ( 尹宣擧 )의 강도 ( 江都 ) 사건이나 이이의 입산(入山)한 잘못은 똑같은 문제라고 지적하였다. 2년 후 노소분당이 심각해지자 윤선거를 옹호한 나양좌(羅良佐)의 견해를 지지함으로써 노론세력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장희빈 ( 張禧嬪 )에 대한 총애 문제를 들추어낸 이세구 ( 李世龜 )를 옹호하고 청류(淸流)로 지칭되는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선비들을 힘써 선발하려고 노력하였다. 기사환국 이후에는 주로 외직에 있으면서 안동부사 · 연안부사를 역임하다가 부친상을 당해 물러났다.

1694년 갑술환국 이후 한성판윤 · 사헌부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장희재(張禧載)를 사형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홍문관대제학 · 이조판서에 임명된 뒤에는 서얼 출신을 삼조(三曹)에 소통하자는 건의를 올리기도 하였다. 1697년 우의정에 올랐고, 왕세자 책봉을 위한 주청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 때 붕당의 폐단을 논하면서 남인들의 일부 서용을 주장하는 입장을 개진, 노론세력의 강한 반발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단종 복위를 성사시키기도 하였다. 1699년 좌의정을 거쳐 1701년 영의정이 되었다. 이 때 김장생 ( 金長生 )의 문묘배향 논의가 일어나자 가볍게 처리할 수 없는 문제라고 반대하였다.

이 해 8월에 인현왕후 ( 仁顯王后 )가 죽고 장희빈에 의한 무고(巫蠱)의 변이 일어나자 왕세자 보호를 위해서는 생모인 장희빈을 사사(賜死)해서는 안 된다고 극력 반대하였다. 또한 붕당 문제보다 도학 ( 道學 )이 쇠퇴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 이유로 파직, 유배의 명령이 내려졌다가 다음 해 석방되어 진천에 거주하였다.

이듬해 다시 영의정이 되었는데 1710년까지 모두 열 차례 입상(入相)하였다. 이 후 노론세력이 대보단 ( 大報壇 )을 세우면서 의리론으로 할아버지 최명길을 공격하자 이를 변호하였다.

또 임보(林溥) · 이잠 ( 李潛 )의 옥사에서는 왕세자의 처지에 문제되지 않도록 안옥(按獄)하여 노론의 비난을 샀으며, 여기에 민암(閔 睦 )의 아들까지 사형에 처한 것은 비법적 처사라고 비난했던 사실까지 들추어지고, 그의 저서 ≪ 예기유편 禮記類篇 ≫ 가 주자의 주와 다르다며 비판받는 등 노론의 집중 공격을 받자 1711년 이후 미사(渼沙)에 은퇴하였다.

1715년 기사(耆社 : 기로소의 다른 이름)에 들어갔고, 이 해 사망하였다. 청주 대율리(大栗里)에 장례지냈으며, 뒤에 숙종묘에 배향되었다. 성격이 겉으로는 화평하나 안으로는 굳건했으며 염려나 불만의 기색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직업 관료의 성격이 강해 의리 · 명분론에 집착하지 않고 백성의 어려움과 정치적 폐단을 변통하려 했던 행정가였다. 또한 당쟁의 화를 가능한 한 줄이려고 힘썼던 정치가이기도 하였다.

≪ 야승 野乘 ≫ 을 집대성하려고 노력하여 찬수청을 설치하게 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편저에 ≪ 전록통고 典錄通考 ≫ 가 있고, 저서로 ≪ 예기유편 ≫ 과 ≪ 명곡집 明谷集 ≫ 36권이 현재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최석항(崔錫恒)

1654(효종 5)∼1724(경종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구(汝久). 호는 손와(損窩). 영흥부사 기남(起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오길(嗚吉)이고, 아버지는 후량(後亮)이며, 어머니는 안헌징 ( 安獻徵 )의 딸이다. 후원(後遠)에게 입양되었다. 영의정 석정(錫鼎)의 아우이다.

1678년(숙종 4) 진사가 되고 168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몸집이 작고 차림이 초라하였으나, 사리판단이 정확하여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는 전국의 관찰사 중 제일이라는 평판을 들었다.

1721년(경종 1)부터 2년에 걸친 이른바 신임사화에서 소론이 승리하는 데에 큰 구실을 하였다. 1721년 10월 왕세제(王世弟 : 뒤의 영조) 대리청정의 지시가 내렸을 당시 좌참찬으로서 왕을 만나 그 부당성을 지적하여 그것을 철회시키기도 하였다.

이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고, 나이 70이 되어 기로소 ( 耆老所 )에 들어갔다. 당시 소론4대신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혔는데, 이러한 당색 때문에, 영조가 즉위한 뒤 관작이 추탈되었다가 복관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손와유고≫ 13권이 있다.

 

최창대(崔昌大)

1669(현종 10)∼1720(숙종 46).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효백(孝伯), 호는 곤륜(昆侖). 영의정 명길(鳴吉)의 증손으로, 영의정 석정(錫鼎)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慶州李氏)로 경억(慶億)의 딸이다.

1687년(숙종 13) 생원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69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검열·설서·부수찬을 거쳐 1698년 암행어사가 되었다. 이어 교리·이조좌랑·헌납·응교를 거쳐 1704년 사서 ( 司書 )·이조정랑을 지냈고, 1706년 사간 등을 지낸 뒤 1711년 대사성에 승진하였으며, 그 뒤 이조참의·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문장에 뛰어나 박세채 ( 朴世采 )· 김창협 ( 金昌協 )에 비교되었고, 제자백가(諸子百家)와 경서에 밝아 당시 사림에게 추앙을 받았으며, 글씨에도 능하였다. 암행어사로 있을 때 함경도 일대의 관폐를 엄명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또한 전라도에 어사로 나가서는 진소어(眞蘇魚)의 수세(收稅)에 따른 폐단과 각 고을 승려에게 부과하는 지공(紙貢)에 따른 폐단, 연해 제읍(諸邑)의 수령을 무신만으로 임명하는 데 따른 문제점 등에 대한 서계 ( 書啓 )를 올렸다. 저술도 많이 있으나 대부분 산일(散佚)되고, ≪곤륜집≫ 20권 10책 만이 전하여지고 있다.

 

최송년(崔松年)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올라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내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추봉되었던 문충공(文忠公) 군옥(群玉)의 인맥으로는 그의 맏아들 송년(松年)이 고려 의종(毅宗)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중의대부(中議大夫)로 밀직사사(密直司使)를 역임했다.

 

최구년(崔龜年)

구년(龜年)은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거쳐 문하찬성(門下贊成)을 역임한 후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작(封爵)되어 가문을 일으켰다.

 

최선능(崔善能)

문숙공(文肅公) 유(완산부원군 희평의 차남)의 아들 선능(善能)은 추충보절공신(推忠補節功臣)으로 삼중대광문하찬성사(三重大匡門下贊成事)에 올라 상산부원군(商山府院君)에 봉작(封爵)되었다.

 

최칠석(崔七夕)

? ∼ 1394(태조 3).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완산부원군 ( 完山府院君 ) 희평(希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문숙공 유(文肅公 伯 )이며, 아버지는 상산부원군(尙山府院君) 선능(善能)이다.

1380년(우왕 6) 비장 ( 裨將 )으로 나세 ( 羅世 ) · 심덕부 ( 沈德符 ) · 최무성(崔茂星) 등과 더불어 신주(信州) · 안악(安岳) · 봉주 ( 鳳州 )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시키고, 이듬해 해도만호(海道萬戶)가 되었다. 그러나 사사로이 군사 30명을 놓아주고 그 식량을 자기 집에 운반하였다가 발각되어 하옥되기도 하였다.

1388년 왜구가 삼도에 침입하여 민가를 불사르고 약탈을 자행하자 밀직부사로서 자혜부사(慈惠府使) 조언 ( 曺彦 )과 함께 이를 격퇴시켰으며, 다음해 경상도 원수(元帥) 박위(朴 輹 )가 대마도를 정벌할 때 그를 뒤따라가 대마도인 300여명을 잡아가지고 돌아왔다.

뒤에 대마도를 정벌한 공으로 왕으로부터 칠석(七夕)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1390년(공양왕 2) 윤이 ( 尹彛 ) · 이초(李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한때 유배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종손인 최양(崔 刎 )과 함께 고향에 은거하였다가 태조의 부름을 받아 1394년(태조 3) 경기도도수군절제사(京畿道都水軍節制使)에 보임되었으나 곧이어 병으로 죽었다.

기골이 장대하고 남달리 키가 컸으며, 임금의 명을 받아 기선(騎船)을 만들었고, 특히 왜구를 방어하는 데 공이 많았다. 시호는 위정(威靖)이다.

 

최양(崔瀁)

1351(충정왕 3)∼1424(세종 6).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백함(伯函), 호는 만륙(晩六) 또는 장륙당(藏六堂). 아버지는 문하찬성사 ( 門下贊成事 ) 지(贄)이며, 어머니는 영일정씨(迎日鄭氏)로 수문하시중 ( 守門下侍中 ) 운관(云瓘)의 딸이다.

외삼촌 정몽주 ( 鄭夢周 )에게 수학하였으며,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상서·대제학 등을 지냈다. 1384년 예문관직제학에 재임할 때 이성계 ( 李成桂 )를 도와 서북면 정벌에 참여하였으며, 그 뒤 대사간 문하찬성사에 이르렀다.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전주 대승동(大勝洞) 봉강리(鳳崗里)에 은거하였다. 태조가 친구로 대우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관직과 전록(田祿)을 하사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저서로는 ≪만륙일고≫가 있다. 전주의 서산사(西山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최응일(崔應一)

인조(仁祖) 때 형제가 함께 이 괄(李 适)의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에 책록되었던 응일(應一)은 한풍부원군(漢豊府院君)에 봉작되어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다.

 

최응수(崔應水)

응일의 아우 응수(應水)는 결성군(結成君)에 봉해진 후 선천 부사(宣川副使)를 역임했다.

 

최보순(崔甫淳)

1162(의종 16)∼1229(고종 16).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예부상서를 지낸 균(均)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황주의 장서기 ( 掌書記 )를 거쳐 소부감 ( 小府監 )이 되었다. 1208년(희종 4) 금나라의 황제 즉위 축하문을 잘못 썼다 하여 파직되었다.

그 뒤 이부시랑(吏部侍郎)이 되고, 1212년(강종 1) 우간의대부 ( 右諫議大夫 )로 과거를 주관하여 위대여(魏大輿) 등을 시취 ( 試取 )하였다. 이듬해 동지공거 ( 同知貢擧 )로서 지공거가 되어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이주장(李柱長)과 함께 허수(許受) 등을 시취하였다.

1222년(고종 9) 참지정사 ( 參知政事 )로서 또 지공거를 맡았으며,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中書侍郎平章事判兵部事)를 거쳐 이듬해 수문전대학사 동수국사(修文殿大學士同修國史)를 역임하였다.

1227년 감수국사 ( 監修國史 )가 되어 수찬관 ( 修撰官 ) 김양경 ( 金良鏡 )· 임경숙 ( 任景肅 )· 유승단 ( 兪升旦 ) 등과 함께 ≪명종실록≫을 찬수하였다. 이듬해 수태사 판이부사(守太師判吏部事)에 올랐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최보연(崔甫延)

보순의 아우 보연(甫延)은 형부 상서(刑部尙書)를 역임했다.

 

최윤이

보순(甫淳)의 아들 형제 중 장남 윤이는 상약국 봉어(尙藥局奉御)가 되어 왕의 건강관리를 맡아보았다.

 

최윤개(崔允愷)

? ∼ 1266(원종 7).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균(均)의 손자로, 평장사 ( 平章事 ) 보순(甫淳)의 아들이다.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고 상서우승(尙書右丞)에 이르러 1257년(고종 44) 고시관(考試官)이 되어 시부로 임춘수(林椿壽), 십운시로 황공석(黃公石) 등을 시취 ( 試取 )하였다.

당시 집권자인 최의(崔 洑 )에게 아부하지 않았으나 1258년 김인준 ( 金仁俊 )에 의하여 최의가 제거되자 좌부승선에 발탁되어 이부 · 병부의 인사권을 맡았다.

1262년(원종 3) 지추밀원사 병부상서 태자빈객(知樞密院事兵部尙書太子賓客)에 오르고, 1264년 지중추원사로서 지공거 ( 知貢擧 )가 되어 김주정 ( 金周鼎 ) 등을 과거에 급제시켰다. 뒤에 판추밀원사 어사대부(判樞密院事御史大夫)에 이르렀다. ≪ 동문선 ≫ 에 표전(表箋) 1편이 전한다.

 

최성지(崔誠之)

1265(원종 6) ∼ 1330(충숙왕 17). 고려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순부(純夫), 호는 송파(松坡). 고종 때에 수태사 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守太師門下侍郎平章事判吏部事)를 역임한 보순(甫淳)의 4세손으로 찬성사 비일(毗一)의 아들이다.

부(阜) · 당( 槻 ) · 수(琇) · 실(實) · 성지(誠之) 등 이름을 다섯번이나 바꾸었다. 충렬왕 때 약관으로 과거에 급제하고 외직으로 계림관기(鷄林管記)가 되었다가, 내직에 들어와 사한(史翰)의 직을 거쳐 춘궁(春宮: 東宮)의 요속(寮屬)이 되었다.

뒤에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갔는데, 충선왕이 무종(武宗)을 옹립할 때 측근에서 협력한 바 많았으므로 지감찰사사(知監察司事)에 임명되었다.

충렬왕이 죽고 충선왕이 복위하자 동지밀직사사 대사헌(同知密直司事大司憲) · 첨의평리(僉議評理) 등을 거쳐 찬성사에 올랐고,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 · 광양군(光陽君)에 봉하여졌다.

1320년(충숙왕 7) 충선왕이 티베트 〔 吐蕃 〕 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원나라에 있으면서도 왕을 시종하지 않아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1321년과 1322년에 걸친 오잠(吳潛) · 유청신 ( 柳淸臣 )의 제2차 입성책동 ( 立省策動 )에는 김정미(金廷美) · 이제현 ( 李齊賢 ) 등과 함께 원(元)의 도성(都省)에 글을 올려 그 의논을 중지하도록 하였다.

1324년 관직에서 물러나 7년간 한적한 생활을 보내다 별세하였다.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다. 일찍이 충선왕이 원나라에 머무를 때 역수(曆數)가 정밀함을 보고 그에게 내탕금(內帑金)을 내려 수시력 ( 授時曆 )을 배워오게 하였는데, 이것이 고려의 학계에 큰 공헌을 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최문도(崔文度)

인품(人品)과 덕망(德望)이 탁월하여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로 손꼽혔던 문도(文度)는 전법판서(典法判書)와 첨의참리(僉議參理)를 지냈다.

 

최부(崔府)

1370(공민왕 19)∼1452(단종 즉위년).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수지(受之). 고려 말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학유가 되었다.

조선 개국 후 예문춘추관의 수찬관이 되었으며, 이어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외직에 나갔으나 고과(考課) 때마다 가장 높은 등급을 받아 임기를 다 채우지 않은 채 1405년(태종 5) 의정부사인이 되었다.

근검하고 염직(廉直)하여 태종의 총애를 받아 동부대언에 제수되었으며, 세종에게 탁용(擢用)할 것을 명함으로 인하여 1421년(세종 3) 경기도도관찰사·인수부윤(仁壽府尹)이 되었다. 1423년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로서 천추사 ( 千秋使 )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예조참판이 되었다.

1428년 대사헌·경창부윤(慶昌府尹)·강원감사를 역임하고, 이듬해 경창부윤으로서 선위사가 되어 의주에 파견되었다. 이 해 한성부윤·황해도관찰사, 2년 뒤 개성부유후(開城府留後)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434년 판광주목사(判廣州牧事)가 되고, 1439년 공조판서를 제수받아 이듬해 연로함을 이유로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고 곧 이조판서가 되었다.

1443년 다시 공조판서로서 경기전봉안사(慶基殿奉安使)가 되어 전라도지방을 순회하고 돌아와 하삼도(下三道)지방에 설해를 입어 작황이 좋지 못하여 전품(田品)을 분정(分定)하기가 어려우니 경차관 ( 敬差官 )을 파견하고, 전품의 분정을 다음해 가을까지 미룰 것을 상소하였다. 1447년 노질(老疾)로 인하여 사직하였다. 시호는 정간(靖簡)이다.

 

최담

문열공(文烈公) 순작(純爵)의 후손으로 또 다른 일파(一派)를 이루었던 문성공(文成公) 아(阿)의 후손에서는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공조 참의(工曹參議)와 제학(提學)을 역임했던 담( )이 유명했다.

혼탁한 정국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전주(全州)로 낙향하였던 담은 옥류동(玉流洞) 냇가의 기암(奇巖) 위에다 한벽당(寒壁堂)을 짓고 양촌(陽村) 권 근(權 近), 만육당(晩六堂) 최 양(崔 養)을 비롯한 명사(名士)들과 교류(交流)하면서 학문과 풍월(風月)로 자적했다.

 

최광지(崔匡之)

담의 맏아들로 우왕(禑王) 때 문과에 급제했던 광지(匡之)는 조선 태종(太宗) 때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을 역임했다.

 

최직지(崔直之)

광지의 아우 직지(直之)는 나주 판관(羅州判官)과 순창 도사(淳昌都事)를 역임했다.

 

최득지(崔得之)

득지(得之)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여 동생 덕지(德之)와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최덕지(崔德之)

1384(우왕 10) ∼ 1455(세조 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가구(可久). 호는 연촌(烟村) · 존양(存養). 용봉(龍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을인(乙仁)이고, 아버지는 참의 담( 奴 )이며, 어머니는 박인부(朴仁夫)의 딸이다.

1405년(태종 5) 식년문과에 동진사 ( 同進士 )로 급제한 뒤 추천을 받아 사관이 되었고, 1409년 교서관정자로서 원구단( 珤 丘壇)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오제제문(五帝祭文)을 준비 못하여 한때 투옥되었다.

뒤에 감찰 등 삼사 ( 三司 )의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외관으로 김제군수 · 남원부사 등 여러 주 · 군을 다스렸다. 남원부사를 사퇴한 뒤 영암의 영보촌(永保村)에 내려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이때 존양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문종이 즉위하자 그를 불러 예문관직제학에 임명,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으나 그는 아직 치사할 나이가 안 되었는데도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당시 풍습으로 볼 때 명예로운 직책을 사임하고 귀향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동료들은 그의 높은 덕과 행동을 칭송하며, 다투어 시부를 지어주고 노자를 마련하여 주었다. 72세에 죽으니 영암의 주민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하고 존양사(存養祠)라 이름지었다.

그는 세종 때 배출된 많은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정치적 격동에 휘말려들지 않고 문신이자 학자로서 명예로운 삶을 마쳤다. 전주의 서산사(西山祠), 남원의 주암서원 ( 舟巖書院 ), 영암의 녹동서원 ( 鹿洞書院 )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최명손(崔明孫)

그외 [동국통감(東國通鑑)] 편찬에 참여했다.

 

최한경(崔漢卿)

세조(世祖)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과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했던 효자(孝子) 한경(漢卿)이 유명했다.

 

최응룡(崔應龍)

충청감사(忠淸監司)와 형조 참판을 역임하였다.

 

최필성(崔弼成)

효행으로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최여림(崔汝霖)

무신(武臣)으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된 여림(汝霖) 등이 유명했다.

 

최균(崔均)

운철(云哲)의 아들 균(均)은 아우 강(堈)과 함께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스스로 <풍운장(風雲將)>이라 하며 고성(固城)과 사천(泗川)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최현(崔晛)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독전어사(督戰御使)가 되었던 현(晛)은 병조 참지(兵曹參知)와 대사성(大司成), 부승지(副承旨)를 거쳐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최명룡(崔命龍)

1567(명종 22) ∼ 1621(광해군 13). 조선 중기의 문인화가.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윤(汝允), 호는 석계(石溪). 이우기(李迂棋)의 문하에서 많은 서책을 섭렵하였다.

변산사(邊山寺)에 들어가 10여년을 밖에 나오지 않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역학에 깊고 수학에도 정통하였다 한다. 여기(餘技)로 그림을 그렸으나 전문가를 능가할 정도로 뛰어났다.

그의 유작으로 〈 선인무악도 仙人舞樂圖 〉 (국립중앙박물관소장)는 한쪽으로 치우친 편파구도(偏頗構圖)에 주제가 되는 신선들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어서 조선 중기에 유행하였던 절파계(浙派系)의 소경산수인물화풍(小景山水人物 怜 風)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최기필(崔琦弼)

?∼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의병.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규중(圭仲). 호는 모산(茅山). 천성이 어질고 품행이 발라 일찍이 지방관의 추천을 받아 봉사가 되었다. 진주부관을 지낸 뒤, 관직에서 물러나 진주 서쪽 백운동(白雲洞)에 살며, 젊은 유생들과 함께 학문과 도의를 강론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항왜구국(抗倭救國)의 대의를 성언(聲言)하며 관군·의군의 적 토벌을 지원하였다.

이듬해 적군이 후퇴할 무렵, 가토(加藤淸正) 등이 진주에서의 패전을 복수하려고 많은 군사를 진주로 집결하여 진주성이 위태로워지자 6,063명의 의병을 이끌고 성안으로 들어가 김천일 ( 金千鎰 )· 최경회 ( 崔慶會 )· 황진 ( 黃進 ) 등 수성장(守城將)들과 합심, 분전하였다.

그 해 6월 성이 함락됨과 함께 남강 ( 南江 )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 뒤에 창렬사 ( 彰烈祠 )에 향사되고,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최처중(崔處中)

처중(處中)은 명(明)나라 내란을 평정하는 원군으로 갔다가 심양(瀋陽)에서 순절하여, 명나라 황제가 <만고충신최처중>이란 글씨를 고국에 보내왔다.

 

최산휘(崔山輝)

인조(仁祖) 때 류효립(柳孝立)의 역모를 사전에 고변하여 영사3등공신(寧社三等功臣)으로 평완군(平完君)에 봉해졌던 산휘(山輝)가 유명하다.

 

최탁(崔濯)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심양에 배종했던 탁(濯)이 유명했다.

 

최방언(崔邦彦)

1634(인조 12)∼1724(경종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미백(美伯). 호는 양정당(養正堂). 아버지는 현감 세영(世榮)이며, 송시열 ( 宋時烈 )의 문인이다. 학행 (學行)으로 민정중 ( 閔鼎重 )·김수흥(金壽興) 등의 천거를 받아 현릉참봉(顯陵參奉)이 되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가 남인의 주장으로 폐위되자 이를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 또한 스승 송시열이 세자책봉문제로 사사(賜死)되자 동지들과 함께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을 강력하게 주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고향 양주로 돌아갔다.

뒤에 서인이 집권하면서 1701년 광릉참봉(光陵參奉)으로 다시 기용되고, 세자익위사의 시직(侍直)·부수(副率), 상의원첨정(尙衣院僉正) 등을 역임하고, 80세 때 노인직으로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최광벽(崔光壁)

1728(영조 4)∼1791(정조 1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헌(公獻). 호는 이우정(二友亭). 선산 출신. 체곤(體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두추(斗樞)이고, 아버지는 수인(壽仁)이다.

1754년(영조 30)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75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注書)·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를 지냈다.

1762년 자신이 직접 학문을 가르친 왕세자(王世子 : 思悼世子, 뒤에 莊祖로 추존)가 궤 속에 갇혀 굶어 죽는 참극을 당하자 깊은 충격을 받고 무언의 항변으로 인륜을 개탄하며 관직에서 떠났다.

1766년 다시 사헌부지평을 제수받고 벼슬길에 나와 1769년 장령 ( 掌令 )으로 승진한 뒤 1782년(정조 6) 돈녕부도정에 발탁되었으니 삼사소속 관원에게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 뒤 병조참판을 거쳐 사직한 뒤 학문으로 여생을 마쳤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남한에 총 81,500가구, 342,84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崔鳴吉(최명길)  선생의 일화.

1

새재의 성황신

최명길이 소년시절에 안동부사로 있는 외숙을 찾아가는 길에 새재를 지나게 되었을 때 일어난 이야기이다. 새재에 이르자, 웬 젊은 여인이 그의 뒤를 따라오면서 혼자 가기가 무서우니 같이 가기를 요청해 오자 이를 쾌히 승낙하고 동행하게 되었다. 최명길은 그녀의 정체를 궁금하게 여기고 있는데 그 여자가 이를 눈치 채고 방긋 웃으면서,
“ 저는 사람이 아니라 새재 성황신이온데, 안동에 사는 모 좌수가 서울에 갔다 오던 길에 성황당 앞을 지나면서 성황당에 걸려 있는 치마를 보고 욕심을 내어 이를 훔쳐다가 제 딸년에게 주었으니 이런 고약한 자가 어디 있습니까? 지금 좌수의 딸을 죽이러 가는 길인데 우연히 공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 라고 말을 하였다.

최명길은 속으로 몹시 놀랐으나, 태연자약하게
“ 인명은 재천인데 그만한 일로 사람을 죽일 것까지 없지 않느냐? ” 고 타이르니, 성황신이 다시
“ 공은 멀지 않아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영의정에 오를 분이시며, 병자호란에 큰 공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명나라는 망하게 되고 청나라가 흥할 것이니 부디 청나라와 화친해 이 나라 사직을 보전해야 합니다. 오늘 좌수의 딸을 죽일 것이나, 공의 체면을 보아 징벌하는 것으로 대신할 것이니, 공은 다음 날 제 체면을 세워 주십시오. ” 라고 말을 한 뒤 사라졌다.

최명길은 이를 이상히 여기고 서둘러 안동 좌수댁을 찾으니 좌수의 딸이 급사해 집안이 매우 어수선하였다. 이에 주인을 찾아 인사를 차리고 나서 딸을 살려주겠다고 말한 뒤 딸의 방으로 갔다.

새재에서 보았던 성황신이 좌수 딸의 목을 누르고 있다가 공을 보고 반기면서 “ 이제야 오십니까? ” 인사를 하였다.
성황신과 최명길이 대화하는 것을 집안 식구들이 들을 수는 있었으나 보이지는 않았다. 최명길이 좌수에게 성황당에서 가져온 치마를 불사르게 하고 깨끗한 음식으로 제수를 갖추어 제사를 지내게 했더니 딸이 다시 회생하였다.

그 뒤 최명길은 벼슬이 자꾸 올라 영의정이 되었으며, 병자호란을 당해서는 중의(衆議)를 물리치고 정세를 잘 판단해 치욕을 참고 화청정책을 써서 국난을 수습하게 되었는데, 성황신과의 인연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전한다.      

 

2

인조반정 때 길흉을 점쳐 거사시기를 정했을 만큼 점술을 인정받았으며 풍수지리나 병법에도 뛰어났다.
다양하고 현실적인 사상은 실제 생활과 정치에 반영되어 사족들에 대해 청군에 끌려갔던 부녀들은 어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일이니 이를 덮고 혼인관계를 계속 유지할 것을 외롭게 주장하였다.

늦게 아들을 얻었으나 그 전에 조카를 양자로 삼은 것을 취소하지 않고 그대로 후사로 삼도록 특별히 청해 조정의 허락을 받아 생자와 다름없는 사랑을 하였다.

또한 동료 공신들의 경제적 비리행위가 발견되면 친소를 가리지 않고 이를  규탄하고 개혁을 촉구하는 데 거리낌이 없을 정도로 강직하였다.

 

 

 

 

 

 

.

 

 

출전 <한미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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