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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최씨(崔)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崔(강릉최씨)

 

 

본관(本貫): 강릉(江陵)

시조(始祖): 최필달(崔必達):최흔봉(崔欣奉):최문한(崔文漢)

유래(由來):

 

강릉 최씨(江陵崔氏)는 본관을 같이 하면서도 상계(上系)를 달리 하는 다음 3계통(系統)이 있다.

첫째는 고려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삼한벽상 개국찬화공신(三韓壁上開國贊化功臣)에 책록되어 영첨의좌정승(領僉議左政丞)을 역임한 후 경흥부원군(慶興府院君)에 봉해졌던 충무공(忠武公) 최필달(崔必達)의 계통이다.

둘째는 고려 태조(太祖)의 부마(駙馬)로 대경(大卿)에 올랐던 최흔봉(崔欣奉)의

계통이다.

새째 계통은 고려 충숙왕(忠肅王)의 부마(駙馬)로 삼중대광(三重大匡)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에 올랐던 충재(忠齋) 최문한(崔文漢)을 시조(始祖)로 하는 계통이다.

 

가문의 중요 인물

 

최숭언(崔崇彦)

충무공(忠武公) 필달(必達)의 증손 숭언(崇彦)이 고려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명주부원군(溟州府院君)에 봉해졌다.

 

최한주(崔漢柱)

13세손 한주(漢柱)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대중대부(大中大夫)로 종정경(宗正卿)과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명주군(溟州君)에 봉해졌으므로 이들, 필달, 숭언, 한주는 강릉 최씨가 자랑하는<삼군(三君)>이다.

 

최치운(崔致雲)

1390(공양왕 2) ∼ 1440(세종 2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백경(伯卿), 호는 경호(鏡湖) · 조은(釣隱). 할아버지는 좌윤 원량(元亮)이고, 아버지는 안린(安 漏 )이며, 어머니는 전인구(全仁具)의 딸이다.

1408년(태종 8) 사마시에 합격하고, 1417년 식년문과에 동진사 ( 同進士 )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된 뒤 집현전에 들어가서 학문을 연구하였다. 1433년(세종 15) 경력 ( 經歷 )이 되어 평안도도절제사 최윤덕 ( 崔潤德 )의 종사관 ( 從事官 )이 되어 야인정벌에 공을 세우고 돌아와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가 되었다.

이어 판승문원사(判承文院事)가 되고, 공조참의와 이조참의를 거쳐 좌승지를 지냈다. 1439년 공조참판으로 계품사(啓稟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범찰(凡察) · 동창(童倉) 등의 야인들이 양민으로 경성지역에 영주할 수 있도록 요청, 이를 관철시켰다.

이 공으로 밭 300결(結)과 노비 30구가 상으로 내려졌으나 노비는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곧 예문관제학이 되고, 그 뒤 여러 차례 사신이 되어 명나라를 다녀와서 외교적인 공을 세웠다.

한편, 왕명으로 ≪ 무원록 無寃錄 ≫ 을 주석(註釋)하고 율문(律文)을 강해(講解)하는 등 학문정비에 기여하였고, 형옥(刑獄)에 관하여 여러 번 왕에게 자문을 하였으며, 뒤에 이조참판이 되었다.

술을 지나치게 즐겼으므로 왕이 친서를 내려 절제할 것을 명하자, 그 글을 벽에 걸어두고 출입할 때에는 꼭 이것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강릉의 향사 ( 鄕祠 )에 제향되었다.

 

최응현(崔應賢)

1428(세종 10) ∼ 1507(중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보신(寶臣). 호는 수재(睡齋). 원량(元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안린(安 漏 )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치운(致雲)이며, 어머니는 현령 함화(咸華)의 딸이다.

1448년(세종 30)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454년(단종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보직이 되었는데, 노모의 봉양을 위하여 강릉훈도를 자원하여갔다. 그 뒤 저작 · 박사 · 전적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고, 1462년(세조 8)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가 되어 1년 만에 양친(養親)하기 위하여 사퇴하였다.

그 뒤 고성 · 영월 두 고을의 군수를 역임할 때 선치하였으며, 만기가 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성균사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1483년(성종 14) 대신의 천거로 집의가 되고 이어 예빈시 ( 禮賓寺 ) · 봉상시 ( 奉常寺 )의 정(正)을 역임하였다.

이어 송도에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옥사가 있었는데 그가 파견되어 명석하게 해결하여 상으로 안마(鞍馬)를 받았다. 1487년 호남의 수적(水賊) 10여인을 잡은 공으로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동부승지를 지내고 충청도감찰사에 임명되었다.

1489년 대사헌, 1491년 경주부윤, 1494년 한성부좌윤을 거쳐 1497년(연산군 3)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임금의 뜻을 거스른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1500년에 다시 대사헌에 제수되고, 1505년에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늙었다는 이유로 사임하자 형조참판으로 임명되었으며, 오위도총부부총관을 역임하다.

 

최세절(崔世節)

1479년(성종 10) ∼ 1535(중종 3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개지(介之). 호는 매창 ( 梅窓 ). 안린(安 漏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치운(致雲)이고, 아버지는 형조참판 응현(應賢)이며, 어머니는 남매(南邁)의 딸이다. 할아버지 치운(致雲)으로부터 3대가 대대로 참판을 지냈다.

1504년(연산군 10)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뒤에 무과에도 급제하였다. 1508년(중종 3) 홍문관에 들어갔고, 1515년 평사를 거쳐 1517년 왕의 명으로 3계급을 뛰어 승진하였으며, 1519년 승지로 발탁되어 왕의 측근에서 보필하였다.

이어 1521년 승지 · 우승지가 되어 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보필에 진력하였다. 잠시 참찬관을 역임한 뒤 장례원 판결사 · 가승지를 거쳐, 다시 우승지가 되어 왕의 측근이 되었다. 이듬해 좌승지에 오르고, 1523년 제주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자 왕은 그를 다시 근무 조건이 좋은 충청도병사를 제수하였다.

1527년 중앙으로 돌아와 홍문관부제학을 역임한 뒤 경연관이 되어 왕에게 경서를 강론하였다. 얼마 뒤 황해도관찰사로 나갔고, 1528년 하정사 · 정조사로, 이듬해는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30년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형조참판이 되었고, 1534년 다시 강원도관찰사로 나가 치적을 올렸으며, 그 해 공조참판이 되어 중앙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유장(儒將)으로 뽑혀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인정받았고, 또한 왕을 호종한 뒤 오언율시를 지어 올려 상으로 활이 하사될 만큼 시재(詩才)에도 뛰어났다. 특히 그는 제조 ( 提調 )로 재임할 때 자격루(自擊漏)를 편리하고도 정확하게 개조(改造)한 공이 크다.

 

최수성

1487(성종 18) ∼ 1521(중종 16). 조선 전기의 선비화가.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가진(可鎭), 호는 원정(猿亭) · 북해거사(北海居士) · 경포산인(鏡浦山人). 치운(致雲)의 증손자로 생원 세효(世孝)의 아들이다.

김굉필 ( 金宏弼 )의 문하에서 배출된 신진사림파(新進士林派) 학자로서 조광조 ( 趙光祖 ) · 김정 ( 金淨 ) 등과 교유하였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때 친구들이 당하는 것을 보고 벼슬을 아예 포기하고 술과 여행, 시서화(詩書 怜 ), 음악으로 일생을 보냈다. 1521년 35세 때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남탄현(南炭峴)에 집을 마련해서 원숭이를 길들여 함께 살았으며 원정이라는 아호는 그 것에서 연유하였다. 젊어서부터 세속을 멀리하여 명산승경을 유람하며 술과 거문고, 시를 즐겼고 뜻이 맞는 교우들과는 만남에서 화흥( 怜 興)을 폈다.

문장 · 시 · 서화 · 음률이 모두 뛰어난 절세의 기재(奇才)로 평가되었으나 유작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인종 때 신원(伸寃)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강릉의 향사 ( 鄕祠 )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최배천(崔配天)

임진왜란 때 28세로 백의창의(白衣倡義)하여 전공을 세웠던 배천(配天)은 선조(宣祖)로부터 어의(御衣)와 망건(網巾)을 하사받고 회령 교수(會寧敎授)와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을 역임했다.

 

최기벽

세절(世節)의 증손이며 수성(壽 )의 손자인 기벽(基 )은 광해군(光海君) 때 박사(博士)로서 태학(太學)인 성균관에서 교수(敎授)하고 있을 때 영창대군(永昌大君:선조의 아들, 인목대비의 소생)을 서인(庶人)으로 만들어 강화도에 멀리 안치시키고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대궐에 나가 "삼강(三綱)이 끊어지고 구법(九法)이 무너졌나이다." 하며 극간(極諫)을 하였고, 조카 문한(文漢)으로 하여금 당시 전횡을 일삼던 이이첨(李爾瞻) 일당의 목을 베라는 항소문(抗疏文)을 올리도록 하였다가 동생 기백(基 )과 함께 성균관에서 퇴관당하여 향리인 원주로 내려갔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억울함이 풀렸다.

 

최문오(崔文澳)

기벽의 아들 4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강릉 최씨를 더욱 빛냈는데, 맏아들 문오(文澳)는 군수(郡守)를 거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했다.

 

최문활(崔文活)

기벽의 차남 문활(文活)은 군수를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최문발(崔文潑)

기벽의 셋째 문발(文潑)은 세속의 명리(名利)를 초탈하고 시주(詩酒)와 더불어 보내며 595수(首)의 주옥 같은 시(詩) 3권 2책에 담은 [취석시집(醉石詩集)]을 남겼다.

 

최문식(崔文湜)

기벽의 막내 문식(文湜)은 1630년(인조8) 중형인 문활(文活)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持平)을 거쳐 헌종(憲宗) 때 장령(掌令)과 헌납(獻納)을 지내고 숙종조(肅宗朝)에 황해도 관찰사, 승지(承旨), 대사간(大司諫), 예조참판, 도승지(都承旨)등을 역임했다.

 

최입지(崔立之)

고려 태조의 부마(駙馬)로 대경(大卿)에 올랐던 최흔봉(崔欣奉)의 후손에서는 그의 12세손 입지(立之)가 고려조에서 문하평리(門下評理)와 상호군(上護軍)을 지내고 평장사(平章事)에 증직되어 강릉군(江陵君)에 추봉되어 후손들이 강릉으로 시적(始籍)되었다.

 

최안소(崔安沼)

입지의 아들 3형제 중 맏아들 안소(安沼)가 평장사(平章事)로 강릉군(江陵君)에 책봉되었다.

 

최안빈(崔安瀕)

입지의 차남 안빈(安瀕)은 이부 전서(吏部典書)로 예성군(芮城君)에 봉해졌다.

 

최안면(崔安沔)

입지의 막내 안면(安沔)은 이부 전서를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최유연(崔有漣)

강릉군(江陵君)에 봉해졌던 유연(有漣:안소의 아들)이 유명하다.

 

최유의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했다.

 

최이

유연의 아들 이( )는 조선 초기에 대사헌(大司憲)과 공조(工曹) 및 형조(刑曹)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경상도 도관찰사에 이르렀다.

 

최경인(崔景仁)

이의 아들 경인(景仁)이 감사(監司)를 역임했다.

 

최문한(崔文漢)

충숙왕(忠肅王)의 딸 선덕공주와 혼인하여 부마(駙馬)가 되었던 문한(文漢)은 기울어져가는 고려의 국운을 일으켜 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자기를 태우고 동분서주하던 애마(愛馬)가 강릉 옥천동 용지(龍池)에서 용(龍)으로 변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는 고려의 운명이 다한 것을 깨닫고 그대로 강릉에 정착하여 강릉 최씨의 또다른 계통의 시조가 되었다.

 

최윤(崔允)

충재공(忠齋公) 문한(文漢)의 후손에서는 그이 손자 윤(允)이 사포서 사포(司圃署司圃)를 역임한 후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최자호(崔自湖)

윤의 둘째 자호(自湖)는 세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대사간(大司諫)과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다.

 

최자점(崔自霑)

윤의 막내 자점(自霑)은 성종(成宗) 때 등과(登科)하여 감찰(監察)과 정언(正言)을 거쳐 홍문관교리(弘文校理)를 지내고 평강(平康),고성(高城),금성(金城) 등지의 군수(郡守)를 지내며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훌륭한 치적(治績)을 남겨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최연(崔演)

1503(연산군 9) ∼ 1546(명종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연지(演之), 호는 간재(艮齋). 윤(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자점(自霑)이고,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세건(世楗)이다. 어머니는 김세량(金世良)의 딸이다.

1519년(중종 14) 사마시를 거쳐 1525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고, 이어 저작에 올랐다가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일으키기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를 하였다. 설서 · 사서를 거쳐 1531년에 김안로 ( 金安老 )의 전횡을 고변하고 홍문관수찬에 올랐다.

이어 정언 · 지제교를 거쳐 병조좌랑에 전임되었을 때, 대간으로부터 여러 차례 탐관이라는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신임이 깊어 유임되었다. 1637년 장령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문장이 능하다고 하여 명나라 사신을 맞는 원접사 ( 遠接使 )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이 해 전국적으로 흉년이 들자 충청도어사가 되어 농민을 위무하였다.

다시 조정에 들어와 장례원판결사를 거쳐 부제학 · 대사간 · 동부승지 · 좌승지 등을 역임하고 1545년(명종 즉위년) 도승지에 올랐다. 이 해에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이기(李 咬 ) · 임백령 ( 林百齡 ) 등 소윤에 가담, 위사공신 ( 衛社功臣 ) 3등에 책록되고 동원군(東原君)에 봉해졌으며 가의대부에 올랐다.

이어 도승지로 경연참찬관을 겸임했고, 1546년 이조참판에 보임되었다. 한성부좌윤을 거쳐 병조참판을 역임했는데, 그 동안 승문원 소속의 노비 2구를 점탈했다고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이듬해 병조판서에 승진했고, 곧 한성부판윤으로 전임되어, ≪ 무정보감 武定寶鑑 ≫ 을 편찬하였다.

1548년 지중추부사 · 겸지의금부사(兼知義禁府事)를 거쳐, 이듬해 동지사 ( 冬至使 )로 명나라에 가던 중 평양에 이르러 병사하였다. 시문에 능해 국가에서 주관하는 교서 · 책문을 주로 담당했고, 어제시(御製詩)에 항상 수석 또는 차석을 차지하여 왕의 총애를 받았다. 저서로 ≪ 간재집 ≫ 이 있다. 좌찬성 겸 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최운우(崔雲遇)

연의 조카 운우(雲遇)는 명종(明宗) 때 횡성 현감(橫城縣監)을 역임했다.

 

최응천(崔鷹天)

인조(仁祖)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진주 목사(晋州牧使)를 역임했던 응천(鷹天)이 문장과 서예, 음율(音律) 등에 정통하여 문명을 떨침으로써 강릉 최씨를 더욱빛냈다.

 

 

 

崔鳴國(최명국) 墓碣銘(묘갈명)

 

明宗 甲子(1564 )~壬申(임신) 江陵人

國衡 松軒,

 

松軒處士 江陵崔公之墓碣銘

公諱鳴國字國衡姓崔氏江陵人自號松軒慶府院君諡忠武諱必達后有諱漢柱溟州君有諱致雲 世宗朝吏曹參判號釣隱高祖諱進賢號寒松子 文宗朝生員蔭拜義禁府都事不就曾祖諱世貞展力副尉祖諱壽儉號方窩與再從弟猿亭諱壽城爲天倫知己及己卯禍作見善類將盡遂鞱晦明姓遯于禮安方下里考諱東仁妣丹陽禹氏易東諱倬后有婦德明宗朝甲子四月十日生自幼天姿品剛和聰明好學善於詩文深於經學隱居邱壑採釣爲樂寥寥然有古人之志優遊卒歲林下之樂也居家以孝悌爲本接人以忠信爲主喪祭禮儀中節親喪易戚備至事鄕隣人由是無親疏遠近一辞稱領公沒於壬申九月十三日葬于胎封艮坐原配羽溪李氏某女有懿德乙丑三月四日生癸亥十月十二日卒公墓下原同坐生四男景福通訓興福起福通政康福景福泰渟泰浩泰泳興福泰元泰圭起福泰享泰柱泰聖泰鎭康福泰林曾玄以下故不盡錄於乎公世守隱德積累數百年忠孝誠厚之家姓有自來矣故公操心如淵氷修行如繩墨忮求不萠於心怠慢不設於身寧學君子而不及對小人如蛇蝪是以內而治人畏而服使天翁有知何福不除今子姓繁衍多有文行其平日所修於斯可驗日公冑孫鍾舜與後孫仁圭英集鍾仁以父老之命請銘于余不文辭銘曰

賢者之德闇然日章公德維何章以世長詩禮承業述善家聖安靜一品區囂塵不入蘿月松風逍遙自適胎封先隴昭陽幽宅積善百年華將發福雲仍克誠屹然貞石本厚源深灒德必馨

檀紀四千三百十七年甲子淸明節 傍裔孫 大宗會長 燉浩 謹撰 十二代孫 鶴圭 謹書

十三代孫 鍾舜 謹竪

支派冑孫 文圭 燉九 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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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갈명

松軒處士(송헌처사) 江陵崔公(강릉최공)의 묘갈명

공의 휘는 鳴國(명국) 자는 國衡(국형) 성은 姓崔(성최)며 본관은 江陵(강릉)이다. 自號(자호)松軒(송헌)이다.

慶府院君(경부원군) 시호 忠武(충무) 必達(필달)의 후손이며, 漢柱(한주)라는 분이 있었는데 溟州君(명주군)이었다. 致雲(치운)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世宗朝(세종조)에서 吏曹參判(이조참판)를 지냈고 호가 釣隱(조은)이었다.

고조의 휘는 進賢(진현)이고 호는 寒松子(한송자)였으며 文宗朝(문종조)에서 生員생원으로 음직으로 義禁府都事(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증조부의 휘는 世貞(세정)으로 力副尉(력부위)였고 조부의 휘는 壽儉(수검)이며 호는 方窩(방와)이었다.

재종제 猿亭(원정) 壽城(수성)과는 하늘이 매어준 친한 사이었는데 기묘사화로 장차 모든 선한 일이 다 살아질 걸을 예견하고 이름을 감추고 禮安(예안) 方下里(방하리)로 피난을 왔다.

부친의 휘는 東仁(동인)이고 모친은 丹陽禹氏(단양우씨)易東(역동) ()의 후손으로 부덕이 있었다.

 

明宗朝(명종조) 甲子(갑자) 410일 공이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타고난 품성이 강직하며 온화하고 총명하며

학문을 좋아하였고 詩文(시문)을 좋아했고 經學(경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산골에 은거하여 나물 캐고 고기 낚으며 조용하게 즐기며 살았다.

그러나 고인의 뜻을 받들어 세상일을 초월하고 느긋하게 자연을 즐기며 살았다.

집에서는 孝悌(효제)를 근본으로 하고 사람을 대함에 믿음과 신의를 다하였으며, 喪祭(상제)에는 규칙에 맞게 예의를 다하였고, 친척집의 상을 당해도 親喪(친상)처럼 성의를 다했고, 향리 사람들은 그래서 다 친하고 소원함이 없어 가까운 곳 사람들은 모두 공을 칭송했다.

공은 壬申(임신)913일에 졸 하였는데 胎封(태봉) 艮坐(간좌) 언덕에 매장하였다. 배위 羽溪李氏(우계이씨), 아무개 딸인데 아름다운 부덕이 있었고 乙丑(을축) 34일 태어나서 癸亥(계해) 1012일에 졸하여 공의 묘아래 같은 언덕 같은 좌향에 매장하였다.

네 아들를 두었는데 장남 景福(경복)通訓(통훈)이고, 興福(흥복), 起福(기복)通政(통정), 康福(강복), 景福(경복)이다.

泰渟(태정), 泰浩(泰渟(태정), 泰浩(태호), 泰泳(태영), 興福(흥복), 泰元(태원), 泰圭(태규), 起福(기복), 泰享(태향), 泰柱(태주), 泰聖(태성), 泰鎭(태진), 康福(강복), 泰林(태림)은 손자이고, 증손과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오호! 공은 대대로 隱德(은덕)을 지켜오고 수백 년 충효와 ()이 두터운 가풍을 이어왔다.

그래서 공은 살얼음을 건너듯 조심하여 수행과 먹물의 기교를 구하여 마음에 태만함이 없도록 노력하여, 몸을 편안하게 하지 않고 군자의 ()을 익혀나가니 소인들이 미치니 못하였다.

마치 뱀 자라탕을 마시면 내장이 병든 사람을 고치만 사람들이 마시기를 두려워하는 것과 같았다.

天翁(천옹)으로 하여금 어디에 복이 있는가를 알게 하여 지금 자식들이 번성하고 글공부를 하는 자가 많이 있는 것은, 평일에 닦은바가 있어 이와 같이 된 것이라 본다.

 

공의 冑孫(주손) 鍾舜(종순)後孫(후손) 仁圭(인규) 英集(영집) 鍾仁(종인)이 노부의 명을 받고 내게 ()을 청하니 나는 거절할 수 없어 다음과 같이 ()을 쓴다.

 

어진 사람의 덕      賢者之德

어두운데 비추는 밝은 해      闇然日章

공의 덕은 어떠한가.      公德維何

문장이 세를 이어 전해져     章以世長

시와 예가 가업으로 받드니     詩禮承業

()을 펴서 가문의 성스러워     述善家聖

편안하고 고요함이 일품이로다.     安靜一品

시끄러운 속사는 멀리 하고     區囂塵不

숲속에 들어가 솔밭에 달을 보며     入蘿月松

스스로 멀리 소요를 하고     風逍遙自

선조 받들고 자손을 길러놓고     適胎封先

양지 바른 유태에 누었으니     隴昭陽幽宅

적선한 백 년으로      積善百年

장차 발복하게          華將發福

먼 후손까지 정성을 다 하네.   雲仍克誠

높게 솟은 곧은 돌에 세기니  屹然貞石

본래 두텁고 깊은 근원          本厚源深

넘쳐나는 덕 반드시 향기로우리.     灒德必馨

 

단기 4317년 갑자 청명절 방예손 대종회장 燉浩(돈호) 근찬 십이대손 鶴圭(학규) 근서

십삼대손 鍾舜(종순) 근수

지파주손 文圭(문규) 燉九(돈구)

 

 

崔東仁(최동인) 墓碣銘(묘갈명)

 

明宗 戊申(1548)~ 宣祖 丁巳(1600) 53. 江陵人 號 方窩,

墓碣銘

處士江陵崔公 諱東仁之墓碣銘

於乎府君之世距今三百有餘歲矣雖或懿行偉蹟猶難其詳而衣履之藏則在宣城北一舍許方峴山胎封之原今玆世道滄桑後孫散離四方而不于表則恐或有後日陵谷之慮謹按府君諱東仁姓崔氏江陵人麗朝慶興府院君諡忠武公諱心達之后也高祖諱致雲號釣隱 世宗朝名臣宮至文吏判五使 明朝專對蒙 允曾祖諱進賢號寒松子生員祖諱世貞展力副尉考諱壽儉與再從弟猿亭公爲天倫知己及己卯禍作遂鞱晦名姓遯于方峴號方窩妣達成徐氏明廟戊申二月十七日生府君於乎不肖豈敢述府君德行乎雖然但得之於家庭所世傳者則自文綱之後常次窮谷長抱幽鬱之思而居家以孝悌爲待人以忠信爲主囂囂之志不累於外物休休之風逈出於流俗故早而見出於儔列晚而信重於後輩則稱之以隱德君子矣隱德君子矣丁巳八月二十七日考終于寢亭年五十有二葬于胎封乙坐原配丹陽禹氏墓在下原同坐有一男曰鳴國孫四人曰景福通訓曰興福曰起福通政曰康福號蓮菴餘不盡錄於乎家世零替不肖生晩先祖文獻寥寥難證又經鬱脩證響無憑則何以知府君之萬一哉慨惋之久 謹按家譜世稿而微信記實參以由來傳誦略敍如而刻于墓石且以爲子孫想慕焉

檀紀四千三百十年十月 日 十四代孫 鍾舜 謹識

十三代孫 鶴圭 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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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갈명

崔東仁(최동인)

처사 강릉 최공 휘 東仁(동인)의 묘갈명

아아! 부군이 세상을 달리한지 지금으로부터 어언 300여 년이 되었구나.

그래서 아름다운 행적이나 위업의 상세한 점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시신을 묻은 장소는 宣城(선성) 북똑 30리 쭘되는 峴山(현산) 胎封(태봉) 언덕에 있으며, 지금 세상의 도의가 변했고 후손 또한 사방으로 흩어져 살다 보니 세태가 극심하게 변하여져 묘를 후일에 실전 할 가 두렵다.

삼가 부군의 휘는 東仁(동인)이고 성은 崔氏(최씨)이며 본관은 江陵(강릉)이다.

고려조에 慶興府院君(경흥부원군) 시호 忠武公(충무공) 心達(심달)의 후손이다.

고조의 휘는 致雲(치운) 호는 釣隱(조은)으로 世宗朝(세종조)名臣명신으로 관직이 文吏判五使(문리판오사) 明朝專對蒙(명조전대몽)이었다. 증조부의 휘는 進賢(진현)이고 호는 寒松子(한송자)로 생원이었다.

조부의 휘는 世貞(세정)이며 展力副尉(전력부위)이었고, 부친의 휘는 壽儉(수검)이었다.

재종제 猿亭公(원정공)과는 하늘이 맺어준 찬다운 벗이기도 한데 기묘년의 사화가 있다. 이름을 감추고 方峴(방현)으로 도피해 와서 호를 方窩(방와)이라고 하였다.

모친은 達成徐氏(달성서씨)明宗(명종) 무신년 217일에 부군을 낳았다.

오호! 불초 소생은 감히 부군의 덕행을 논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다만 가정에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문과에 진출 할 기회가 없어진 뒤, 항상 골짝에서 우울한 생각을 품고 살았지만, 집에서는 孝悌(효제)하였고 사람을 대함에는 忠信(충신)을 위주로 하여, 시끄러운 말로 누를 끼치지 않았으며, 바깥 사물에 대해 너그럽고 선하였으며, 세상의 유행과 멀리 벗어나 의연하게 살아갔다.

그래서 일찍이 남들과 잘 어울렸고, 나이 들어서는 후배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워서 隱德君子(은덕군자)라고 불리었다. 정사 년 827일에 정침에서 졸하니 향년 52세였다.

胎封(태봉) 乙坐原(을좌원)에 장사 지냈고 배위 丹陽禹氏(단양우씨)의 묘는 그 아래 같은 언덕 같은 좌향에 있다.

아들이 하나 있는데 鳴國(명국)이고 손자는 4명으로 景福(경복)通訓(통훈)이고, 興福(흥복), 起福(기복)通政(통정), 康福(강복)은 호가 蓮菴(연암)인데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가세가 영락하여 불초소생이 늦게나마 선종의 문헌을 읽어 증명하기 어렵고, 또한 경력을 알 길이 없고 증빙한 자료가 없는 즉 어찌 부군에 대해 알 수가 있겠는가.

한탄한지 오래지만 삼가 전해 오는 家譜(가보)의 미소한 기록을 믿고 신재로 전해오는 유래를 생략하고라도, 墓石(묘석)을 조각하여 자손들이 오래 도록 생각하고 사모하게 하도록 한다.

 

단기 431010월 일 십사대손 鍾舜(종순) 근식.

십삼대손 鶴圭(학규) 근서.

 

 

 

 

崔壽儉(최수검) 墓碣銘(묘갈명)

 

崔壽儉(최수검) 字 恭信, 號 方窩處士

成宗 辛卯(1471)~成廟 丙辰(1557) 86. 江陵人

 

墓表

方窩處士公 壽儉 墓表

府君諱壽儉字恭信姓崔氏江陵人麗祖慶興府院君諡忠武公諱必達之后也高祖諱安麟號桐軒國子生員 贈兵曹參判曾祖諱致雲號釣隱 世宗朝名臣官至文吏判五使明朝專對蒙 允祖諱進賢號寒松子生員考諱世貞展力副尉妣羽溪李氏 成宗辛卯公生于江陵里第自幼擧止凝重姿性豈弟事親極其誠孝定省之暇手不釋卷嘗讀經史不專口誦深究文義與再從弟猿亭公齒相上下志氣相孚及己卯禍作家事慘酷遂鞱晦名姓踰嶺遯居于禮安熊登谷移方峴自號方窩居士杜門四十餘年一不言時事耕樵自娛以故世無知者成廟丙辰考終于正寢亭年八十六葬于胎封乙坐原配達成徐氏葬府君墓下平地艮坐有一男曰東仁孫鳴國曾孫景福通訓次興福次起福通政次康福不肖生晚無由承聞當日之懿行偉蹟但得之於家庭所世傳者則一自文綱以後奔迸窮谷家世濩落至於咳唾遺什屢經査攸皆蕩逸無遺子姓又零替至此懼夫愈久愈失其眞也故書大 槩竝錄譜系年月刻于墓石以寓感慕之懷焉

歲在壬戌 五代孫 慶立 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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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壽儉(최수검) 江陵人

方窩處士(방와처사)壽儉(수검) 묘표

 

부군의 휘는 諱壽(휘수) 자는 恭信(공신), 성은 崔氏(최씨)江陵人(강릉인)이며 고려 시대에 慶興府院君(경흥부원군) 시호 忠武公(충무공) 必達(필달)의 후손이다.

고조의 휘는 安麟(안린)이고 호는 桐軒(동헌)으로 國子生員(국자생원)이며 증 兵曹參判(병조참판)이었다.

증조의 휘는 致雲(치운)이고 호는 釣隱(조은)인데 世宗朝(세종조)의 명신으로 관직이 文吏判五使明朝專對蒙(문리판오사명조전대몽)에 이르렀다.

允祖(윤조)는 휘 進賢(진현)이고 호는 寒松子(한송자)로 생원이 엇다.

부친의 휘는 世貞(세정)으로 展力副尉(전역부위)이었다.

모친은 羽溪李氏(우계이씨), 成宗(성종) 신묘 년에 공은 江陵里(강릉리)에서 낳았다.

어릴 때부터 몸가짐이 신중하였고, 용모와 기상이 안아하였다.

부모에게 효도하기 극진하였으며 아침마다 부모를 문안 들릴 때도 손에서 책을 때지 않았으며, 다만 經史(경사)를 임으로 외우는데 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깊이 문장의 뜻까지도 탐구하였다.

재종제 猿亭公(원정공) 동갑으로 서로 마음이 서로 맞아, 己卯禍(기묘화)로 집안 일이 참혹한 지경에 이루자 이름을 감추고 중령을 넘어 禮安(예안) 熊登谷(웅등곡)에 숨어살며 方峴(방현)으로 이사하여 自號(자호)方窩居士(방와거사)라 하고 40여 년간을 두문 출출하며 한 마디도 時事(시사)에 애해 말을 하지 않으며, 밭 갈고 나무하며 즐겨 산고로 세상에서 아는 사람이 없었다.

성종 병진 년, 정침에서 졸하니 향년 86이었다.

胎封(태봉) 乙坐原(을좌원)에 장사 지냈으며 배위 達成徐氏(달성서씨) 도 부군의 묘아래 평지 艮坐(간좌)에 장사 지냈다.

아들이 라나 있는데 東仁(동인)이고 손자는 鳴國(명국), 중손은 景福(경복)이며 通訓(통훈)이고 ,다음이 興福(흥복), 다음이 起福(기복)으로 通政(통정)이며, 다음이 康福(강복)이다.

불초한 소생은 늦게까지 당일의 위업과 미행을 듣지 못하였고 다만 가정에서 전하는 자의 말에 의하면, 한결같이 문맥이 후에 이르도록 하였으며, 집안이 영락하여 궁해도 어른의 말씀을 잘 전해, 자주 도리를 살펴 방탕한 자식들이 없게 하였다.

또한 이 지경으로 가정이 몰락해도 오리도록 두려워하지 아니했고 질실 됨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크게 계보의 연월을 墓石(묘석)에 적어 그리운 해표의 정으로 한다.

 

세재임술 오대손 慶立(경입) 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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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한미족대성보>

 

 

 

항렬(行列)

최필달계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40

亨(형)

42

貞(정)

44

祿(록)

41

重(중)

43

重(중)

45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강릉 최씨(江陵崔氏)는 남한에 총 30,940가구, 132,30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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