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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강화최씨(崔)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崔(강화최씨)

 

 

본관(本貫): 강화(江華)

시조(始祖): 최익후(崔益厚)

유래(由來):

 

강화 최씨(江華崔氏)의 시조(始祖) 최익후(崔益厚)는 경주 최씨(慶州崔氏) 시조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의 후손으로 고려 중엽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냈고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강화(江華)에서 터를 잡고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강화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최효장(崔孝章)

효장(孝章)이 고려 때 도평리(都評理)를 지냈다.

 

최중의(崔重義)

중의(重義)는 시중(侍中)을 지냈다.

 

최광의(崔光義)

중의(重義)의 동생 광의(光義)는 지도성사(知都省事)를 역임하였다.

 

최근(崔瑾)

광의(光義)의 아들 근(瑾:충숙공)은 1232년(고종 19) 상장군(上將軍)으로 이 통(李 通)의 난을 토평(討平)하고 수문각대제학(修文閣大提學)을 거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올라 문하시중(門下侍中)과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최종수(崔宗秀)

근의 아들 종수(宗秀)가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거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를 지냈다.

 

최유

근의 손자 유( )는 선부전서(選部典書), 수문각 대제학(修文閣大提學),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 예부상서 등을 역임했다.

 

최수진(崔秀眞)

수진(秀眞)은 감찰어사(監察御史)를 거쳐 직제학(直提學)을 지냈다.

 

최용소(崔龍蘇)

?∼1422(세종 4).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강화(江華). 고려 공민왕 초에 의릉직(毅陵直)에 제수, 이후 감찰규정(監察糾正)·계림부판관(鷄林府判官)·이성등처관군만호(泥城等處管軍萬戶) 등을 역임하였다.

1370년(공민왕 19) 전라도체복사(全羅道體覆使)로 파견되어 민심을 위유하고, 같은 해 7월 환경하여 신돈 ( 辛旽 )을 먼저 본 뒤에 왕을 알현하여 장형 ( 杖刑 )을 받았고, 고려 말에 공조전서를 역임하였다.

1394년(태조 3) 회례사(回禮使)로 일본 구주 ( 九州 )에 파견되어 구주절도사(九州節度使) 이미카와(令州了俊)에게 왜구를 토벌하여 양국의 우호를 도모하자는 국서를 전하고, 이마카와가 차견(差遣)한 승려 종구(宗俱)와 함께 피로인 570여 명을 대동하고 귀국하였다.

1397년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1398년 강원도도관찰사를 지냈다. 1400년(정종 2) 3군 도진무 ( 都鎭撫 )로 재직 중 방간(芳幹)의 모반에 연좌되어 하옥되었다가 방면되고, 곧 검교참찬문하부사(檢校參贊門下府事)에 좌천되었으며, 곧 방간의 당여로 재차 논죄되어 삭직, 장형을 받았으나, 태종이 즉위하면서 사면되었다.

1403년(태종 3) 승녕부윤(承寧府尹)으로 복직되고, 그 해 좌군총제(左軍總制)에 개수(改授)되고, 그 뒤 안동부사·개성부유후 등을 역임하였다. 1413년 형조판서로 한성부윤 김겸 ( 金謙 )과 함께 하정사 ( 賀正使 )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그 해 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414년 판한성부사가 되고, 이듬해 전라도의 조운책(漕運策)을 진언(陳言)하였다. 성품이 청백하면서도 절개가 굳고, 언행이 정중하였다. 일찍이 명나라에 들어가 옥하관(玉河館)의 건축을 감독하고 명성을 얻기도 하였다. 시호는 제정(齊貞)이다.

 

최귀수(崔龜壽)

용소(龍蘇)의 동생 귀수(龜壽)는 목은(牧隱) 이 색(李 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 재(吉 再)와 교유하며 벼슬이 사복경(司僕卿)에 이르렀는데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가 충신의 절개를 지켰다.

 

최항(崔恒)

수진(秀眞)의 아들 항(恒)은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역임했다.

 

최유간(崔有澗)

항의 아들 유간(有澗)은 개성소윤(開城少尹)을 지냈다.

 

최한문(崔漢文)

중종 때 예조 판서를 역임한 한문(漢文)은 귀수(龜壽)의 증손이다.

 

최자윤(崔自潤)

한문(漢文)의 아우 자윤(自潤)은 기묘사화의 원흉인 남 곤(南 袞) 일당의 비행을 논척(論斥)하고 양주 사천(楊洲沙川)으로 퇴거하여 살았다.

 

최수(崔琇)

귀수(龜壽)의 현손(玄孫) 수(琇)는 1590년(선조 23) 과거에 등제하여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고 개성유수(開城留守)를 거쳐 판윤(判尹)에 이르렀다.

 

최순(崔淳), 최시망(崔時望)

중종 때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순(淳)과 당대 성리학의 대가 기대승(奇大升)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선조 때 장령(掌令)을 지낸 시망(時望)은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였다.

 

최희립(崔希立)

희립(希立)은 선조 때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휘하에서 공을 세우고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진주(晋州) 싸움에서 순절하여 강화 최씨의 가문을 영광되게 하였다.

 

 

출전 <한미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40

煥(환)

43

永(영)

46

達(달)

41

憲(헌)

44

植(식)

47

鎔(용)

42

鎬(호)

45

烈(열)

48

漢(한)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강화 최씨(江華崔氏)는 남한에 총 2,905가구, 12,55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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