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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개성최씨(崔)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崔(개성최씨)

 

 

본관(本貫): 개성(開城)

시조(始祖): 최우달(崔佑達)

유래(由來):

 

개성 최씨(開城崔氏)의 시조(始祖) 최우달(崔佑達)은 원래 황주(黃州) 토산현(土山縣) 사람으로 신라조에 대상(大相)을 역임하였고, 그의 아들 응(凝)이 태조를 도와 고려개국에 공을 세워 여러 관직을 지내고 누대(累代)에 걸쳐 개성(開城)에 세거(世居)하며 호족(豪族)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우달(佑達)을 시조(始祖)로 하고 개성(開城)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최응(崔凝)

898(효공왕 2) ∼ 932(태조 15). 고려 전기의 문신. 대상 ( 大相 ) 우달(祐達)의 아들이다.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그 집 오이 줄기에 갑자기 참외가 맺혔다.

이웃 사람이 이를 궁예 ( 弓裔 )에게 고했더니, 궁예가 점을 쳐 생남하면 나라에 불리하니 기르지 말라고 해 부모가 숨겨 길렀다. 오경(五經)에 통하고 문장에 능했으며, 궁예가 “ 이른바 성인 ( 聖人 )을 얻는다 함은 이 사람을 얻는 게 아닌가! ” 라고 할 정도로 신임을 얻었다.

915년(신덕왕 4) 궁예가 왕건 ( 王建 )을 불러들여 이른바 관심법(觀心法)으로 모반의 누명을 씌울 때 이를 변명하자, 그 자리에 장주(掌奏)로 있던 그가 일부러 붓을 뜰에 떨어뜨린 다음 주우려고 뜰에 내려가 왕건에게 “ 굽히지 않으면 위태롭다. ” 라고 귀띔해 주어 화를 면하도록 하였다.

왕건이 고려를 세우자 지원봉성사(知元奉省事)가 되었다가 광평낭중(廣評郎中) · 내봉경(內奉卿) · 광평시랑(廣評侍郎)을 역임하며 태조의 총애를 받았다.

항상 재계(齋戒)하고 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병들어 누웠을 때 태조가 동궁 ( 東宮 )을 보내 병문안을 하고 육식을 권하며 “ 다만 손수 죽이지 않으면 될 것이지 고기를 먹는 것이야 무슨 해가 되리오. ” 라고 하였다.

그러나 굳이 사양하고 먹지 않자 태조가 그 집에 행차해 이르기를 “ 경이 육식하지 않으면 두 가지 손실이 있으니, 그 몸을 보전하지 못해 끝까지 어머니를 봉양하지 못함이 불효요, 명(命)이 길지 못해 나로 하여금 일찍 좋은 보필을 잃게 함이 불충이라. ” 하니 이에 비로소 고기를 먹어 병이 나았다고 한다.

또 태조가 “ 옛날에 신라가 9층탑을 세워 삼국을 통일했는데 개경에 7층탑을 세우고 서경에 9층탑을 세워 삼한을 합해 일가를 삼고자 하니 경은 나를 위해 발원소(發願疏)를 지어 달라. ” 라고 하자 이에 따랐다.

죽은 뒤 대광 태자태부(大匡太子太傅)가 증직되고 뒤에 다시 사도 ( 司徒 )가 증직되었다.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희개(熙愷)이다.

 

최천보(崔天寶)

천보(天寶)가 조선에서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역임했다.

 

최명창(崔命昌)

1466(세조 12) ∼ 1536(중종 3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여신(汝愼) · 자신(子愼), 호는 송석거사(松石居士). 천보(天寶)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중추원사 유(濡)이고, 아버지는 부사과 ( 副司果 ) 철손(鐵孫)이며, 어머니는 찰방 윤예경(尹禮卿)의 딸이다.

1489년(성종 20) 진사가 되었으나 아버지 상을 당하여 상심한 끝에 병이 나서 오랫동안 과거를 포기하였다. 그 뒤 1504년(연산군 10)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고, 그 뒤 성균관전적 · 응교를 역임하였다. 1519년(중종 14) 예조판서를 거쳐 뒤에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뒤 전주부윤과 원주목사가 되었다.

그가 성천부사로 있을 때 임금이 불러 “ 최모는 시종(侍從)에 합처(合處)함이니 어찌 외직에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곧바로 응교에 배수하였고, 대간에서 소신껏 말을 하여 회피하는 것이 없었으며 국가에서도 그의 건의를 많이 채택하였다.

예를 들면 적전 ( 籍田 )이 종묘에 제사용으로 되어 있는 것을 민간인이 가만히 경작하여 납세를 하지 않아 지방관리들이 실제는 제사도 궐(闕)하고 문서상으로만 정리한 것을 어사를 파견하여 실제조사를 시켜 사실을 밝혀 정리하도록 한 것 등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원주목사로 있을 때 선정을 하여 백성들의 환심을 샀으나 감사와 의견충돌로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벼슬에 뜻을 버렸다. 그는 병이 깊어지자 아들을 불러놓고 검소한 장례를 당부하였으며 항상 집이 누추하여 친구의 방을 빌려 기거하였다고 한다. 중종 때 청백리 ( 淸白吏 )에 녹선되었다.

 

최입

일찍이 이 이(李 珥)의 문하에서 글을 읽어 문장과 시에 능하였던 입( )은 1561년(명종 16)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여러 번 명나라 사신으로 가서 그곳 학자들로부터 명문장가(名文章家)라는 격찬을 받았으며 그의 글과 차천로(車天輅)의 시(詩), 한 호(韓 濩)의 글씨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일컬었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0

斗(두)

23

鐘(종)

26

熙(희)

21

容(용)

24

泰(태)

27

圭(규)

22

坤(곤)

25

東(동)

28

錫(석)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개성 최씨(開城崔氏)는 남한에 총 716가구, 3,30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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