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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최씨(崔)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崔(경주최씨)

 

 

본관(本貫): 경주(慶州)

시조(始祖): 최치원(崔致遠)

유래(由來):

 

우리나라 최씨(崔氏) 중에서도 가장 뿌리가 굵은 경주최씨(慶州崔氏)는 사로(斯盧)의 6촌(村) 중 돌산고허촌장(突山高墟村長:사량부) 소벌도리(蘇伐都利)를 원조(遠祖)로 받들고, 그의 24세손으로 전하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을 시조(始祖)로 하여 누대로 살아온 경주(慶州)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명문거족(名門巨足)의 문호(門戶)를 열었다.

신라 말과 고려 초기에 명망을 떨쳤던 경주최씨는 문창후 최치원의 후대에서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와 판서공파(判書公派)를 비롯하여 광정공파(匡靖公派)와 계림군파, 충렬공파(忠烈公派), 정랑공파(正郞公派), 사성공파(司成公派), 문밀공파(文密公派), 문정공파(文正公派), 화숙공파(和淑公派) 등 크게 26파로 분파(分派)되어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명문거족의 지위를 굳혀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최치원(崔致遠)

857(문성왕 19) ∼ ? 신라 하대의 학자 · 문장가. 본관은 경주 ( 慶州 ).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 경주 사량부(沙梁部 또는 本彼部)출신. 견일(肩逸)의 아들이다.

신라 골품제에서 6두품(六頭品)으로 신라의 유교를 대표할 만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최씨 가문출신이다. 특히, 최씨 가문 중에서도 이른바 ‘ 신라 말기 3최(崔) ’ 의 한 사람으로서, 새로 성장하는 6두품출신의 지식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세계(世系)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버지 견일은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 ( 崇福寺 )의 창건에 관계하였다.

최치원이 868년(경문왕 8)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아버지 견일은 그에게 “ 10년동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 라고 격려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뒷날 최치원 자신이 6두품을 ‘ 득난(得難) ’ 이라고도 한다고 하여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었던 점과 아울러 신흥가문출신의 기백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당나라에 유학한지 7년만인 874년에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郎) 배찬(裵瓚)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2년간 낙양(洛陽)을 유랑하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다. 그 때 지은 작품이 ≪ 금체시 今體詩 ≫ 5수 1권, ≪ 오언칠언금체시 五言七言今體詩 ≫ 100수 1권, ≪ 잡시부 雜詩賦 ≫ 30수 1권 등이다.

그 뒤, 876년(헌강왕 2) 당나라의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되었다. 이 때 공사간(公私間)에 지은 글들을 추려 모은 것이 ≪ 중산복궤집 中山覆 慣 集 ≫ 1부(部) 5권이다. 그 뒤, 887년 겨울 표수현위를 사직하고 일시 경제적 곤란을 받게 되었으나, 양양(襄陽) 이위(李 隸 )의 문객 ( 門客 )이 되었다. 곧 이어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었다. 그러나 문명(文名)을 천하에 떨치게 된 것은 879년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이를 칠 때 고변의 종사관 ( 從事官 )이 되어 서기의 책임을 맡으면서부터였다.

그 뒤, 4년간 고변의 군막(軍幕)에서 표(表) · 장(狀) · 서계 ( 書啓 ) · 격문 ( 檄文 ) 등을 제작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 공적으로 879년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承務郎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승차되었으며, 겸하여 포장으로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았다.

이어 882년에는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고변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공사간에 지은 글이 표 · 장 · 격(檄) · 서(書) · 위곡(委曲) · 거첩(擧牒) · 제문 ( 祭文 ) · 소계장(疏啓狀) · 잡서(雜書) · 시 등 1만여 수에 달하였으며, 귀국 후 정선하여 ≪ 계원필경 桂苑筆耕 ≫ 20권을 이루게 되었다. 이 중 특히 〈 토황소격 討黃巢檄 〉 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다.

885년 귀국할 때까지 17년동안 당나라에 머물러 있는 동안 고운(顧雲) · 나은(羅隱) 등 당나라의 여러 문인들과 사귀어 그의 글재주는 더욱 빛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 당서 唐書 ≫ 예문지(藝文志)에도 그의 저서명이 수록되었다. 이규보 ( 李奎報 )는 ≪ 동국이상국집 ≫ 권22 잡문(雜文)의 〈 당서에 최치원전을 세우지 않은 데 대한 논의 唐書不立崔致遠傳議 〉 에서 ≪ 당서 ≫ 열전 ( 列傳 )에 최치원의 전기가 들어 있지 않은 것은 중국인들이 그의 글재주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29세로 신라에 돌아오자, 헌강왕에 의해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郎知瑞書監事)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문명을 떨쳐 귀국한 다음해에 왕명으로 〈 대숭복사비문 大崇福寺碑文 〉 등의 명문을 남겼고, 당나라에서 지은 저작들을 정리해 국왕에게 진헌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신라사회는 이미 붕괴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지방에서 호족세력이 대두하면서 중앙정부는 주(州) · 군(郡)의 공부 ( 貢賦 )도 제대로 거두지 못해 국가의 창고가 비고, 재정이 궁핍한 실정이었다. 889년(진성여왕 3)에는 마침내 주 · 군의 공부를 독촉하자 농민들이 사방에서 봉기해 전국적인 내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최치원은 895년 전국적인 내란의 와중에서 사찰을 지키다가 전몰한 승병들을 위해 만든 해인사 ( 海印寺 ) 경내의 한 공양탑(供養塔)의 기문(記文)에서 당시의 처참한 상황에 대해, “ 당토(唐土)에서 벌어진 병(兵) · 흉(凶) 두 가지 재앙이 서쪽 당에서는 멈추었고, 동쪽 신라로 옮겨와 그 험악한 중에도 더욱 험악해 굶어서 죽고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흐트러져 있었다. ” 고 적었다.

당나라에서 직접 황소의 반란을 체험한 바 있는 그에게는 고국에서 벌어지고 있던 전쟁과 재앙이 당나라의 그것이 파급, 연장된 것으로 느껴졌던 모양으로, 당대 제일의 국제통(國際通)다운 시대감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귀국한 뒤, 처음에는 상당한 의욕을 가지고 당나라에서 배운 경륜을 펴보려 하였다. 그러나 진골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체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함을 깨닫고 외직(外職)을 원해 890년에 대산군(大山郡 : 지금의 전라북도 태인) · 천령군(天嶺郡 :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 · 부성군(富城郡 : 지금의 충청남도 서산) 등지의 태수 ( 太守 )를 역임하였다.

부성군 태수로 있던 893년 하정사 ( 賀正使 )에 임명되었으나 도둑들의 횡행으로 가지 못하고, 그 뒤에 다시 사신으로 당나라에 간 일이 있다.

894년에는 시무책 ( 時務策 )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서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10여 년동안 중앙의 관직과 지방관직을 역임하면서, 중앙 진골귀족의 부패와 지방세력의 반란 등의 사회모순을 직접적으로 목격한 결과, 그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시무책은 진성여왕에게 받아들여져서 6두품의 신분으로서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 ( 阿飡 )에 올랐으나 그의 정치적인 개혁안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의 사회모순을 외면하고 있던 진골귀족들에게 그 개혁안이 받아들여질 리는 만무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실정을 거듭하던 진성여왕이 즉위한지 11년만에 정치문란의 책임을 지고 효공왕에게 선양(禪讓)하기에 이르렀다.

최치원은 퇴위하고자 하는 진성여왕과 그 뒤를 이어 새로이 즉위한 효공왕을 위해 대리 작성한 각각의 상표문(上表文)에서 신라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을 박진감 나게 묘사하였다.

이에 이르자 최치원은 신라왕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을 느낀 나머지 40여 세 장년의 나이로 관직을 버리고 소요자방(逍遙自放)하다가 마침내 은거를 결심하였다. 당시의 사회적 현실과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의 사이에서 빚어지는 심각한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은퇴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즐겨 찾은 곳은 경주의 남산 ( 南山 ), 강주(剛州 : 지금의 경상북도 義城)의 빙산(氷山), 합천(陜川)의 청량사 ( 淸凉寺 ), 지리산의 쌍계사 ( 雙磎寺 ), 합포현(合浦縣 : 지금의 昌原)의 별서(別墅) 등이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동래 ( 東萊 )의 해운대 ( 海雲臺 )를 비롯해 그의 발자취가 머물렀다고 전하는 곳이 여러 곳 있다.

만년에는 모형(母兄)인 승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머물렀다. 해인사에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길이 없으나, 그가 지은 〈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 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 〉 에 의하면 908년(효공왕 12) 말까지 생존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 뒤의 행적은 전혀 알 수 없으나, 물외인(物外人)으로 산수간에서 방랑하다가 죽었다고도 하며 또는 신선이 되었다는 속설도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자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새로운 주장도 있다.

향 〕 }} ≪ 삼국사기 ≫ 최치원전에 의하면, 고려 왕건 ( 王建 )에게 보낸 서한 중에는 “ 계림은 시들어가는 누런 잎이고, 개경의 곡령은 푸른 솔(鷄林黃葉 鵠嶺靑松) ” 이라는 구절이 들어 있어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새로 일어날 것을 미리 내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최치원이 실제 왕건에게 서신을 보낸 사실이 있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러나 그가 송악(松岳)지방에서 새로 대두하고 있던 왕건세력에 주목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은거하고 있던 해인사에는 희랑 ( 希朗 )과 관혜(觀惠) 등 두 사람의 화엄종장(華嚴宗匠)이 있어서 서로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며 대립하고 있었다. 즉, 희랑은 왕건을 지지한 반면, 관혜는 견훤 ( 甄萱 )의 지지를 표방하고 있었다.

그 때에 최치원이 희랑과 교분을 가지고 그를 위해 시 6수를 지어준 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이로 보아 최치원은 희랑을 통해서도 왕건의 소식을 듣고 있었고, 나아가 고려의 흥기에 기대를 걸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는 역사의 중심무대가 경주에서 송악지방으로 옮겨지고 또 그 주인공도 경주의 진골귀족이 몰락하는 대신에 지방의 호족세력이 새로 대두하고 있던 역사적 현실을 직접 눈으로 내다보면서 살다간 사람이었다.

비록 그 어느 편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해서 사회적인 전환과정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이미 잔존세력에 불과하던 신라인으로 남아서 은거생활로 일생을 마치고 말았으나, 역사적 현실에 대한 고민은 그의 후계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문인(門人)들이 대거 고려정권에 참가해 새로운 성격의 지배층을 형성함으로써 신흥고려의 새로운 정치질서 · 사회질서의 수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최치원이 살던 시대는 사회적 전환기일 뿐만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정신계의 변화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정신계의 변화면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학문의 기본적 입장은 자신을 ‘ 부유(腐儒) ’ · ‘ 유문말학(儒門末學) ’ 등으로 표현했던 것으로 보아, 유학(儒學)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유학을 단순히 불교의 부수적인 것으로 이해하거나, 왕자(王者)의 권위수식에만 이용하던 단계를 지나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내세우면서, 골품제도라는 신라사회의 족적 편제방법(族的編制方法)을 부정하는 방향으로까지 발전시켰다. 유교에 있어서의 선구적 업적은 뒷날 최승로 ( 崔承老 )로 이어져 고려국가의 정치이념으로 확립을 보기에 이르렀다.

그는 유교사관(儒敎史觀)에 입각해서 역사를 정리하였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연표형식으로 정리한 ≪ 제왕연대력 帝王年代曆 ≫ 이다. ≪ 제왕연대력 ≫ 에서는 거서간 ( 居西干 ) · 차차웅 ( 次次雄 ) · 이사금 ( 尼師今 ) · 마립간 ( 麻立干 ) 등 신라왕의 고유한 명칭은 모두 야비해 족히 칭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하면서 왕(王)으로 바꿨다.

그것은 유교사관에 입각해서 신라문화를 이해하려는 역사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최치원의 유교사관은 유교에 대한 이해가 보다 깊어지는 김부식 ( 金富軾 )의 그것에 비해서 냉정한 면이 결여된 만큼 모방적인 성격이 강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었다.

≪ 제왕연대력 ≫ 은 오늘날 남아 있지 않아 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가야를 포함해 삼국, 통일신라, 중국의 연표가 들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 사불허북국거상표 謝不許北國居上表 〉 나 〈 상태사시중장 上太師侍中狀 〉 등에서 나타난 발해인에 대한 강한 적개심으로 보아 발해사(渤海史)는 제외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 상태사시중장 〉 에서는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로 발전한 것으로 인식하고, 발해는 고구려의 후예들이 건국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로 보아 그가 인식한 한국고대사체계는 삼한-삼국-통일신라와 발해로 이어져오는 것이었다. 나아가 그 자신의 시대에 와서 통일신라 자체도 이미 붕괴되고 있었던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유교에 있어서의 선구적인 역할과 아울러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한문학사(漢文學史)에 있어서의 업적이다. 그의 한문학은 중국문학의 차용(借用)을 통해서 형성되었다.

신라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성립된 향가문학(鄕歌文學)과 대립되는 새로운 문학장르를 개척하였다. 문장은 문사를 아름답게 다듬고 형식미가 정제된 변려문체(騈儷文體)였다. ≪ 동문선 ≫ 과 ≪ 계원필경 ≫ 에 상당수의 시문이 수록되어 전하고 있으며, 평이근아(平易近雅)하여 당시 만당시풍(晩唐詩風)과 구별되었다.

최치원은 그 자신 유학자로 자처하면서도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승려들과 교유하고, 불교관계의 글들을 많이 남기고 있었다. 불교 중에서도 특히 종래의 학문불교 · 체제불교인 화엄종의 한계와 모순에 대해서 비판하는 성격을 가진 선종 ( 禪宗 )의 대두를 주목하고 있었다.

지증(智證) · 낭혜(朗慧) · 진감(眞鑑) 등 선승들의 탑비문(塔碑文)을 찬술하였다. 그 중 특히, 〈 지증대사비문 智證大師碑文 〉 에서는 신라선종사(新羅禪宗史)를 간명하게 기술한 것으로 유명하다. 여기서 신라의 불교사를 세 시기로 구분해 이해한 것은 말대사관(末代史觀)에 입각한 것으로서 주목된다.

그러나 불교 중에서 주목한 것은 선종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은 종래의 지배적 불교인 화엄종이었다.

화엄종관계의 글을 많이 남기고 있어서 오늘날 확인되는 것만도 20여 종에 이르고 있다. 특히, 화엄종 사찰인 해인사에 은거한 뒤부터는 해인사관계의 글을 많이 남겼다.

화엄종관계의 글 중에는 ≪ 법장화상전 法藏和尙傳 ≫ · ≪ 부석존자전 浮石尊者傳 ≫ · ≪ 석순응전 釋順應傳 ≫ · ≪ 석이정전 釋利貞傳 ≫ 등이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이로 보아 신라화엄종사(新羅華嚴宗史)의 주류를 의상 ( 義湘 )-신림(神琳)-순응(順應)-이정(利貞)-희랑으로 이어지는 계통으로 이해하지 않았는가 한다.

그리고 화엄학 외에도 유식학자(唯識學者)인 원측 ( 圓測 )과 태현 ( 太賢 )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어, 화엄학과 함께 신라불교의 양대 조류를 이루었던 유식학(唯識學)도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주목된다.

유교와 불교 외에 기타 사상으로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도교(道敎)와 노장사상(老莊思想) ·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이다. 당나라에 있을 때 도교의 신자였던 고변의 종사관으로 있으면서 도교에 관한 글을 남기고 있었던 것을 보아,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 계원필경 ≫ 권15에 수록된 〈 재사 齋詞 〉 에서 그의 도교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귀국한 뒤 정치개혁을 주장하다가 진골귀족의 배척을 받아 관직을 떠난 뒤에는 현실적인 불운을 노장적(老莊的)인 분위기 속에서 자족하려고 하는 면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현실도피적인 행동이 뒷날 도교의 인물로까지 잘못 전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가 찬술한 〈 대숭복사비문 〉 에 의하면, 예언적인 도참신앙(圖讖信仰)과 결부되어 국토재계획안적인 성격을 가지고 사회적 전환의 추진력이 되고 있었던 풍수지리설에도 상당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사회에 대한 인식이나 역사적인 위치가 선승(禪僧)이자 풍수지리설의 대가였던 도선 ( 道詵 )과 비슷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처럼 유학자라고 자처하면서 유교 외에 불교나 노장사상, 심지어는 풍수지리설까지도 아무 모순 없이 복합해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유교와 불교의 조화에 노력한 면이 〈 난랑비서문 鸞郎碑序文 〉 을 비롯한 그의 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상적인 복합화가 중앙의 진골귀족들의 독점적인 지배체제와 그들의 고대적인 사유방식에 반발하던 6두품출신의 최치원에 의해 추진되었다는 사실은 신라고대문화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새로운 사상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그러나 말년에 와서의 소극적이며 은둔적인 생활은 시대적인 제약성을 스스로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적인 전환기에서 중세적 지성의 선구자로 머물다간 아쉬움을 남겼다.

1020년(현종 11) 현종에 의해 내사령 ( 內史令 )에 추증, 다음해에 문창후(文昌候)에 추시(追諡)되어 문묘에 배향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인(泰仁)의 무성서원 ( 武城書院 ), 경주의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 ( 永平 )의 고운영당(孤雲影堂), 대구 해안현(解顔縣)의 계림사(桂林祠) 등에 제향되었다.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 계원필경 ≫ 20권, ≪ 금체시 ≫ 5수 1권, ≪ 오언칠언금체시 ≫ 100수 1권, ≪ 잡시부 ≫ 30수 1권, ≪ 중산복궤집 ≫ 1부 5권, ≪ 사륙집 四六集 ≫ 1권, 문집 30권 등이 있었다.

사서(史書)로는 ≪ 제왕연대력 ≫ 이 있었다. 불교에 관계되는 저술로는 ≪ 부석존자전 ≫ 1권, ≪ 법장화상전 ≫ 1권과 ≪ 석이정전 ≫ · ≪ 석순응전 ≫ · ≪ 사산비명 四山碑銘 ≫ 등이 있었다.

오늘날 전하는 것은 ≪ 계원필경 ≫ · ≪ 법장화상전 ≫ · ≪ 사상비명 ≫ 뿐이고, 그 외는 ≪ 동문선 ≫ 에 시문 약간, 사기(寺記) 등에 기(記) · 원문(願文) · 찬(讚) 등 그 편린만이 전한다.

글씨도 잘 썼다. 오늘날 남아 있는 것으로는 쌍계사의 〈 진감선사비문 〉 이 유명하다. 그리고 전해오는 많은 설화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조선시대 김집 ( 金集 )의 ≪ 신독재전집 愼獨齋全集 ≫ 에 실린 〈 최문헌전 崔文獻傳 〉 이 있다.

 

최승로(崔承老)

재능이 특출하여 태조(太祖:왕건)로부터 지극한 총애를 받았던 승로(承老:시조 고운의 손자, 원보 은함의 아들)는 나이 겨우 12살에 태조 앞에 나가 [논어(論語)]를 암송하였는데 60고개를 막 넘어선 태조는 이를 기특하게 여기어 승로에게 염분(鹽分)을 하사했으며 학자들이 드나드는 원봉성(元鳳省)의 학사로 보내어 학문하는 분위기 속에 젖어들게 하였다.

그후 승로의 나이 17세 때 고려 태조가 죽고 태조의 뒤를 이은 혜종(惠宗)을 비롯하여 정종(定宗), 광종(光宗), 경종(景宗)을 거쳐 6대 성종(成宗)에 이르기까지 다섯 임금을 모시면서 고려 창업 이후의 여러 가지 모순과 신라로부터 이어져온 적폐(積弊), 또는 문물제도의 미비에서 오는 여러 가지 혼란들에 대하여 세밀히 분석하여 군제(軍制)의 개편, 과다한 불교행사의 중지, 무역의 절제, 지방관제의 확정, 관복의 제정, 승려의 횡포 엄금, 공역(貢役)의 균등, 우상(偶像)의 철폐, 신분제도의 확립, 개국공신 후손의 등용 등 국가의 전반적인 정책을 간추린 [시무28조]를 상소하여 이를 시행케 함으로써 고려왕조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최청(崔淸)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제자로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급제했던 관가정(觀稼亭) 청(淸)이 평소 청렴결백하고 강직하여 직언을 서슴지 않아 많은 고난이 따르기도 했으나 나라를 위하는 충절 앞에는 그 누구도 고개를 숙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당시 권신 신돈(辛旽)의 전횡을 탄핵하기 위하여 상소(上疏)를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신주감무관(信州監務官)으로 벼슬이 좌천되기도 했으나, 1374년(공민왕23) 첨의중찬(僉議中贊)을 제수 받아 내직으로 다시 들어갔고 우왕(禑王) 때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어 명나라에 가서 황제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그는 권세와 부귀영화를 초개같이 버리고 양주풍양(楊洲豊壤)의 송산(松山)에 들어가 은거(隱居)했으며, 이태조(李太祖)가 좌찬성(左贊成)을 제수하고 수차례 불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끝까지 이를 거절하자 태조는 그의 절의를 높이 기려 송산(松山)을 어래산(御來山)으로 봉하고 그가 살던 모옥(茅屋)에는 관가정(觀稼亭)이란 제호(題號)를 내렸다.

은거생활 속에서도 목은 이색, 행촌 이암, 양호당 우현보, 야은 길재 등과 도의로 교우하며 [채미가(採薇歌)]로 울분을 달래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켜오다가 1414년(태종14) 9월 28일 향년 71세로 임종을 맞이하여 자손들에게 [내 비석에는 반드시고려의 관직을 쓰라]고 유언했는데 개갈(改喝)시에 잘못하여 조선 소함(召啣)인 좌찬성이라고 비에 새겼더니 갑자기 천둥이 일고 벼락이 떨어져 비석이 산산조각이 났다고 한다.

 

최탁(崔倬)

문하시중(門下侍中) 제안(齊顔)의 증손이며 고려 말의 문신(文臣)으로 성품이 강직했던 계림군 탁(倬)은 벼슬이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충렬공(忠烈公) 광위(光位:제안의 현손)는 고려 명종(明宗) 때 왜적을 토평하는데 공을 세워 초명(初名)인 광훈(光勳)에서 광위(光位)로 사명(賜名)받았고, 벽상삼한 삼중대광으로 내사령에 이르러 계림부원군에 봉해졌다.

 

최호(崔灝)

정랑공(正郞公) 호(灝)는 고려 정종 때 동경부유수(東京副留守)로 왕명을 받아 [전후한서(前後漢書)]와 [예기정의(禮記正義)],[모시정의(毛詩正義)] 등의 명저를 저술하여 문명(文名)을 떨쳤다.

 

최예(崔汭)

사성공(司成公) 예(汭)는 이조정랑(吏曹正郞)과 성균관의 사성(司成)을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최제(崔堤)

충간(忠諫)으로 유명했던 문밀공(文密公) 제(堤:밀직공 선지의 5세손,문숙공 선의 아우)는 충선왕(忠宣王) 때 합문지후(閤門祗侯)를 지내고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최해(崔瀣)

1287(충렬왕 13) ∼ 1340(충혜왕 복위 1). 고려 후기의 문인. 본관은 경주 ( 慶州 ). 자는 언명보(彦明父) 또는 수옹(壽翁). 호는 졸옹(拙翁) 또는 예산농은(猊山農隱). 최치원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민부의랑(民部議郎) 백륜(伯倫)이며, 어머니는 대호군 ( 大護軍 ) 임모(任某)의 딸이다.

최해는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를 거쳐서 예문춘추검열(藝文春秋檢閱)이 되었다.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예문춘추주부로 기용되었다. 장흥고사(長興庫使)에 임명된 뒤에 1320년(충숙왕 7) 안축(安軸) · 이연경(李衍京) 등과 함께 원나라의 과거에 응시하였다. 최해만 급제하였다. 1321년 요양로개주판관(遼陽路蓋州判官)이 되었다. 5개월만에 병을 핑계하고 귀국하였다. 예문응교(藝文應敎) · 검교 ( 檢校 ) ·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말년에는 사자갑사(獅子岬寺)의 밭을 빌려서 농사를 지으며 저술에 힘썼다.

최해는 평생을 시주(詩酒)로 벗을 삼았다. 이제현 ( 李齊賢 ) · 민사평 ( 閔思平 )과 가까이 사귀었다. 성품이 강직하여 세속에 아부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남의 선악을 밝혔다. 그래서 윗사람의 신망을 사지 못하여 출세에 파란이 많았다. 그는 독서나 창작에 있어서 스스로 깨달음을 중하게 생각하였다. 그가 사제관계를 맺은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이 것은 ≪ 고려사 ≫ 에서 기술하였듯이 그의 성격이 대단히 곧고 깨끗하였음을 보여준다.

최해가 노년에 지은 ≪ 예산은자전 猊山隱者傳 ≫ 은 자서전이다. 책 속에서 “ 구차하게 편함을 추구하지 않고 떳떳이 우졸(愚拙)로 살아가겠노라. ” 라고 한 것은 ‘ 졸옹 ’ 이라고 자호(自號)한 동기와 같다. 말년에는 저술에 힘써 고려 명현의 명시문을 뽑아 ≪ 동인지문 東人之文 ≫ 25권을 편찬하였다. 그가 남긴 문집은 ≪ 졸고천백 拙藁千百 ≫ 2책이다. 일본에 있다. 1930년에 영인되었다.

 

최현우(崔玄祐)

문창후의 9세손으로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를 역임했던 화숙공(和淑公) 현우(玄祐)는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치적으로 명망이 두터웠고,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러 가문을 더욱 빛냈다.

 

최형손(崔亨孫)

화숙공 현우의 5세손 형손(亨孫)은 장흥부사(長興府使)를 지내고 적개공신(摘慨功臣)에 올라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최한홍(崔漢洪)

형손의 아들 한홍(漢洪)은 병마절도사를 지낸 후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올랐다.

 

최호(崔湖)

1536(중종 31)∼1597(선조 30).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경주 ( 慶州 ). 자는 수부(秀夫). 아버지는 벽동군수(碧潼郡守) 한정(漢禎)이며, 어머니는 광주김씨(光州金氏)로 군수 계옥(繼玉)의 딸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1576년(선조 9) 무과중시에 장원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1594년에 함경도병마절도사가 되었는데 야인들의 감파보(甘坡堡) 침입을 막지 못한 데 대한 견책을 받았다.

1596년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이몽학 ( 李夢鶴 )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는 홍가신 ( 洪可臣 )과 함께 주장(主將)이 되어 홍산 ( 鴻山 )· 임천 ( 林川 ) 등지에서 난적을 소탕하여 공을 세웠다.

이듬해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칠천량해전에서 원균 ( 元均 )과 함께 패사하였다. 1604년 이몽학의 난 평정에 세운 공로로 청난공신 ( 淸難功臣 ) 2등에 추록되고, 1615년(광해군 7) 찬집청 ( 撰集廳 )의 주청으로 임난공신록에도 추록되었다. 시호는 충원 ( 忠元 )이다.

 

최숙생(崔淑生)

1457(세조 3)∼1520(중종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 慶州 ). 자는 자진(子眞). 호는 충재(忠齋). 유량(有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저(渚)이고, 아버지는 철중(鐵重)이며, 어머니는 이계손(李繼孫)의 딸이다.

1492년(성종 23) 진사로서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1496년(연산군 2)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일으키기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하고 수찬·지평·헌납 등을 지냈다.

1504년 응교로 있을 때 연산군이 생모에 대하여 상복을 다시 입으려 하자, 이행 ( 李荇 )과 함께 이를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그 소의 글귀가 문제되어 신계(新溪)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그해 9월에 응교로 다시 임명되었으며, 1508년(중종 3) 문신정시(文臣庭試)에서 장원하였다.

그 뒤 대사간·대사헌을 지내고, 1518년 우찬성에 올랐다. 이듬해 사은사 ( 謝恩使 )를 거절하자 파직되었고, 곧 판중추부사로 복직되었으나 이 해 기묘사화로 다시 파직되었다. 저서로는 ≪충재집≫이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최진립(崔震立)

1568(선조 1)∼1636(인조 14).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경주 ( 慶州 ). 자는 사건(士建), 호는 잠와(潛窩).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득정(得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순릉참봉 삼빙(三聘)이고, 아버지는 신보(臣輔)이며, 어머니는 평해황씨(平海黃氏)로 참봉 사종(士鐘)의 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동생 계종(繼宗)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594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부장을 제수받았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결사대 수백명을 인솔하고 서생포(西生浦)의 적을 격멸한 데 이어 양호(楊鎬)· 권율 ( 權慄 )과 함께 도산(島山)에서 대승하였다.

1600년 여도만호 겸 선전관(呂島萬戶兼宣傳官)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1607년 도총도사에 제수되자 비로소 관직에 나갔다. 뒤에 울산에 유배되었으나 인조반정 후 사면되어 가덕첨사(加德僉使)를 제수받았다.

경흥부사·공조참판을 거쳐 1630년(인조 8) 경기수사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겸하였다. 1634년 전라수사를 거쳐서 1636년 공주영장으로 병자호란을 맞자 감사 정세규 ( 鄭世規 )를 따라 참전하여 용인 험천(險川)에 이르러 청군을 만나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다.

저서로는 ≪정무공기실 貞武公紀實≫ 2권이 있다. 1637년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1647년에 청백리 ( 淸白吏 )에 녹선되었다. 경주의 숭렬사(崇烈祠), 경원의 충렬사 ( 忠烈祠 )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최북(崔北)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화가. 초명은 식(埴). 자는 성기(聖器) · 유용(有用) · 칠칠(七七), 호는 월성 ( 月城 ) · 성재(星齋) · 기암(箕庵) · 거기재(居基齋) · 삼기재(三奇齋) 또는 호생관(毫生館). 그는 49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고만 전해져 있다. 그러나 그의 행적을 통해 볼 때 대략 1720년(숙종 46년)에 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1747년(영조 23년)에서 1748년 사이에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심한 술버릇과 기이한 행동으로 점철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이에 관해서 남공철 ( 南公轍 )의 ≪ 금릉집 金陵集 ≫ 과 조희룡 ( 趙熙龍 )의 ≪ 호산외사 壺山外史 ≫ 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금강산의 구룡연(九龍淵)을 구경하고 즐거움에 술을 잔뜩 마시고 취해 울다 웃다 하면서 “ 천하 명인 최북은 천하 명산에서 마땅히 죽어야 한다. ” 고 외치고는 투신하였던 일이라든가, 어떤 귀인이 그에게 그림을 요청하였다가 얻지 못하여 협박하려 하자 “ 남이 나를 손대기 전에 내가 나를 손대야겠다. ” 고 하며 눈 하나를 찔러 멀게 해 버린 이야기 등은 그의 괴팍한 성격을 단적으로 알려 주는 대표적인 일화라 하겠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광생(狂生)이라고까지 지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평양이나 동래 등지로 그림을 팔러 가면 많은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구하기 위하여 모여들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 서상기 西廂記 〉 와 〈 수호전 〉 을 즐겨 읽었으며, 김홍도 ( 金弘道 ) · 이인문 ( 李寅文 ) · 김득신 ( 金得臣 ) 등과 교유하였다. 그리고 ≪ 호산외사 ≫ 에 의하면 원말 사대가(元末四大家)의 한 사람인 황공망(黃公望)의 필법을 존중하였다고 전한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작품들에는 인물 · 화조 · 초충 등도 포함되어 있으나 대부분이 산수화이다. 그의 괴팍한 기질대로 대체로 치기(稚氣)가 있는 듯하면서 소박하고 시정(詩情) 어린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특히 그의 산수화들은 크게 진경산수화와 남종화 계통의 두 가지 경향으로 나누어진다. 진경산수화에서는 〈 표훈사도 表訓寺圖 〉 에 보이는 바와 같이 정선 ( 鄭敾 )의 화풍을 연상시키는 것도 있다.

진경산수에 대하여 최북은 “ 무릇 사람의 풍속도 중국 사람들의 풍속이 다르고 조선 사람들의 풍속이 다른 것처럼, 산수의 형세도 중국과 조선이 서로 다른데, 사람들은 모두 중국 산수의 형세를 그린 그림만을 좋아하고 숭상하면서 조선의 산수를 그린 그림은 그림이 아니라고까지 이야기하지만 조선 사람은 마땅히 조선의 산수를 그려야 한다. ” 고 그 중요성을 크게 강조한 바 있다.

국립광주박물관 소장의 〈 한강조어도 漢江釣魚圖 〉 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 추경산수도 秋景山水圖 〉 등을 대표작으로 하는 그의 남종화 계열의 작품에서는 심사정 ( 沈師正 ) 등의 영향이 부분적으로 엿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화풍을 계승, 변천시키면서 개인 소장의 〈 조어도 釣魚圖 〉 와 〈 풍설야귀도 風雪夜歸圖 〉 에 보이는 바와 같이 대담하고도 파격적인 자신의 조형 양식을 이룩하여 조선 후기 회화의 발전에 기여한 바 크다. 이밖에 대표작으로 개인 소장의 〈 공산무인도 空山無人圖 〉 와 간송미술관 소장의 〈 누각산수도 樓閣山水圖 〉 등이 있다.

 

최흥원(崔興源)

정조(正祖) 때 효행과 학문이 뛰어나 [칠계선생(漆溪先生)]으로 일컬어졌다.

 

최제우(崔濟愚)

1824(순조 24) ∼ 1864(고종 1). 동학 ( 東學 )의 교조(敎祖).

〔생 애〕 본관은 경주 ( 慶州 ). 초명은 복술(福述) · 제선(濟宣). 자는 성묵(性默), 호는 수운(水雲) · 수운재(水雲齋). 경주 출신. 아버지는 옥( 汶 )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7대조인 최진립 ( 崔震立 )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혁혁한 공을 세워 병조판서의 벼슬과 정무공(貞武公)의 시호가 내려진 무관이었으나, 6대조부터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몰락양반 출신이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일찍부터 경사(經史)를 익혔으나 기울어져가는 가세(家勢)와 함께 조선 말기의 체제내부적 붕괴양상 및 국제적인 불안정이 그의 유년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3세의 나이로 울산 출신의 박씨(朴氏)와 혼인하였고, 4년 뒤 아버지를 여의었다. 3년상을 마친 뒤에는 집안살림이 더욱 어려워져 여기저기로 떠돌아다니며 갖가지 장사와 의술(醫術) · 복술(卜術) 등의 잡술(雜術)에 관심을 보였으며,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세상인심의 각박함과 어지러움이 바로 천명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나타난 것을 깨닫고 천명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다. 1856년 여름 천성산(千聖山)에 들어가 하느님께 정성을 드리면서 시작된 그의 구도(求道) 노력은 그 이듬해 적멸굴(寂滅窟)에서의 49일 정성, 그리고 울산 집에서의 계속된 공덕닦기로 이어졌고, 1859년 10월 처자를 거느리고 경주로 돌아온 뒤 구미산 용담정(龍潭亭)에서 계속 수련하였다.

이 무렵 가세는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까지 기울어져 있었고, 국내 상황은 삼정의 문란 및 천재지변으로 크게 혼란된 분위기였으며, 국제적으로도 애로호사건(Arrow號事件)을 계기로 중국이 영불연합군에 패배하여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맺는 등 민심이 불안정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주(혹은 悧 堪 님)의 뜻을 알아내는 데 유일한 희망을 걸고 이름을 제우(濟愚)라고 고치면서 구도의 결심을 나타냈다.

그러다가 1860년 4월 5일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하게 되었다. 하느님에게 정성을 드리고 있던 중 갑자기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하여지면서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공중에서 들려왔다. 이러한 체험을 통하여 그의 종교적 신념은 결정적으로 확립되기 시작하여 1년 동안 그 가르침에 마땅한 이치를 체득, 도를 닦는 순서와 방법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1861년 포교를 시작하였고, 곧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동학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었다. 동학이 세력을 얻게 되자 기존 유림층에서는 비난의 소리가 높아져 서학, 즉 천주교를 신봉한다는 지목을 받게 되었다. 또한 톈진조약 후 영불연합군이 물러가서 조선침공의 위험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민심이 가라앉게 되자, 조정에서는 서학을 다시 탄압하게 되었으므로 1861년 11월 호남으로 피신을 가게 되었다.

1862년 3월 경주로 되돌아갈 때까지의 남원의 은적암(隱寂庵) 피신생활 중 동학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였고, 〈 논학문 論學文 〉 · 〈 안심가 安心歌 〉 · 〈 교훈가 〉 · 〈 도수사 道修詞 〉 등을 지었다. 경주에 돌아와 포교에 전념하여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는데, 1862년 9월 사술(邪術)로 백성들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경주진영(慶州鎭營)에 체포되었으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석방을 청원하여 무죄방면되었다.

이 사건은 사람들에게 동학의 정당성을 관이 입증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신도가 더욱 증가하였으며, 포교방법의 신중성을 가져와 마음을 닦는 데 힘쓰지 않고 오직 이적만 추구하는 것을 신도들에게 경계하도록 하였다. 신도가 늘게 되자 그 해 12월 각지에 접(接)을 두고 접주(接主)가 관내의 신도를 다스리는 접주제를 만들어 경상도 · 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에까지 교세가 확대되어 1863년에는 교인 3,000여 명, 접소 13개 소를 확보하였다.

이 해 7월 제자 최시형 ( 崔時亨 )을 북접주인으로 정하고 해월(海月)이라는 도호를 내린 뒤 8월 14일 도통을 전수하여 제2대 교주로 삼았다. 관헌의 지목을 받고 있음을 알고 미리 후계자를 정한 것이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미 동학의 교세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의 체포계책을 세우고 있었는데, 11월 20일 선전관 ( 宣傳官 ) 정운구(鄭雲龜)에 의하여 제자 20여 명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1864년 1월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심문받다가 3월 10일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41세의 나이로 참형에 처해졌다.

〔가르침〕 그가 본격적으로 종교활동을 할 수 있었던 기간은 득도한 이듬해인 1861년 6월부터 1863년 12월까지 약 1년 반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다. 게다가 대부분 피신하며 지낸 시간이어서 안정되게 저술에 몰두할 수는 없었으나 틈틈이 자신의 사상을 한문체 · 가사체 등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처형당하게 되자 남아 있던 신도들은 그의 글들을 모아서 기본되는 가르침으로 삼게 되었는데, 한문체로 된 것을 엮어놓은 것이 ≪ 동경대전 東經大全 ≫ 이고, 가사체로 된 것을 모아 놓은 것이 ≪ 용담유사 龍潭遺詞 ≫ 이다. ≪ 동경대전 ≫ · ≪ 용담유사 ≫ 에는 두 가지 신앙대상에 대한 명칭이 나타나는데 천주(天主)와 悧 堪 님이 그것이다.

천주 또는 悧 堪 님에 대하여 명확하게 규정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입장을 알아보려면 간접적으로 파악하는 수밖에 없는데, ‘ 시천주 ( 侍天主 ) ’ 에 대한 두 가지의 해석이 하나의 단서를 제공한다. 하나는 하느님은 초월자이나 부모님같이 섬길 수 있는 인격적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며, 다른 하나는 사람은 누구나 나면서부터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그의 하느님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함과 동시에 인간 밖에 존재하는 초월자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그의 신관은 매우 독특한 것으로 그의 종교체험이 무속적인 원천에 뿌리박고 있다는 주장과 접맥될 수 있다고 보여진다.

 

최시형(崔時亨)

1827(순조 27)∼1898. 동학의 제2대 교주. 본관은 경주 ( 慶州 ). 초명은 경상(慶翔). 자는 경오(敬悟), 호는 해월(海月). 경주 출신. 5세 때 어머니를, 12세 때 아버지를 여의게 되어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고, 17세부터 제지소(製紙所)에서 일하며 생계를 도모하였다. 19세 때 밀양손씨(密陽孫氏)를 맞아 결혼한 뒤 28세 때 경주 승광면 마복동(馬伏洞)으로 옮겨 농사를 지었다.

이곳에서 마을 대표인 집강(執綱)에 뽑혀 6년 동안 성실하게 소임을 수행하다가 33세 때 자신의 농토로 농사를 짓기 위하여 검곡(劍谷)으로 이주하였다. 최제우 ( 崔濟愚 )가 동학을 포교하기 시작한 1861년(철종 12) 6월 동학을 믿기 시작하여, 한 달에 3, 4차례씩 최제우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집에 돌아와 배운 것을 실천하고, 명상과 극기로 도를 닦았다.

1861년 11월 최제우가 호남 쪽으로 피신한 뒤 스승의 가르침을 깨닫고 몸에 익히기 위해 보인 정성과 노력은 많은 일화로 남아 있다. 1863년 동학을 포교하라는 명을 받고 영덕·영해 등 경상도 각지를 순회하여 많은 신도를 얻게 되었고, 이 해 7월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되어 8월 14일 도통을 승계받았다.

이 해 12월 최제우가 체포되자 대구에 잠입, 옥바라지를 하다가 체포의 손길이 뻗치자 태백산으로 도피하였고, 이어 평해와 울진 죽변리에 은거하면서 처자와 최제우의 유족을 보살피다가 동학의 재건을 결심하고, 교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영양(英陽)의 용화동(龍化洞)으로 거처를 정하였다.

이곳에서 1년에 4회씩 정기적으로 49일 기도를 하고 스승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계를 조직하여 신도들을 결집시켰고, 경전을 다시 필사하고 편집하여 신도들에게 읽게 하였다. 이처럼 교세의 재건이 이루어지다가 1871년(고종 8) 진주민란의 주모자인 이필제 ( 李弼濟 )가 최제우의 기일(忌日)인 3월 10일에 영해부(寧海府)에서 민란을 일으킴으로써 다시 탄압을 받게 되었다.

관헌의 추격을 피해 소백산으로 피신하면서 영월·인제·단양 등지에서 다시 기반을 구축하여 1878년 개접제(開接制), 1884년 육임제(六任制)를 마련하여 신도들을 합리적으로 조직하고 교리연구를 위한 집회를 만들었다. 1880년 5월 인제군에 경전간행소를 세워 ≪동경대전 東經大全≫을 간행하였고, 1881년 단양에도 경전간행소를 마련하여 ≪용담유사 龍潭遺詞≫를 간행하였다.

이와 같이 신도의 교화 및 조직을 위한 기틀이 마련되어 교세가 비약적으로 증가하게 됨에 따라 1885년 충청도 보은군 장내리로 본거지를 옮겼다. 동학교도들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그에 따른 관헌의 신도수색과 탄압이 가중되었는데, 동학의 교세도 만만치 않게 성장하여 1892년부터는 교조의 신원(伸寃)을 명분으로 한 합법적 투쟁을 전개하여 나갔다.

제1차 신원운동은 1892년 11월 전국에 신도들을 전주 삼례역(參禮驛)에 집결시키고, 교조의 신원과 신도들에 대한 탄압중지를 충청도·전라도관찰사에게 청원했으나 여전히 탄압이 계속되자 1893년 2월 서울 광화문에서 40여 명의 대표가 임금에게 직접 상소를 올리는 제2차 신원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측의 회유로 일단 해산하였으나 태도가 바뀌어 오히려 탄압이 가중되자 제3차 신원운동을 계획, 3월 10일 보은의 장내리에 수만 명의 신도를 집결시켜 대규모 시위를 감행하였다.

이에 놀란 조정에서 선무사 어윤중 ( 魚允中 )을 파견, 탐관오리를 파면하자 자진 해산하였다. 당시 많은 신도들은 무력적인 혁신을 위하여 봉기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시기상조임을 이유로 교세확장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1894년 1월 10일 전봉준 ( 全琫準 )이 고부군청을 습격한 것을 시발로 하여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신도들의 뜻에 따라 4월 충청도 청산 ( 靑山 )에 신도들을 집결시켰고, 9월 전봉준이 다시 봉기하자 적극 호응하여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일본군의 개입으로 1894년 12월 말 동학운동이 진압되자 피신생활을 하면서 포교에 진력을 다하였고, 향아설위 ( 向我設位 )· 삼경설 ( 三敬說 )·이심치심설(以心治心說)·이천식천설(以天食天說)·양천주설(養天主說) 등의 독특한 신앙관을 피력하였다. 1897년 손병희 ( 孫秉熙 )에게 도통을 전수하였고, 1898년 3월 원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6월 2일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의 신관은 범신론적·내재적 경향을 띠어 하느님을 인간과 동일시하며, 나아가 만물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인간이 음식을 먹는 것’은 ‘하느님이 하느님을 먹는 것(以天食天)’으로 파악된다. 이런 신관에 의해 자연스럽게 삼경사상(三敬思想)이 도출되는데, 이는 경천(敬天)·경인(敬人)·경물(敬物)의 사상이다.

또한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하느님을 잘 길러나가는 것〔養天主〕이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라는 입장도 같은 맥락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최익현(崔益鉉)

1833(순조 33) ∼ 1906. 조선 말기의 애국지사. 본관은 경주 ( 慶州 ).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菴). 경기도 포천 출신. 대(岱)의 아들이다. 6세 때 입학해 9세 때 김기현(金琦鉉) 문하에서 유학의 기초를 공부하였다.

14세 때 경기도 양근 ( 楊根 ) 벽계(蘗溪)에 은퇴한 성리학의 거두 이항로 ( 李恒老 )의 문하에서 ≪ 격몽요결 擊蒙要訣 ≫ · ≪ 대학장구 大學章句 ≫ · ≪ 논어집주 論語集註 ≫ 등을 통해 성리학의 기본을 습득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항로의 ‘ 애군여부 우국여가(愛君如父 憂國如家) ’ 의 정신, 즉 애국과 호국의 정신을 배웠다.

1855년(철종 6) 명경과에 급제해 승문원부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던 이후 순강원수봉관(順康園守奉官) · 사헌부지평 · 사간원정언 · 신창현감 (新昌縣監) · 성균관직강 · 사헌부장령 · 돈녕부도정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1870년(고종 7)에 승정원동부승지를 지냈다.

수봉관 · 지방관 · 언관으로 재직시 불의와 부정을 척결해 강직성을 발휘하였다. 특히 1868년에 올린 상소에서 경복궁 재건을 위한 대원군의 비정을 비판, 시정을 건의하였다. 이 상소는 그의 강직성과 우국애민정신의 발로이며 막혔던 언로를 연 계기가 되었다.

1873년에 올린 〈 계유상소 癸酉上疏 〉 는 1871년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대원군이 그 위세를 몰아 만동묘 ( 萬東廟 )를 비롯한 서원의 철폐를 대거 단행하자 그 시정을 건의한 상소다. 이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의 10년 집권이 무너지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이후 고종의 신임을 받아 호조참판에 제수되어 누적된 시폐를 바로잡으려 했으나, 권신들이 반발해 도리어 대원군 하야를 부자이간의 행위로 규탄하였다. 이에 〈 사호조참판겸진소회소 辭戶曹參判兼陳所懷疏 〉 를 올려 민씨 일족의 옹폐를 비난했으나 상소의 내용이 과격, 방자하다는 이유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873년부터 3년간의 유배생활을 계기로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우국애민의 위정척사의 길을 택하였다. 첫 시도로서 1876년 〈 병자지부복궐소 丙子持斧伏闕疏 〉 를 올려 일본과 맺은 병자수호조약을 결사 반대하였다. 이 상소로 흑산도로 유배되었으나 그 신념과 신조는 꺾이지 않았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날 때까지 약 20년 동안 침묵을 지켰다. 이 시기는 일본과의 개국 이래 임오군란 · 갑신정변 · 동학운동 · 청일전쟁 등 연이어 일어나 국내외 정세가 복잡했던 때이다. 특히 1881년에 신사척사운동이 일어나면서 위정척사사상이 고조되고 있을 때 그가 침묵을 지켰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이라는 역사적 위기상황 속에서 그의 위정척사사상은 항일투쟁의 지도이념으로 성숙하였다. 이것은 그의 위정척사사상이 고루하거나 보수적이지 않은 것은 보여준다. 또, 항일정치투쟁방법도 이제까지의 상소라는 언론 수단에 의한 개인적 · 평화적인 방법이 아닌 집단적 · 무력적인 방법으로 바뀌었다.

동시에 위정척사사상도 배외적인 국수주의로부터 민족의 자주의식을 바탕으로 한 자각된 민족주의로 심화되었다. 이러한 그의 항일구국이념은 1895년 을미사변의 발발과 단발령의 단행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오랫만의 침묵을 깨고 〈 청토역복의제소 請討逆復衣制疏 〉 를 올려 항일척사운동에 앞장섰다.

이 때 여러 해에 걸쳐 고종으로부터 호조판서 · 각부군선유대원(各府郡宣諭大員) · 경기도관찰사 등 요직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오로지 시폐의 시정과 일본을 배격할 것을 상소하였다.

당시 올린 상소는 1896년에 〈 선유대원명하후진회대죄소 宣諭大員命下後陳懷待罪疏 〉 , 1898년 〈 사의정부찬정소 辭議政府贊政疏 〉 와 재소, 〈 사궁내부특진관소 辭宮內府特進官疏 〉 와 재소, 1904년 〈 사궁내부특진관소 〉 의 삼소 · 사소, 〈 수옥헌주차 漱玉軒奏箚 〉 , 〈 궐외대명소 闕外待命疏 〉 와 재소 · 삼소 · 사소 등이 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 청토오적소 請討五賊疏 〉 와 재소를 올려서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박제순 ( 朴齊純 ) 등 오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위정척사운동은 집단적 · 무력적인 항일의병운동으로 전환하였다.

1906년 윤4월 전라북도 태안에서 궐기하였다. 〈 창의토적소 倡義討賊疏 〉 를 올려 의거의 심정을 피력하고 궐기를 촉구하는 〈 포고팔도사민 > 을 돌리고 일본 정부에 대한 문죄서 〈 기일본정부 寄日本政府 〉 를 발표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켜 최후의 진충보국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적지 대마도 옥사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우국애민의 정신과 위정척사사상은 한말의 항일의병운동과 일제강점기의 민족운동 · 독립운동의 지도이념으로 계승되었다. 위정척사운동에 비해 그이 학문은 큰 업적을 남기지는 못하였다.

그는 성리학에 기본을 둔 이항로의 학문을 이어받았으나 이기론 ( 理氣論 )과 같은 형이상학보다는 애국의 실천 도덕과 전통질서를 수호하는 명분론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이기론은 이항로의 심전설(心專說)을 계승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과 이념은 역사적 현실에 바탕을 둔 실천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구국애국 사상으로, 민족주의 사상으로 승화, 발전할 수 있었다. 여기에 위정척사사상의 역사적 역할과 의의가 있는 것이다.

최익현의 사우관계는 김기현 · 이항로를 스승으로 성리학을 배웠으나 후자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학우관계는 이항로 문하에서 수학한 동문인 이준 ( 李埈 ) · 이박(李 裸 ) · 임규직 ( 任圭直 ) · 김평묵 ( 金平默 ) · 박경수(朴慶壽) · 유중교 ( 柳重敎 ) 등으로 비교적 단순한 편이었다. 저서는 ≪ 면암집 ≫ 40권, 속집 4권, 부록 4권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최익현의 대의비인 춘추대의비(春秋大義碑)가 현재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에 있다. 제향은 모덕사(慕德祠 : 충청남도 청양군 목면 농암리 소재)와 포천 · 해주 · 고창 · 곡성 · 순화 · 무안 · 함평 · 광산 · 구례 등에서 봉향되고 있다.

 

최봉환(崔鳳煥)

1868(고종 5) ∼ ? 독립운동가. 평안남도 순천 출신. 1910년 1월 19일 평안남도 순천교회 장로로 활동하던 중, ‘ 시장세반대투쟁(市場稅反對鬪爭, 일명 百一稅事件) ’ 을 주도하여 3,000여명의 농민 · 상인들을 동원하여 시위 항쟁하고, 순천 세무주사 노자와(野澤辰三郎) 등 15명의 일본인들을 살해한 뒤 군청과 주재소를 습격하여 기물을 파괴하고, 자진출두하여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그 후 경술국치로 감형되어 2년간 복역한 뒤 출감하였으나, 5년간 연금생활을 하였다. 1919년 3월 3일 평안남도 순천군 은산 · 자산읍의 독립만세시위운동에 기독교측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 기독교인 · 천도교인 · 주민 등 2,000여명의 선두에 서서 시위를 전개하다가 검거되었다.

그 뒤 재판에서 백일세(百一稅)투쟁 전력으로 가중처벌을 적용받아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최현배(崔鉉培)

1894(고종 31)∼1970. 국어학자·국어운동가·교육자. 호는 외솔. 경상남도 울산출신.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 뒤 고향의 일신학교에서 신식 교육을 받고 1910년 상경하여 한성고등학교(漢城高等學校 : 뒤에 경성고등보통학교로 개칭됨.)에 입학하여 1915년 졸업하였다.

그 해 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廣島高等師範學校) 문과에 입학하여 1919년 졸업하고, 1922년 4월에 일본 경도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 교육학을 전공하여 〈페스탈로치의 교육학설〉이라는 논문으로 1925년 졸업, 계속하여 그 대학원에서 수학하였다.

1926년 4월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1938년 9월 흥업구락부사건으로 파면당할 때까지 재직하였다. 1941년 5월 연희전문학교에 도서관 직원으로 복직하였으나, 그해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사임, 1945년 광복까지 4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45년 9월부터 1948년 9월까지, 1951년 1월부터 1954년 1월까지 문교부(지금의 교육부) 편수국장에 두 차례 재직하였다. 1954년 연희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문과대학 학장과 부총장을 역임하고 1961년 정년퇴임으로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1964년 3월부터 2년간 부산 동아대학교 교수로 재직한 일이 있다.

1954년 학술원 회원에 뽑혔고 이어 임명회원·부회장을 맡았다. 1955년 연희대학교에서 국어학 연구와 그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밖에 1949년 한글학회 이사장에 취임하여 20년간 계속하여 한글학회를 이끌었으며, 1949년 한글전용촉진회 위원장, 1957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부회장·대표이사 등으로 국어운동의 중심적인 인물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여러 방면에 걸친 활동과 공로로 1955년 제1회학술원공로상, 1967년 5·16민족상 학예부문 본상을 수상하였고, 1970년 3월 사망하자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국어학의 연구, 국어정책의 수립, 그리고 교육학의 연구와 국어운동의 추진에 전념하여 그와 관련한 20책에 이르는 저서와 100편에 이르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국어학의 연구는 1910년 봄, 일요일마다 보성중학교에서 열리는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 ( 周時經 )의 가르침을 받음으로써 싹튼 것이라 한다.

이 분야의 업적은 ≪우리말본≫과 ≪한글갈≫로 집약된다. ≪우리말본≫은 1929년 ≪우리말본 첫째매 소리갈≫, 이어 1937년 온 책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주시경 이래의 문법연구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20세기 전반기의 문법연구를 집대성한 저술이다.

전반적인 체계는 중학교 교재로 편찬된 ≪중등 조선말본≫(1934)에 이미 나타나 있었으나, 이를 보완하고 확대하였는데 인용된 자료의 해박함, 설명의 논리정연함, 체계의 정연함에 있어서 당시로는 이것을 능가할 문법서가 없다고 할 수 있다. ≪한글갈≫(1941)은 한글 연구의 체계화를 추구한 업적인데, 역사편과 이론편으로 되어 있다.

역사편은 한글제정의 동기와 경위, 한글문헌에 대한 해설, 한글 연구의 역사를 다루고, 이론편은 한글창제 이후 없어진 글자를 주로 다루어서 그 음가를 추정한 것이다. 국어정책의 수립과 국어운동에 대한 집념과 활동도 대단하여 항상 최선봉에서 그 운동을 추진하고 그에 대한 이론투쟁을 정력적으로 전개하였다.

≪글자의 혁명≫(1947)·≪한글의 투쟁≫(1958)·≪한글 가로글씨 독본≫(1968)·≪고희기념 논문집≫(1968)·≪한글만 쓰기의 주장≫(1970) 등 단행본으로 한글전용과 풀어쓰기의 이론을 발표하여, 그 운동의 이론적인 지침서가 되었다.

이 밖에 국어정화를 주장하면서 일본어의 찌꺼기를 몰아내는 등 우리말도로찾기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의 이론적인 근거는 ≪우리말 존중의 근본뜻≫(1953)에 나타나 있다. 국어 정책에 대한 그의 주장은 전후 6년에 걸친 문교부 편수국장 재직중에 교과서에서 실행되었다.

이에 대한 시비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지만, 현행 각종 교과서에서 한글만으로 가로쓰는 체재를 확립한 일은 그의 업적이다. 교육학적인 연구는 대학의 졸업논문으로 비롯되는데, 민족주의적인 국민 계몽사상을 고취한 ≪조선민족 갱생(更生)의 도(道)≫(1930)가 공개된 최초의 업적이다.

이 책에는 일생을 일관한 애국·애족의 사상이 뚜렷이 나타난다. 먼저 우리 민족의 성격상의 결함과 질병을 진단하여 그 역사적인 원인을 구명하고서, 민족이 되살아날 원리를 말하고 이어 그 원리를 실천하고 노력할 것을 역설한 것이다.

이 책에 나타난 그의 정신은 광복 이후에 확대, 발전되어 ≪나라 사랑의 길≫(1958)과 ≪나라 건지는 교육≫(1963)으로 간행되었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정신을 고취하여 부강한 자유국가와 훌륭한 자주민족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담겨 있다.

국어운동의 추진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급진적인 점도 없지 않으나, 국어문법 체계를 확립한 국어학자로서, 국어와 한글운동의 이론가이며 실천가로서, 민족의 중흥과 민주국가 건설을 외친 교육자로서 남긴 업적과 공로는 크다. 민족의 수난기에 살면서도 고난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간 그 의지는 민족사의 한 귀감이 된다.

그의 학문과 유지는 한글학회를 중심한 학자들에 의하여 계승되고 있으며, 그의 사상을 기리는 모임인 외솔회가 1970년에 창립되어 기관지 ≪나라사랑≫을 발간하며, 해마다 국학연구와 국어운동에 뛰어난 사람에게 외솔상을 시상함으로써 그의 정신을 이어가려 하고 있다.

 

≪참고문헌≫ 외솔 최현배박사 고희기념논문집(1968), 외솔 최현배박사 해적이(한글 146, 1970), 주시경선생의 학문(허웅, 東方學志 12, 1971), 외솔의 3대 저작 고찰(홍이섭·허웅·김석득, 나라사랑 1, 1971), 외솔 선생의 전기, 외솔 선생의 학문, 외솔 선생의 국어정책, 외솔 선생과 한글학회(나라사랑 14, 1974).

 

최창식(崔昌植)

1892(고종 29)∼1957. 독립운동가. 서울 출신. 일찍부터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펴다가 1916년 12월 피체, 징역 8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918년 오성학교(五星學校) 교사로 있을 때 학생들에게 민족의식·독립주의·주인의식을 고취하다가 문제가 되어 금고 1년형을 선고받았다.

1919년 3·1운동 당시 서울에서 학생들을 이끌고 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였으며, 그뒤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업무에 참여하고 임시의정원의 초대 경기도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전원위원회이사(全院委員會理事)·내무위원장·법무총장·선거위원회위원·국제연맹회제출안건작성 특별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같은해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개편에 따라 조소앙 ( 趙素昻 )의 후임으로 국무원비서장에 선임되었고, 곧 박은식 ( 朴殷植 )이 회장으로 있는 대한교육회 ( 大韓敎育會 )의 편집부장과 거류민단의 의사원을 겸하면서 시사책진회 ( 時事策進會 )를 조직,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지속시켜갔다.

1924년 5월 제10대임시의정원 의장에 선출되어 1926년 8월 18일까지 임시의정원에 참여하다가 국무위원(內務長)에 임명되었다. 1927년 4월 한국노병회 ( 韓國勞兵會 )의 이사로 선출되었다. 1930년 11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잡혀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8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崔碩(최석)  선생의 일화.

망아지 까지

崔碩(최석)은 고려 충렬왕 때 관리였다. 그가 승평부사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게 되자 고을 사람들이 관례에 따라 말 여덟 마리를 선물했다.
최석은 말을 타고 도성에도착한 후 말을 돌려보냈으나 고을 사람들이 받지 않으려 했다.

그러자 최석은 급히 망아지 한 마리를 더 보태 보내며 이렇게 전했다.
“오는 도중에 말이 망아지를 낳았는데 깜빡 잊고 그 망아지를 내가 데려오고 말았네. 이것은 나의 마음속에 탐욕이 있어서이네. 이제 너희가 받지 않는 다면 나의 탐욕스러움을 알면서도 겉으로 사양하는 척하는 것이 아닌가?”
하면서 억지로 말을 보냈다고 한다.

 

崔致遠(최치원) 선생의 일화.

1

바둑을 두던 두 노인

조선시대에 한 어부가 고기잡이 갔다가 풍란을 만나 파선을 당해 어떤 섬에 표류하게 되었는데, 그 섬에 홍안백발의 두 노인이 한가하게 바둑을 두고 있었다.
어부가 시장해서 밥을 좀 달라고 청했더니, 잠시 후 불기(佛器)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밥을 가져다주었다.

며칠 뒤 그 곳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려 하자 노인들은 어부에게 불기를 진산 태고사에 가져다주라고 하였다.
어부는 시키는 대로 불기를 가지고 태고사를 찾아갔더니, 그 불기는 전날 태고사에서 供養(공양)한 불기였고, 바둑을 두던 두 노인은 元曉(원효)와 崔致遠(최치원)이었다고 한다.

 

2

선녀홍대설화(仙女紅袋說話)

최치원(崔致遠)이 중국으로 유학 갔을 때 초현관(招賢館)에서 놀았는데, 그 앞 언덕에 ‘ 쌍녀분 ’ 이라는 오래 된 무덤이 있어, 그 석문에다 시를 써 놓고 돌아왔다.

그 뒤 어느날 갑자기 손에 홍대를 쥔 여자가 최치원에게 와서
“ 팔낭자와 구낭자가 화답하여 삼가 바칩니다. ” 라고 하였다.

최공이 깜짝 놀라 그 낭자가 누구인지 물었더니, 여자는 말하기를
“ 공께서 아침에 시를 지으셨던 곳이 바로 두 낭자가 사는 곳입니다. ” 라고 하였다.

공이 홍대를 받아 보니 두 낭자가 화답한 시가 들어 있었고, 뒷 폭에는 한 번 만나기를 청하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공이 여자의 이름을 물으니 ‘ 취금 ’ 이라 했다. 그래 공이 또 시를 짓고, 끝에다 역시 만나자는 내용을 써 취금에게 주어 돌아가게 했다.

한참 후 한 쌍의 구슬슬같이 아름답고 두 송이 연꽃이 귀여운 두 여자가 나타났다. 공이 두 여자를 맞아 근본을 물으니, 두 여자가 들려주는 내력은 이러했다.

그들은 원래 부호인 장씨집의 딸들로서, 언니가 18세, 아우가 16세 때에 각각 소금장사와 차장사에게 시집가기를 부모가 권유하였으나, 자매의 마음에 차지 않아 울적한 마음이 병이 되어 마침내는 요절하였더니, 다행히 최공과 같은 수재를 만나게 되어서 혼이나마 기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매는 오늘 같은 좋은 밤에 시나 지으며 즐기기를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공이 먼저 시를 짓자 이어 두 낭자가 차례로 시를 지어 읊으며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즐겁게 놀았다고 한다.
그러자 닭이우니 그녀들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그들의 간 곳은 길이 알지 못했다한다.

 

3

        조치원

최치원이 조치원에 시장을 개설하고 상업을 권장하여 많은 산물들이 모여 들어 시장이 번성하였는데, 그 시장을  ‘ 최치원시장 ’ 이라고 불렀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말이 와전되어 [최치원]이 [조치원]’ 이 되었다는 것이다.

 

4

쌍녀분(雙女墳)

최치원이 12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한 뒤 율수현(碌水縣)의 현위(縣尉)가 되었는데, 항상 고을 남쪽의 초현관(招賢館)에 가서 놀았다. 초현관 앞에는 쌍녀분(雙女墳)이라는 오래된 무덤이 있었는데, 예로부터 많은 명현들이 노는 곳이었다.

어느 날 최치원이 쌍녀분에 관한 시를 지어 읊었더니, 홀연히 취금(翠襟)이라는 시녀가 나타나 쌍녀분의 주인공인 팔낭자(八娘子)와 구낭자(九娘子)가 최치원의 시에 대해 화답한 시를 가져다주었다.
시를 읽고 감동한 최치원이 다시 두 여인을 만나고자 하는 시를 지어 보내고 초조히 기다리노라니, 얼마 뒤 이상한 향기가 진동하면서 아름다운 두 여인이 나타났다.

서로 인사를 나눈 뒤에 최치원이 두 여인의 사연을 듣고자 하였다. 원래 그들은 율수현의 부자 장씨(張氏)의 딸들로 언니가 18세, 동생이 16세 되던 해 그녀들의 아버지가 시집보내고자 하여 언니는 소금장수에게, 동생은 차〔 茶 〕 장수에게 정혼하였다.

그러나 그녀들의 뜻은 달랐기에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 없었고, 그 때문에 고민하다가 마침내 죽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여인을 함께 묻고 쌍녀분이라 이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한을 품고 죽은 그녀들은 마음을 알아줄 사람을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다가, 마침 최치원 같은 수재를 만나 회포를 풀게 되어 기쁘다고 말하였다.

세 사람은 곧 술자리를 베풀고 시로써 화답하여 즐기다가 흥취가 절정에 이르자, 최치원이 서로 인연을 맺자고 청하니 두 여인 또한 좋다고 하였다. 이에 세 사람이 베개를 나란히 하여 정을 나누니 그 기쁨이 한량없었다.

이렇게 즐기다가 달이 지고 닭이 울자 두 여인은 이제 작별할 시간이 되었다면서 시를 지어 바치고는 사라져 버렸다. 최치원은 그 다음날 지난밤 일을 회상하며 쌍녀분에 이르러 그 주위를 배회하면서 장가(長歌)를 지어 부른다. 그 뒤 최치원은 신라에 돌아와 여러 명승지를 유람하고 최후로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버린다.

 

5

      자막석-보령시-

최치원이 한때 대천 앞바다의 한 섬에서 논 적이 있는데, 자정만 되면 반석 위의 바위를 저절로 회전하게 해놓고는 그 곳을 떠나면서 “ 이 바위가 회전을 멈추는 날이 내가 생명을 마치는 날 ” 이라 예언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바위 이름이 자마석(自磨石)이 되었다고 한다.

 

6

왕비의 넋을 달랜 최치원

돝섬은 마산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이다. 가락왕의 사랑하는 왕비가 홀연 없어져버려 모두 사방으로 찾았는데, 누가 말하기를 골포(骨浦 : 마산의 옛 이름)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하들이 찾아가 환궁하기를 청했다.

그러나 왕비는 금빛 돼지로 변해 두척산(일명 무학산) 바위틈에 숨어 버렸다. 화가 난 군사들이 바위를 포위하고 그만 그 돼지를 살해하고 말았다.

그 뒤 밤마다 돼지 울음소리가 처량하게 들려, 崔致遠(최치원)이 돼지가 죽은 자리에 제를 지냈더니 울음이 그쳤다고 전한다.

 

 

 

 

 

 

 

 

출전 <한미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32

模(모),圭(규)

36

時(시),先(선)

40

夏(하),敏(민)

33

柄(병),鎔(용)

37

鏞(용),在(재)

41

聲(성),植(식)

34

鐸(탁),汶(문)

38

洙(수),鐸(탁)

42

 

35

來(래),東(동)

39

根(근),漢(한)

43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경주 최씨(경주최씨)는 남한에 총 210,154가구, 876,72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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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1 삭녕 최.jpg 삭녕최씨: 삭영최씨(崔) 청남 14-08-30 6264
720 부안 최.jpg 부안최씨(崔) 청남 14-08-30 2936
719 밀양 최.jpg 밀양최씨(崔) 청남 14-08-30 3181
718 낭주 최.jpg 낭주최씨(崔) 청남 14-08-30 3778
717 나주 최.jpg 나주최씨(崔) 청남 14-08-30 3685
716 광주 최.jpg 광주최씨(崔) 청남 14-08-30 3068
715 곡강 최.jpg 곡강최씨(崔) 청남 14-08-30 3330
714 고부 최.jpg 고부최씨(崔) 청남 14-08-30 3112
713 계림최씨(崔) 청남 14-08-30 2661
경주 최1.jpg 경주최씨(崔) 청남 14-08-30 17952
711 개성 최.jpg 개성최씨(崔) 청남 14-08-30 3230
710 강화 취.jpg 강화최씨(崔) 청남 14-08-30 4568
709 강릉 최1.jpg 강릉최씨(崔) 청남 14-08-30 4885
708 간성 최1.jpg 간성최씨(崔) 청남 14-08-30 3671
707 파릉 초.jpg 파릉초씨(楚) 청남 14-08-30 2782
706 제주 초.jpg 제주초씨(肖) 청남 14-08-30 2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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