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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녕최씨: 삭영최씨(崔)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崔(삭녕최씨)

 

 

본관(本貫): 삭녕(朔寧)

시조(始祖): 최천로(崔天老)

유래(由來):

 

삭녕 최씨(朔寧崔氏)는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최천로(崔天老)를 시조(始祖)로 하고,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낭장(郎將)을 지낸 최선보(崔善甫)와 경전 부사(慶殿副使)를 역임했던 최연(崔 )을 각각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을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최충(崔忠)

낭장(郎將) 선보(善甫)의 아들 충(忠)이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최윤문(崔潤文)

충의 아들 윤문(潤文)은 우찬성(右贊成)을 역임하였다.

 

최사유(崔士柔)

1372(공민왕 21) ∼ 1455(단종 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삭녕 ( 朔寧 ). 자는 휘지(徽之). 선보(善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자충(子忠)이고, 아버지는 호조전서(戶曹典書) 윤문(潤文)이며, 어머니는 어백천(魚白 穗 )의 딸이다.

1399년(정종 1) 생원시 ·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1402년(태종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09년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1414년 장흥고사(長興庫使)가 되었는데, 이 때 질이 나쁜 종이를 납궐(納闕)한 죄로 의금부에 하옥되었다.

1432년(세종 14) 사간원좌헌납이 되었다. 이듬해 상정색녹사(詳定色錄事) 한유린(韓有隣)과 책봉도감녹사(冊封都監錄事) 허완 ( 許完 )에게 7등급을 초과하여 참직(參職)을 제수하자, 3등급을 초과할 수 없는 초천법(超遷法) 규정을 들어 이의 시정을 상소하였다.

누천(累遷)하여 성균관사예에 이르렀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퇴거하여 경사를 읽으며 세월을 보내다가 뒤에 수직(壽職 : 80세 이상의 노인에게 은전으로 주는 벼슬)으로 통정대부 ( 通政大夫 )에 올랐다.

 

최항(崔恒)

1409(태종 9) ∼ 1474(성종 5). 조선 전기의 문신 · 학자. 본관은 삭녕 ( 朔寧 ). 자는 정보(貞父), 호는 태허정(太虛亭) · 동량( 炚 梁). 충(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문(潤文)이고, 아버지는 증영의정 사유(士柔)이다. 어머니는 오섭충(吳燮忠)의 딸이다. 서거정 ( 徐居正 )의 자부(姉夫)이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집현전부수찬이 되었다. 이 해 ≪ 자치통감훈의 資治通鑑訓義 ≫ 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이어 박팽년 ( 朴彭年 ) · 신숙주 ( 申叔舟 ) · 성삼문 ( 成三問 ) 등과 같이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1444년 집현전교리로서 ≪ 오례의주 五禮儀注 ≫ 를 상정(詳定)하는 일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박팽년 · 신숙주 · 이개 ( 李塏 ) 등과 함께 ≪ 운회 韻會 ≫ 를 한글로 번역하였다.

1445년 집현전응교로서 ≪ 용비어천가 ≫ 를 짓는 일에 참여하고, 이어 ≪ 동국정운 ≫ · ≪ 훈민정음해례 ≫ 등을 찬진하였다. 1447년 문과중시에 5등으로 급제, 집현전직제학 겸 세자우보덕에 임명되었다. 그 당시 세종은 세자(뒤의 문종)로 하여금 섭정(攝政)하게 했는데 이 때 서연관 ( 書筵官 )으로서 정치에 보좌함이 컸다.

1450년(문종 즉위년)에 선위사 ( 宣慰使 )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접대했고, 같은 해 언관 ( 言官 )으로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 해 7월 다시 집현전으로 돌아와 부제학이 되었고, ≪ 대학연의 大學衍義 ≫ 를 주석하는 일을 맡았으며, ≪ 고려사 ≫ 의 열전을 집필하였다. 1452년 2월 ≪ 세종실록 ≫ 편찬 때는 수찬관으로 참여하였다.

이어 동부승지가 되었으며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협찬한 공이 있다 하여 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 1등에 녹훈되고, 도승지가 되었다. 이 해 12월 이조참판에 임명되고, 영성군(寧城君)에 봉해졌다. 1454년 10월에는 〈 공신연곡 功臣宴曲 〉 4장(章)을 지어 올렸으며, 1455년 정난공신 1등의 교서가 내려졌다.

그 해 2월 대사헌이 되고, 6월에 세조가 즉위하면서 좌익공신 ( 佐翼功臣 ) 2등에 녹훈되었다. 이어 7월에 서연의 우부빈객이 되었고, 그 뒤 호조참판 · 이조참판 · 형조판서 · 공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세조는 즉위한 직후 육전상정소(六典詳定所)를 설치하고 ≪ 경국대전 ≫ 편찬에 착수하였는데 이 때 그는 김국광 ( 金國光 ) · 한계희 ( 韓繼禧 ) 등과 함께 육전상정관(六典詳定官)으로 임명되었고, 1458년(세조 4)에 ≪ 신육전 新六典 ≫ 의 초안을 작성하여 올렸다.

그 해 부친상을 당했으나 왕명으로 기복 ( 起復 )되어 다음 해 중추원사세자빈객 겸 성균관대사성이 되고 1460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1461년 양성지 ( 梁誠之 )의 ≪ 잠서 蠶書 ≫ 를 한글로 번역, 간행하였다.

1463년 의정부우참찬이 되고, 1464년 9월 왕명으로 ≪ 병장설주 兵將說註 ≫ 를 산정(刪定)하였다. 이듬해 좌참찬 겸 세자이사(左參贊兼世子貳師)가 되었고, 사서오경의 구결 ( 口訣 )을 바로잡는 일에 참여하였다.

1466년에 판병조사로 임명되자 그는 군사 관계는 적임이 아니라며 간절히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467년 4월 좌찬성, 5월 우의정, 7월 좌의정, 9월 영의정이 되었다.

1468년(예종 즉위년) 9월 신숙주 · 한명회 ( 韓明澮 ) · 김국광 등과 함께 원상이 되었다. 1469년 경국대전상정소 제조 ( 提調 )를 겸하여 ≪ 경국대전 ≫ 을 찬진했고, 이어 ≪ 무정보감 武定寶鑑 ≫ 을 찬수하였다.

1470년(성종 1) 부원군에 봉해졌고, ≪ 역대제왕후비명감 歷代帝王后妃明鑑 ≫ 을 찬진하였다. 1471년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 1등에 녹훈되고 다시 좌의정이 되어 경연춘추관사를 겸하면서 ≪ 세종실록 ≫ · ≪ 예종실록 ≫ 을 찬진하였다. 그 뒤 1474년 4월에 죽었다.

그는 18년 동안 집현전관원으로 있으면서 경연관 · 지제교 ( 知製敎 )로서뿐만 아니라, 유교적인 의례 · 제도를 마련하기 위한 고제연구와 각종 편찬사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에 대한 평가는 서거정이 찬한 비명, ≪ 필원잡기 筆苑雜記 ≫ , 김육 ( 金堉 )이 지은 ≪ 해동명신록 海東名臣錄 ≫ 의 것과 ≪ 성종실록 ≫ 에 있는 그의 졸기의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전자에서는 그의 성품이 겸공(謙恭) · 간정(簡靜) · 단개(端介) · 무화(無華) · 공정(公正)하고 정관(正冠 : 의관을 바로함.) · 위좌(危坐 : 무릎을 꿇고 몸을 바르게 하여 앉음.)하며, 침착 신중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청백하여 재산을 탐하지 않으며, 40년 간 벼슬했으나 한번도 탄핵을 받지 않았다고 극구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후자에서는 겸근과언(謙謹寡言 : 겸손하고 삼가며 말이 적음.)과 정관 · 위좌하였다고 한 것은 거의 비슷하나, 일을 처리하는 데 결단성이 없고, 정승자리에 있었으나 한번도 인사 ( 人事 )를 건의하는 일이 없이 우물쭈물 넘겼으며 자기의 의견을 내세우지 못했다고 하였다.

또 문형 ( 文衡 )에 있던 사람이 의정으로 임명되면 반드시 문형직을 사양하는 것이 예였는데 그는 오히려 사양하지 않고 겸했다고 못마땅하게 평하고 있다.

특히, 가정 문제에서도 부인의 성품이 사나워서 집안일은 부인의 주장대로 행해져 자유가 없었다고 하고, 혼사에 있어서도 인품이 아닌 재산만을 보고 사위와 며느리를 얻었다고 혹평하고 있다.

≪ 성종실록 ≫ 졸기에 보이는 이와 같은 혹평은 당시 삼사 ( 三司 ) 계통에 진출하여 훈구대신들을 공격하던 사림 ( 士林 ) 계통의 신진관료들의 활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저서로 ≪ 태허정집 ≫ · ≪ 관음현상기 觀音現相記 ≫ 가 있으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최흥원(崔興原)

1529(중종 24)∼1603(선조 3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삭녕 ( 朔寧 ). 자는 복초(復初), 호는 송천(松泉). 영의정 항(恒)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호(永灝)이고, 아버지는 전첨 ( 典籤 ) 수진(秀珍)이며, 어머니는 이세신(李世臣)의 딸이다.

1555년(명종 10) 소과를 거쳐 1568년(선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장령·정언·집의·사간을 역임하였으며, 이어 동래와 부평의 부사를 지냈다. 1578년 부평부사로 재임중 효릉 ( 孝陵 )의 감역(監役)이 문제되어 파직되었다가 다시 승지로 기용되고, 1588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이후 지중추부사를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유성룡 ( 柳成龍 )의 파직에 따라 영의정에 기용되었다. 이듬해 병으로 사직, 영돈녕부사 ( 領敦寧府事 ), 영평부원군(寧平府院君)에 봉해졌다.

임진왜란 당시 왕을 의주까지 호종했던 공으로 1604년 호성공신 ( 扈聖功臣 ) 2등에 추록(追錄)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최상중(崔尙重)

1551(명종 6) ∼ 1604(선조 3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삭녕 ( 朔寧 ). 자는 여후(汝厚). 호는 미능재(未能齋). 영의정 항(恒)의 6대 손이며, 준원(濬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언수(彦粹)이고, 아버지는 어모장군 영(潁)이며, 어머니는 현감 송구(宋駒)의 딸이다. 유희춘 ( 柳希春 )의 문인이다.

1576년(선조 9) 사마시에 합격하고, 158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원수 권율 ( 權慄 )의 계청(啓請)으로 그의 종사관이 되어 5, 6년간 그를 보필하였다. 그 뒤 검열 · 예문관봉교 · 헌납 · 지평 · 장령 · 사간 · 교리 등을 역임하고 1602년 사간을 끝으로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였고, 선견지명이 있어서 정인홍 ( 鄭仁弘 )이 화심(禍心)을 품고 있다고 첫눈에 알아 보았다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는 호남을 내왕할 때 쌀을 가지고 다니며 굶주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도승지에 추증되었다가 아들 연( 褻 )의 공으로 대사헌에 가증되었으며, 남원의 노봉서원 ( 露峰書院 )에 제향되었다.

 

최동립(崔東立)

1557(명종 12) ∼ 1611(광해군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삭녕 ( 朔寧 ). 자는 탁이(卓爾). 호는 행원(杏園) · 행우(杏雨). 준철(濬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계종(繼宗)이고, 아버지는 증이조참판 변( 豆 )이며, 어머니는 별좌 ( 別坐 ) 우성훈(禹成勳)의 딸이다.

1585년(선조 18) 진사가 되고, 1589년 음보(蔭補)로 능참봉에 제수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임금을 따라 의주까지 호종(扈從)하고, 그곳에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부친상으로 출사하지 못하다가 1595년 봉교, 다음해 형조좌랑을 거쳐 병조좌랑이 되었다.

이 해 서장관 ( 書狀官 )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병조정랑으로 세자시강원사서를 겸하였다. 이어 지평 · 문학 · 필선 · 정언 · 헌납 · 장령을 역임하고, 1599년 권신을 탄핵한 일에 연좌되어 수성도찰방(輸城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곧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1607년 사면되어 순창군수 · 담양부사가 되고, 1609년(광해군 1) 우부승지에 이어 황해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이도(吏道)를 바로잡았다. 어려서는 성품이 난폭하여 동네의 싸움을 도맡아 하였으나, 형 홍한(弘 淹 )의 충고로 학문을 닦게 되었다.

그는 여러 벼슬을 역임하면서 서리 ( 胥吏 )들의 부정을 간과하지 않았고, 당시 권세가인 유영경 ( 柳永慶 )의 전횡을 시로써 풍자하여 그의 원망을 사기도 하였다.

순창군수로 있을 때에는 권세가들의 침탈로 양정(良丁)이 줄어들고 관부의 재정이 궁핍하여짐을 보고 법으로써 이를 억제하였다. 특히, 그는 예학 ( 禮學 )에 조예가 깊어 선유(先儒)들의 모든 예서(禮書) 주설(註說)을 재고증하기도 하였다.

 

최동식(崔東式)

1562(명종 17) ∼ 1614(광해군 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삭녕 ( 朔寧 ). 자는 정칙(正則). 호는 율정(栗亭). 준문(濬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계종(繼宗)이고, 아버지는 변( 豆 )이며, 어머니는 우성훈(禹成勳)의 딸이다. 동립(東立)의 동생이다. 대사성 우성전 ( 禹性傳 )의 문인이다.

1588년(선조 21) 진사가 되고, 159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학유 · 헌납을 거쳐 장령이 되었으나 대신의 미움을 받아 경성부판관으로 좌천되었고, 부임한 날로부터 주색을 즐겨 곧 파직당하였다.

이듬해 직강 · 사예를 거쳐 안변부사가 되어 제방을 쌓고 도랑을 파는 등 관개사업을 크게 일으켰다. 광해군 초에 문학 · 장령 · 사간 · 필선 · 집의 등을 거쳐 1612년(광해군 4) 보덕이 되고, 이듬해 사간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취임하지 않았다.

광해군이 궁궐을 새로 짓고 천도하려 하자 한(漢)나라의 고사를 인용하여 그 부당함을 극간하였고, 정조 ( 鄭造 ) · 윤인(尹 婦 ) 등이 폐모론을 발의하자 처음으로 반대의견을 제시하고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뒤 다시 벼슬하지 않았다

 

최연

1576(선조 9) ∼ 1651(효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삭녕 ( 朔寧 ). 자는 유장(孺長). 호는 성만(星灣) · 성연(星淵). 남원 출신. 언수(彦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穎)이고, 아버지는 사간 상중(尙重)이며, 어머니는 윤충(尹 食 )의 딸이다.

1603년(선조 36) 진사가 되고, 이 해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정자를 거쳐 1610년(광해군 2) 예조좌랑이 되었으나 이이첨 ( 李爾瞻 ) 등의 모의에 반대, 대북파에 의하여 파직당한 뒤 고향에 돌아가 12년 동안 은거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장령에 임명되고, 응교 · 집의 · 사간 등을 지내면서 여러가지 건의를 통하여 실정개혁에 공헌이 컸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좌승지로서 왕을 호종, 남한산성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돌아와서 예조참의가 되었고, 가선대부 ( 嘉善大夫 )에 올라 한성부좌윤이 되었다.

뒤에 명리에 뜻이 없어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남원의 방산서원 ( 方山書院 )에 배향되었다.

 

최은

연의 동생 온( )은 1609년(광해군 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은퇴하여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전념하다가 1653년(효종 4)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이르렀다.

 

최계옹(崔啓翁)

1654(효종 5) ∼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삭녕 ( 朔寧 ). 자는 내심(乃心). 호는 동량( 炚 梁). 남원 출신. 상중(尙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연( 褻 )이고, 아버지는 휘지(徽之)이며, 어머니는 양준우(梁俊遇)의 딸이다.

1681년(숙종 7) 통덕랑 ( 通德郎 )으로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설서를 거쳐 1695년 지평으로 동지사 ( 冬至使 )의 서장관 ( 書狀官 )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정언을 거쳐 장령이 되었으며, 1704년 단종이 폐위될 때 이를 지지하였던 대신들의 관작을 추탈할 것을 극력 주장하다가 파직되었다. 1706년 다시 보덕으로 기용되어 집의 · 사간을 거쳐 승지가 되었으며, 1710년 영상 신완 ( 申琓 )을 탄핵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

 

최시옹(崔是翁)

계온의 동생 시옹(是翁)은 윤 증(尹 拯)의 문하생으로 지평(持平)이 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최한기(崔漢綺)

1803(순조 3) ∼ 1877(고종 16). 조선 말기의 실학자 · 과학사상가.

〔생 애〕 본관은 삭녕 ( 朔寧 ). 자는 지로(芝老), 호는 혜강(惠岡) · 패동(浿東) · 명남루(明南樓) · 기화당(氣和堂) 등의 당호도 있다. 아버지는 치현(致鉉)이며, 어머니는 청주 한씨(淸州韓氏)이다. 평생 학문에 진력하였고, 부인 반남 박씨(潘南朴氏)와의 사이에 2남 5녀를 두었다. 큰아들 병대(柄大)는 1862년 문과에 급제하여 고종의 시종을 지냈으나 후손의 존재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일생에 대하여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그가 수많은 책을 저술하였으며 그 가운데 상당수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방대한 저술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대의 다른 학자들조차 그의 이름을 기록에 남긴 일은 극히 드물다. 이규경 ( 李圭景 )의 ≪ 오주연문장전산고 ≫ 에 그에 관한 기록이 몇 차례 나올 따름이다.

이규경은 그를 뛰어난 학자로서 많은 저술을 남겼다고 소개하였고, 또한 그가 중국에서 나온 많은 신간서적을 가지고 있었다고도 기록하였다. 최한기가 당대의 지리학자 김정호 ( 金正浩 )와 친분이 두터웠고 이들이 함께 중국에서 나온 세계지도를 대추나무에 새겼음을 알 수 있다. 1834년 김정호가 ≪ 청구도 靑丘圖 ≫ 를 만들자 최한기는 여기에 제를 써주기도 하였다.

〔사 상〕 최한기의 학문세계는 유교적 전통에서는 극히 드물게 강한 경험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심지어, 맹자가 인간의 본유적(本有的 : 내면서 가지고 있는 것)인 것이라고 규정한 인의예지조차 경험으로 얻게 되는 습성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모든 앎이란 선천적이 아니라 후천적 경험을 통하여 배워 얻어지는 것이다. 또, 경험이란 경험의 주체인 인간의 마음과 경험의 대상, 그리고 이들 둘을 맺어주는 감각기관이 있어야 가능하다.

천지의 만물은 모두 같은 기(氣)를 받아 서로 다른 질에 따라 서로 다른 신기 ( 神氣 )를 갖게 된다. 사람마다 신기가 서로 다른 점이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공통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이해할 수가 있다. 또, 이런 신기의 만남은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도 가능하다. 이때 한 사람의 신기를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에 통해주는 것이 그의 감각기관이다. 즉, 인간은 눈 · 코 · 입 · 귀 등의 감각을 통해 경험을 쌓음으로써 그의 신기를 더욱 밝혀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한가지보다는 둘 또는 그 이상의 감각경험을 통하여 확인된 지식일수록 그 확실성이 높아진다. 이들 감각의 감각경험을 그는 이통(耳通) · 목통(目通) · 구통(口通) · 수통(手通) 등으로 부르고, 보강된 경험을 주통(周通)이라 불렀다.

인간은 경험과 그것이 쌓여진 기억을 바탕으로 자기 생각을 확장하여 갈 수 있다. 이 과정이 추측이다. 귀납법과 연역법을 함께 포함하고 있는 그의 추측법에는 다음과 같은 종류가 있다. ① 기를 바탕으로 이를 추측하는 것 〔 推氣測理 〕 , ② 정의 나타남을 미루어 성을 알아내는 것 〔 推情測性 〕 , ③ 움직임을 보고 그 정지상태를 알아내는 것 〔 推動測靜 〕 , ④ 자기자신을 미루어 남을 알아보는 것 〔 推己測人 〕 , ⑤ 물을 바탕으로 일을 짐작하여 아는 것 〔 推物測事 〕 등이다.

그의 경험론적 방법론이 얼마나 서양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서양의 역산(曆算)과 기학 ( 氣學 )을 크게 중요시하면서 서양의 과학기술 도입에 적극적이었다. 그의 학문방법을 설명한 ≪ 추측록 推測錄 ≫ · ≪ 신기통 神氣通 ≫ 이 이미 많은 서양과학의 예를 들어 그의 논지를 펴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뒤의 저술이 모두 서양학문을 소개하려는 노력으로 일관되어 있다.

우선, 1857년의 ≪ 지구전요 地球典要 ≫ 에서 최한기는 세계 각국의 지리 · 역사 · 물산 · 학문 등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중국에서 나온 위원(魏源)의 ≪ 해국도지 海國圖志 ≫ 와 서계여(徐繼 慕 )의 ≪ 영환지략 瀛環志略 ≫ 을 바탕으로 요약한 것이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내세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비롯하여 적지않은 서양과학의 내용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서양천문학에 관하여서는 1867년에 간행된 ≪ 성기운화 星氣運化 ≫ 가 있는데, 이는 영국의 유명한 천문학자 허셜(Herschel,W.)이 쓴 중국 번역본 ≪ 담천 談天 ≫ 을 번안해 놓은 것이다.

그는 특히 서양의학의 소개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1866년에 지은 그의 ≪ 신기천험 身機踐驗 ≫ 은 인체를 신기가 운화(運化)하는 기계 같은 것으로 보고 서양의학의 대강을 소개한 것이다. 동양의학에 비하여 해부학이 크게 앞서 있고 병리학도 더 발달되어 있다고 지적한 그의 ≪ 신기천험 ≫ 은 영국인 선교의사 홉슨(Hobson,B., 중국 이름 合信)의 서양의학서적을 ‘ 편수 ’ 하여 만든 것이다.

〔저 술〕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최한기의 저술을 연대순으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 농정회요 農政會要 ≫ (1830), ≪ 육해법 陸海法 ≫ (1834), ≪ 청구도제 靑丘圖題 ≫ (1834), ≪ 만국경위지구도 萬國經緯地球圖 ≫ (1834, 현존 미상), ≪ 추측록 ≫ (1836), ≪ 강관론 講官論 ≫ (1836), ≪ 신기통 ≫ (1836), ≪ 기측체의 氣測體義 ≫ (1836, 추측록과 신기통을 합본한 것), ≪ 감평 鑑枰 ≫ (1838, 뒤에 人政에 포함됨), ≪ 의상이수 儀象理數 ≫ (1839), ≪ 심기도설 心器圖說 ≫ (1842), ≪ 소차유찬 疏箚類纂 ≫ (1843), ≪ 습산진벌 習算津筏 ≫ (1850), ≪ 우주책 宇宙策 ≫ (연대 미상), ≪ 지구전요 ≫ (1857), ≪ 기학 氣學 ≫ (1857), ≪ 운화측험 運化測驗 ≫ (1860), ≪ 인정 人政 ≫ (1860), ≪ 신기천험 ≫ (1866), ≪ 성기운화 ≫ (1867), ≪ 명남루수록 明南樓隨錄 ≫ (연대 미상) 등이다.

 

 

崔振寧(최진영) 선생의 일화.

효자와 풍정(豊井) 숲 : 사천군(泗川郡)

이 숲은 정동면 풍정리에 있었는데 이 마을 삭령최씨(朔寧崔氏) 문중에 최진영(崔振寧)이란 분이 있었고 그의 아들 두남(斗南)이란 소
년이 있었다.
12세때 임진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진영공을 모시고 풍정숲에서 피난을 하게 되였다. 피난 중에도 봉친(奉親)에 극진(極盡)하여 수년을 피하였는데 그 고생이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누차(累次) 왜적을 만났을 때에는 노부모(老父母) 봉친(奉親)을 칭탁(稱託)하여 화를 면하였다. 그 뒤 하루는 밖에 양식을 구하러 나갔다가 왜적을 만나 잡히게되어 외적은 그를 죽이려고 하는데 옆에 있던 장수(將帥)가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이 아이는 백자천손(百子千孫)할 용모를 지녔다. 일본으로 데려가자, 하고 그들의 본진(本陣)인 선진(船津)으로 끌고 갔다.
그곳에 쇠 밧줄로 얽어매어 두었다.

밤에 왜적이 술에 취(醉)하는 틈을 타서 왜장의 장검으로 쇠줄을 끊고 탈주(脫走)하였다.
그 뒤 나라에서는 친출지효(天出之孝)라 하여 진주도동(晋州道洞)에 복호(復戶)를 내렸고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증직(贈職)받고 첨중추(僉中樞)를 가자(加資)하였다.

그리고 그의 부인 정(鄭)씨는 니구산(尼丘山) 성지골에 제단(祭壇)을 쌓고 기도(祈禱)하여 6형제를 두어 출세 시켰다.


 

崔漢綺(최한기) 선생의 일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책을 쓴 사람.

역사상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책을 쓴 저자는 누구일까?
다산 정약용 성생은 일생에 약 500권의 책을 썼다고 하는데, 최한기 선생은 1,000권이 넘는 책을 썼다고 한다.

물론 지금 실재로 남아 전해오는 책은 80여권 이며 많은 책이 전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나 청남 권영한은 겨우 50여권의 책 밖에 못썼으니 감히 엄두도 못내는 미흡한 저자일 뿐이다.

 

 

崔恒(최항) 선생의 일화. 삭령.

 

崔恒(최항)은 일찍이 世宗(세종) 임금의 꿈에 ()으로 顯夢(현몽)한 이야기가 있어, 巷間(항간)에 큰 話題(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世宗(세종)科擧試驗(과거시험)을 하루 앞둔 어느 날 낮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成均館(성균관)뜰 앞 잣나무 밑 둥을 ()한 마리가 칭칭 감고 있었다. 깜짝 놀란 世宗(세종)이 사람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더니, 거기에 바로 崔恒(최항)이 태평스럽게 잣나무 밑 둥을 베개 삼아 낮잠을 자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튿날 科擧(과거)에서 崔恒(최항)壯元(장원)으로 뽑히니 成均館(성균관)의 그 잣나무는壯元(장원)나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때가 1434年 世宗(세종)16의 일로 崔恒(최항)의 나이 25세 때 였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崔恒(최항) 선생의 일화.

 

崔恒(최항)人物評(인물평)으로 徐居正(서거정)이 남긴 <筆苑雜記(필원잡기)>에 이런 글이 있다.

그의 성품이 兼恭(겸공), 簡淨(간정), 端介(단개), 無華(무화), 公正(공정)하고 ,언제나 의관을 바로하고 앉을 때는, 무릎을 꿇고 몸을 바르게 하여 앉았다.

 

沈着愼重(침착신중)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淸白(청백)하여 재산을 ()하지 않았고, 40년간 벼슬하였으나 한번도 탄핵을 받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출처: 歷史人物>

 

 

崔恒(최항) 선생의 일화.

 

각종 편찬 사업에 주도적 역할을 崔恒(최항)

崔恒(최항)1434(세종 16)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길 에 나섰다.

朴彭年(박팽년) 申叔舟(신숙주) 成三問(성삼문)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 했다. 그리고 용비어천가를 짓는 일에 참여하고, 훈민정음 해례, 동국정운을 편찬했다.

최항은 유교적인 의례 · 제도를 마련하기 위한 제도 연구와 각종 편찬사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453년 세 조가 金宗瑞(김종서)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을 때 그는 鄭麟趾(정인지)와 함께 적극적으로 수양대군을 도운 공로로 정난공신이 되었다. 그해 이조참판에 임명되고, 영성군에 봉해졌다.

그는 벼슬자리가 형조판서 · 공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까지 이르렀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출전 <한미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19

遇(우)

23

成(성)

27

聖(성)

20

九(구)

24

範(범)

28

揆(규)

21

炳(병)

25

康(강)

29

 

22

宇(우)

26

新(신)

30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삭녕 최씨(朔寧崔氏)는 남한에 총 9,027가구, 37,87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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