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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지씨(池)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池(충주지씨)

 

 

본관(本貫): 충주(忠州)

시조(始祖): 지경(池鏡)

유래(由來):

 

충주 지씨(忠州池氏)는 중국 홍농 출신인 지경(池鏡)을 시조로 하고 있다.

「충주지씨족보」에 의하면 경(鏡)은 960년(고려 광종 11) 태학사(太學士)로서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정착하여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태보(太保)·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그 후 6세손 종해(宗海)가 문하시랑 평 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낸 후 추우언백에 봉해져 충주에 세거하였으므로 후손들은 본관을 충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지씨는「조선씨족통보」에 충주를 비롯하여 단양(丹陽)·광주(廣州) 등 무려 89본까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충주를 제외한 나머지 본관은 세거지명에 불과하다.

 

가문의 중요 인물

 

지용수(池龍壽)

생몰년 미상. 고려의 관인(官人). 충목왕 때 현릉직(顯陵直)으로 시작해 공민왕 때는 안우 ( 安祐 ) 등과 함께 홍건적 ( 紅巾賊 )을 격퇴했으며, 홍건적에게 일시 함락된 서울(개경)을 수복해 1등공신이 되었다.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 전공판서(典工判書)에 이르러 규의선력공신(揆義宣力功臣)의 호를 받았다.

그 해에 덕흥군 ( 德興君 ) 혜( 鰲 )가 원나라에 의해 고려 왕에 임명되어 입국한다는 소식이 있자, 전공판서로서 서북면도순문사가 되어 용주(龍州 : 지금의 평안북도 용천)에 주둔했다가, 덕흥군이 물러간 뒤 추성규의선력공신(推誠揆義宣力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이르렀다.

지위가 차차 올라가 1365년에 밀직사 · 지도첨의상원수(知都僉議上元帥)가 되고 이듬 해에는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고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가 되었으며, 이어 서북면상원수 겸 평양윤이 되었다.

1370년 원나라에서 평장사 ( 平章事 )를 지낸 기새인티무르(奇賽因帖木兒)가 원이 망하자 요심관리평장(遼瀋官吏平章) 김백안(金伯顔) 등과 더불어 동녕부 ( 東寧府 )에 웅거하였다. 그런데 자기 아버지 기철 ( 奇轍 )을 죽인 것에 감정을 품고 있었으므로, 부원수 양백안(楊伯顔), 안주상만호 임견미 ( 林堅味 ), 이성계 ( 李成桂 ) 등과 함께 공격하였다.

이 때 시중 이인임 ( 李仁任 )은 도통사로 안주에 진을 치고 군사가 의주에 이르러 만호 정원비(鄭元庇) · 최혁성(崔奕成) · 김용진(金用珍) 등에게 압록강에 부교를 설치하게 해 모두 3일 만에 도하를 끝냈다. 이 전투의 결과로 동녕부를 회복하고 북원(北元)과 국교를 단절하게 되었다.

한편, 전쟁을 치르면서 성을 함락하고 창고를 거의 다 불태워 군량이 부족하였다. 이에 모든 장수들이 지름길로 갈 것을 청했으나 유독 혼자서 엄정한 군기를 자랑하기 위해 바닷가를 따라 군사를 돌렸다. 그러나 병사들이 크게 굶주려 소와 말을 잡아먹어 행군을 못하게 되자 모두가 원망해 지름길로 돌아왔다고 한다.

 

지윤(池奫)

∼1377(우왕 3). 고려 후기의 무신. 본관은 충주(忠州). 무녀(巫女)의 소생으로서 처음 군졸에서 출발하였으나 점차 무공을 세워 공민왕 말년에는 판숭경부사(判崇敬府事)가 되었으며, 서북면원수·경상도상원수 등 출정군(出征軍)의 지휘관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우왕 때에는 문하찬성사 ( 門下贊成事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가 되어 재상에 올랐는데, 당시의 권신(權臣)인 이인임 ( 李仁任 )과 한패가 되어 친원정책을 비판하는 임박 ( 林樸 )· 정도전 ( 鄭道傳 )· 박상충 ( 朴尙衷 ) 등을 탄압하였다. 관직과 옥(獄)을 팔아 많은 재산을 모았으며, 심복들을 대간에 배치, 그들을 사주하여 위엄을 부렸다.

그러나 그의 아들 익겸(益謙)을 왜구토벌의 지휘관으로 내보내는 문제 등으로 점차 이인임과 사이가 나빠졌는데, 기회를 엿보던 이인임이 김승득(金承得)· 이열 ( 李悅 )·화지원(華之元) 등 자신의 심복들을 정부비방죄로 몰아 유배시키자, 이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지신사 ( 知申事 ) 김윤승 ( 金允升 )과 공모하여 이인임·최영 등을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실패함으로써 가족·당여(黨與)와 함께 처형되었다.

 

지용기(池湧奇)

∼1392(공양왕 4).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충주(忠州). 공민왕 때 삼사우윤에 이르고, 우왕 때에 예의판서가 되었으며, 밀직부사(密直副使)·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승진해 수성분의공신(輸誠奮義功臣)의 호를 받았다.

1378년(우왕 4) 전라도도순문사가 되어 장흥부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였다, 그러나 1381년에 지밀직사사로서 전라도원수(全羅道元帥)가 되어 사근내역(沙斤乃驛)에서 패퇴해 파직되었다.

이듬해 양광·전라·경상도 조전원수(楊廣全羅慶尙道助戰元帥)로 기용되었고, 원수 이을진 ( 李乙珍 )과 함께 반남현(潘南縣)에서 왜구를 격퇴하였다. 1384년에 문하평리 ( 門下評理 )로 전라도도원수가 되었고, 이어 전라도도순문사로 다시 나가 왜를 쳤다.

1388년에는 요동(遼東)정벌에 안주도부원수로 참가했다가 우군도통사 이성계 ( 李成桂 )의 편을 들어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89년(공양왕 1)에는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세운 공으로 문하찬성사에 발탁되었으며, 중흥공신녹권(中興功臣錄券)을 받고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다.

그 뒤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지냈으나 이·초(彛初)의 옥에 연루된 김종연(金宗衍)의 당인으로 지적되어 탄핵을 받아 삼척에 유배되었다. 당시의 대사헌 김사형 ( 金士衡 ) 등이 그의 죄를 덜어 고신과 공신녹권만 거두자고 하였다. 그러나 낭사 ( 郎舍 ) 진의귀 ( 陳義貴 )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하여 매 1백을 쳐서 삼척에 귀양보냈으며, 가산은 적몰(籍沒)하였다. 1391년 처의 재종 왕익부(王益富)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유배지에서 죽었다.

비록 역모와 관련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기는 했으나 그의 행동은 전장에서는 관우(關羽)와 장비(張飛)의 용맹에 비교되었으며, 곽자의(郭子儀)와 이광필 ( 李光弼 )과 같은 자질을 소유한 자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지여해(池汝海)

1591(선조 24) ∼ 1636(인조 14).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수지(受之). 고려의 명장 충의군(忠義君) 용기(湧奇)의 후손이며, 시직 영수(永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운(芸)이고, 아버지는 사과 경담(景湛)이며, 어머니는 선교랑(宣敎郞) 김정현(金挺賢)의 딸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영변통판으로 300여 군사를 이끌고 운산의 적을 기습, 패주시켰다. 이 전공으로 절충장군 ( 折衝將軍 )에 올라 용천부사가 되었으나 모함하는 자의 참소로 의주에 충군 ( 充軍 )되었다.

배소에 있을 때 가도( 假 島)에 주둔한 명나라 장수 유흥치(劉興治)의 변란에 백의종군하여 큰 공을 세우고 장연부사가 되었다가 얼마 뒤 철산부사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체찰사 김류(金 濫 )의 비장 ( 裨將 )으로서 지략을 발휘하였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적의 포위 속에 있을 때 김류에게 출전을 간청하여 임금의 허락을 받고 어영포수(御營砲手) 200여 명을 이끌고 나아가 싸우다 전원이 전사하였다. 패보를 접한 인조는 매우 슬퍼하고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를 추증하고 전사자를 수습하여 매장하게 하였다.

 

지달원(池達源)

문장에도 능하여 학명으로도 이름이 높았던 달원(達源)은 임진왜란 때 함경도에서 정문부·최배천 등과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다.

 

지석영(池錫永)

1855(철종 6) ∼ 1935. 의사 · 국어학자.

〔생 애〕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공윤(公胤), 호는 송촌(松村). 서울 낙원동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의학교육을 받은 일은 없었으나 일찍부터 서학 ( 西學 )을 동경하여 중국에서 번역된 서양의학책을 탐독하였는데, 특히 관심을 둔 것은 영국인 제너(Jenner,E.)의 종두법(種痘法 : 천연두 예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1876년(고종 13) 병자수호조약이 일본과 체결되면서 그 해 수신사로 지석영의 스승인 박영선(朴永善)이 가게 되어 그에게 일본에서 실시되고 있는 종두법의 실황을 조사하도록 간청하였다. 그래서 박영선은 오다키(大瀧富川)에게 우두법을 배우고 구가(久我克明)의 ≪ 종두귀감 種痘龜鑑 ≫ 을 얻어다 전해주었다.

〔행 적〕 그 뒤 1879년 일본해군이 세운 부산의 제생의원(濟生醫院)에 가서 원장 마쓰마에(松前讓)와 군의(軍醫) 도즈카(戶塚積齊)로부터 2개월간 종두법을 배우고 두묘(痘苗 : 우두의 원료)와 종두침 두 개를 얻어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처가가 있는 충주에 들러 40여 명에게 우두를 놓아주었다.

이것이 우리 나라 사람에 의한 공개적인 종두법 실시의 시초이다. 이듬해 서울로 돌아와 종두를 실시하여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두묘의 공급이 잘 안 되었으므로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 ( 金弘集 )의 수행원으로 일본 도쿄에 건너가서 그곳 위생국 우두종계소장(牛痘種繼所長) 기쿠치(菊池康庵)에게 종두기술을 익히고 두묘의 제조, 저장법과 독우(犢牛 : 송아지)의 사양법(飼養法) · 채장법(採漿法)을 배운 뒤 두묘 50병(柄)을 얻어가지고 귀국하였다.

서울에서 두묘를 만들어 종두를 보급하면서 군의 마에다(前田淸則)로부터 서양의학을 배웠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일본에서 종두법을 배워왔다는 죄목으로 체포령이 내렸다. 그는 재빨리 피신하였으나 종두장은 난민들의 방화로 불타버렸다. 정국이 바뀌면서 서울로 돌아와 종두장을 재건하였다.

그는 전라도어사 박영교(朴永敎)의 초청을 받아 전주에 우두국을 설치하고 종두를 실시하면서 종두법을 가르쳤고, 이듬해에는 충청도어사 이용호(李容鎬)의 요청에 의하여 공주에도 우두국을 만들었다.

≪ 한성순보 漢城旬報 ≫ 에 외국의 종두에 관한 기사가 실려 종두법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렇게 종두법의 보급에 진력하면서도 1883년 문과에 등제(登第)하여 성균관전적과 사헌부지평을 역임하였다.

1885년 그 동안 쌓은 지식과 경험을 종합하여 ≪ 우두신설 牛痘新說 ≫ 을 지어냈다.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 처음 나온 우두법에 관한 저서로 2권으로 되어 있는데, 제너의 우두법 발견을 비롯하여 우두의 실시, 천연두의 치료, 두묘의 제조, 독우의 사양법 · 채장법이 간명하게 서술되어 있다.

같은 해 우두교수관으로서 전라도지방을 순회, 시종(施種)을 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고, 1887년 전라남도 강진의 신지도 ( 薪智島 )에 유배되어서도 여전히 우두를 실시하였다.

1892년 유배에서 풀려 서울로 돌아온 그는 이듬해 우두보영당(牛痘保 叛 堂)을 설립하고 많은 어린이들에게 시종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과 함께 위생국의 종두를 관장하게 되어 떳떳하게 우두를 보급할 수 있었다.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면서 형조참의 · 승지를 거쳐 동래부사를 지냈는데 임지에서도 우두를 실시하기를 잊지 않았다.

학부대신에게 의학교의 설립을 제의하였고, 1899년 의학교가 설치되자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일본인 교사들을 초빙하고 일본 의학책을 번역하여 가르치게 하였다. 1902년 그의 제창으로 훈동(勳洞)에 의학교의 부속병원이 설립되었고, 이듬해 의학교는 첫 졸업생 19명을 배출했다.

그는 ≪ 황성신보 皇城新報 ≫ 에 〈 양매창론 楊梅瘡論 〉 을 발표하여 매독의 해독을 대중에게 알렸고, 온역(瘟疫 : 봄철에 유행하는 급성전염병) · 전염병 · 양매창(楊梅瘡 : 악성 매독으로 인한 발진)의 예방법을 만들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1907년 의학교가 폐지되고 대한의원의육부(大韓醫院醫育部)로 개편됨과 함께 학감에 취임하였다. 1910년에 사직하였으니 11년 동안 의학교육에 헌신한 셈이다.

〔업 적〕 그의 업적은 근대의학의 도입에만 그치지 않았다. 1882년에 올린 상소에서 급속한 개화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이를 위하여 일종의 훈련원을 세우자고 주장하였다.

그곳에 당시의 세계정세를 알 수 있는 책과 외국의 과학기술에 관한 책들을 모으고, 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물을 수집하여 전국에서 뽑아온 젊은이들에게 보이고 가르치자는 야심적인 계획이었다.

이처럼 일찍이 개화에 눈을 뜬 그는 1890년대 후반에는 독립협회의 주요 회원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갖가지 토론회에 참가하여 의견을 발표하였으며, 그럼으로써 시야를 넓혀갔다.

다른 회원들이 대부분 서양문물이라면 무조건 받아들이자는 태도로 쏠려 있던 때 좀 다른 생각을 가졌던 듯하다. 예컨대, 그는 음력을 주로 쓰되 그 옆에 양력을 아울러 표시하자는 의견이었다.

또한, 개화가 늦어지는 이유가 어려운 한문을 쓰기 때문이라 보고 1905년 널리 교육을 펴기 위하여 알기 쉬운 한글을 쓸 것을 주장하였다. 더욱이 주시경 ( 周時經 )과 더불어 한글의 가로쓰기를 주장한 선구자였다. 1908년 국문연구소 위원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한글로 한자를 해석한 ≪ 자전석요 字典釋要 ≫ 를 지어냈다.

그의 주장은 인정을 받아 많이 받아들여졌고, 고종은 그의 공을 인정하여 태극장 ( 太極章 ) · 팔괘장 ( 八卦章 ) 등을 내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일합병을 당하자 모든 공직을 버렸다. 일본의 간곡한 협조요청이 있었으나 초야에 묻혀 살다가 80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지운영(池雲英)

 1852(철종 3) ∼ 1935. 조선 말기 및 근대 초기의 문인화가. 본관은 충주(忠州). 초명은 운영(運永). 호는 설봉(雪峰) 또는 백련(白蓮). 종두법 시행의 선구자인 석영(錫永)의 형이다.

김정희 ( 金正喜 )의 제자로 여항문인(閭巷文人)이었던 강위 ( 姜瑋 )의 문하에서 시문 등을 배웠다. 1870년대말에 청계천 광교부근에 살던 역관 ( 譯官 )과 의관(醫官) 등 기술직 중인 ( 中人 )들이 강위를 맹주(盟主)로 하여 맺은 육교시사 ( 六橋詩社 )의 동인으로 활약하였다.

1880년대 초반에 통리군국사무아문 ( 統理軍國事務衙門 )의 주사 ( 主事 )로 개화정책을 구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 후에 김옥균 ( 金玉均 )을 암살하기 위하여 일본에 건너갔다가 미수에 그쳤다.

일본경찰에 붙잡혀 강제귀국당하여 원악지(遠惡地)로 유배당하였다. 1895년 유배생활에서 풀려나 상소문을 올려 재기를 꿈꾸었지만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은둔하여 시와 그림에 몰두하게 되었다.

1921년 서화협회(書 怜 協會) 정회원으로 제1회서화협회전람회에 출품하였으며, 1922년에는 제1회조선미술전람회에 〈 산인탁족도 山人濯足圖 〉 를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옛 그림들로 임모(臨模)하여 기량을 길렀으며, 특히 산수인물을 잘 그렸다. 그의 화풍은 대체로 중국풍이 짙은 북종(北宗) · 원체적(院體的)인 경향을 띠고 있으며, 독창적인 화풍은 형성하지 못하였으나,

인물과 산수를 적절히 배치하는 구성력은 뛰어났다. 대표작으로 개인 소장의 〈 후적벽부도 後赤壁賦圖 〉 · 〈 남극노인수성도 南極老人壽星圖 〉 · 〈 동파선생입기도 東坡先生笠 均 圖 〉 등이 있다.

 

지홍문

한말의 의병장 홍문은 1907년(숙종 1) 군대 해산령이 내리자 의병을 일으켜 강화 갑곶(江華甲串)에서 일본군 1개 중대를 격멸했다.

 

지청천(池靑天)

1888(고종 25)∼1957. 독립운동가·정치인. 호는 백산 ( 白山 ). 본명은 대형(大亨), 일명 이청천(李靑天). 서울 출신. 한말 무관학교 ( 武官學校 )에 입교, 2학년 때 1, 2년생 40여 명과 함께 정부유학생으로 동경육군중앙유년학교(東京陸軍中央幼年學校)에 들어갔다.

이 때는 본명인 지대형을 사용하였다. 유년학교는 뒤에 일본사관학교 예과가 된 3년제이며, 다시 본과 2년이 있는데, 유학 도중 한일합병이 되어 본과에는 일반 학생으로 편입하는 곤경을 겪었다.

제26기생으로 1913년 졸업, 중위가 되면서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일무력항쟁을 지도하기 위해 일본의 병서와 군용지도를 가지고 신흥무관학교 ( 新興武官學校 )를 찾았다.

독립군 간부양성에 진력하고 1920년 상해임시정부 산하의 만주군정부(滿洲軍政府)· 서로군정서 ( 西路軍政署 )의 간부가 되었다. 같은 해 10월 일본이 혼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하고 청산리싸움에서 대패하자, 일본군은 무차별 살육을 감행하였다.

이에 서로군정서를 이끌고 간도성(間島省) 안도현(安圖縣) 밀림으로 이동, 서일 ( 徐一 )· 김좌진 ( 金佐鎭 ) 등과 대한독립군단 ( 大韓獨立軍團 )을 조직하고 군단의 여단장이 되었는데, 이때 이청천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921년 6월 소련혁명군과의 마찰로 흑하사변 ( 黑河事變 )이 났을 때 포로가 되었으나, 북만주로 탈출하여 고려혁명군 ( 高麗革命軍 )을 조직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북만주에는 신민부 ( 新民府 )· 대한국민단 ( 大韓國民團 )· 대한의용군사회 ( 大韓義勇軍事會 )가 생기게 되고, 남만주에는 서로군정서가 모태가 되어 대한통군부(大韓統軍部)가 조직되었다.

그 뒤 양기탁 ( 梁起鐸 )· 오동진 ( 吳東振 ) 등과 함께 대한통군부를 개편하여 정의부를 조직, 군사위원장 겸 사령장이 되었고, 1925년에는 남·북만주의 두 단체를 통합하여 국민부를 만들었다.

김좌진이 저격당한 뒤, 1930년 7월 한국독립당 ( 韓國獨立黨 ) 창당에 참여, 군사위원장이 되었으며, 별도로 한국독립군을 만들어 총사령관이 되었다.

1932년에는 동아혈성동맹(東亞血成同盟)의 간부로서 각지의 항일단체를 규합하는 데 힘썼다. 1933년 치치하얼(齊齊哈爾)에 잠입하여 항일지하운동을 지휘하면서 한중연합군의 총참모장이 되었으나, 중국 공산당의 압력으로 무장해제 당한 뒤, 같은 해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국인 특별반을 만들어 책임자로 활약하였다.

1940년 9월 17일 임시정부가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자 사령관이 되어 1945년 환국할 때까지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환국 후 26개 청년단체를 통합한 대동청년단 ( 大同靑年團 )을 창설하여 단장이 되었다.

제헌국회의원과 초대 무임소 장관을 역임하고 제2대 국회의원, 민주국민당의 최고위원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종두법의 池錫永(지석영) 선생의 일화.

 

지석영의 자는 공윤(公胤), 호는 송촌(松村), 본관은 충주로 1882년에 식년문과 을과에 급제했다. 전적과 지평을 역임하고 1885우두신설(牛痘新設)을 저술했다. 1886년 장령으로 시폐를 논하다가 1887년 전라도 강진현 신지도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1892년에 석방된 후 형조참의, 승지를 거쳐 1895년 동래부사 및 부산재판서 판사가 되었다. 동래의 동래 부사 재임시 선정을 베풀었다.

 

그뒤 그는 경성의학교 교장과 학부내의 국문연구소가 설치 되자 그 연구원이 되었으며, 1906년에는 자전석요를 집필하는 등 국문연구에도 공이 컸다. 그가 서울에서 193521일 별세하자 사회장으로 장의가 집행되었으며 그의 공덕 비가 1988년에 동래 금강공원 안에 동래부사 송촌 지석영선생 공덕비란 이름으로 세워졌다. 그의 개화의지를 높이 산 것이다.

 

그는 1876년 수신사의 수행으로 일본에 갔던 그의 스승 박영선으로부터 일본인의 종두귀감을 전해 받고 천연두 예방접종 종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제로 종두를 얻는 방법과 접종하는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그는 1879년 부산에 있는 일본인 병원인 제생병원으로 와서 종두접종 방법을 배워 그해 겨울 충 주 덕산면의 그의 처가 가족들에게 종두를 최초로 실시했다. 그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종두 시술이었다.

 

 

출처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36

載(재),大(대)

40

煥(환),黙(묵)

44

秀(수)

37

鉉(현),鎬(호)

41

培(배),喆(철)

45

烈(열)

38

求(구),永(영)

42

善(선)

46

均(균)

39

根(근),植(식)

43

泰(태)

47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충주 지씨는 남한에 총 28,312가구, 118,41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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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8 봉산지씨:봉주지씨(智) 청남 14-08-30 3075
충주 지.jpg 충주지씨(池) 청남 14-08-30 4438
686 청주준씨(俊) 청남 14-08-30 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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