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秦(진주진씨)
본관(本貫): 진주(晉州)
시조(始祖): 진상(秦商)
유래(由來):
진주 진씨(晋州秦氏)의 원조는 공자의 제자로 우리나라 문묘에 배향된 진상(秦 商)이다. 문헌에 의하면 상의 후손인 욱(郁)이 고려조에서 박사보리공신(博士輔理功臣)으로 진주군에 봉해졌으므로 그를 시조로 하고, 진주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욱(郁)의 둘째 아들 계백은 고려 공민왕 때 찬성사(贊成事)로서 홍 윤·최만생 등과 정사(政事)를 논하다가 그들이 모반을 계획하자 화를 면하기 위해 제주로 피거함으로써 제주(濟州)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진주 진씨는 계백의 증손대에서 인규(仁規)를 파조로 하는 판포파와 인한(仁漢)을 파조로 하는 명월파, 의한(義漢)을 파조로 하는 납읍파 등 거주지를 중심으로 크게 3파로 갈라져 세계를 이어왔다.
그러나 근대에 와서 판포파와 납읍파는 진씨에 관한 문헌을 조사하여 풍기 진씨의 후예라는 사실이 판명되어 본관을 풍기(豊基)로 정정했다고 하며, 둘째인 명월파는 아직도 진주를 관향으로 고수하고 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진언백(秦彦伯)
봉훈랑 인한(仁漢)의 손자 언백(彦伯)이 조선조에서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과 제주 상진무 등을 지내고 천문·지리에 박통하여 크게 이름을 날렸다.
진경필
경팔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훌륭한 가문을 널리 알렸다.
진온, 잔석주, 진용하, 진호, 진원호
학자로 유명하였다.
진치만
치만은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진원호(秦元湖)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역임했다.
진성국(秦聖國)
한말에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진철주(秦喆周)
항일지사로 유명하였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진주 진씨는 남한에 총 1,184가구, 4,9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전 <한미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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