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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차씨(車)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車(연안차씨)

 

 

본관(本貫): 연안(延安)

시조(始祖): 차무일(車無一)

유래(由來):

 

연안(延安)을 단본(單本)으로 하는 차씨(車氏)는 고대(古代) 중국(中國)의 명군(名君)인 황제(黃帝: 姓은 姬, 諱는 軒轅)의 후예이다.

우리나라 차씨(車氏)의 연원(淵源)은 황제의 후손 사신갑(似辛甲)이 중국에서 고대조선(古代朝鮮)으로 망명하여 평양(平壤) 일토산(一土山) 아래에 정착하여 살며 왕조명(王祖明)으로 변성명하였고, 그 후손 왕 몽(王 蒙)이 정치적 화(禍)를 피하기 위하여 전(田)·신(申) 등으로 개성(改姓)하였다가 후에 차무일(車無一)로 변성명하여 차씨(車氏)의 시원(始源)을 이루게 되었다.

신라(新羅) 초기에 승상(承相)을 지냈던 차무일(車無一)의 아들 8형제중 일곱째 차신을(車神乙 : 본명 주림)이 차씨(車氏)의 성(姓)을 계승하여, 후손대에서 25명의 승상(承相)이 배출되어 명문대가(名門大家)의 기틀을 다졌으며, 차무일(車無一)의 32세손 차건신(車建申)의 아들 차승색(車承穡)은 신라 애장왕(哀莊王 : 제40대왕, 재위기간 : 800∼809)의 서삼촌(庶三寸) 김언승(金彦昇 : 헌덕왕)이 난을 일으켜 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하자 아들 공숙(恭叔)과 함께 전왕(前王)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헌덕왕(憲德王)을 암살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자, 황해도 유주(黃海道儒州 : 현 신천군 문화면)로 달아나 숨어 살며 조모(祖母 : 조부는 승상 儉夫)의 성(姓)인 양씨(楊氏)를 모방하여 류씨(柳氏)로 변정하고 자기 이름을 류 환(柳 桓)으로, 아들 공숙(恭叔)은 류 숙(柳 淑)으로 개명하였고, 그의 6세 류차달(柳車達)의 아들 대(代)에서 류씨(柳氏)와 차씨(車氏)로 갈라졌다.

대승공(大丞公) 류차달(柳車達 : 본명은 柳海)은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남정(南征)하여 후백제(後百濟)를 칠 때 부호로서 그가 수레 천 대를 만들고 창고에 있던 양곡을 실어 군량미로 보급하여 줌으로서 왕건이 후삼국(後三國) 통일(統一)의 위업을 달성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리하여 태조(太祖) 왕건이 그의 공로를 크게 치하하며 벽상2등공신(壁上二等功臣)으로 대승(大承)에 봉착하고 이름도 차달(車達)로 하사(下賜)하였다.

그 후 대승공 차달의 아들 형제 중 장남 효전(孝全)에게는 <차씨(車氏)의 홍렬은 잊을 수 없다>하며 상조(上祖)의 본성(本姓)인 차씨(車氏)의 성(姓)을 잇게 하고 식읍(食邑)을 하사하면서 대광백(大匡伯) 연안군(延安君)에 봉했으며, 차남 효금(孝金)은 소윤(少尹)의 벼슬과 문화군(文化君)에 봉하여 류씨(柳氏)의 성을 계전하도록 하였다.

 

가문의 중요 인물

 

차약송(車若松)

∼ 1204(신종 7). 고려 후기의 장군. 본관은 연안 ( 延安 ). 직사관(直史官) 거수(擧首)의 아들이다. 일찍이 아버지가 예언하였던 대로 형 약춘(若春)은 문관으로 입신(立身)하였고, 약송은 장군이 되었다.

금위에 들어가서 명종 초에 낭장 ( 郎將 )을 거쳐 장군이 되었으며, 내시다방(內侍茶房)을 겸직하였다. 이것이 무관이 내시다방을 겸직하게 된 시초가 되었다. 신종 초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거쳐 수사공 참지정사(守司空參知政事)에 이르렀다.

기홍수 ( 奇洪壽 )와 더불어 중서성 ( 中書省 )에 앉아서 공작과 모란 기르는 문답을 하였으므로 이때 사람들이 “ 재상의 직책은 도(道)를 논하고 나라를 경륜함에 있는데, 다만 화조(花鳥)를 논하고 있으니 어찌 백관의 의표(儀表)가 되겠느냐. ” 라고 조롱하였다. 수태위중서평장사(守太尉中書平章事)에 이르러 죽었다.

 

차척(車倜)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관. 승선 ( 承宣 ) · 추밀원부사 · 어사대부 ( 御史大夫 ) · 참지정사 ( 參知政事 )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1215년(고종 2)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郎) 윤세유 ( 尹世儒 )가 최충헌 ( 崔忠獻 )에게 의지하여 권세를 잡고, 평소 감정이 있던 우복야 정진(鄭 貰 )을 제거하기 위하여 왕에게 무고하기를, “ 정진이 그 아우 숙첨(叔瞻)과 함께 반역을 도모하려 한다. ” 라고 하자, 왕이 그를 최충헌에게 보내어 은밀히 타일러 윤세유를 잡아 국문하게 하니 무고죄로 유배되었다.

다음해 거란의 유종(遺種)인 금산왕자(金山王子)와 금시왕자(金始王子)가 침입하여오자 중군이 지원군을 요청하므로, 전군병마사(前軍兵馬使)가 되어 안주 태조탄(太祖灘)에서 적을 막았으나 대패하였다.

일찍이 최충헌에게 붙어 아첨을 잘하여 권세를 누리다가, 1220년 최우 ( 崔瑀 )의 미움을 받아 나주에 유배되었다. 그뒤 최우가 비밀히 소환하여 추밀원부사 · 어사대부를 제수하고, 또 자신이 사랑하는 명기 옥기향(玉肌香)을 주어 위로하였다. 죽은 뒤 그의 집으로 봉은사 ( 奉恩寺 )를 만들었다.

 

차원부

1320(충숙왕 7) ∼ .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 · 화가. 본관은 연안 ( 延安 ). 자는 사평(思平), 호는 운암 ( 雲巖 ). 지방어사(知防禦使) 종로(宗老)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한 이후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간의대부 ( 諫議大夫 )에 이르렀다. 당대의 대학자인 정몽주 ( 鄭夢周 ) · 이색 ( 李穡 ) 등과 함께 명성을 떨치던 유학자로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고려 말 정치가 문란하여지자 수습할 수 없음을 알고 관직을 사퇴한 뒤 평산 ( 平山 )의 수운암동(水雲巖洞)에 은거하였다. 이성계 ( 李成桂 )가 요동(遼東)을 공격하게 되어 그 계략을 묻자 출병을 반대하였다.

뒤에 위화도회군으로 조선이 개국하였을 때 태조가 공신으로 책록하려 하였으나 굳이 사퇴하고, 이어 정언 ·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등의 벼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찍이 정도전 ( 鄭道傳 ) · 하륜 ( 河崙 ) 등이 차씨(車氏) 외손의 서속(庶屬)이었음을 사실대로 족보에 기재하여 그들의 원한을 받아오던 중 평산으로 돌아가려고 송원(松原)에 이르렀을 때, 숙적 하륜 등이 보낸 자객에게 가족 및 일당 80여 인과 함께 살해되었다.

당시 고려에 충성을 다하던 두문동 ( 杜門洞 ) 72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림을 잘 그렸으며, 특히 매화에 뛰어났다. 세종 때 황보 인(皇甫仁)의 청원으로 신원되어 시중에 추증되고, 순천의 운암사(雲巖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차운혁(車云革)

한편 원부(原 )의 조카 운혁(云革)은 경성(鏡城)에 살다가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정휴명(鄭休明)·박성장(朴成章)·조 두(曺 ) 등과 더불어 이시애 납치 작전을 수행하다가 적에게 잡혀 단천(端川)에서 살해당하여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책록되고 「삼강행실록」에 기록되었다.

 

차식(車軾)

1517(중종 12) ∼ 1575(선조 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 ( 延安 ). 자는 경숙(敬叔), 호는 이재( 蓬 齋). 보인(寶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계생(繼生)이고, 아버지는 광운(廣運)이며, 어머니는 최지(崔漬)의 딸이다. 부인은 아주 이씨(牙州李氏)로, 부인과의 사이에 5남 3녀를 두었다. 천로(天輅)와 운로(雲輅)의 아버지이다.

1537년(중종 32)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43년(중종 38) 식년문과 급제하였다. 급제 후 내외 관직을 두루 지냈다. 중앙관직으로는 성균관 · 호조 · 예조 · 봉상시 · 교서감 · 승문원 등의 좌랑 · 주부 · 교리 · 교감을, 지방관직으로는 통진 · 항주 · 해주 · 평해 · 고성의 현감 · 군수를 역임하였다.

1575년(선조 8) 평해군수(平海郡守)를 지내다가 상한(傷寒)으로 사망하였다. 유몽인(柳夢寅)이 쓴 신도비문에 의하면, 그는 서경덕 ( 徐敬德 )의 문인으로 경사에 널리 통했으며, 특히 문장에 능하였다고 한다.

아들인 천로 · 운로와 더불어 송나라의 삼소(三蘇 : 蘇洵 · 蘇軾 · 蘇轍)에 비유되기도 했다. 문집 5, 6권을 남겼으나 병화에 소실되었다고 한다.

 

차천로(車天輅)

1556(명종 11) ∼ 1615(광해군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 ( 延安 ). 자는 복원(復元), 호는 오산(五山) · 귤실(橘室) · 청묘거사(淸妙居士). 송도 ( 松都 ) 출신. 고려의 간의대부 원부(原 琅 )의 6대손이며, 계생(繼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광운(廣運)이다. 아버지는 식(軾)이며, 어머니는 이계천(李繼天)의 딸이다. 서경덕 ( 徐敬德 )의 문인이다.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개성교수(開城敎授)를 지냈고, 1583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86년 정자 ( 正字 )로서 고향 사람 여계선(呂繼先)이 과거를 볼 때 표문(表文)을 대신 지어주어 장원급제시킨 일이 발각되어 명천에 유배되었다가 1588년 문재가 있어 용서되었다.

이듬해 통신사 황윤길 ( 黃允吉 )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그 때 얼마 되지 않은 기간이었으나 4,000 ∼ 5,000수의 시를 지어 일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또 명나라에 보내는 대부분의 외교문서를 담당, 문명이 명나라에까지 떨쳐 동방문사(東方文士)라는 칭호를 받았다.

특히, 명사(明使)들이 문장의 속작을 실험하기 위해 미리 준비한 시에 거침없이 수응(酬應)하여 이름을 더욱 떨쳤다.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을 거쳐 1601년 교리가 되어 교정청 ( 校正廳 )의 관직을 겸임했고, 광해군 때 봉상시첨정을 지냈다.

한호 ( 韓濩 ) · 권필(權 億 ) · 김현성 ( 金玄成 )과 더불어 서격사한(書檄詞翰)이라 하였다. 특히 시에 능해 한호의 글씨, 최립(崔 凌 )의 문장과 함께 ‘ 송도 삼절(松都三絶) ’ 이라 일컬어졌다.

아버지 식, 아우 운로(雲輅)와 함께 세인(世人)으로부터 ‘ 3소(三蘇) ’ 라 불렸다. 가사 ( 歌辭 )와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서로 ≪ 오산집 五山集 ≫ · ≪ 오산설림 五山說林 ≫ , 작품으로 〈 강촌별곡 江村別曲 〉 등이 있다.

 

차운로(車雲輅)

1559(명종 14)∼1637(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이 연안 ( 延安 ). 자는 만리(萬里), 호는 창주(滄州). 계생(繼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광운(廣運)이고, 아버지는 호조좌랑 식(軾)이며, 어머니는 이계천(李繼天)의 딸이다.부인은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부인과의 사이에 3남2녀를 두었다. 형이 천로(天輅)이다. 사위가 조신준(曹臣俊)이다.

1580년(선조 13) 생원·진사 양시(兩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1583년(선조 16)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내직으로는 내자시정, 사옹원정, 공조정랑, 시강원필선, 외직으로는 개성부교수, 어천도찰방, 풍기·금성의 군수, 황간현감, 금성부사, 봉상시판관, 첨정 등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개성부교수 당시에는 홍이상(洪履祥, 유수), 이시정(李時禎, 경력), 윤영실(尹英實) 등과 장원 합격자들의 모임인 사장원계(四壯元契)를 결성하기도 했다. 그는 당대 사람들로부터 비록 문벌(門閥)은 미천하였으나 문장이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문집인 ≪오산집 五山集≫을 남겼다. 묘소는 경기도 장단에 있다.

 

차전곤(車轉坤)

천로(天輅)의 아들 전곤(轉坤 : 군수를 지냄)과 서곤(瑞坤)도 모두 시서화(詩書畵)로 이름났다.

 

차좌일(車佐一)

1753(영조 29) ∼ 1809(순조 9). 조선 후기의 시인. 본관은 연안 ( 延安 ). 자는 숙장(叔章), 호는 사명자(四名子). 천로(天輅)의 6대손으로, 윤태(潤泰)의 아들이다. 어머니 백씨(白氏)가 그를 잉태하였을 때 하지장(賀知章)을 꿈에 보아 그의 자와 호를 따라 지었다 한다.

하지장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소식(蘇軾)의 흔적도 많다. 경사(經史)에 능통하고 서화나 음률 · 사예(射藝)에도 뛰어났으나, 특히 시를 잘하였다. 당대의 문장가였던 홍양호 ( 洪良浩 ) · 윤행임 ( 尹行恁 ) · 윤사국 ( 尹師國 ) · 정약용(丁若鏞) 등이 자리를 함께 하여 시를 지을 정도였다.

그러나 재주는 뛰어나지만 관직이 한미하여 만년에 만호 ( 萬戶 )라는 무관말직(武官末職)에 머물렀던만큼 세상에 대한 불평의 뜻이 많았다. “ 살아서는 취향백(醉鄕伯), 죽어서는 수문랑(修文郎) ” 이라는 그의 시는 시주(詩酒)에 경도되었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또 세세생생(世世生生) 이 나라에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하소연은 제도에 대한 불만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한다. 가정적으로도 불행하여 동생과 두 아들이 죽은 뒤 더욱 시주에 탐닉하고 방약무인하였다.

천수경 ( 千壽慶 ) · 장혼 ( 張混 ) · 왕태(王太) · 최북 ( 崔北 ) 등과 함께 송석원시사 ( 松石園詩社 )를 결성하여 비분과 고뇌를 시로 풀었다. 그의 시는 유재건(柳在建)이 편한 ≪ 풍요삼선 風謠三選 ≫ 과 일본인 아오야마(靑山好惠)가 편한 ≪ 명가시집 名家詩集 ≫ 에도 실려 있으며, 시집으로는 ≪ 사명자시집 ≫ 이 전한다.

 

차충량(車忠亮)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의사(義士). 본관은 연안 ( 延安 ). 자는 여서(汝恕). 선천 출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나 이듬해 화의가 성립되자 분개, 청태종을 죽이고 명나라의 부흥을 돕고자 최효일 ( 崔孝一 )과 아우 예량(禮亮)을 중국으로 보내는 등 계획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거사 전에 탄로가 나 남별궁 ( 南別宮 ) 문 밖에서 살해되었다. 후일 병조참의에 추증되고, 의주의 현충사 ( 顯忠祠 )에 제향되었다.

 

차예량(車禮良)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의사(義士). 본관은 연안 ( 延安 ). 자는 여명(汝明). 호는 풍천(風泉). 선천 출신. 충량(忠亮)의 동생이다.

≪춘추좌씨전 春秋左氏傳≫에 밝았다. 병자호란 후 과거를 단념하고 고향에 숨어서 의주 ( 義州 )의 용사 최효일 ( 崔孝一 )과 함께 청태종을 살해하고 명나라를 위하여 원수를 갚을 것을 모의하였다. 논밭과 집을 팔아 큰 배를 사서 최효일을 등주 ( 登州 )에 보내어 제장(諸將)을 설득하여 심양(瀋陽)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심양에 들어가 친구이자 명나라 도독 심세괴(沈世魁)의 편장(偏將) 관귀(管貴)와 함께 그 곳에 숨어서 최효일과 내외로 협공하려 하였다.

그러나 최효일의 누이 아들인 장후건(張厚健)이 청나라 사자 ( 使者 )의 속임수에 빠져 개혁이 사전에 누설되어 관귀와 함께 살육당하였다. 숙종 때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의주의 현충사 ( 顯忠祠 )에 제향되었다.

 

차도선(車道善)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의 의병장·항일운동가. 함경남도 갑산출신. 일제의 침략세력이 점점 강화되자 이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먼저 일진회원을 암살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혀 북청군의 태양욱 ( 太陽郁 )과 함께 군읍민들을 교육시켰다.

1907년 11월 16일에 북청군 안산면장 주도익(朱道翼)을 암살하였다. 또, 홍범도 ( 洪範圖 )·송상봉(宋相鳳) 등과 의병을 모집하여 산포대(山砲隊)를 조직하였고, 같은해 11월 22일에 북청 후치령 ( 厚峙嶺 )에서 혜산진으로 가는 목재창고원·총기 호위병 2명과 경찰관 1명을 사살하고, 이튿날 일본 헌병과 호위병 2명 및 우편물 호위병을 사살하였다.

그 해 12월 중순에는 갑산 노루목에서 화물 호위병과 우편 호위병을 살해하고, 12월 26일에는 삼수읍성을 점거하고 혜산진과 갑산의 수비대와 3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적을 물리쳤다.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뒤 만주로 망명, 청년들을 모아 포수단 ( 砲手團 )을 조직하여 광복운동을 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차석보(車錫甫)

생몰년 미상. 언론인·독립운동가. 을사조약에 의하여 국권이 침해받게 되자 1908년 6월 ≪대동공보 大東共報≫를 발간, 언론을 통하여 독립투쟁을 폈다.

이보다 앞서 수만명의 동포가 거주하는 해삼위(海蔘威)에서 독립운동을 펴고자 연해주로 이동, 국민회 ( 國民會 ) 간부인 유진율 ( 兪鎭律 )과 합의하여 동포를 계몽하고 의식을 개발하여 국권회복운동에 결집시키기 위하여 ≪대동공보≫를 발간, 현지 동포와 본국 동포에까지 배포하기에 힘썼다. 편집인은 유진율이었고, 주필은 윤필봉(尹弼鳳)이었다.

 

차희식(車喜植)

1870(고종 7)∼1939. 독립운동가. 일명 봉습(鳳習, 奉習). 경기도 수원 출신. 1919년 4월 3일 차병한(車炳漢)·차병혁(車炳爀) 등과 수원군 장안면·우정면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1일 이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여듣고, 장안면사무소에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여 장제덕(張濟德)· 장소진 ( 張韶鎭 ) 등과 석포리 주민들에게 만세운동에 참여하도록 홍보하였다.

군중 200여명이 모인 장안면사무소에서 선두에 서서 투석과 몽둥이로 면사무소 건물을 부수고 공문서를 파기하였다. 점차 군중이 1,000여명으로 늘어나자, 다시 그들을 인근의 쌍봉산(雙峰山)으로 인솔하여 그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다.

이어서 차병혁· 차인범 ( 車仁範 ) 등과 함께 2,000여명으로 불어난 만세시위군중을 인솔하여 우정면사무소로 가서 그곳의 건물을 파괴하고, 집기류와 공문서를 파기하였다.

다시 석포리 이장 차병한의 제의로 화수리에 있던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고 방화하였는데, 그때 주재소 안에 있던 일본순사 가와바타(川端豊太郎)가 권총을 발사하며 뛰쳐나와 도망하자, 차인범 등과 추격하여 격살하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검거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9년 2개월만에 출옥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차이석(車利錫)

1881(고종 18) ∼ 1945. 독립운동가. 일명 서입환(徐立煥). 호는 동암(東岩). 평안북도 선천 출신. 1907년 평양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를 졸업한 뒤 신민회 ( 新民會 )에 가입, 안창호 ( 安昌浩 ) 등과 평안도에서 대성학교 ( 大成學校 )를 경영하며 인재 육성에 진력하였다.

1910년 12월 일제가 날조한 105인사건으로 1911년 1월에 잡혀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 · 1운동 때는 향리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4월에 상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의 기자로도 활약하였다.

같은 해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에 선임되었고, 1928년 3월 민족 진영의 독립 지사들을 한데 묶기 위해 한국독립당 ( 韓國獨立黨 )을 조직하고 그 주요 실무간부로 활동하였다. 이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홍보선전책자로 〈 한보 韓報 〉 · 〈 한성 韓聲 〉 등을 발행, 배포하는 등 당의 기본 강령 실천과 그 이념 전파에 진력하였다.

1933년 항저우(杭州)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어 대일투쟁 의욕을 드높이는 데 노력하였고, 임시의정원 부의장으로도 활약하였다.

대일전선통일동맹(對日戰線統一同盟)에 의한 5당(義烈團 · 新韓獨立黨 · 朝鮮革命黨 · 韓國獨立黨 · 美洲大韓人獨立黨) 통합을 통해 조선민족혁명당 ( 朝鮮民族革命黨 )이 조직될 때, 5당 통일에 주도적인 임무를 담당했던 김원봉 ( 金元鳳 ) · 김두봉(金枓奉) 등 의열단계가 임시정부폐쇄를 강력히 주장, 임시정부가 곤경에 처한 적이 있었다.

더욱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중 김규식 ( 金奎植 ) · 조소앙 ( 趙素昻 ) · 최동오 ( 崔東旿 ) · 양기탁 ( 梁起鐸 ) · 유동열 ( 柳東說 ) 등 5명이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 임시정부 자체가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이 때 송병조 ( 宋秉祚 )와 함께 김구 ( 金九 ) · 이시영 ( 李始榮 ) · 조완구 ( 趙琬九 ) · 김붕준 ( 金朋濬 ) · 양묵(楊墨) · 이동녕 ( 李東寧 ) · 안공근 ( 安恭根 ) · 엄항섭 ( 嚴恒燮 ) 등과 임시정부를 유지하기로 뜻을 모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계승, 발전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1935년 2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가 개최되어 주석에 이동녕이 선출되었을 때 비서장( 煉 書長)에 선출되어, 1945년까지 그 직책을 고수하며 독립운동에 진력하다 충칭(重慶)에서 죽었다. 1947년 김구의 주선으로 유해가 운구되어 서울 효창원에 이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연안 차씨(延安車氏)는 남한(南韓)에 총 37,092가구, 154,6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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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3 진주 진.jpg 진주진씨)秦) 청남 14-08-30 3623
692 여양 진.jpg 여양진씨(陳) 청남 14-08-30 5074
691 양산 진.jpg 양산진씨(陳) 청남 14-08-30 4833
690 삼척 진.jpg 삼척진씨(陳) 청남 14-08-30 4270
689 광동 정.jpg 광동진씨(陳) 청남 14-08-30 3549
688 봉산지씨:봉주지씨(智) 청남 14-08-30 3074
687 충주 지.jpg 충주지씨(池) 청남 14-08-30 4436
686 청주준씨(俊) 청남 14-08-30 2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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