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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채씨(蔡)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蔡(인천채씨)

 

 

본관(本貫): 인천(仁川)

시조(始祖): 채선무(蔡先茂)

유래(由來):

 

인천 채씨(仁川蔡氏)의 시조(始祖)는 채선무(蔡先茂)이다. 그의 선계(先系)는 문헌이 없어 상고(詳考)할 수 없으며 그는 고려(高麗) 때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使)에 추증되고 인천(仁川)에 세거(世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이 인천(仁川)을 관향(貫鄕)으로 하게 되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채신징(蔡愼徵)

신징(愼徵)이 나라에 공(功)을 세워 대장군(大將軍)을 거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올랐다.

 

채보문(蔡寶文)

보문(寶文)은 고려 의종(毅宗)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부 상서(禮部尙書) 등을 지냈으며 학문(學問)이 뛰어나 문명을 날렸고, 뒤에 추밀원사(樞密院使)·태자빈객(太子賓客)·지제고(知制誥)를 거쳐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역임하였고 금성백(錦城伯)에 봉해졌다.

 

채귀하(蔡貴河)

생몰년 미상. 고려 말기의 문신 · 학자. 본관은 인천(仁川). 호는 다의당(多義堂). 달성 출신. 아버지는 형부상서(刑部尙書) 원길(元吉)이며, 어머니는 개성고씨(開城高氏)로 상장군 천서(天瑞)의 딸이다. 효성이 출천(出天)하였으며, 문학에 심취하여 영양(永陽)의 정몽주 ( 鄭夢周 )와 경전(經傳)을 강습(講習)하고 도의 ( 道義 )를 논변하였다.

일찍이 문과급제하여 벼슬이 호조전서(戶曹典書)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고 정몽주가 선죽교 ( 善竹橋 )에서 살해되자, 동지들과 함께 부조현(不朝峴)에 관복을 걸어놓고 두문동 ( 杜門洞 )으로 들어갔다. 이른바 두문동72현(賢)의 한 사람이 되었다.

다음해 평산 ( 平山 )의 다의현(多義峴)에 옮겨 집을 ‘ 다의당 ’ 이라 이름하고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세상에서는 두문동 72현을 백이숙제(伯夷叔齊)에 비하여 그들의 충절을 찬양하였다.

1740년(영조 16) 영조는 개성에 나가서 그들의 충의를 가상하게 여겨 고려충신부조현(高麗忠臣不朝峴)의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시호는 정의(貞義)이다. 저서로는 ≪ 다의당실기 ≫ 가 있다.

 

채수(蔡壽)

1449(세종 31)∼1515(중종10). 조선 중기의 문신·중종반정공신.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기지(耆之), 호는 나재(懶齋). 영(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필선 윤(綸)이고, 아버지는 남양부사 신보(申保)이다. 어머니는 유승순(柳承順)의 딸이다.

1468년(세조 14) 생원시에 합격하고, 1469년(예종 1) 식년문과에 장원하여 사헌부감찰이 되었다. 1470년(성종 1) 예문관수찬이 된 뒤, 홍문관교리·지평·이조정랑 등을 역임하면서 ≪세조실록≫·≪예종실록≫의 편찬에 관계하였다.

1477년 응교가 되어 임사홍 ( 任士洪 )의 비행을 탄핵했으며, 승지를 거쳐 대사헌으로 있을 때 폐비 윤씨(廢妃尹氏 : 연산군 생모)를 받들어 휼양할 것을 청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벼슬에서 물러났다.

1485년 비로소 서용되어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가 하정사 ( 賀正使 )· 성절사 ( 聖節使 )로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성균대사성 등을 거쳐 호조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이후 줄곧 외직을 구하여 무오사화를 피하였다. 1499년(연산군 5) 이후 예조참판·형조참판·평안도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갑자사화 때는 앞서 정희대비(貞熹大妃)가 언서(諺書)로 적은 폐비 윤씨의 죄상을 사관 ( 史官 )에게 넘겨준 것이 죄가 되어 경상도 단성으로 장배(杖配)되었다가 얼마 후 풀려났다.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여기에 가담,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인천군(仁川君)에 봉군되었다.

그 뒤 후배들과 함께 조정에 벼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경상도 함창(咸昌 :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에 쾌재정(快哉亭)을 짓고 은거하며 독서와 풍류로 여생을 보냈다. 사람됨이 총명하고 박람강기하여 천하의 서적과 산경(山經)· 지지 ( 地誌 )·패관소설(稗官小說)에까지 해박하였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시문에는 특히 뛰어나 어려서부터 문예로 이름을 얻을 정도로 당대의 재사였다. 그러나 성격이 경망되고 행동이 거칠고 경솔하여 독실한 유학자는 못 된 데다가, 1511년(중종 6) 〈설공찬전 薛公贊傳〉이라는 패관소설을 지어 윤회화복을 말하다가 사림의 비난을 받아 불태워지기까지 하였다.

김종직 ( 金宗直 )에게 종유(從遊)하고, 특히 성현 ( 成俔 )과 교제가 깊었다. 사신으로 북경을 내왕하는 길에 요동명사(遼東名士)이던 소규(邵圭)와도 친교를 맺었으나, 당시 새로이 등장하던 사류(士類)와는 잘 화합하지 못하였다.

1703년(숙종 29) 함창의 사림에 의하여 그의 고장에 임호서원 ( 臨湖書院 )이 건립되고 표연말 ( 表沿沫 )· 홍귀달 ( 洪貴達 ) 등과 함께 제향되었다. 저서로 ≪나재집≫ 2권이 있다. 좌찬성에 추증되고,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채무일(蔡無逸)

1496(연산군 2) ∼ 1556(명종 11). 조선 중기의 문신 · 문인 · 화가.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거경(居敬). 호는 일계(逸溪). 함창 출생. 신보(申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국공신 ( 靖國功臣 ) 지중추부사 수(壽)이고, 아버지는 전생참봉(典牲參奉) 윤권(胤權)이며, 어머니는 부림군(富林君) 식(湜)의 딸이다.

1522년(중종 17) 생원이 되었다. 그 당시 고모부인 김안로 ( 金安老 )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김안로는 그가 대과에 급제하면 자기에게 방해될 것을 두려워하여 대간들을 사주하여 그를 진우 ( 陳宇 )의 일당으로 몰아서 1534년 남해로 귀양을 가게 하였다.

김안로가 실각한 뒤인 1537년 귀양에서 풀려나, 1540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정언 · 좌랑을 지냈다. 1544년 부안현감으로 있을 때 중종이 사망하였는데, 그림 재주에 뛰어난 그가 선화(善 怜 )로 천거되어 왕명을 받고 선왕인 중종의 화상을 그려 바쳤다.

이로써 이조정랑에서 헌납이 되었고, 왕명을 받아 간의 ( 簡儀 )를 수리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그 기술이 너무나 뛰어나므로 탄복하였다. 경사(經史)와 역(易)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서화 · 음률 · 의학 · 복서 ( 卜筮 )에도 뛰어나 명성이 높았다.

특히 중종대에 선비로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풀벌레그림에는 가장 저명하였다. 벼슬이 한성서윤에 이르렀다. 함창의 임호서원 ( 臨湖書院 )에 배향되었다.

 

채응린(蔡應麟)

학자(學者)로 유명.

 

채지홍(蔡之洪)

1683(숙종 9) ∼ 1741(영조 17).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군범(君範), 호는 봉암(鳳巖) · 삼환재(三患齋) · 봉계(鳳溪) · 사장와(舍藏窩).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영용(領用)이며, 어머니는 유씨(柳氏)로 승주(承胄)의 딸이다. 16세 때 권상하 ( 權尙夏 )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남달리 뛰어나 말을 배우기 시작하자마자 글자를 가르치면 이를 해득했으며, 어머니가 〈 등왕각서 冀 王閣序 〉 를 구수(口授)하면 단번에 암송하는 재질이 있었다. 8세에 시를 짓기 시작했고, 또한 ≪ 상서 尙書 ≫ 기삼백(朞三百)의 주(注)를 통해(通解)했다고 한다.

권상하의 문하에 들어가서는 스승으로부터 남다른 총애를 받았으며, 동문인 한원진 ( 韓元震 ) · 윤봉구 ( 尹鳳九 ) · 이간 ( 李柬 ) · 윤혼(尹 鹽 ) 등과 친교, 학문을 강론하였다. 스승의 영향으로 과거 공부에 뜻을 두지 않고, 위기학(爲己學)에 전념, 지행일치(知行一致)의 학문의 실천적 수행에 더욱 힘써, 당시 많은 학자들로부터 추앙받았다.

뛰어난 학행으로 암행어사 황구하 ( 黃龜河 )와 도(道)의 관찰사 등이 추천, 1718년(숙종 44) 왕자사부 ( 王子師傅 )로 임명받았으나 사퇴하였다. 그 후, 1721년(경종 1) 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았다.

신임사화로 노론이 실각하자 김일경 ( 金一鏡 ) 등 소론의 죄를 논척하는 소를 올리고, 구운산 ( 九雲山 )에 들어가 은거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1725년(영조 1) 노론이 다시 집권하자 세자익위사부수(世子翊衛司副率)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민진원 ( 閔鎭遠 )의 강력한 요청으로 경연관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있다가 역시 사퇴하였다.

그 뒤 빙고별제(氷庫別提)로 다시 기용되고 몇 개월 뒤 부여현감으로 나갔다가 사퇴하였다. 1728년 이인좌 ( 李麟佐 )의 난이 일어나자 변희하(卞熙夏) 등 고을 선비들과 함께 격문을 써 붙여 적도(賊徒)들에 가담하는 자들을 회유하는 한편, 의병을 모집하던 중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중지하였다.

그 해 가을 청산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부친 상을 당해 취임하지 않았다. 1740년 형조좌랑에 임명되고, 익위사사어(翊衛司司禦)를 거쳐 공홍도도사(公洪道都事)에 취임했다가 사퇴하고 귀향, 그 이듬해 죽었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했으며, 당시 심성론 ( 心性論 )으로 유학계가 호락논쟁 ( 湖洛論爭 )을 벌일 때 한원진과 함께 호론에 속하였다.

또한, 경학 · 예학을 비롯, 역사 · 천문 · 지리 · 상수(象數) 등에도 박통하였다. 저서로는 ≪ 봉암집 鳳巖集 ≫ 8책을 비롯, ≪ 성리관규 性理管窺 ≫ · ≪ 세심요결 洗心要訣 ≫ · ≪ 독서전보 讀書塡補 ≫ · ≪ 천문집 天文集 ≫ 등이 있다.

 

채기중(蔡基中)

1873(고종 10)∼1921. 독립운동가.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극오(極五). 호는 소몽(素夢). 일명 기중(基仲). 경상북도 상주 출신. 1910년대 국내에서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인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대한광복회를 결성, 활약하였다.

1913년에 유창순 ( 庾昌淳 )·유장렬(柳璋烈)· 한훈 ( 韓焄 ) 등과 함께 독립군단체로서 의병출신자의 집합체인 광복단을 결성하고, 군자금을 수합하기 위하여 강순필 ( 姜順弼 )과 함께 일본인이 경영하는 영월의 중석광산에 잠입, 활동하였다.

재만(在滿) 독립군과도 연락을 취하는 한편 대구에서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경영하던 애국지사 박상진 ( 朴尙鎭 )과도 연락하면서 1915년초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을 협의하고 1915년 7월에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였다.

대한광복회는 박상진을 총사령으로 경상도·전라도·충청도·경기도·황해도 각지에 회원들이 결성되어 있었는데, 그는 경상도의 책임자였으며 전라도 조직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1917년 11월 광복회가 친일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할 때 이 공작을 직접 지휘, 결행하였다. 1918년 광복회가 일본경찰에게 발각되자 상해로 망명하기 위하여 전라남도 목포에 잠적하였다가 붙잡혀 사형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채상덕(蔡相悳)

∼1925. 독립운동가. 일명 채상덕(蔡尙悳). 본관은 평강(平康). 호는 심호(深湖). 황해도 사리원 출생.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최익현 ( 崔益鉉 )의 문하생으로 그의 뒤를 따라 의병초모에 전심전력하였다.

황해도 사리원·재령·해주·신막·안악 일대에서 의병투쟁을 하였으며, 안필호(安弼濩)·최봉소(崔鳳韶)·최전구(崔銓九)·윤항식(尹恒植)·이승회(李承會)· 채만식 ( 蔡萬植 )·이승원(李承遠) 등과 함께 의병투쟁에 동참,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 뒤 만주 동삼성(東三省)으로 망명, 이진룡 ( 李鎭龍 )·홍재학(洪在學) 등을 만나 의병투쟁 및 항일투쟁의 방략을 논의하였다.

1922년 봉천성 환인현(奉天省桓仁縣)에서 서로군정서 ( 西路軍政署 )· 한족회 ( 韓族會 )· 대한독립단 ( 大韓獨立團 ) 등 여러 단체가 1년 여에 걸친 일제토벌성공의 축하연을 개최하는 모임에서 대한통군부 ( 大韓統軍府 )를 결성하였을 때 총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 뒤 1923년 8월 8일 평안북도 의주군 청성주재소를 공격, 일본순사를 사살하고 1명에게 중상을 입힌 뒤 주재소를 소각하였다.

1925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직할 군사단체인 육군주만참의부 ( 陸軍駐滿參議府 ) 군대가 일본군에게 참패하자 집안현 고마령전투 ( 古馬嶺戰鬪 )에서 자결하였다. 1995년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채응언(蔡應彦)

1879(고종 16)∼1915. 조선 말기의 의병장. 평안남도 성천 출신. 대한제국의 육군보병부교로 근무하다가, 1907년 군대강제해산을 당하자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고자 이진룡 ( 李鎭龍 )의병진의 부장 ( 副將 )이 되어 평안남도·강원도·함경남도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황해도 안평(安平)의 일본순사주재소와 수안(遂安)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여 무기를 다수 노획하였다. 1910년 4월 강두필(康斗弼)과 함께 의병 30명을 인솔하여 함경남도 안변에 있는 마전동 순사주재소와 황해도 선암(仙巖) 헌병파견대를 습격하고, 원산으로 이어지는 수십개의 전주를 베어버렸다.

또한, 같은해 6월에는 85명의 의병을 인솔하여 강원도 남산역(南山驛)·고산역(高山驛) 헌병분견소를 공격하였다. 국권침탈 후에도 부하 300∼400명을 거느리고 의병장이 되어 경기도·강원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 등지에서 일제에 대한 무력항쟁을 계속하였으며, 1913년 6월 3일 황해도의 대동리 헌병파견소를 공격하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일본헌병들과 교전하여 적에게 큰 두려움을 주었다.

1915년 평안남도 성천군 백년산(百年山)일대를 근거로 하여 항일유격전을 계속하던 중 7월 5일 붙잡혔다. 1915년 9월 2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0월 평양감옥에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출전 <한미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30

種(종)

34

雲(운)

38

奎(규)

31

泰(태)

35

均(균)

39

秀(수)

32

敎(교)

36

和(화)

40

 

33

植(식)

37

求(구)

41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인천 채씨(仁川蔡氏)는 남한(南韓)에 총 8,510가구, 34,82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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