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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채씨(蔡)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蔡(평강채씨)

 

 

본관(本貫): 평강(平康)

시조(始祖): 채송년(蔡松年)

유래(由來):

 

평강 채씨(平康蔡氏)의 시조(始祖) 채송년(蔡松年)은 1230년(고종 17) 최 향(崔 珦)의 난(亂)이 일어나자 병마사(兵馬使)로 이를 평정(平定)하여 대장군(大將軍)에 올랐고, 그 후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태사(太師)·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상호군(上護軍) 등을 거쳐 태자 태사(太子太師)에 이르렀다.

그의 맏아들 정(楨)이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평강군(平康君)에 봉

해졌고 둘째 자화(子華)는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상장군(上將軍)·판이부사(判吏部事) 등을 지냈으므로,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평강(平康)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채세영(蔡世英)

1490(성종 21)∼1568(선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영지(英之). 호는 임진당(任眞堂). 효순(孝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담(潭)이고, 아버지는 첨정 자연(子涓)이며, 어머니는 유효용(柳孝庸)의 딸이다.

1510년(중종 5) 진사시에 합격하고, 151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19년 검열을 거쳐 춘추관기사관이 되었다. 이 해 기묘사화가 일어나던 밤 가승지 김근사(金謹思)가 그의 붓을 빼앗아 조광조 ( 趙光祖 ) 등의 죄를 대역죄인으로 고치려 들자, 사필(史筆)은 아무나 가지는 것이 아니라고 다시 빼앗는 기개를 보여 세상에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 때문에 파직당하였다. 그 뒤 1533년 세자시강원의 문학·필선·보덕, 집의를 역임한 뒤 홍문관의 응교·전한·직제학을 거쳐 1537년 대사성이 되었고, 1539년 형조참의에 이르렀다. 1545년(명종 즉위년) 첨지중추부사로서 천추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호조참의·병조참의·우승지·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이어 1550년 호조참판으로 동지춘추관을 겸직하였고, ≪중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이 후 공조판서·호조판서를 지내고 우참찬을 거쳐 벼슬이 좌참찬에 이르렀다. 천문과 의약에 밝았고, 중국어에도 능하여 1548년 이문정시(吏文庭試)에 장원하기도 하였다.

그가 비록 처음에는 기묘사화로 청명(淸名)을 얻었으나 후일 높은 벼슬에 있으면서 내전에 친하려 든다는 비난을 듣기도 하였다.

 

채유후(蔡裕後)

1599(선조 32) ∼ 1660(현종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창(伯昌), 호는 호주(湖洲). 난종(蘭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선(慶先)이고, 아버지는 진사 충연(忠衍)이다. 어머니는 안사열(安士說)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문재에 뛰어났으며, 17세에 생원이 되고, 1623년(인조 1) 개시문과(改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보임되었다.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일으키기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를 거친 뒤, 교리(敎理) · 지평 ( 持平 ) · 이조좌랑 · 응교 ( 應敎 )를 역임하고 사간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집의 ( 執義 )로서 인조를 호종하였다. 김류(金 濫 ) 등의 강화천도 주장을 반대하고 주화론에 동조했다가 구금되었고, 1638년 석방되었다. 1641년 광해군이 제주도에서 사망하자 예조참의로서 호상 ( 護喪 )을 맡아보았으나 행상(行喪)할 때 담군(擔軍)에게 백건(白巾)을 쓰게 했다는 탄핵을 받자 병을 빙자하여 사임하였다.

중년 이후 술을 좋아하여 때때로 주실(酒失)을 저질러 인조의 눈밖에 났으나, 1646년 이조참의로서 지제교 ( 知製敎 )가 되어 누구도 싫어하는 강빈폐출사사교문(姜嬪廢黜賜死敎文)을 지어 다시 현용(顯用)되었다.

그러나 그 자신도 강빈사건에 반대 견해를 취했던 터이므로 집에 돌아와 소장하고 있던 교문을 짓는 데 필요한 사륙전서(四六全書)를 모두 불태워버릴 만큼 후회했다고 한다.

이어 대사간을 거쳐 병조참의로 별시문과 초시의 시관이 되었으나, 부정이 있다고 하여 한때 파직되었다. 1647년 동부승지를 거쳐 부제학 · 대사성 · 대사간을 역임하고, 다시 이조참의가 되었다.

효종이 즉위한 뒤에도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상작남상(賞爵濫觴 : 상이나 관직을 함부로 줌.)을 경계하였다. 1652년(효종 3) 이조참판에 오르고, 이듬해에는 대제학으로서 ≪ 인조실록 ≫ 편찬에 참여하여 가자(加資)되었다.

이후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사 ( 同知經筵事 )를 역임하고, 여러 차례 대사헌을 거친 뒤 1657년 대제학으로서 ≪ 선조수정실록 ≫ 편찬의 책임을 졌으며, 곧이어 예조판서 · 우참찬에 승서되었다.

이듬해 이조판서에 오르고, 대제학을 8년 동안 겸하고 있었으나, 여러 차례 사직상소를 올렸다. 형조판서로 옮겼다가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으나 술에 취하여 실의(失儀)했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현종이 즉위하자 찬집청당상(撰集廳堂上)으로 ≪ 효종실록 ≫ 편찬에 참여하고, 1659년(현종 즉위년) 성절사 ( 聖節使 )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9월 다시 대사헌에 올랐으나 유계 ( 兪棨 )의 탄핵으로 사임하고, 공조참판 · 내국재조(內局提調)를 거쳐 다시 대사헌이 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병으로 죽었다.

죽고 난 뒤 실록 편찬의 공으로 숭정대부 ( 崇政大夫 )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술 때문에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으나 문재에 뛰어나 중용되었다. 작품으로 시조 2수가 전하며, 저서로 ≪ 호주집 ≫ 이 있다.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채제공(蔡濟恭)

1720(숙종 46) ∼ 1799(정조 2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 · 번옹(樊翁). 효종 때 이조판서 · 대제학을 지낸 유후(裕後)의 방계 5대손이며, 시상(時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성윤(成胤)이고,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응일(膺一)이다. 어머니는 이만성(李萬成)의 딸이다. 홍주 출생.

1735년(영조 11) 15세로 향시에 급제한 뒤 1743년 문과정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748년 한림회권(翰林會圈) 때 영조의 탕평을 표방한 특명으로 선발되어 청요직인 예문관사관직을 거쳤다. 1751년에는 중인 ( 中人 )의 무덤이 있는 산을 탈취했다 하여 1년 이상 삼척에 유배되었다.

1753년에 충청도암행어사로 균역법의 실시과정상의 폐단과 변방대비 문제를 진언하였다. 1755년 나주 괘서사건이 일어나자 문사랑(問事郎)으로 활약했고, 그 공로로 승정원동부승지가 제수되었다. 이후 이천도호부사 · 대사간을 거쳤고, ≪ 열성지장 列聖誌狀 ≫ 편찬에 참여한 공로로 1758년에 도승지로 임명되었다.

이 해 사도세자와 영조의 사이가 악화되어 세자 폐위의 비망기가 내려지자 죽음을 무릅쓰고 막아 이를 철회시켰는데, 이 사건으로 하여 후일 영조는 채제공을 지적하여 “ 진실로 나의 사심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 ” 라고 정조에게 말했다 한다.

이후 대사간 · 대사헌 · 경기감사를 역임하던 중 1762년 모친상으로 관직을 물러나자, 이 해 윤5월에 사도세자의 죽음이 있었다. 복상 후 1764년부터 개성유수 · 예문관제학 · 비변사당상을 거쳐 안악군수로 재임 중 부친상을 당하여 다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1767년부터 홍문관제학 · 함경도관찰사 · 한성판윤을, 1770년부터는 병조 · 예조 · 호조판서를 역임하고, 1772년 이후 세손우빈객 · 공시당상 ( 貢市堂上 )이 되었다. 1775년 평안도관찰사 재임시에 서류통청(庶類通淸)은 국법의 문제가 아니므로 풍속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 상소로 인하여 서얼출신자에게 구타당하는 사건이 생기기도 하였다.

이후 영조의 깊은 신임과 함께 약방제조로 병간호를 담당하기도 했고, 정조가 왕세손으로 대리청정한 뒤에는 호조판서 · 좌참찬으로 활약하였다.

1776년 3월에 영조가 죽자 국장도감제조에 임명되어 행장 · 시장 · 어제 · 어필의 편찬 작업에 참여하였다. 이어 사도세자 죽음에 대한 책임자들을 처단할 때 형조판서 겸 판의금부사로서 옥사를 처결하였다.

또한 정조 특명으로 사노비(寺奴婢)의 폐를 교정하는 절목을 마련하여 정1품에 이르렀다. 이 사노비절목은 점차 사노비의 수효를 감소시켜 1801년(순조 1)의 사노비 혁파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후 규장각제학 · 예문관제학 · 한성판윤 · 강화유수를 역임하였다.

1780년(정조 4) 홍국영 ( 洪國榮 )의 세도가 무너지고 소론계 공신인 서명선 ( 徐命善 )을 영의정으로 하는 정권이 들어서자, 홍국영과의 친분, 사도세자의 신원에 대한 과격한 주장으로 정조 원년에 역적으로 처단된 인물들과의 연관, 그들과 동일한 흉언을 했다는 죄목으로 집중 공격을 받아 이후 8년 간 서울근교 명덕산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다.

1788년 국왕의 친필로 우의정에 특채되었고, 이 때 황극(皇極)을 세울 것, 당론을 없앨 것, 의리를 밝힐 것, 탐관오리를 징벌할 것, 백성의 어려움을 근심할 것, 권력기강을 바로잡을 것 등의 6조를 진언하였다. 이후 1790년 좌의정으로서 행정 수반이 되었고, 3년 간에 걸치는 독상(獨相)으로서 정사를 오로지 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이조전랑의 자대제(自代制) 및 당하관 통청권의 혁파, 신해통공정책 등을 실시했으며, 반대파의 역공으로 진산사건 ( 珍山事件 )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793년에 잠깐 영의정에 임명되었을 때는, 전일의 영남만인소에서와 같이 사도세자를 위한 단호한 토역(討逆)을 주장하여 이후 노론계의 집요한 공격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그 뒤는 주로 수원성역을 담당하다가 1798년 사직하였다.

문장은 소(疏)와 차(箚)에 능했고, 시풍은 위로는 이민구 ( 李敏求 ) · 허목 ( 許穆 ), 아래로는 정약용(丁若鏞)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또한, 학문의 적통(嫡統)은 동방의 주자인 이황 ( 李滉 )에게 시작하여 정구 ( 鄭逑 )와 허목을 거쳐 이익 ( 李瀷 )으로 이어진다고 하면서 정통 성리학의 견해를 유지하였다.

때문에 양명학 · 불교 · 도교 · 민간신앙 등을 이단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들 사상도 수기치인 ( 修己治人 )의 측면에서 선용할 수 있다면 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천주교 〔 西學 〕 에 대해서도 패륜과 신이적 요소를 지닌 불교의 별파로서, 이적(夷狄)인 청나라 문화의 말단적인 영향이라고 인식하였다. 그러나 서학을 믿는 자에 대하여 역적으로 다스리라는 요구를 당론이라 배척하고, 정조의 뜻을 받들어 척사(斥邪)를 내세우면서도 교화우선 원칙을 적용하려 하였다.

자신의 시대를 경장이 필요한 시기로 생각했으나, 제도 개혁보다는 운영의 개선을 강조, 중간수탈 제거, 부가세 폐단의 제거들을 추진하고 간리(奸吏)의 작폐를 없앰으로써 국가재정 부족을 타개하는 것을 급선무로 생각하였다.

상업 활동이 국가 재정에 필요함을 인식했으나 전통적인 농업우선 정책을 지켰다. 또한,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는 사족(士族) 우위의 신분질서와 적서(嫡庶)의 구별을 엄격한 의리로서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영조연간 청남(南人淸流)의 지도자인 오광운 ( 吳光運 )과 강박(姜樸)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채팽윤 ( 蔡彭胤 )과 이덕주 ( 李德胄 )에게서 시를 배웠다.

친우로는 정범조 ( 丁範祖 ) · 이헌경 ( 李獻慶 ) · 신광수 ( 申光洙 ) · 정재원 ( 丁載遠 ) · 안정복 ( 安鼎福 ) 등이 있고, 최헌중(崔獻中) · 이승훈 ( 李承薰 ) · 이가환 ( 李家煥 ) · 정약용 등이 그의 정치적 계자가 된다.

순조 때 유태좌 ( 柳台佐 )가 청양(靑陽)에 그의 영각(影閣)을 세웠고, 1965년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에 홍가신 ( 洪可臣 ) · 허목 · 체제공을 모시는 도강영당(道江影堂)이 세워졌다.

저서로 ≪ 번암집 ≫ 59권이 전하는데, 권두에 정조의 친필어찰 및 교지를 수록하였다. 그는 ≪ 경종내수실록 ≫ 과 ≪ 영조실록 ≫ · ≪ 국조보감 ≫ 편찬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1799년 1월 18일에 사망, 3월 26일에 사림장(士林葬)으로 장례가 거행되었고, 묘는 경기도 용인에 있다. 1801년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으로 추탈관작되었다가 1823년 영남만인소로 관작이 회복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채홍원(蔡弘遠)

1762(영조 3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이숙(邇叔). 성윤(成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응일(膺一)이고, 아버지는 청하현감 민공 ( 敏恭 )이며, 어머니는 오필운(吳弼運)의 딸이다. 영의정 제공(濟恭)에게 입양되었다.

1792년(정조 1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가 되고, 이어 이조참의·승정원승지 등을 지냈다. 1801년(순조 1) 수렴청정하던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金氏)의 시파 ( 時派 )에 대한 탄압으로 말미암아 파직되고, 이듬해 온성으로 유배되었다.

1805년 귀양이 풀려 부호군에 임용되었으나,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일찍이 정약용(丁若鏞)·이유수(李儒修)· 한치응 ( 韓致應 )·윤지눌(尹持訥)·신성모(申星模) 등과 죽란시사(竹蘭詩社)를 결성하여 교유하였고, 정조의 명을 받아 ≪영남인물고≫를 편술하기도 하였다.

 

채동건(蔡東健)

1809(순조 9)∼1880(고종 17). 조선 말기의 무신.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순여(順汝). 포도대장 학승(學承)의 아들이다. 음보(蔭補)로 무관에 등용되어 행호군, 1862년(철종 13) 경상우도병마절도사, 1866년(고종 3) 개성부안무사를 지냈다.

1869년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있으면서 자성(慈城)·후창(厚昌) 두 고을을 신설하고, 포수를 모아 수비하자고 건의하였다. 1871년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냈고, 한때 진산군(珍山郡)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1876년 형조판서에 올랐다

 

채광묵(蔡光默)

1850(철종 1) ∼ 1906. 조선 말기의 의병장.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명숙(明淑), 호는 구연(龜淵). 충청남도 청양 출신.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박창로(朴昌魯) · 안병찬 ( 安炳瓚 ) 등과 홍주성 ( 洪州城 )에서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였으나 목사 이승우 ( 李勝宇 )의 배반으로 실패하였다.

의병거사에 실패한 뒤 곧바로 상경하여 10여 차례에 걸쳐 토적상소(討賊上疏)를 올렸다. 조정에서는 그의 기백에 감동하여 내부주사(內部主事)를 제수하였으나, 이를 고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다시 박안기(朴安 蕎 ) · 이만식(李晩植)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또한, 1906년 4월 민종식 ( 閔宗植 )과 의병대를 조직하여 수천명으로 규합된 대의병진의 참모장으로 추대되어 홍주성을 점령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반격하는 일본군과 최후까지 접전하다가 아들 규대(奎大)와 함께 전사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채영찬(蔡永贊)

1854(철종 5)∼1908. 조선 말기의 의병. 일명 기문(基文). 전라북도 순창 출신.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상실됨을 개탄, 격분하여 1906년 순창·태인 등지에서 수십명의 의병을 이끌고 최익현의진(崔益鉉義陣)에 합류하여 대포장(大砲將)이 되었다.

최익현의병대의 순창 패전 당시 임병찬 ( 林炳瓚 )의 명령으로 의병 명부를 가지고 피함으로써 많은 의병이 체포를 면하였다. 그뒤 순창창의장 김상기(金相璣) 의병대에 속하여, 경상북도 하동으로 가서 화개동에 집결하여 광양창의장 백낙구(白樂九)와 함께 순천을 공격하다가 체포되어 고금도 ( 古今島 )에 유배되었다. 1907년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도 항전을 계속하다가 1908년 상인 ( 商人 )으로 가장한 일본군에게 피살되었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蔡膺一(채응일) 선생의 일화.

 

의젓한 자세에 기가 눌린 어사

조선 21대왕 英祖(영조)조에 비안 현감으로 채응일이 재임한 때가 있었다. 채 현감이 재임할 때에 어린 시절을 한 동안 비안에서 보낸 바 있는 번암에게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남아 있다.
당시 南老(남로) 당파의 갈등이 극심할 적에 경상도를 안행 중인 御使(어사)가 老論(노론)이었으므로 南人(남인)계열인 채옹일을 비안 현감에서 파직시키기로 단호히 결심한 모양이단.

그리하여 어느 날 아침에 느닷없이 驛卒(역졸)을 등원하여 官營(관영)과 客舍(객사)를 쑥대밭처럼 짓밟고 기습하여 왔다. 마침 아침 식사를 하고 있던 채 현감은 황겁 결에 뒷산인 모란봉 숲속으로 피신하여 버렸다.
현감을 놓쳐버린 어사에게는 역졸로부터 섬쯕한 제보를 받기에 이르렀다.
사연인즉 현감의 어린 아들이 창망 중에도  늠늠하고 으젓하게 밥을 먹으면서 꾸짖어 대하고 나섰다 한다.

영특한 자손이 나기에 따라서는 후일 시대가 바뀜에 따라 무슨 보복이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은 불의를 저지르는 무리들일수록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다를 수 없다.
어사는 즉각 이 어린 소년을 만나보기에 이르렀다.
듣던 바대로 그 기상은 장래를 예측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만큼 너무나 커서 마침내 크게 후회하고 역졸을 즉각 철수시키기에 이르렀다.

평온을 되찾고 난 후 이어 모란봉에서 돌아온 현감을 대하여 東軒(동헌)에서 버선발로 뛰어 내려가 맞이한 어사는 크게 자신의 잘못을 사죄하게 되 었다. 이윽고 흥겨운 酒席(주석)이 벌어진_가운데서 醉中(취중)眞談(진담)으로
「어찌하면 그대는 아들을 그처럼 여특하게 두었더냐」도 현감에게 찬탄하고 남로파쟁이 아무지 심각하여도 두 사람 간의 인정은 결코 변치 말자고 자신의 사과를 겸하여 다시 한 번 다짐하였다고 한다.

 

 

 

출전 <한미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31

源(원),洪(홍)

35

鎬(호),鉉(현)

39

均(균),在(재)

32

榮(영),相(상)

36

淳(순),漢(한)

40

鎭(진),鎰(일)

33

烈(열),煥(환)

37

植(식),模(모)

41

濟(제),求(구)

34

建(건),起(기)

38

炳(병),容(용)

42

秀(수),樂(락)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평강 채씨(平康蔡氏)는 남한(南韓)에 총 14,326가구, 59,95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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