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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천씨(千)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千(영양천씨)

 

 

본관(本貫): 영양(潁陽)

시조(始祖): 천암(千巖)

유래(由來):

 

영양 천씨(潁陽千氏)의 시조(始祖) 천암(千巖)은 중국 서촉(西蜀)의 천고봉 만인암(千古峰萬仁巖)에서 출생하였으므로 그 지명을 따서 성(姓)을 천(千)으로 하고 이름을 암(巖)이라 하였다고 한다.

「영양천씨매헌공가승보(潁陽千氏梅軒公家乘譜)」의 기록에 의하면 시조 천 암(千巖)은 1368년(명나라 홍무 원년) 도총장(都總將)을 지내며 나라에 공훈을 세워 판도승상(版圖丞相)에 이르렀고, 후손들이 대대로 벼슬을 역임하며 영양(潁陽)에 살았으므로 본관(本貫)을 영양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가문의 중요 인물

 

천만리(千萬里)

중시조(中始祖) 천만리(千萬里)가 1555년(명나라 가정 34) 황태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경과에서 12세의 어린 나이로 급제하여 황제를 뵙고 후한 상을 받았으며, 1571년(명나라 융경 5) 무과(武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고 총절사(摠節使)가 되어 북방의 몽고5부병(蒙古五部兵)을 섬멸시킨 공으로 내위진무사(內衛鎭撫使)가 되었다.

그러나 간사한 자들의 무고를 받아 8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으며, 뒤에 풀려나 태청전수위사(太淸殿守衛使) 겸 총독오군수(總督五軍帥 : 궁전 경비 및 전군총사령관)에 승진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명(明)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자, 만리는 황제의 명(命)을 받아 총수사(總輸使) 이여송(李如松)과 더불어 조병영양사(調兵領糧使) 겸 총독장(總督將)으로서 두 아들 상(祥)과 희(禧)를 데리고 철기군(鐵騎軍 : 용맹한 기병) 2만을 인솔하여 조선(朝鮮)에 건너와 평양(平壤)·곽산(郭山 : 함경북도)· 동래(東萊) 등지에서 대첩(大捷)을 거두었고, 정유재란 때는 울산(蔚山) 등지에서 왜군을 섬멸했다. 전란이 평정되자 명나라 장병들은 귀국했으나 만리는 휘하 장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두 아들과 함께 조선 땅에 남아 우리나라 천씨(千氏)의 시원(始源)을 이루게 되었다.

이 때 조정에서는 그의 혁혁한 전공을 치하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봉조하(奉朝賀)의 벼슬을 내리고 화산군(花山君)에 봉했으며 30결(結)의 사패지(賜牌地)를 하사(下賜)하고, 맏아들 상(祥)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차남 희(禧)는 평구도 찰방(平邱道察訪)에 각각 임명하였다.

그 후 숙종(肅宗) 때 왜란 평정의 은혜(恩惠)를 잊지 못하여 명(明)나라 황제를 추모하기 위해 궁중에 대보단(大報壇)을 설치하고, 화산군(花山君) 천만리(千萬里)도 함께 향사(享祀)하도록 했으며 순종(純宗) 때는 가헌(家憲)의 뜻이 담긴 충장(忠壯)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천경주(千耕疇)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했다.

 

천태주(千泰疇)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지낸 태주(泰疇) 형제가 유명했다.

 

천거주, 천자주

찰방(察訪) 희(禧)의 아들 거주와 자주는 영월 군수(寧越郡守)와 이원 현감(利原縣監)을 각각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천장주(千長疇)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선공감역(繕工監役)을 지냄.

 

천찬명(千贊銘)

광주부윤(廣州府尹)을 역임하였다.

 

천순명(千順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천인명(千仁銘)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였다.

 

천경필(千慶弼)

칠원현감(漆院縣監)을 역임하였다.

 

천우열(千宇烈)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역임했다.

 

천해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역임하였다.

 

천록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역임하였다.

 

천용서(千龍瑞)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천인운(千仁雲)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천수경(千壽慶)

? ∼ 1818(순조 18). 조선 후기의 학자 · 시인. 본관은 금계(金溪). 자는 군선(君善). 처음 호는 희헌(羲軒), 뒤에 송석원(松石園) · 송석도인(松石道人)으로 바꾸었다. 빈한한 집안 출신이었으나 독서를 좋아하고 시공부에 힘썼다. 시인이자 교육자였다. 위항(委巷)의 부호들이 자식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다투어 초치(招置)하였다고 한다. 학생이 모두 50 ∼ 60명이나 되어 반을 나누어 교육을 할 정도였다. 법도가 매우 엄하였다. 당시의 중인이나 상인은 재산을 모으고 지위상승을 염원하는 단계에 이르자 유학과 한시문(漢詩文)의 교육을 절실하게 요청하였기 때문에 활약이 매우 컸던 듯하다.

인왕산 옥류천(玉流泉) 송석(松石) 아래에다 초가집을 마련하고 ‘ 송석도인 ’ 이라 자처하며 동인(同人)들을 모아 시를 읊었다. 당시 시인으로서 이곳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은 수치로 여길 만큼 유명하였다. 1786년(정조 10) 여름에 결성된 이 모임을 송석원시사 ( 松石園詩社 ) · 옥계시사 ( 玉溪詩社 ) · 서사(西社) 혹은 서원시사 ( 西園詩社 )라고 하였다. 이는 뒤에 중인층 시단의 모체가 되었다. 당시 송석원시사에 참여한 사람은 장혼 ( 張混 ) · 조수삼 ( 趙秀三 ) · 차좌일 ( 車佐一 ) · 김낙서(金洛瑞) · 왕태(王太) 등이었다. 차천로 ( 車天輅 )의 후손인 차좌일과 특히 친한 사이였다.

천수경은 1791년에 시사에서 읊은 시를 모아 ≪ 옥계아집첩 玉溪雅集帖 ≫ 을 만들었으며, 1793년에는 송석아회(松石雅會)를 개최한 뒤에 시첩을 만들었다. 그는 1797년에 333명이나 되는 시인들의 작품을 수록한 ≪ 풍요속선 風謠續選 ≫ 을 간행하여 ≪ 소대풍요 昭代風謠 ≫ 이후 60년간 위항문학이 성장한 자취를 보여주었다. 또한, 차좌일 · 장혼 등과 함께 위항문학의 전성기에 가장 큰 활약을 한 인물이다.

천수경이 죽은 뒤에 묘비에는 ‘ 시인천수경지묘(詩人千壽慶之墓) ’ 라고 새겼을 만큼 시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남긴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시는 두보(杜甫)와 한유(韓愈)의 풍을 띠고 있다는 평을 얻었다. 문집은 없고 ≪ 풍요속선 ≫ 에 시 7수가 전한다.

 

천위영(千緯永),천후근(千厚根),천하영(千夏永)

학자(學者)로 이름을 떨쳤다.

 

천세헌(千世憲)

1881(고종 18) ∼ 1945. 독립운동가. 경상북도 상주 출신.

1903년 하와이로 이주해 사탕수수밭의 노동자와 상인으로 생계를 꾸렸다. 1910년 본토인 뉴욕으로 이주해 해외지역 한인의 통일연합기관인 대한인국민회 ( 大韓人國民會 ) 북미지방총회(北美地方總會) 뉴욕지회에 가입해 조국의 독립과 한인교포들의 민족교육 실시를 위해 노력하였다.

1914년에는 안창호 ( 安昌浩 ) · 송종익 ( 宋鍾翊 ) 등이 조직한 흥사단 ( 興士團 )에 가입하고 활동하였다. 1917년에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뉴욕지방총회장으로 선임되어 회관의 임대료를 출연하는 등 회의 운영을 위해 노력하였다.

1919년 4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 독립운동 후원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선전을 목적으로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자유대회(韓人自由大會)를 개최하자, 이 대회에 참석해 임시정부의 승인과 지원, 외교사무소의 설치 등을 결의하였다.

1921년 8월 대한인국민회에서, 그 해 11월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5대열강회의에 맞춰 대한민족대표단을 조직하고, 국내 및 상해 임정과 연락해 ‘ 대한 인민의 건의서 ’ 를 작성 · 제출하고 임정의 승인을 요청하기로 하였다. 이에 그는 뉴욕에서 서재필 등과 함께 대한민족대표단 후원회를 조직하고 동포들로부터 특별의연금 220여 달러를 모금해 대표단의 외교선전 경비에 충당케 하였다.

1922년에는 대한민족대표단의 일원으로 중국 상해에 파견되어 동년 4월 임정의 개편을 위한 국민대표회의를 열 것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임정에 제출하였다. 그리고 안창호 등과 시사책진회 ( 時事策進會 )를 조직하고 각 단체들의 입장을 조정했으며, 임정을 새롭게 창조하려는 창조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임정의 개선이 어려워지자 1923년 미국으로 돌아와 음식점을 경영하며 가난한 한인들을 도와 ‘ 한인들의 은사 ’ 라고 불리워졌다. 1933년에는 시카고에서 한민족을 업신여기는 일본인 마쯔에(松江)를 처단해 민족정신을 고취하려고 하였다.

1939년 10월 로스앤젤레스의 조선민족혁명당 소장파들이 중국 한구(漢口)에서 조직된 조선의용대 ( 朝鮮義勇隊 )를 후원하기 위해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美洲後援會)를 조직하였다. 그러자 그는 1940년 7월 강영승(康永昇)과 함께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시카고지방지회를 설립하고 서기 · 대표로 활동하면서 중국 관내에서 전개되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40년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한 그는 서재필의 지시를 받고 미국 군사정보부와 접촉해 미주 한인들의 대일참전 문제를 협의하였다. 이후에도 그는 독립자금을 출연해 조국의 독립운동을 후원하다가 1945년 6월에 서거하였다.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천세광(千世光)

세광(世光)은 해방 후에 성결교 서울 신학교를 창설하여 이사(理事)가 되고 십자군 전도대장으로 전도사업에 공헌하여 영양 천씨를 더욱 빛냈다.

 

 

 

千彦裕(천언유)의 효행

 

엎드린 자리엔 풀이 마르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산뿐인 조그만 산골 마을에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과 들을 마치 어버이의 품속처럼 느끼며 살고 있는 한 소년이 있었다.

계절에 따라 피어나는 이름 모를 꽃들을 바라보는 소년의 마음은 신비로운 자연의 모습에 감탄할 따름이었다.

 

소년은 이런 자연 속에서 사는 것이 마냥 즐거웠다. 그러고, 신비로운 자연 속에서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자기를 낳아 주신 부모의 은혜에 늘 감사했다.

 

이 소년의 이름은 천 언유(千彦裕)였다.

 

천 언유는 지금부터 약 160 년 전 영양읍 무창동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는 농사짓는 일을 천직으로 삼고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라도 부지런히 꾸려 나가며 부모를 극진히 모시는 것을 자식 된 도리로 여기는 시대였다.

언유는 천성이 어질고 착했으며 특히 부모께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그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홀로 된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는데 어머니가 일찍 돌 아가자 자기가 효성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늘 뉘우치며 하늘보다 높 은 어머니의 은혜를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다. 이러한 연유인지라 홀로 계 신 아버지께 대한 효성은 지극하기만 했다.

아버지, 편히 주무셨읍니까?”

아침에 일어나 안부 인사를 드리고, 요 밑에 손을 넣어 방이 따뜻한지를 확인하고, 세숫물을 떠다 드리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낮에는 밭에 나가 열심히 일을 하며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밭을 가꾸는 일이 더 없는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틈틈이 산에 가서 짐승을 잡거나 냇가 에서 고기를 잡아 반찬을 해서 아버지께 드리기도 했다.

밤이 되면 아버지의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허리를 밟아 드렸다.

아버지, 앞밭에는 감자를 심고, 뒷밭에는 고추를 심으려 합니다.”

뒷밭은 땅이 기름지기 때문에 고추골을 잘게 타면 못 쓰느니라.”

부자는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언유는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며, 일하면서 생각한 것 등을 일일히 아뢰며 아버지의 말벗이 되어 드렸다. 그리고, 아버지의 마음을 항상 편하게 하는 데 힘썼으며 더울 때는 곁에서 부채를 부쳐 드리고, 추울 때는 일찍부터 아버지의 옷을 껴 입고 있다가 따뜻하게 해서 입혀 드렸다.

마을 사람들은 언유의 효성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를 존경하기에 이르렀다.

 

세월이 흘러 언유의 아버지가 칠순이 넘자 차츰 기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언유는 어떻게 하면 아버지의 기력을 오래 보존할 수 있을까를 걱정하며 밭에 나가서 일을 열심히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언유가 밭에서 일을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 왔다.

아버지, 다녀왔읍니다.”

하고, 인사를 드렸으나 평소 같으면

오냐, 애썼다.”

하시며, 문을 열고 내다보실 아버지가 그 날은 아무런 대답이 없다.

웬일일까?’

이상한 생각이 들어 지게를 내려 놓고 방문을 열어 보았다.

아버지, 어디가 편찮으십니까?”

응응, 몸이 좀 아프구나. ”

아버지의 대답은 힘이 없었다. 그 때 언유의 슬픔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날부터 언유는 밭에 나가는 것을 중단하고 아버지를 간호하기 시작했다. 좋다는 약이 있다면 아무리 먼 길이라도 달려 가 구해 왔고, 유명하다는 의원이 있으면 아무리 멀리 있어도 가서 모셔 왔다.

그러나, 언유의 지극한 보살핌에도 아랑곳없이 아버지의 병환은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언유는 자기의 효성이 모자라서 병이 낫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고 새벽 동이 트기 전에 찬 물에 목욕을 하고 정화수를 떠 놓고 정성을 모아 빌기 시작했다.

천지 신명이시여, 저의 아버지 병환을 낫기만 한다면 저는 무슨 일이든지 하겠읍니다.”

언유의 기도는 그칠 줄을 몰랐다. 산골의 쌀쌀한 새벽 날씨가 살을 에이는 듯했지만 아버지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추운 줄도 몰랐다.

하늘이 무심해서일까? 언유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마침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언유는 아버지의 장례를 정중히 치르면서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고 며칠을 통곡하였다.

아버지는 정말 돌아 가셨읍니까?”

믿어지지가 않았다. 금방이라도 사립문을 열고 들어오실 것만 같았다.

장례를 치른 후 언유는 매일 십여 리나 떨어진 아버지 산소를 찾아가 통곡을 하였다. 3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산소를 찾는 언유의 정성을 세찬 눈보라나 비바람도 막지는 못했다.

 

하루는 비가 많이 와서 논밭이 걱정이 된 마을 사람들이 아침 일찍 냇가로 몰려 나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상주인 언유가 나무 토막을 타고 냇물을 건너지 않는가?

위험하다 !”

마을 사람들이 외치며 달려가니 언유는 벌써 물을 건너서 산소로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언유의 지극한 효성에 탄복할 따름이었다.

3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산소에 다닌 언유의 무릎은 옷이 닳아 구멍이 났으며 매일 엎드린 장소는 풀이 나질 않았다. 이렇듯 효성이 지극한 언유가 산 속에 엎드려 통곡을 할 때 까마귀도 까악까악 슬피 울었다.

 

드디어 효자 언유에 대한 소문이 퍼져 조정에까지 알려지자 당시 고종 황제는 언유에게 1884년 교관이란 벼슬을 내리고 이 사실을 후세에 알리기 위 하여 1885년에 정효각을 세웠다.

 

출전영양군 무창초등학교 최 교장

참고 문헌 > 英揚郡誌, 旌孝錄, 孝烈行誌

 

 

 

 

출전 <한미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14

鳳(봉),胤(윤)

旭(욱)

19

庸(용),康(강)

24

林(임),植(식)

15

昞(병),炳(병)

20

宰(재),壁(벽)

25

煐(영),炯(형)

16

宇(우),寧(녕)

弼(필)

21

廷(정),任(임)

26

均(균),基(기)

17

成(성),歲(세)

璣(기)

22

揆(규),葵(규)

27

 

18

熙(희),範(범)

23

洪(홍),海(해)

28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영양 천씨(潁陽千氏)는 남한(南韓)에 총 20,277가구, 83,99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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