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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柳)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풍산류씨)

 

 

본관(本貫): 풍산(豊山)

시조(始祖): 류절(柳節)

유래(由來):

 

풍산 류씨(豊山柳氏)는 고려(高麗) 때 수주(樹州:경기도 부평의 옛 지명) 호장(戶長)을 지낸 류절(柳節)로부터 세계(世系)가 이어지고 있으며, 일설(一說)에는 문화류씨(文化柳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으로 전한다.

 

가문의 중요 인물

 

류종혜(柳從惠)

일세조 절()7세손 종혜(從惠)가 조선 태조(太祖) 때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내고, 조부(祖父) 난옥(蘭玉:창평 현령을 지냄)과 부친 보(고려 말 검교예빈경

을 지냄)가 지어놓고 적선(積善)을 베풀었던 관가정(觀稼停)이 있는 하회(河回) 마을에서 풍산 류씨의 가맥(家脈)을 계승했다.

 

류종개(柳宗介)

1558(명종 13)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계유(季裕). 예안 출신. 아버지는 빈()이다. 1579(선조 12)에 진사가 되고, 훈도로서 158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교서관정자가 된 뒤 전적 ( 典籍 )을 역임하고 향리로 돌아와 있던 중 임진왜란을 당하였다.

이 때 사족(士族)들이 적에게 대항하려 하지 않고 피난하자, 홀로 향병 수백명을 모아 고을을 보전하다 함경도 지역에서 태백산맥을 타고 퇴각하던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소천(小川)에서 전사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향리의 사족들이 서로 들고 일어나 왜적과 싸워 영남일대의 왜적을 격퇴하였다. 참의에 추증되고, 봉화(奉化)의 경현사우(景賢祠宇)에 제향되었다.

 

류중영

간성 군수(杆城郡守) 공작(公爵)의 아들 중영은 명종조(明宗朝)의 명신(命臣)으로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겸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가 되어 토호(土豪)들의 횡포를 엄중히 다스렸으며 육영(育英) 기금을 마련하여 교학 진흥에 공이 컸다.

 

류운룡(柳雲龍)

1539(중종 34) 1601(선조 34). 조선 중기의 문신 · 학자. 자는 응현(應見), 호는 겸암(謙菴). 아버지는 중영(仲 班 )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로 진사 광수(光粹)의 딸이다. 성룡(成龍)의 형으로 이황 ( 李滉 )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릴 때부터 총명해 모든 경사(經史)를 통독함으로써 사문의 촉망을 받았다. 1572(선조 5) 친명(親命)으로 음사(蔭仕)를 받아 전함사별좌(典艦司別坐)가 된 뒤 이듬해 의금부도사로 추배되었으나 사퇴하였다.

다시 사포서별제가 된 뒤 금부예천(禁府例遷) · 풍저창직장(豊儲倉直長) 등을 역임하면서 청렴하고 철저한 임무 수행 능력을 인정받아 내자시주부로 승진해, 진보현감 등을 지냈다. 그러나 어머니의 신병 때문에 사퇴하였다가 다시 인동현감으로 추배되었다.

길재 ( 吉再 )의 묘역을 정화하고 사우 ( 祠宇 )와 서원을 지어 유학의 진흥책을 도모해 그를 칭송하는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광흥창주부 · 한성부판관 · 평시서령 · 사복시첨정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인 영의정 성룡이 선조에게 그를 해직시켜 어머니를 구출하도록 읍소하니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그는 어머니를 비롯한 온 가족이 모두 무사하도록 하여 모두가 그의 효심을 칭찬하였다.

그 해 가을에 풍기가군수(豊基假郡守)가 되었으며, 전란의 어려움에도 조공을 평시와 같이 함으로써 얼마 뒤 다시 정군수(正郡守)가 되어 왜적들의 위협을 받고 있는 백성들의 생업을 보호하는 데 힘썼다. 그 뒤 원주목사로 승진되었으나 어버이의 노쇠함을 핑계하여 사퇴하였다.

군국기무(軍國機務)에 관한 소를 올려 선조로부터 인정을 받아 조의(朝議)에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학문에서는 이기설이나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이황의 이기이원론에 근거를 두고 변증을 시도하려 하였다. 저서로는 겸암집 이 있다. 안동의 화천서원 ( 花川書院 )에 제향되어 있다.

 

류성룡(柳成龍)

1542(중종 37) 1607(선조 4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의성 출생. 자온(子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작(公綽)이고,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 중영(仲 班 )이며,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 ( 金光粹 )의 딸이다. 이황 ( 李滉 )의 문인이다. 김성일 ( 金誠一 )과 동문수학했으며 서로 친분이 두터웠다.

관직 활동1564(명종 19) 생원 · 진사가 되고, 다음 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한 다음, 1566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춘추관기사관을 겸직하였다.

1568(선조 1) 대교, 다음 해 전적 · 공조좌랑을 거쳐 감찰로서 성절사 ( 聖節使 )의 서장관 ( 書狀官 )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어 부수찬 · 지제교로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 · 춘추관기사관을 겸한 뒤,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 ( 賜暇讀書 )를 하였다. 그 뒤 정언 ( 正言 ) · 병조좌랑 · 이조좌랑 · 부교리 · 이조정랑 · 교리 · 전한 · 장령 · 부응교 · 검상 · 사인 · 응교 등을 역임한 뒤, 1578년 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직제학 · 동부승지 · 지제교로 경연참찬관 (經筵參贊官) · 춘추관수찬을 겸하고, 이어 이조참의를 거쳐 1580년 부제학에 올랐다. 1582년 대사간 · 우부승지 · 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에 승진해 왕명을 받고 황화집서 皇華集序 를 지어 올렸다.

1583년 다시 부제학이 되어 비변오책 備邊五策 을 지어 올렸다. 그 해 함경도관찰사에 특별히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어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다가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예조판서로 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 · 제학을 겸했으며, 1585년 왕명으로 정충록발 精忠錄跋 을 지었고, 다음 해 포은집 圃隱集 을 교정하였다.

1588년 양관대제학에 올랐으며, 다음해 대사헌 · 병조판서 · 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왕명을 받아 효경대의발 孝經大義跋 을 지어 바쳤다. 이 해 정여립 ( 鄭汝立 )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있자 여러 차례 벼슬을 사직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소()를 올려 스스로 탄핵하였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 ( 光國功臣 ) 3등에 녹훈되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 해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관련되어 죽게 된 최영경 ( 崔永慶 )을 구제하려는 소를 초안했으나 올리지 못하였다. 1591년 우의정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이어 좌의정에 승진해 역시 이조판서를 겸하였다.

이 해 건저문제 ( 建儲問題 )로 서인 정철 ( 鄭澈 )의 처벌이 논의될 때 동인의 온건파인 남인 ( 南人 )에 속해 같은 동인의 강경파인 북인 ( 北人 )의 이산해 ( 李山海 )와 대립하였다.

왜란의 대비왜란이 있을 것에 대비해 형조정랑 권율 ( 權慄 )과 정읍현감 이순신 ( 李舜臣 )을 각각 의주목사와 전라도좌수사에 천거하였다. 그리고 경상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을 이일 ( 李鎰 )로 교체하도록 요청하는 한편, 진관법(鎭管法)을 예전대로 고칠 것을 청하였다.

15923월에 일본 사신이 우리 경내에 이르자, 선위사 ( 宣慰使 )를 보내도록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아 일본 사신이 그대로 돌아갔다. 그 해 4월에 판윤 신립 ( 申砬 )과 군사(軍事)에 관해 논의하며 일본의 침입에 따른 대책을 강구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활약1592413일 일본이 대거 침입하자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軍務)를 총괄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고, 이듬해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 그 뒤 충청 · 경상 · 전라 3도의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하였다.

이 해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해 군사를 총지휘했으며, 이여송이 벽제관 ( 碧蹄館 )에서 대패해 서로(西路)로 퇴각하는 것을 극구 만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권율과 이빈(李 笭 )으로 하여금 파주산성을 지키게 하고 제장(諸將)에게 방략을 주어 요해(要害)를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다.

그 해 4월 이여송이 일본과 화의하려 하자 그에게 글을 보내 화의를 논한다는 것은 나쁜 계획임을 역설하였다. 또 군대 양성과 함께 절강기계(浙江器械)를 본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및 성곽의 수축을 건의해 군비 확충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소금을 만들어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할 것을 요청하였다.

10월 선조를 호위하고 서울에 돌아와서 훈련도감의 설치를 요청했으며, 변응성 ( 邊應星 )을 경기좌방어사로 삼아 용진 ( 龍津 )에 주둔시켜 반적(叛賊)들의 내통을 차단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1594년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 紀效新書 를 강해(講解)하였다. , 호서의 사사위전(寺社位田)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군량미를 보충하고 조령 ( 鳥嶺 )에 관둔전 ( 官屯田 )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는 등 명나라와 일본과의 화의가 진행되는 기간에도 군비 보완을 위해 계속 노력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들의 탄핵으로 관작을 삭탈당했다가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 ( 扈聖功臣 )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도학 ( 道學 ) · 문장 ( 文章 ) · 덕행(德行) · 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 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묘지는 안동시 풍산읍 수리 뒷산에 있다. 안동의 병산서원 ( 屛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류진(柳袗)

성룡의 아들 중 진()은 광해군(光海君) 때 유일로 천거받아 세마(洗馬)가 되었고, 인조반정 후 봉화 현감(奉化縣監)을 거쳐 지평(持平)을 지냈다.

 

류초(柳初)

()는 광국호성원종공신(光國扈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류원지(柳元之)

성룡의 장손 원지(元之:여의 아들)는 성리학(性理學)과 역학(易學)에 밝은 학자로상수소설(象數小說)을 지어 12괘도(卦圖)의 근원을 밝혀 명성을 떨쳤다.

 

류세명(柳世鳴)

운룡의 증손 세명(世鳴:원리의 아들)은 숙종(肅宗) 때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사관(史官), 이조 좌랑(吏曹佐郞), 지평(持平) 등을 거치고, 공충도도사(公忠道都事)로 서천군구(舒川郡守)의 부정을 탄핵하여 파면케 하였다.

 

류규

정조(正祖) 때 경산 현령(慶山縣令)으로 치적(治績)을 울렸다.

 

류태좌(柳台佐)

순조조(純祖朝)에서 대사간(大司諫)이 되어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떨쳤던 태좌(台佐)가 유명했다.

 

류후조(柳厚祚)

1798(정조 22)1876(고종 13).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재가(載可), 호는 매산(梅山낙파(洛坡영매(嶺梅). 도정 ( 都正 ) 심춘(尋春)의 아들이다.

1858(철종 9) 정시문과에 급제한 뒤 부사·부호군을 지내고 1864(고종 1)에 이조참판, 이듬해 공조판서를 지냈으며, 흥선대원군 ( 興宣大院君 )의 남인계 인사 중용책에 따라 1866년 우의정에 이르렀다.

같은 해 주청사 ( 奏請使 )로 청나라에 다녀와 그곳 서양인들의 동정을 알렸는데, 병인양요 때에는 상주에 살던 아들 주목(疇睦)에게 의병을 일으키게 하기도 하였다. 1867년 좌의정에 오르고, 1872년에는 판중추부사로 퇴관하고 봉조하 ( 奉朝賀 )가 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류도발(柳道發)

한말(韓末) 한일합방(韓日合邦)의 울분으로 시() 한 수를 짓고 자결했던 도발(道發)1962년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을 받았다.

 

류신영(柳臣榮)

신영(臣榮)은 고종(高宗)이 독살(毒殺)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제문(祭文)을 지어 보내고 음독자결하므로써 문벌과 충절(忠節)의 가문인 풍산 류씨의 가통(家統)을 살렸다.

 

1985년 인구조사 결과 풍산 류씨(豊山柳氏)는 남한에 총 2,946가구, 11,65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柳成龍(류성용) 선생의 일화.

 

  1)

  도인 유성용의 형

임진란 당시 안동의 하회마을에는 류성룡 대감의 형이 살고 있었다. 그는 남 보기에는 모자란 듯한 사람으로 보였지만 사실은 미래를 내다보고 시류의 길흉을 점칠 줄 아는 도인이며 기인이었다.

왜적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하여 칼을 갈고 있는데 그런 형편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라 안에서는 당파 싸움으로 온통세상이 어지러웠다 그러한 때 하루는 형의 집에 류대감이 다니러 왔다.
집안 이야기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형은 동생인 류대감에게
「사흘 후 너를 죽이기 위해 일본서 자객이 찾아올 것이다. 너는 동네 아이들을 불러저 “가등청정이 나오네”라는 노래를 가르쳐 내일 부터 부르도록 시켜라.」하는 것 이었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형의 숨은 인품과 재능을 존경해온 류대감은 형이 시키는 대로 동네방네 아이들을 불러 모아 「가등청정이 나오네」라고 동네 곳곳에서 부르도록 하였다.
가등청정이가 보낸 자객이 하회 마을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가등청정이 나오네'라는 노랫소리가 들려 가슴이 섬뜩하였다.

「내가 오는 것을 동네 아이들이 어떻게 알고 저런 노래를 부르는 걸까?」
부쩍 의심이 난 일본의 첩자는 아이들에게 누가 가르쳐 준 노래냐고 물어 보았다.
류대감이 가르쳐 주었다는 말에 왜적의 첩자는 류성룡의 훌륭함에 탄복하면서 한편으로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자면 이런 훈륭한 조선의 인물은 큰 방해가 될 것이니 더욱 없애야겠다고 생각했다.

 

한편 그 날 아침 형은 류대감을 불러서
「내일 자객이 와서 너 보고 바둑을 두자고 할 것이니 너는 네 앞에 걸려 있는 거울 맞은편에 앉고 자객은 거울 밑에 앉혀라. 내가 뒷방에서 바둑판에 네가 바둑을 놓을 자리를 비쳐 줄 터니 그 때마다 한 수씩 거울에 놓이는 대로 바둑을 두어라.」

그  날 오후 정말 자객이 찾아와서 류대감에게 내기 바둑을 두자고 청 하였다. 대감은 자객과 마주 앉아 형이 시킨 대로 거울을 보며 차레 차레 두었다.
반쯤 두었을 때 자객은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바둑돌을 던지면서
「제가 졌습니다.」하고는 음식 대접도 받지 않고 부랴부랴 달아나 버렸다. 이 일로 임진왜란 때 안동 땅은 왜군들이 감히 약탈하니 못하고 피해갔다고 한다.
이 때 부른 '가등청정이 나오네'가 변해저 '쾌지나 칭칭나네'라는 민요로 바뀌어 전해졌다고 한다.

 

2)

        서애대감과 치숙

옛날 하회마을에 학식이 높은 정승이 계셨습니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일본 사람들의 침략으로부터 구하신 유성룡 대감입니다. 효성이 지극하신 유대감님은 정치를 하시다가 여가만 있으면 늘 고향인 하회마을로 와서 부모님과 여러 집안 어른들을 공경하셨습니다.


하회마을에는 유대감에게 아저씨 되는 좀 이상한 분이 한 분 계셨습니다. 남들과 서로 어울리지도 않고 말도 잘 않으며 잠을 자거나 깨어 있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아서 어느 날에는 밤을 새워가며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어느 날에는 하루 종일 잠만 주무시는 날도 있습니다. 마을 뒷 편 언덕위에 초막을 짓고 혼자서 살며 아무도 그가 무엇을 하는지 아는 이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조금 모자라는 바보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동네 사람들은 그를 팔푼이라고 생각하고 [팔푼 도사]라고 불렀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어느해 겨울입니다. 설을 쉬려고 하회마을로 온 유대감 집으로 팔푼 도사가 새벽 일찍 찾아왔습니다. 먼길을 오느라 고단해서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유대감의 침실로 막 들어가서 새벽부터 바둑을 두자고 합니다. 유대감은 바둑 실력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으며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몇째가는 고수급이였습니다.

잠도 깨지 않았는데 꼭두새벽에 침실까지 들어와서 바둑을 두자고 하니 정신이 멀쩡한 사람의 짓이 아니며, 또 그때까지 아무도 [팔푼 도사]가 바둑두는 것을 본 사람도 없으니 유대감의 상대는 본래 아닐 것으로 생각하고 "아저씨, 새벽부터 바둑은 무슨 바둑입니까? 고정하시고 노시다가 아침이나 잡숫고 가십시오." 라고 하면서 상대를 하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팔푼 도사]는 정색을 하고 바둑을 꼭 두자고 대들었습니다. 어른을 공경하기로 유명한 유대감은 속으로 '이분이 정신이 실성해서 저러시는데 바둑을 둘 줄이나 아시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저렇게 바둑을 두자고 하시니 대접조로 한판 해 드려야지......하면서 바둑을 두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둑이 약 반판 정도 진행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유대감이 정신을 차려보니 유대감의 바둑이 모두 죽어 있었습니다. 유대감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정신을 가다듬고 전력을 다해서 싸웠으나 결과는 유대감이 꼭 한집 지고 말았습니다. "한판 더 두세." 하고[팔푼 도사]가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꼭 이겨야지!' 라고 결심한 유대감은 처음부터 정신을 차리고 전력을 다해서 싸웠으나 이번에는 꼭 두집을 지고 말았습니다.

'그럴리가 없는데......'하면서 또 한판을 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번에는 꼭 세집을 지고 말았습니다. [팔푼 도사]는 마치 승부를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 같았습니다. 유대감은 이 분이 보통 분이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래서 유대감은 [팔푼 도사]에게 큰 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저씨, 제가 미처 아저씨를 몰라 봤습니다."라고 하면서 공손히 머리를 숙였습니다.

 

[팔푼 도사]는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시더니 "대감, 오늘부터 약 100일 후에 어떤 중이 한 사람 대감집을 찾아와서 재워달라고 할 것일세. 그 중을 절대로 대감 집에서 재워서는 안되네. 무슨 핑계를 대든지 대감집에서 재우지 말고 내가 사는 초막으로 보내주게." 라고 말을 하였는데 그 말씀하시는 태도가 무척 엄하고 위엄이 있었습니다.

"오늘 일어났던 일은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말해서는 안되네. 꼭 명심하게."하고 나서 초막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유대감은 너무나 의외에 일을 당하여서 어리둥절하였으나 그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인들에게 앞으로 낯선 사람이 집에 와서 재워 달라고 청할 때는 반드시 자기에게 알리라고 엄명을 하였습니다.

세월은 자꾸자꾸 흘러갔으며, 그 일이 있고 나서 꼭 100일째 되던 날 저녁 때였습니다. 어떤 젊은 중 한사람이 시주를 하러 왔다가 날이 저물었으니 하룻밤 재워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하인들은 즉시 대감에게 알렸습니다. 유대감은 속으로 크게 놀랐습니다. [팔푼 도사]의 말이 너무 잘 맞았기 때문입니다. 유대감은 여러가지 좋은 말로 집에서 재울 수 없다고 잘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은 방이 없으면 마루에서라도 마루가 없으면 헛간에라도 좋으니 꼭 하룻밤 재워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유대감은 도사에게 들은 말이 더욱 생각이 나서 끝까지 승낙하지 않고, 마을 뒷편에 있는 [팔푼 도사]의 초막으로 보냈습니다. 초막에는 방이 하나 밖에 없습니다. 중은 먼길을 걸어 왔는 듯 자리에 눕자마자 곧 곤히 잠들고 말았습니다. 한밤중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잠자던 중이 가슴이 답답해서 눈을 떴습니다. 함께 자던 [팔푼 도사]가 중의 가슴 위에 올라 앉아 시퍼런 칼을 중 목에 대고 막 찌를 듯한 자세를 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중은 깜짝 놀라서 몸을 피하려고 하였으나 어느새 손발 마저 묶여 있어서 꼼짝을 할 수 없었습니다.

"선비님, 왜 이러십니까?" 하고 중은 겁에 질려서 말했습니다. "네 이놈, 딴 사람은 속여도 나는 못 속인다. 네가 일본놈인 것도 나는 알고 있고, 염탐꾼인것도 모두 알고 있다. 그리고 유대감을 암살하려고 여기 온 것도 모두 알고 있다. 그래도 바른 말을 하지 않을 텐가?"하고 호령을 하였습니다. 그제서야 중은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도사는 중 목에서 칼을 떼고 조용히 말하였습니다. "하늘과 땅의 조화로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은 역사의 흐름이요. 천지의 운세인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파리 목숨 같은 너의 목숨 하나 뺏은들, 흐르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어찌 멈출 수 있으리. 오늘 너를 살려서 보내주는 것도 모두가 하늘의 이치이다. 네 나라로 돌아가거든 네 나라 장수에게 하회 마을을 갔더니 무서운 도사가 있어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말을 하여라. 그리고 누구든 이 마을로 들어서는 일본군은 모두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말도 꼭 전해라."하면서 중을 풀어 주었습니다. 중은 혼이 나서 도망치듯 돌아갔습니다.

과연 그 후 임진년이 되자 전쟁이 일어나서 온 나라 안이 모두 전란에 휩쓸렸습니다. 그러나 하회 마을에는 한 명의 왜병도 들어오지 않았답니다.

 

 

柳尋春(유심선) 선생의 일화.

 

임지에서 낳은 송아지도 두고 간 청백리.

1816년(純祖(순조) 15) 3월에 선생은 54세로 내직에서 고향이 가까운 곳을 자원하여 義城(의성)헌령으로 부임하여 왔다. 다음 해 7월에 관직을 버리고 가기까지 갖가지 청백하던 그의 일화는 많다.

크게 흉년이 들어 오갈데 앖이 유랑하던 백성들이 선생의 선정 소식을 듣고 속속 의성으로 모여들어 안착하기  시작했다.
한번은 고향인 愚川(우천)에서 하인이 문후를 왔을 때에 가족은 모두 무사하나 비가 많이 오는 우수기라서 집에 물이 샌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하였다.

돌아가는 하인에게 돈을 몇 푼 주면서 이르기를
[버지기를 서너 개 사가지고 가서 비가 많이 새는 곳에 우선 받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 청빈한 관료는 세정도 좀 어두웠던 모양이다.
의성현감을 사임을 하고 떠나던 날 이방(吏房)이 싸 주는 선물과 판공비를 모두 거절하여 봉투에 넣은 뒤 후임 사또에게 넘기고 갔다.
당시에는 퇴직하는 사토에게 전벌금을 후하게 주는 것이 관행(慣行)되던 일인데도 완강히 거절하고 빈손으로 돌아 왔는데 후임 사또는 그것을 삼키고 또 자기의 몫을 또 다시 책정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후임 사또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뒷날 자기의 아들이 권좌에 있을 적에 선생의 아들 유후조를 발탁하라고 일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유심춘 사또는 의성에서 난 망아지도 의성 것이라고 버리고 의성에서 얻은 물레도 버리고 가기를 부인에게 지시하였다고 한다.

73세에 별세하고 이어서 헌종(憲宗) 7년에는 청백리로 녹선 되었다.

 

 

柳仲郢(류중영) 墓碣銘(묘갈명)

 

柳仲郢(류중영) 中宗(중종) 10年 乙亥(1515)~ 宣祖 6年 癸酉(1573) 59. 
字 彦遇. 號 立巖. 豊山人 杆城郡守 公綽의 子.

공의 묘는 外先祖(외선조) 평창군사 權雍(권옹)의 묘아래 있다. 권태사공 묘가 실전된 것을 찾은 郡事公(군사공)이 유언으로 자신의 사후에 태사공 묘 야래 안장하라 하였는데 그 후손이 이사하여 郡事(군사)의 외손인 풍산 류씨 집안에서 守墓(수묘)하게 되어 공의 묘소도 이곳 군사 묘 아래에 入葬(입장)하게 되었다.
묘 앞에는 공의 아들 西厓(서애)가 홍문관 수찬 때 찬한 비가 세워져있고 묘 아래에는 蘇齋(소재) 盧守愼(노수신) 찬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공의 묘소는 案山(안산)의 砂(사)가 領相(영상)이 배출되는 명당이라 西厓(서애)선생이 정승이 되었다 한다. 그리고 묘아래 永慕樓(영모루)는 陵孝寺(능효사)였는데 명종 13년(1558) 중수하고 광해 14년(1622)에 보수하여 공의 묘제의 재사로 사용하고 있는데 경북유형문화제 제146호로 지정되어 있다.

 

【立巖柳仲郢神道碑銘 幷序】
【頭 篆】贈吏曹參判守黃海道觀察使柳公神道碑銘

【碑 文】有明朝鮮國故通政大夫. 守黃海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成均館春秋館事藝文館提學柳公墓碑銘. 幷序.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 經筵監春秋館事 盧守愼 撰

柳故豐山著姓. 其始有諱栢. 仕麗季. 諱蘭玉諱葆. 俱達官. 至本朝. 工曹典書諱從惠. 入河隈村老焉. 遂爲世居. 典書生諱洪. 右軍司正. 司正生諱沼. 宣略將軍忠武衛副護軍, 贈通訓大夫司僕寺正. 正生諱子溫. 擧進士. 有文行名世. 贈通政大夫刑曹參議. 參議生諱公綽. 通訓大夫杆城郡守, 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 聘于延安李氏敎授贈通政大夫吏曹參議亨禮之門. 以正德乙亥生公. 公諱仲郢. 字彦遇. 弱冠. 能辨志敬業. 庚子. 登第. 權知成均. 敎授三邑. 不以圭撮爲歉. 所至盡心訓誨. 識者推爲遠器. 丙午. 兼養賢庫直長. 恬靜明達. 日見敬憚. 知學田多缺. 按籍刷出. 格於富商. 語侵度支怒. 啓鐫三資. 竟歸田學. 丁未. 敍博士. 親舊以公論. 謂公宜在史館. 勸訪諸先生. 笑不應. 嘗以公事詣尹元衡. 抗論不撓. 罷. 己酉. 復爲博士. 陞典籍. 歷殿中民部. 藉甚. 庚戌. 監惟新. 居數月. 恩威大行. 前監司李瀣遭誣在理. 言者以公黨庇. 請竝鞫. 特命止罷. 辛亥. 進秋臺郞中. 錄讞無滯. 壬子. 監軍關西. 蘇枯拉贓. 列鎭爲之肅然. 移冬曹. 進僉正宗簿掌樂. 轉副正軍器. 癸丑. 改軍籍. 使湖南. 發擿如神. 元額旣充. 傭丐盡落. 咸稱實簿. 爲諸路最. 九月. 拜掌令. 屬阿尹爲長. 妄事改作. 人不何問. 公遇遄事必爭. 棘棘不阿. 衆危之. 李徵君之爲高靈也. 廉使毒害之. 旋請究徑去狀. 公啓希顔起遺逸. 棄官得罪. 非所以示士. 不納. 甲寅. 拜司諫. 未幾. 除掌樂正. 見律學亡. 慨然有釐正意. 昏曉攷校. 敎督賞罰. 庶幾一變. 乙卯. 遠梁有警. 二南大震. 公從巡察使曹光遠出嶺外. 光遠庸才. 非公莫可爲. 每一出號. 遠邇驚服. 十二月. 陟牧義州. 紀律一新. 城裏惵息. 唐人匿官奴家. 會公至. 不得出. 命搜獲之. 械送江㳂堡. 堡官受責愧謝. 申勅所部. 公仍循江設伏. 上下相望. 置巡軍往來. 境上安之. 悼鄕校壞. 漸修益奐. 暇日. 謁先聖. 講諸生. 復揀英妙. 廩之空舍. 月叩其學. 善者至與對酌. 不善必夏楚之. 觀聽從化. 其後. 建碑學前以寓思. 丙辰. 遼東饑. 都司遣百戶二人. 移咨索糧. 要直抵都城. 以公牢拒. 恚不就燕. 公辭婉意誠. 便得其歡心. 遂行. 國以無事. 時關譏已嚴. 姦狡受齦. 飛謀釣謗. 必欲間染. 有二使回. 及州. 譯官呈物目曰. 牧使私貿也. 或勉公自明. 不聽. 駙馬之貨過江. 悉取以沒官. 權貴賀節. 輜重塡道. 察訪郭趕發其不法甚冗. 仍被劾罷. 疑出公指. 重銜之. 己未. 丁內艱. 方三家交橫. 老根頗深. 士類有欲以燕伐燕. 公憂曰. 其人騃. 必凶于國. 已而果然. 辛酉. 服除. 以管押使赴燕. 癸亥. 至自燕. 除刑曹參議. 甲子. 出按黃海. 剸裁有裕. 繫治爲民害者四五魁. 不饒. 賦役稍得平. 文獻堂學錢不繼. 檢得贖布. 作千斛穀貯之. 名曰作成庫. 學徒坌集. 絃誦日聞. 丙寅春. 宰定州. 益不解. 戊辰冬. 牧西原. 退溪翁題盡屛寄意云. 臺閣剩員難寄足. 壑溝多瘠更關心. 風流洛社時看畫. 曠蕩天門獨撫襟. 其重惜如此. 比下車. 以州逋逃淵藪. 大括剔還其主. 殆數百人. 怨詈四布. 家人甚懼. 公曰. 彼欲動我亦動. 來者若之何. 初. 租輓牙山. 漕海屢敗. 輒再斂. 公擧可興陸等江便. 利病較然. 强方伯移輸. 民始脫巨禍. 州士謀創書院旣鳩材而重役民. 公嘆此以敎子弟也. 父兄有不樂. 諸人出力. 二三築之. 因其地名. 命曰有定. 別立學規揭其楣. 復爲屋三間. 將以祀鄕賢如李牧隱金沖庵宋圭庵. 議未決而去. 壬申春. 除參知. 察宿衛太疏. 科色多端. 就爲輕重之. 胥戢軍紓. 兵政略擧. 秋除承旨. 入侍經幄. 多所建明. 癸酉三月. 病遞爲春官參議. 復除承旨. 六月. 又辭. 疾革. 猶諄諄語國事. 七月十三日. 終于正寢. 是年十一月八日. 葬府西子坐午向之原. 公質性方毅而處心和厚. 襟度洪大而應事詳愼. 機變枉曲之思絶於中. 易直子諒之氣溢於表. 家居也. 沈默自將. 莊恪下臨. 晨起衣冠. 寒暑不廢. 夜必與賓客子弟. 討論古今. 衎衎無倦. 或至鷄鳴. 彌露精采. 平生不解假寐. 不能一日漫過. 人之憚事者切厲之. 門庭之間. 斬斬悾悾. 官莅也. 以束吏恤民爲急. 寬刑大惠爲本. 日事備旱澇. 課耕種. 興水利. 時屛騶御. 巡視咨詢. 僻聚姓名. 罕有不識. 常垂意邊務. 凡山川城池. 兵革儲峙. 靡不詳練預辦. 節制峻明. 行伍整齊. 無敢紊越讙呶者. 尤存心風化. 愛護人材. 成就後學. 士多感奮. 奉祭祀則先期選牲具幣. 至日齋宿廟下. 祀典所載. 莫不致敬. 家儀一遵文公. 雖世所難行. 必深繹而力持之. 皿數盤行. 自有定式. 下至婢僕. 慣習循守. 接親友則恩意周洽. 交情開暢. 過有相負. 無幾微見言面. 門族攘其田舍. 不顧而隱之. 鄕人竊其疆. 更割半以益之. 凡民有喪. 悶念經紀如不及. 惡聞人過惡. 恥言人陰私. 或在卒隸. 亦亟掩之. 得一好言行. 喜爲之稱道. 惟不肯趨附强合. 故知者愈少. 嘗囑校理曰. 吾夙慕學問. 間嬰遊宦. 老而無成. 悔怍何追. 汝年富道遠. 宜無若若翁. 臨絶. 偶見其告身. 疑之. 戒以事君不可有一毫虛僞. 蓋其忘身徇國之心. 律己詒後之道. 至此而無以加矣. 夫人金氏同府人進士光粹女. 生六子. 長文龍. 夙逝. 次雲龍. 業儒. 保任典艦司別坐. 娶參奉李容女. 生二女三男. 女適士人金弘微. 男正甫純甫. 餘幼. 次成龍. 擢丙寅科. 選入玉堂. 卽校理也. 娶縣監李坰女. 生一男一女. 幼. 次適士人李潤壽. 生一男一女. 幼. 次適士人金宗武. 生一女. 幼. 季適參奉鄭好仁. 二孝視予爲先友. 直而不華. 授介狀來. 俾明著之. 嗚呼. 公以當今强項. 猶昔倔彊. 不能與世俯仰. 溘然齎志而歿使其得志. 如持國元鎭. 豈直忤於君讎於時而已. 其得志. 命也. 其不得志. 命也. 其如命何. 銘曰.
瑚璉也天下之貴. 鈇鉞也天下之畏. 龜策也所以處天下之事. 天與我器. 爲國家利. 奚與奚奪. 人罔時倚. 惟紹有光. 百世其起.
萬曆 十二年 甲申 八月  日 建 疑川道生 謹書
<해>
【두전】증이조참판수황해도관찰사류공신도비명

【비 문】유명조선국고통정대부. 수황해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증가선대부
 이조참판겸동지경연의금부성균관춘추관사예문관제학류공묘비명. 병서.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겸영 경연감춘추관사 노수신 찬

류씨는 옛 풍산의 저명한 성씨다. 시조 휘 백은 고려 말에 벼슬하였고, 휘 난옥․휘 보는 모두 현달한 관리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공조전서 휘 종혜가 하회에 들어와 늙어서 드디어 세거하고 있다. 전서가 낳은 휘 홍은 우군사정이요, 사정이 낳은 휘 소는 선략장군 충무위부호군으로 통훈대부 사복시정에 증직되었다. 사복시정이 낳은 휘 자온은 진사에 올라 문행으로 세상에 이름났으며 통정대부 형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이분이 공작을 낳았는데, 통정대부 간성군수를 지냈고 가선대부 호조판서 겸 동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다. 연안 이씨 교수로 통정대부 이조참의에 증직된 형례의 문에 장가들어 정덕 을해년(1515, 중종10)에 공을 낳았다.
공의 휘는 중영 자는 언우이다. 약관에 뜻을 분변하고 학업에 힘 쓸 수 있었는데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 성균관 교수가 되었다. 세 고을에 나아가 좋고 싫음으로 혐의하지 않고 가는 곳 마다 정성을 다해 가르치니 아는 사람들은 그를 크게 될 그릇이라고 추증했다. 병오년(1546)에 양현고 직장을 겸하여 염정명달로 날로 경탄을 받았다. 학전에 모자라는 것이 많음을 알고는 장부를 살펴 조사해내니 부자 상인들이 그것을 침탈하였음을 알고 세 번이나 계문을 올려 마침내 학전을 돌려받았다.
정미년(1547)에는 박사에 서용됨에 친구들의 공론이 ‘공을 사관에 두어야 한다.’고 하며 여러 선생들을 찾아뵈라고 전하자 일소에 붙이며 응하지 않았다. 일찍이 공무로 윤원형에게 갔을 때 곧은 논의로 조금도 굴하지 않고서 파직되고 말았다. 기유년(1549)에 다시 박사가 되었고 전적에 승진하고 이어서 전중을 거쳐 경술년에 유신현을 맡아 몇 개월을 다스림에 너그러움과 위엄이 크게 베풀어졌다. 전 감사 이해가 무고를 입었는데 말을 만드는 자들은 공을 비호하는 당인으로 지적하여 함께 국문할 것을 청해 특명으로 파직되었다.
신해년에 형조의 낭중으로 나아가서는 사건에 연루된 기록들을 지체함이 없었다. 임자년에 감군어사로 관서지방으로 나아가니 여러 진들이 숙연해 졌다. 겨울에 종부시와 장악원의 첨정이 되었다가 군기시의 부정이 되었고, 계축년에 군적으로 옮겨 호남으로 나아가 신명처럼 적발하자 원 액수가 모두 참에 모두 장부가 충실함은 다른 곳과 비교해 가장 뛰어나다고 칭송을 받았다. 9월에 장령이 되었는데 아윤에 속한 사람이 수장이 되어 망령되게 일을 바꾸려 함에도 다른 사람들은 감히 묻지를 못했다. 공은 일을 만나면 반드시 다투어 속히 해결하여 아부하지 않으니 여러 사람들이 그것을 위태롭게 여겼다.
염사가 시기하여 해롭게 하려하니 벼슬을 버리고 퇴거하였다. 공이 상계하기를, 희안은 유일로 천거되었는데 사직한 관원을 죄주는 것은 선비를 대우하는 예가 아니라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갑인년에 사간이 되고 오래지 않아 장악원정이 되어 율학이 없어진 것을 개탄하여 공치고 장려하여 일신케 하였다. 을묘년에 달영 지방에 일이 생겨 양남이 크게 소란하였으므로 공이 순찰사 조광원의 조사관이 되어 남하하였는데, 광원이 역량이 없어 공이 아니면 아무 일도 못하였으나 공이 한번 호령하면 원근이 승복하였다. 12월에 의주목사로 나가 기율을 일신하자 성중이 안온하였다. 당나라 사람이 관노의 집에 숨어있었는데, 공이 부임하자 나오지 못함으로 잡아내어 묶어서 중국으로 보내고 그 그릇됨을 책망하니 깊이 사과하였다. 공이 강가에 망루를 세우고 상하를 보이도록 하고 군사로 순찰하게 하니 관내가 평온해졌다. 향교가 퇴폐함을 개탄하여 크게 수리하고 여가에 성현을 배알하고 여러 학생에게 강의하고 잘하는 자는 술을 권하여 장려하고 잘 못하는 자는 벌을 주니 모두 승복하였는데 그 뒤에 학당앞에 송덕비를 세웠다.
병진년에 요동에 흉년이 들어 도사 백호이명을 보내서 식량을 도성으로 보내라고 하였으나 공이 굳게 거절하였는데 중국관원이 화가 나서 술자리를 피함으로 공이 좋게 타일러 보내니 나라가 무사하였다. 그때 세관법이 엄하여 간사한 무리들이 비방모략하고 사신이 돌아오는데 역관이 물목을 적어 이것은 목사 즉 공의 사재라고 무고하니 친구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변명하라고 하였으나 듣지 않고 심지어 부마의 물건도 다 몰수하여 관에 올렸다. 권세가들의 물건이 길이 비좁도록 많았는데 찰방 곽한이 불법을 적발하였는데 책임을 지고 파직 당하였는데 공의 지회라고 원망하였다. 기미년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셋 간신들이 국권을 전횡하여 남을 대신 이용하려하니 공이 걱정하기를 그 사람의 어리석음이 반드시 나라에 해가 될 것이라 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그 말이 맞았다.
신유년에 탈상을 하고 관압사로 중국에 갔다. 계해년에 돌아와서 형조참의가 되고 갑자년에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부역도 안하는 과수 45명을 증치하니 민폐가 없어졌다. 문헌당 비용이 모자라 필목과 곡식 천섬을 각출하여 작성고를 세우니 학도들이 운집하고 글소리가 성했다. 병인년에 정주 목사가 되어 선치를 하였고 무진년 겨울에 청주목사가 되었는데 퇴계선생이 병풍제사를 써주기를 내직에는 인원이 남아돌고 지방에는 할일이 많다. 풍류집에서 때로 그림을 보니 하늘문이 넓어서 홀로 옷깃을 쓰다듬네 하고 심히 애석해했다. 부임하여 도망친 무림들을 잡아 주인에게 돌려준 인원이 수백 인이라 원망이 퍼져 집사람이 겁을 내니 공이 말하기를 “저들이 나를 동요코자 하는데 내가 동요하면 그 사람들은 어찌하겠느냐.”하였다. 처음에는 세금으로 받은 곡식을 아산에서 해로로 운반하였으나 여러 번 복선으로 다시 세곡을 거두었는데 공이 육지로 운반하는 편리를 감사에게 강권하여 그렇게 하니 민폐를 많이 줄일 수 있었다.
고을선비들이 서원을 창건하려고 자재를 모았음으로 공이 자질교육에 좋은 일이라 하고 서원이름을 유정이라 하고 별도로 학규를 세워 향중선배 이목은, 김충암, 송규암을 모셨으며 인신년에 병조참지가 되어 수직이 허술한 것을 고치는 등 많은 치적이 있었다. 가을에 승지로 들어가서 임금에게 많은 진언을 하였고 이듬해 계유 3월에 병으로 이조참의로 옮기고 6월에 다시 승지가 되었는데 또 병으로 사임하고 국사를 걱정하며 7월 13일에 돌아가셨으며 그해 11월 8일에 안동북서쪽 천등산 오향에 장사지냈다.
공은 천성이 바르고 씩씩하였으며 마음 씀은 넓고 일에는 철저하여 삐뚤고 그릇된 생각은 하지 않고 바르고 스스로 생각하는 기상이 나타나 집에 있을 때는 침목 엄격하였고 새벽에 일어나서 의관을 정제함을 한서지절에도 폐하지 않았고 밤에는 손과 자제들과 더불어 고금사를 토론하기를 혹 닭이 울 때 까지 하여도 더욱 정기가 났었고 평생 동안 잠자는 듯 하면서도 사람의 허물은 훈계하여 가정이 정숙하였고 관에 있을 때에는 아전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휼하는데 급급하였고 형벌은 너그럽게 하고 베풂은 크게 하여 날로 한해 대책을 예비하고 누에치고 수리사업에 힘을 썼다. 관내 벽촌까지 순시하여 시골사람들 이름도 잘 기억하였고 산천 성지와 병사일에도 잘 살펴 절제가 있어 감히 속이고 흩트리지 못하였고 더욱 교화에 힘썼고 인재를 양성하여 후학들이 감복하였으며 제사 때에는 미리 제물을 정제하고 그날은 사당 앞에서 재계하여 주자가례를 본받아 세상 사람들이 실행 못하는 일도 실천하여 제기 등도 보살펴 정성을 다하니 노비들도 자연이 따랐고 붕우를 대해서는 은혜를 베풀어 교분을 두터이 하고 혹 배반하는 자가 있어도 면전에서 나무라지 않았고 마을사람이 전지 경계를 침범하여도 도리어 그 절반을 떼어주고 민가에 초상이 나면 자기일 같이 돌보고 사람의 허물은 덮어주고 좋은 행동은 길러 주었고 세력에 아부하는 법이 없어서 따르는 사람이 드물드라.
아들 감사에게 훈계해 가로되 ‘나는 일찍 학문에 뜻이 있었으나 벼슬길에 올라서 뜻을 이루지 못하여 후회막급이나 너는 나보다 강하니 내 본을 보지 말라.’ 하고, 임종 때 둘째 아들의 관분한 사령장이 온 것을 기뻐하지 않고 훈계하기를 “임금을 섬기는데 털끝만한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대개 나라에 충성하는 마음과 몸을 닦고 후손들에 대한 길이 여기 더할 수 없다.
부인 김씨는 안동사람 진사 광수의 딸인데 6남매를 두었다. 맏이는 문룡인데 일찍 죽고 둘째는 운룡인데 선비로서 진보현감이다. 참봉 이용의 딸에게 장가가서 2녀 3남을 낳고 그 딸은 진사 김홍미에게 시집가고 아들은 주․기․심이고 딸 하나는 어리다. 셋째 아들은 성룡이니 병인년에 급제하여 옥당을 거쳐 지금 경상감사다. 현감 이형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2녀를 두었는데 딸은 사인 이문영에게 시집가고 장남은 위이고 다음은 모두 어리다. 둘째딸은 사인 이윤수에게 시집가서 4남 2녀를 두었는데 남은 형, 둘째딸은 찰방 김종무에게 시집가서 2남 1녀를 두었다. 끝에 딸은 직장 정호인에게 시집가서 2녀를 두었다.
만력 임오년에 감사 관계로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 경연 의금부 성균관 춘추관 예문관제학을 증직 받았다. 두 자제들이 와서 내가 가까운 친구라 하여 신도비명을 구하니 슬프다. 공은 강경 불굴하여 세상에 아부하지 않고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홀연히 돌아갔으나 만일 뜻을 이루었으면 국가 원훈이 되었을 것인데 임금에게 노여움을 사고 때의 원수들 때문에 그 뜻을 다 펴지 못하였네. 그 뜻을 이룬 것도 명이요 못 이룬 것도 명이다.
새겨 가로되 옥돌은 천하에 귀중한 물건이요, 창칼은 천하에 겁나는 것이요, 귀책은 천하일을 처리하는 까닭이다. 하늘이 내 그릇을 줄때는 국가에 이롭게 하기 위해서인데 이리 주고 어찌 빼앗아 가는고! 오직 좋은 자취가 빛나니 백세동안 그 음덕이 있으리.
만력 12년 갑신 8월 일 의천도생 근서

【先考黃海道觀察使府君墓誌 】
先府君諱仲郢. 字彦遇. 姓柳氏. 世爲安東府豐山縣人. 八代祖伯. 仕高麗. 其後. 曰都染署令蘭玉. 曰版圖判書葆. 判書之子曰從惠. 入我朝爲工曹典書. 子諱洪. 左軍司正. 是府君高祖. 曾祖諱沼. 副護軍. 贈司僕寺正. 祖諱子溫. 成均進士. 贈刑曹參議. 考諱公綽. 杆城郡守. 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 妣延安李氏. 敎授贈吏曹參議亨禮女. 亦贈貞夫人. 皆府君故. 府君以正德乙亥正月十二日生. 四歲喪母夫人. 稍長. 讀書業文. 中庚子文科. 補成均館. 由學諭歷學錄,學正至博士. 有富商竊學田. 府君辨于戶曹. 判書私於商. 府君責之. 怒揑辭啓罷. 然田竟屬學. 士論歸之. 再爲博士. 忤權宰又罷. 己酉. 陞典籍. 轉司憲府監察,工曹佐郞. 出爲惟新縣監. 聽斷明恕. 數月. 邑內稱治. 時縣新經大獄. 權奸方陰中不快意者. 誣以黨逆. 怒府君上文案. 不時請拿問. 事叵測. 賴上察其枉. 只命罷. 辛亥. 敍爲刑曹正郞. 爲御史. 監軍平安道. 移工曹. 陞宗簿寺,掌樂院僉正. 又陞軍器寺副正. 癸丑. 承敬差改軍籍于全羅道. 吏民稱神明不敢欺. 還拜司憲府掌令. 有臺長恃勢專擅事. 府君日與爭論. 衆憂其觸禍. 而府君裕如也. 修景福宮. 伐石于懷陵. 府君啓曰. 懷陵雖失德見廢. 亦先時國母. 伐石豈無他處. 上從之. 李希顔以遺逸徵拜縣監. 棄官歸. 朝議欲罪之. 府君又啓曰. 朝廷待士. 當崇禮節養廉恥. 要不可束縛. 今一棄官而遽繩以苛律. 恐傷大體. 議雖不行. 聞者韙之. 陞司僕寺正. 有言臺諫爲重者. 復爲掌令. 甲寅. 陞司諫院司諫,掌樂院正. 乙卯. 遣巡邊使兩南禦倭. 各率從事二人. 府君從曹光遠下慶尙道. 警報方急. 人情騷動. 軍事多倚辦於府君. 應機整暇. 一道賴焉. 擢通政爲義州牧使. 刑奸民之交互唐人. 偸掠邊境者數輩. 嚴紀律以固關防. 人大安. 事聞. 上賜表裏一襲. 後州人立善政碑. 然在州頗嚴束. 赴京譯官. 不得私帶禁物. 又以事積怒權貴. 羣怨造誣. 而府君略不辨也. 任滿. 爲護軍. 改僉知中樞府事. 己未. 丁外艱. 服闋. 仍西銜差管押使. 貢馬京師. 還拜刑曹參議. 遞爲護軍. 拜黃海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 明黜陟. 抑豪猾. 徭役均平. 獄訟無滯. 民滋詠慕. 築作成庫. 貯米布以贍文憲堂. 絃誦不廢. 入爲僉知. 丙寅. 爲定州牧使. 戊辰. 還朝. 卽牧驪州. 未赴. 俄移淸州. 是時府君連守外邑. 識者爲朝廷惜焉. 州距忠州,牙山道里均. 舊例納稅牙山. 由海道漕運. 船敗. 輒再稅于民. 府君言監司改就忠州. 安流達漢. 人免其害. 凡有水旱. 必先期區畫. 備盡其方. 終日憂勞. 不自暇逸. 浮民游惰者. 初雖不悅. 久未嘗不服. 所至修鄕校. 或作書院. 聚學子敎之. 時節迎邑中年七八十者. 行養老宴. 各率子弟. 扶攜道路. 觀者以爲盛事. 御史上其政. 上又賜表裏. 三年見代歸家. 公論多言府君在閒不便者. 明年. 拜兵曹參知. 由參知拜承政院同副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 陞右副左副. 入侍經席. 多所建白. 而府君已衰矣. 萬曆元年癸酉. 府君年五十九. 三月. 以病遞承旨. 參議禮曹. 四月. 復拜承旨. 六月感疾. 遂於七月十三日奄至不救. 遠近震悼. 上命禮官吊祭致賻. 下一路護其歸. 嗚呼. 府君忠信渾厚. 出於天性. 處己待人. 本乎誠意. 平生毅然有盡瘁殉國之志. 見諸施設. 又皆明白洞達. 而任不過方面. 壽不及耳順. 宏材碩德. 沈鬱莫伸於世. 豈非命也歟. 配貞夫人金氏. 安東人進士光粹之女. 生三男三女. 長文龍早歿. 次雲龍業儒. 以蔭爲典艦司別坐. 次成龍爲弘文館修撰. 女長適李潤壽. 次適金宗武. 皆士人. 季適參奉鄭好仁. 雲龍娶參奉李容女. 生二女三男. 女適金弘微. 男正甫,純甫. 餘皆幼. 成龍娶縣監李坰女. 生一男一女. 李潤壽一男一女. 金宗武一女. 俱幼. 其年十一月甲申. 返葬于安東府天燈山子坐午向之原. 實府君外高祖權氏墓下. 其上第一墓. 卽權氏始祖幸之墓. 柳氏自護軍府君以下塋. 皆在山中. 竊惟葬不可無誌. 不肖孤. 不量無狀. 謹泣血而略記大槩如右. 且請碣陰之銘于當世秉筆者. 以表墓道. 垂示無極. 昊天罔極. 嗚呼痛哉.

<해>
【선고 황해도관찰사 부군 묘지 】
선부군 휘 仲郢(중영). 자 彦遇(언우). 성은 柳氏(류씨)로 안동부 풍산현에 대대로 사는 사람이다.  8대조 伯(백)은 고려조에 종사했고 그 후 都染署令蘭玉(도염서령란옥)이라고도 하고 版圖判書葆(판도판서보)라고도 한다. 판서의 아들은 從惠(종혜)인데 우리 조선조에 들어 와 공조전서가 되었다.
그 아들 휘 洪(홍)은 좌군사정인데 바로 부군의 고조부이다.
증조부의 휘는 沼(소)이고 부호군이 었으며 司僕寺正(사복사정)으로 증직되었다. 조부의 휘는 溫(온)인데 成均進士(성균진사)로 刑曹參議(형조참의)에 증직되었다.
부친의 휘는 公綽(공작)으로 杆城郡守(간성군수)를 역임했고 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가선대부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로 증직된 분이다.
모친은 延安李氏(연안이씨)로 교수 증 이조참의 亨禮(형례)의 딸인데 역시 貞夫人(정부인)으로 증직되었다. 모두가 부군 때문이다.


부군은 정덕 을해 1월 12일 태어났다. 4세때 어머니를 잃고  자랐는데  독서를 열심히 해서 경자 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보, 학유력학록, 학정지박사가 되었다.
부상 가운데 학전을 훔친 자가 있어 부군이 호조에 말을 하니, 판서가 사사로운 상업에 일이라고 부군을 책망하니 노해서 사의를 표하고 사직했다.
그러나 밭은 결국 학당을로 속했다. 사림이 돌아가라 해서 다시 박사가 되었으나 제상에게 거슬려 또 파직되었다.
기유 년, 전적으로 승진하고, 사헌부감찰 공조좌랑으로 전직한 다음 유신현감으로 나갔다. 잘 듣고 판단하여 명석하게 헤아려 치정하기 몇 개월, 읍내가 잘 다스려 졌다.
그때 새로운 큰 감옥을 경영하였는데, 권력과 세력을 가진 간사한 신하 가운데 은연중 불쾌하게 생각하는 자가, 깔보며 파당을 지어 거역하니 부군은 노하여 상소문을 지어, 불시에 불러 심문을 하니, 생각이나 행동 따위가 괘씸하고 엉큼해서, 상감에게 잘 살펴서 처리해 줄 것을 상소하니 즉시 파면하라는 명이 내렸다.    신해 년, 차래로 형조정랑이되고, 어사가 되고, 감군평안도가 되어 공조로 옮겨 종부시로 승진하여 장악원첨정이 되었다. 다시 승진하여 군기사부정이 되었다.
계축 년, 명을 받들어 전라도의 잘못된 군적을 고치니, 백성과 관리들이 분명하고 이치에 밝은 처사를 감히 속일 수 없다고 말 하였다.
돌아와 사헌부장령을 배수하니, 대장가운데 세력을 갖고 일을 멋대로 하는 자가 있어 부군은 날마다 서로 쟁론을 하니,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의해 화를 입을까 우려했는데도 부군은 느긋하였다. 
경복궁을 고칠 때에서 돌을 懷陵(회릉)에 채취 하니, 부군이 인군에게 계를 올려 「회릉은 비록 덕을 잃고 패한 것으로 보이나, 역시 전에 국모였으니 다른 곳에서 돌을 채석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하니 상감이 이에 따랐다.
李希顔(이희안)이 遺逸( 유일)로 현감에 명했으나, 관직을 버리고 돌아오니 조정에서는 죄를 주자고 하였다. 부군이 또 계를 올려 「조정에서 대기한 선비들은 마땅히 예절을 숭상하고 염를 길러야 하니 속박 안 할 수 없다. 지금 한 사람이 관직을 버린다고 가혹한 규율로 구속한다면 큰 것을 상할까 두렵습니다.」하니 의논은 결구 하지 않았고, 듣는 자는 옳다고 하였다. 사복사정으로 승진하고 대간으로 말을 할 때 비중이 있는 자가 되었다. 다시 장령이 되었다.
갑인 년, 사간원사간으로 승진 하여 장악원정이 되었다.
을묘 년, 순변사량남어왜가 되어 종사 두 사람을 거느렸다.  부군은 曹光遠(조광원)을 따라 경상도로 내려 왔다.

급하다는 경고가 보고되고 인심이 동요되며 부군의 군대에 많이 의존하니, 사항에 맞추어 일을 정리하고 난 뒤의 여가에, 한 고을을 의뢰했다. 통정으로 뽑혀  의주목사가 되어, 당나라 사람과 서로  주고받는 사람을 벌하고, 훔치고 노략질하는 변경의 많은 무리들을 엄한 규율로 스려 방지했다.  사람들이 다 편안해 하는 사실을 듣고, 상감은 상으로  表裏(표리) 일습을 내렸다.
뒤에 고을 사람들이 선정비를 세웠다.
그러나 고을에 있을 때 자못 엄격하여, 북경으로 가는 역관이 자적인 물건을 갖고 못 가게 하니 또한 지위 있고 권세가 높은 사람들의 노여움이 쌓여, 무리ㅣ들이 날조하여 무고하니, 부군은 변명하지 않았다.
임기를 마치고 호군이 되었으며, 다시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기미년에 외간상을 당해 복이 끝나자, 곧 서함차관압사가 되어 경사에 말을 바치고, 돌아와 형조참의가 되고 호군으로 옮겨, 황해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가 되었다.
밝게 못된 사람을 내쫓고 착한 사람을 올리어 쓰고, 교활하고 힘써 날튀는 자를 억재하고, 부역을 고르게 하였으며, 옥사와 송사를 지체없이 속히 처리하니, 백성들은 모두 흠모하였다. 창고를 지어 쌀을 비축하여 문헌당에 넉넉하게 보냈으며, 부지런히 학문을 닦고 교양을 쌓는 것을 그치지 아니하게 하였다. 입시하여 천지가 되었다. 병인 년, 정주목사가 되었고 무진년에 조정에 소환되어 목려주가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아니했다.
갑자기 청주로 옮겼는데 그 때 부군은 잇따라 外邑(외읍)을 지키니, 식자는 조성의 처사가 아깝다고 하였다.
청주는 충주와 떨어져 있고, 아산과의 길은 평탄하니, 옛날에는 稅(세)를 아산에 바쳤는데 바닷길로 배로 운반하였다. 배가 망가지면 번번이 다시 백성에게 세금을 내게 하니, 부군이 감사에게 말해서 충주로 바꾸자고 말을 하여 편안하게 한강으로 가니 사람들은 그 피해를 면 할 수가 있었다. 무릇 물 가뭄에는 반드시 먼저 그 구획을 정해서, 그 방도를 대비하고 종일 걱정하며 노력해서 한가하게 놀지를 아니했다.
떠돌이 개으른 자에게는 처음에는 비록 세금을 면해 주어도 머지않아 과세를 하였다. 향교를 수리하고, 혹 서원을 지어 자녀를 취학시켜 교육을 하였고, 시절에 따라 읍내의 7,80되는 자를 맞아, 양로 잔치를 베푸니, 각자 자녀를 거느리고 도로에 부축을 받으며 가는 것이, 보기에도 성사를 이루어, 어사가 그 일을 상소하고. 위에서 상으로 表裏(표리)를 내렸다.
3년을 그렇게 하고 귀가하니, 많은 사람이 공론으로 부군은 한가하게 지내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자라하여, 다음 해 병조참지를 재수하고 이어 참지배승정원동부승지겸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이 되어 우부좌부로 입시하여 경석에서 많은 소견을 건의 하여 부군은 이미 상을 많이 받았다.
만력 원년 계유, 부군의 나이 59세인 3월, 병으로 승지를 바꾸어 참의예조가 되었는데, 4월에 다시 승지가 되고, 6월에 병을 들어서 드디어 7월 13일 다시는 일어 설 수 없게 되니 원근에서 모두 슬퍼하고, 상감은 예관에게 명해서 장례를 지내게 하고 부의를 보내어 그 마지막 길을 보호하였다. 오호! 부군은 충성스럽고 신의가 있으며 온화하고 인정이 두터웠으며 나가서는 천성이, 자신을 대하듯 남을 접대하며 성의를 근본으로 삼았다.
평생토록 의연하게 나라 위한 뜻을 다하였고, 어떤 시설을 보아도 또한 모두를 명백하게 통달하여 하는 일이 지나치게 되지 않게 하였다. 나이가 이순에 미치지 못하였어도 크게 덕을 베풀었으며 막힘없이 세상을 살았으니 어찌 비명에 죽었다고 하리.
배위 정부인금씨은 안동인 진사 광수의 딸이며 3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 文龍(문룡)은 이찍 죽고, 차남 雲龍(운룡)은 유학자로 음보로 전함사별좌가 되었다. 다음이 成龍(성룡)인데 홍문관수찬이다. 장녀는 이윤수, 차녀는 금종무에게 각각 갔는데 모두가 士人(사인)이다. 다음은 참봉 정호인에게 갔다.
운용은 찬봉 이용의 딸에게 장가들어 2녀 3남을 낳았는데, 딸은 금홍미에게 시집갔고 아들 정보,순보,는 모두 어리다.
성용은 현감 이경의 딸을 얻어 1남 1여를 낳았는데, 이윤수의 1남 1녀, 금종무의 1녀는 모두 어리다.
그해 11월 갑신, 안동부 천등산 자좌 오향 언덕에 返葬(반장)하였다. 실로 부군의 외고조 권씨 묘 아래이며, 그 제1 위에는 즉 권씨 시조 幸(행)의 묘이며 류씨 호군부군은 그 아래인데 모두 이 산중에 장사하니 묘지가 없을 수 없다.
不肖孤(불초고)는 감회가 무량하여 삼가 피눈물로 울면서 위와 같이 대략을 적으니 또한 바라건대 묘갈명의 음기를 당세에 붓을 잡아 묘표에 써서 나타내어 한량없이 보이니, 어버이의 은혜가 넓고 큰 하늘과 같이 다함이 없도다.
오호 통재라.

 

 

 


柳景深(류경심) 墓碣銘(묘갈명)

 

柳景深(류경심) 中宗 11年 丙子(1516)~ 宣祖  4年 辛未(1571) 56.
 字 太浩, 號 龜村. 豊山人 正郞 公權의 子.

공의 묘는 서후면 성곡동 능골에 있다. 공은 선조 4년(1571) 평안도 관찰사 재임중 질병으로 상소사직하고 귀향다가 장연부 초현에서 6월 4일에 별세하니 임금이 관을 하사하고 歸葬케 하였다 한다. 공을 슬하에 9녀 후에 1남을 두었으나, 그 아들은 21살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손자도 35세에 사망하여 대가 끊기니, 겸암의 후예를 양자로 맞아 봉제하고 있다. 1985년 을축 년에 공의 묘 앞에 종질 서애선생 찬의 新碑(신비)를 세웠다. 그 비문에 의하면 중종 32년 정유(1537)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중종 39년 갑진 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명종 1년 을사사화 때는 승문원 주서가 되어 대응하는 재치가 민첩하여 권충정공이 칭찬 하였다 한다.
그해 문과 重試(중시)에 장원급제하여, 공조좌랑 사간원 정언, 예조정랑. 유신현감을 거쳐 종성부사, 정주목사가 되었다. 이때 또 윤원형에게 미음을 사서 변방인 종성으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광주목사에 제수되고 명종 18년(1563)에 다시 정주목사, 회령부사, 북도병마절도사를 거쳐 동지중추부사로 빈전도감 제조가 되었다. 선조 1년(1586)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호조참판, 대사헌, 병조참판, 이어서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공의 가계를 살펴보면 부친 공권은 중종 14년(1519) 생원시에 합격하고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편에 오르고 중종 34년(1539)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사망하였을 때 부인 영양남씨(진사 팔준의 딸)은 泣血(읍혈) 3년에 두 눈이 모두 상하여 殉死(순사)하니 열부로 정려가 내려 지고, 또한 공의 아들 성구가 일찍 죽으니 그 부인 문소김씨(대사간 우굉의 딸)도 殉死(순사)하여 조손이 旌閭(정려)되었다
이때 공의 종형 중서(호 입암 황해감사), 재종제 찬(호 권옹 학자), 종제 중암(호 파산 학자)도 부러울 것이 없다 하였다.
공은 학문도 돈독하였으나 문장 역시 뛰어나서 변영천, 장문보와 함께 영가 삼걸이라는 칭호도 있었다 한다.
공의 부친 [유명조선국 통덕랑 공조정랑 겸 사헌부지평 증 가선대부예조참판 겸 동지성균관사 류공권 급 증 정부인 남양남씨] 묘도 성곡동 능동에 있다. 류권공이 중종 34년(1539)에, 남씨가 3년 후인 중종 37년(1542)에 사망하고 立碑(입비)한 묘전비는 그 당시의 비석형태를 참고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墓碣銘】有明朝鮮國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柳公碣銘 幷序
隆慶五年五月。平安道觀察使柳公狀啓。臣病甚不能莅事。願歸死京輦。上憫而許之。改授同知中樞府事。公曳病還。卒于長湍府之招賢里民舍。訃聞上命有司馳賜棺以斂。喪至城外。吊賻如儀。下一路護其歸。十一月返葬于安東天燈山先塋之側。後十八年而墓石具。族姪前禮曹判書柳成龍叙而銘之曰。公諱景深字太浩。有諱栢諱欄玉諱葆。俱仕麗。諱從惠入我朝爲工曹典書。典書之子司正諱洪。司正之子護軍贈司僕正諱沼。是公曾祖。祖諱子溫。進士贈刑曹參議。考諱公權。工曹正郞。公貴贈嘉善大夫禮曹參判。妣英陽南氏。公爲人豪爽俊邁。自幼已嶄然出頭角。有聲塲屋間。得丁酉司馬。甲辰釋褐。選補承文院。薦授藝文檢閱承政院注書。權忠定公以院相入院。每見公通敏無滯。必嘖嘖言柳氏有子。策文儒。公對第一。佐郞工曹。轉司諫院正言。華聞藹蔚。丁未由禮曹佐郞拜弘文館修撰。時權奸秉國。構會乙巳事未已。以立威。見公翹楚後進中。欲籠絡之。屢示慇懃。公愈閉絶不通。又遇其爲鷹犬者面數之。皆大憾焉。九月臺諫承風劾罷。自是公屛居林下者五年。辛亥叙懷仁縣監。癸丑移惟新。丙辰以師儒徵。俄正郞地部僉正軍器。戊午從事廵南邊。未還陞通政鍾城府使。旋改定州牧使。尹元衡私囑公發民堰海爲田。公曰公事方殷。力不給也。元衡面色騂然。數日以臺論仍赴鍾城。時公論重惜公厄秉權者久冗卑。至是築定州城。擧公授之。卒不果行。在鍾一年。驗災傷失實罷。庚申爲光州牧使。公才無所不宜。尤長於理劇。其在懷仁縣。殘破甚。吏民赤立無吊。倉無數日畜。公居年餘。邑遂以完。惟新於湖路最巨。簿領雲委。前爲守宰者旰食流汗。晷盡繼以燭。猶不能了。公始至。新舊案沒肩。持牒號訴者充庭陛囂甚。公左右决遣沛如也。日未昃。與賓客飮射爲樂。老吏皆驚。以爲古未有也。爲光政益著。喣濡㷀寡。鞭撻強豪。一境肅然。期滿且還也。或有誤傳公爲羅州牧使者。羅州吏有第舍踰制。懼甚卽撤毁。威令之服人如此。癸亥再爲定州。尋移義州。發倉庫之剩。築四門擁城。一年陞會寧府使。卽爲北道節度使。還京同知樞府。丁卯六月。兼殯殿都監提調。治大行喪事皆立辦。時新皇帝登極詔至。議迎詔服色。衆皆欲素。公獨曰頒詔天下大慶。不可以下國之喪加之。當權吉。不然恐爲華人笑。旣而得杜氏通典說。與公言略同。議遂定。公之明智達識類如此。九月如京師賀聖節。戊辰以戶曹參判兼都揔府副揔管。十月爲司憲府大司憲。頹綱幾振。以事免。辛未兵曹參判。三月西道缺方伯。朝廷方有西顧憂。衆議非公不可。遂授公。時公已有病。輿行卽還。在道漸劇。遂不能起。聞者莫不傷嘆。以爲國家失人矣。臨絶無一語及家事。神識不爽曠如也。始正郞公以書狀歿於燕都。南夫人毁繼歿。公於兄弟爲長。養弱弟妹皆得成立。友愛悃悃。人無間言。公享年五十六。有九女一男。壻全海,尹大鳴,監役梁天遇,進士張遇,崔確,進士李懲,正字呂大老,趙瑭,李檥。男成龜。全海有子六成憲,士憲。餘皆幼。女二。一歸正郞裵應褧。一歸士人權暹。天遇有子女八人。子山岌,山㞳,山嵂。餘幼。確有子三夢尹,夢說,夢亮。大老有子女六人。子師謙。餘皆幼。檥二女幼。成龜早死。只有一子巖。銘曰。
有五石之弓。其力足以穿七札。有莫邪之刃。其利足以斷犀革。有百圍之木。其材足以支大廈之將覆。有之而莫知其貴。知之而未盡其用。命也如何。尙後慶之是㙲。
資憲大夫。前禮曹判書兼同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提學柳成龍撰。

<해>
【묘갈명】유명조선국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류공갈명 병서
륭경 5년 5월, 평안도관찰사 류공은 계장을 올려 「신은 병이 심해서 직무를 수행 할 수 없으니 원컨대 서울에 돌아가서 죽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하니 사마감께서 불쌍히 여겨 허락하시며 다시 동지중추부사를 재수 하였다. 공은 병을 안고 돌아 가다가 장단부 초현리 민가에서 졸하였다.
부고를 들은 상감은 유사에게 가라고 명해서 관을 내리고 염을 하여 성밖에 장사지내게 했다.
예에 따라 부의를 전하고, 돌아가는 길을 지켜주었다.
11월에 다시 안동 천등산 선영 옆에 매장하였다. 그리고 18년이 지난 뒤에 묘석을 다 가추었다. 족질인 전 례조판서 류성룡이 서술한 명에 이르기를, 공의 휘는 景深(경심)이고 자는 太浩(태호)인데 또 휘 栢(백)과 휘 欄玉(란옥), 휘 葆(보)는 모두 고려조에서 벼슬을 하였다.
휘 從惠(종혜)가 우리 조손조에서 공조전서가 되고, 전서의 아들이 사정인 휘 洪(홍)이다. 사정의 아들인 호군으로 사복정에 증직된 휘 沼(소)인데, 바로 이분이 공의 증조부이다. 조부의 휘는 子溫(자온)이며 진사로 형조참의에 증직된 분이다. 부친의 휘는 公權(공권)이며 공조정랑이었다. 공의 귀하게 되자 증가선대부례조참판로 증직되었다.
모친은 영양남씨다.

공의 사람됨은 호탕하고 시원시원하며 재주와 지혜가 매우 뛰어나다.
어릴 때 붙어 이미 한층 높이 뛰어나 우뚝하여 두각을 나타내어 마을에 소문이 았다.
정유 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갑진 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벼슬을 하고, 선발되어 승문원에 들어가 예문검열승정원주서가 되었다.
권 충정공이 院相(원상)으로 들어와, 매번 보니 공은 민첩하고 막힌대가 없으며, 나무랄 때는 반드시 류씨라는 사람을 나무랐고 채문이 내리면 공이 제일 먼저 대하였고 좌랑공조에서 사간원정언으로 전보되어 이름을 드날렸다.
정미 년에 예조좌랑을 거처 홍문관수찬을 배수 하였다. 그때 간신이 나라의 주도권을 잡고, 무리가 모여 을사사화가 아직 일어나지 않을 때 위협으로 공을 보고 뛰어난 사람임을 알고 농락하려 여러 번 은근히 접근을 시도하였으나, 공은 더욱 마음을 닫고 통하지 아니하였다. 또 그 날뛰는 자들을 여러 번 대하니 모두가 유감이라 하였다.
9월에 바람을 타고 대간직을 파직 당하거 이로부터 공은 초야에 묻혀 5년을 지냈다. 신해 년에 회인현감이 되었고, 계축 년에 유신으로 옮겼다.
병진 년에 師儒(사유)로 고집되었다가 갑자기 정랑지부첨정군기가 되었다. 무오 년에 남쪽 변방을 순찰하다가,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통정종성부사로 승진하여 정주목사가 되었다.
윤원형이 사적인 부탁으로 공권력을 써서 백성을 증발해서 바다를 막아 전잡을 만드는데 공이 말하기를 「공사가 한창이지만, 힘을 보탤 일이 아니다.」하니 원형의 얼굴이 불그락 했다.
며칠 동안 탄핵을 하기 위해 종성에 갔을 때, 공론을 중시해서 재앙을 부른 권력자를 비하하고, 그로부터 정주성을 쌓았는데 공이 맡아 다 하지 못하였다. 종성에 1년 있으며, 재앙으로 상실되는 실태를 경험했다. 경신년에 광주목사가 되었는데 공의 재주는 한량없었고 날로 잘 다스려갔다.
회인현에 있을 때 모두가 엉망이 되었고, 백성과 관리들 모두 극도로 가난하여 불쌍하였다. 창고에는 불과 며칠 분의 비축밖에 없었다. 공에 거기 일 년여 있으니, 읍은 드디어 온전해 지고 수로를 새롭게 해 가장 크게 되었으며, 공사다망한 가운데 앞으로 나가기 위해 벼슬아치들은 아직 밝지 않은 새벽에 옷을 입어 집무하고 저물어서야 밥을 먹으며 땀을 흘리니, 해가 다 지면 촛불을 밝혀 그래도 오히려 일을 다 할 수 없었다.
공은 처음으로 신구안에 모두 하였고 첩지를 갖고 호하는 자가 뜰에 가득하였다.
은 좌우의 일을 처리함 마치 沛公(패공)가 온것 같이 하였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인 이른 새벽, 빈객과 더불어 술을 들며 활을 쏘고 즐기니, 늙은 관리들이 모두 놀라고, 고래로 없던 일이라 하였다.
빛나는 정치를 더욱 잘 하기 위해, 외로운 늙은 홀아비를 보호하고,
세력 또는 힘이 강한 사람들은 격려하여, 모두가 숙연해 졌고 만기가 되어 다시 돌아갔다. 혹간 잘못되어 공이 나주목사라고 하기도 하는데, 나주목사는 차래가 아니었다. 명령에 복종하기 이와 같이 하였다.
계해 년애 다시 정주로 갔다가 의주로 옮기고, 남는 창고의 제도를 발의하고 4대문에 옹성을 쌓았다.
일년 만에 회녕부사로 승진하였고 곳 북도절도사가 되었가 동지추부가 되어 서울로 돌아 왔다.
정묘 6월에 겸빈전도감제조를 겸직하며, 대왕의 장사를 모두 지휘하고,
새 황제의 등극을 선포할 때, 모두 모여 복색을 의논하니, 모두가 소복을 입자고 하였으나, 공 홀로 頒詔(반조)는 천하의 큰 경사인데, 하국에 喪事(상사)로 명하는 것을 아니 된다, 당연히 길사로 봐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화인이 웃을 것이라 하였다. 이미 두씨통전에 설한 바이니 모두 공의 말과 같이 하여 회의는 드디어 결정이 되었다. 공의 밝고 통달된 식견은 이와 같았고 8월에 경사하성절은 이와 같이 하였다.
무진년에 호조참판 겸 도양부부양관이 되고, 10월에 사헌부대사헌이 되어 문어진 기강을 바로 잡고, 물러났다.
신미 년에 병조참판, 3월에는 서도결방백이 되었다. 조정에서는 서쪽 방면에 걱정이 많았는데, 모두 의논하기를 공이 아니면 아니 된다 하여 드디어 공이 맡았다.
그 때 공은 이미 병이 있어, 가마로 가서 즉시 돌아오니, 서쪽 도에 있을 때 참극이 생겨, 드디어 다시 일어 설 수 없게 되고, 듣는 이는 모두 슬퍼 하였고 국가를 몹시 위하는 한 사람을 잃었다.
숨을 거둘 때 집안일에 관해서는 한 마디 말도 없었는데, 마음이 맑고 편안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정랑공이 연도에서 죽었다는 글이 왔을 때, 南(남) 부인도 돌아가셨다.
공은 형제의 장이었고, 약하던 제매는 모두 성공을 하였다. 우애가 진실로 돈독했으며 아무도 간언하는 자가 없었다.
공은 향년 56세. 딸 9명 아들 하나인데, 사위는 全海(전해),尹大鳴(윤대명),감역 梁天遇(량천우),進士 張遇(장우),崔確(최확),進士 李懲(리징),정자 呂大老(여대로),趙瑭(조당),李檥(리의)였고, 아들은 成龜(성구)이다.
全海(전해)는 6남이 있었는데 成憲(성헌) 士憲(사헌)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딸은 둘인데, 한 딸은 정랑 裵應褧(배응경)에게 갔고 다른 딸은 사인 權暹(권섬)에게 시집 갔다. 天遇(천우)는 자녀가 8명인데, 아들은 山岌(산급),山㞳(산두),山嵂(산률)이며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確(확)은 3남이 있는데 夢尹(몽윤),夢說(몽설),夢亮(몽량)이다. 大老(대로)는 자녀가 6명인데 다들은 師謙(사겸)이고 다른 자년는 모두 어리다.
檥(의)는 두 딸이 있었는데 成龜(성구)는 일찍 죽고 홀로 巖(암)만이 있다.
명에 이르기를。


다섯 석이나 비싸게 값이 나간 활이 있는데
그 힘은 족히 일곱 찰의 나무도 뚫을 만하니
삿되고 간사함을 배는 칼이 있는데
그 날카로움 족이 무소의 가죽도 베네.
백 아름이나 되는 나무가 있어
그 재목은 목히 대권도 덮은만 한데
그것이 있어도 그 귀함을 모르네.
알고 나니 그것을 다 쓰지 못했고
명이야 어찌 하랴!
오히려 뒤에 올 경사 이렇게 막히네.

 

  자헌대부 전례조판서 겸 동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제학 류성룡찬

 

 

 

 

출전 <한민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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